아홉 마디를 견뎌야 제 이름을 갖는다
집 뒤편 수리산 비탈길에는
가을 내내 들국화 축제가 벌어
바람 따라온 쑥부쟁이, 감국, 벌개미취, 산국, 구절초는
향기를 어디에 숨겼다가 가을을 일시에 꺼내놓은 걸까
색색의 향내가 방 문턱을 넘어오면
그 애도 따라온 것 같아 두리번거려져
이맘때쯤 통학 열차 타러 임성리역으로 가는
용숲재 고갯길은 학생들이 뒤엉켜 시끌시끌했어
길섶에 무리 지어 피어있는 구절초를 머리에 꽂은
여학생들을 바라보며 남학생들은
미친 여자 닮았다고 웃었어
이웃집 형이 구절초 한 다발 꺾어 아랫마을 누나에게
건네주면
소문은 금세 온 동네에 퍼졌어
나도 구절초 닮은 그 애에게 구절초를 건네주고
싶었지만
꽃은 매번 내 손에서 시들고 말았어
어쩌다 빵집에서 만나도 말 한마디 못 했어
임성리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멀리 떠나온 후
구절초 여러 번 피고 진 다음
그 애 소식을 물었지만, 모르겠다는 마른 대답만
돌아왔어
구절초는 때가 되면 다시 피어 흔들리는데
그 애는 바람에 실려 어디로 간 것일까
가을은 이룬 자들이 바람 따라 떠나는 시간
아홉 마디를 가져야 구절초는 꽃을 피운다는데 나는
몇 마디쯤에서 머물고 있는 걸까
아홉 마디가 되면 상상은 완성되고
아홉 위의 세상을 볼 수 있을까 구절초를 닮은
그 애는 만날 수 있을까
아홉 마디를 넘어 꽃을 피우고 싶어서 나는
아직도 고도를 기다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으로 정의하고,
그 끝없는 기다림 속에 나타난 인간존재의 부조리 성을 보여주는
‘사무엘 베케트’의 소설이다.
고도가 무엇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아홉 마디를 견뎌야 제 이름을 갖는다 ― 구절초와 기다림의 변주
구절초는 아홉 마디를 지나야 꽃을 피운다.
시인은 그 과정을 사랑의 은유로 풀어낸다.
학창 시절 구절초를 머리에 꽂은 여학생, 빵집에서 스쳐간 그 애,
그러나 끝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청춘의 무력감.
시는 그 애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는 상실로 이어진다.
그러나 구절초는 매년 다시 피고 흔들린다.
기다림은 이루지 못했으나, 꽃은 변함없이 제 자리에 선다.
시인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소환해
“아홉 마디의 기다림이 삶의 부조리를 견디는 방식”이라 말한다.
결국 시는 질문한다.
나는 지금 몇 마디쯤에 머물러 있는가.
“꽃은 기다림의 끝에서 핀다.”라는 문장이 어록처럼 남는다.
구절초는 사라진 사랑의 은유이자,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고도의 상징으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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