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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음력 7월 10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월리(사도실)에서 조선 선조 때의 명현 동강 김우옹의 13대 종손으로 하강 김호림과 인동 장씨의 외아들로 출생 1884년 글을 배우기 시작 1886년 소학(小學) 공부, 쇄소응대(灑掃應對)의 일은 귀찮게 여겼다고 함 1888년 부친의 뜻에 따라 동리 정은석(鄭恩錫)에게 글을 배움 1891년 사서(四書) 통독. 부친이 한계 이승희에게 자식의 지도를 부탁했으나 김창숙은 경전에 대한 공부와 성리설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승희 문하에 들어가지 못함 1896년 부친 별세 1898년 이종기 · 곽종석 · 이승희 · 장석영 등 대학자들의 문하에 두루 찾아 공부, 특히 이승희를 따름 1905년 이승희와 함께 을사오적 처단 상소 1908년 장남 김환기 출생 1909년 일진회 성토 건의서 발표. 이 문제로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 1910년 ‘전국단연동맹’ 성주 대표로 활약.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 설립 1913년 모친의 엄한 꾸짖음을 받고 비로소 독서에 전념. 이후 몇 년간 학문에 정진 1915년 차남 김찬기 출생 1916년 조선은 일본인들이 부르는 칭호이며, 대한은 우리 황제가 명명한 것으로 ‘대한’ 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 1918년 삼남 김형기 출생 1919년 해사 김정호(金丁鎬)와 상의하여 파리 평화회의에 장서를 보낼 것을 모의. 이중업 · 김정호 · 성태영 · 유준근 · 유진태 · 윤중수 등과 더불어 전국을 분담하여 유림들로부터 서명과 더불어 협조를 얻음, 장서를 휴대하여 3월 23일 밤 10시 출국, 중국 안둥현을 거쳐 펑텐에 도착 삭발하고 화복으로 변장, 3월 27일 상하이에 도착, 이시영 · 조성환 · 신채호 · 조완구 · 신규식 등과 만나 파리에 가려는 뜻을 알렸으나 영어로 번역하여 우송하기로 함, 4월 30일 한인거류 민단사무소에서 개최된 임시의정원 4차 회의에서 경상도 의원에 선임, 7월 쑨원과 회견,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얻음. 8월 홍콩 도착, 5~6일 뒤에 광저우 도착, 리원즈를 만나 그의 집에 머물면서 참의원 의장 린산, 중의원 의장 우징리엔과 만남. 각계의 인사들과 접촉, 사적으로 한국독립후원회를 결성하여 의연금 모금, 9월 공교회관을 관람하고 난잡한 석존제일의 모습을 보고 힐책, 10월 상하이에서 김상덕 · 장필석 · 김제민 · 강대곤 · 김주 등 약 50명의 한국 유학생을 불러와서 그들에게 중어와 영어 강습 비용은 한국독립후원회 부담 1920년 정월 7일 모친 별세, 2월 말 임시의정원 경상북도 의원 재임, 리원즈에게 배신당한 뒤 학생 50여 명을 데리고 상하이로 돌아옴, 4월 위장병으로 요양, 6월 중순 민병위 · 김공집을 데리고 의연금의 행방을 추심하러 광저우로 갔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껴 뜻을 이루지 못함, 8월 린푸청을 설득하여 『사민일보』를 창간하고, 박은식과 더불어 편술원이 됨. 김창숙은 박은식 · 신채호 등과 같이 이승만을 성토함, 10월 우산이 홍콩에 왔고, 쉬지엔(외교 총장)이 파리에서 상하이로 왔으므로 그를 임정요인들에게 소개한 뒤, 그들을 움직여 중한호조회를 결성하고 창립총회를 개최, 11월 베이징으로 가 윤중수(尹中洙)가 묵고 있는 집에서 신채호 · 김창돈과 함께 지내며 단재를 도와 『천고(天鼓)』 편찬 1921년 4월 19일 김원봉 · 이극로 · 신채호 등 54인의 이름으로 이승만의 위임통치안 성토문 발표,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한인독립운동가 50여 명으로 구성된 보합단(普合團) 재무부서 책임자로 선임 1922년 일본의 밀정 김달하(金達河)의 매수 유혹을 뿌리쳤는데 그후 김달하는 의열단원에게 피살 1923년 여름에 치질로 보행조차 불편하여 미국인이 운영하는 협화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병이 재발, 그 해 가을 입원 치료, 손영직이 배신하고 국내로 돌아갔으나 끝내 만류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함. 국민회의를 조직, 이때 김동삼 · 안창호 등 30인과 더불어 대의원으로 선출, 그러나 김창숙은 본래 창조파를 지지하지 않았고 국민회의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하고 그곳에 임시정부를 세운다고 하여 이에 반대하고 불참 1924년 베이징으로 돌아왔음. 우당 이회영(李會榮)은 베이징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몹시 가난하게 살고 있었는데 김창숙은 그의 인품을 존경하여 경제적으로 도와주기도 했으며, 우의가 날로 두터워졌음. 겨울, 이회영 · 신채호와 상의하여 김상호를 영남지방으로 보내 동지들에게 자금을 모금 1925년 봄. 독립운동자금 마련차 본국에 보냈던 김상호가 아들 김환기와 함께 베이징에 왔음, 쉬지엔을 통하여 북방 군벌 펑위샹에게 부탁, 수이위엔 · 빠오터우 등지의 3만 정보의 개간 가능지를 독립운동의 영구적인 기지로 얻는 데 성공, 8월 초에는 개간 자금을 마련하고자 국내로 잠입하기 위해 먼저 진린성 하얼빈으로 가 거기서 10여 일 머물면서 만주 각지 동포들의 상황 파악, 국내에 잠입하여 선발대로 입국시킨 송영우 · 김화식을 불러 곧 곽종석 집간소로 보내 곽윤과 김황을 불러 이들을 각각 경북과 경남으로 파견하여 재산을 많이 가진 친척들과 연통하도록 지시, 하장환 · 정수기 등을 경기 · 충남북 · 경남북 · 전남북 · 강원 등지로 파견하였고, 관서 · 관북지방과는 본래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소통할 길이 없어 매우 안타까워함, 10월 정수기와 함께 충남 진잠으로 가서 이원태(李源泰)의 집에서 10여 일을 묵었으며, 사돈 이제락을 만나 독립운동자금 요청, 11월 송영우와 김화식을 데리고 대구로 내려가 남산동 박인동 노파 집에 은거하면서 영남일대에서 모금활동을 전개, 12월 이동흠의 소개로 칠곡 관음동 배석하의 집으로 숙소를 옮겨 10여 일 묵은 뒤 다시 울산으로 떠났음. 언양에서 버스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허리에 중상 · 치료 1926년 3월 모금액을 가지고 중국으로 탈출, 나석주를 국내에 밀파하여 동양척식회사 · 식산은행을 폭파, 모금운동이 탄로나면서 유림 600여 명 체포(제2차 유림단사건), 임시정부의정원 부의장에 선출(의장 이동녕), 통일독립당의 조직 규약 마련 1927년 장남 김환기, 국내에서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 김창숙 본인은 상하이 공동조계 병원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 1928년 14년형 확정. 대전형무소로 이감. 극렬한 옥중투쟁 전개 1929년 지병이 악화되어 일시 가출옥, 재수감 1934년 병이 위독하여 다시 가출옥 1939년 백양사에서 요양중 회갑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 끝내 거부, 모친 별세 21년 만에 고향 집에 돌아와 묘막에서 시묘 1943년 차남 김찬기를 중경임시정부로 밀파 1944년 건국동맹 남한책임자로 추대 1945년 일경에 피검, 해방을 맞아 출감, 곧 상경. 민중당 당수에 추대되었으나 거절. 조선인민공화국을 비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촉구,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 부회장에 선출, 10월 무명회에 관계함. 차남 찬기는 사망하여 유해로 돌아옴, 12월 3 · 1동지회 고문, 광복회 고문 1946년 1월 2일 「반탁담화문」을 발표하며 신탁통치 반대투쟁 전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 1월 6일 『동아일보』 지상을 통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조선공산당에 경고문 발표. 공산당의 행위를 매국민족반역행위라고 비판, 직접 공산당 간부들을 불러 설전. 2월 대한독립촉성회 고문, 2월 18일 민주의원 회의석상에서 최고정무위원회를 민주의원으로 바꾼 것에 대해 이승만을 심하게 질책하며 대립, 4월 한독당 고문, 5월 3 · 1건국동지회 발기인, 유도회 조직 통합, 유도회 총본부로 개편하고 위원장으로 추대. 정부수립을 위한 28인 최고정무위원에 뽑혔으나 이승만과 대립. 성균관대학 설립, 초대 학장으로 취임. 10월 30일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우합작 7원칙’ 발표와 이것이 민주의원에서 통과된 것을 계기로 모든 ‘공직’ 에서 사퇴할 것을 성명 1948년 1월 태평양동지회 고문. 2월 남북협상운동에 대한 견해 발표. 3월 12일 김구 · 김규식 · 조소앙 · 조성환 · 조완구 · 홍명희 등과 함께 남한만의 총선거에 불참한다고 선언하는 ‘7거두 공동성명’ 을 발표 1949년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 1950년 6 · 25전쟁 때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승엽의 인민군에 대한 협조 요청 거절. 이후 1 · 4 후퇴 때까지 을지로 한의원에 은거 1951년 1 · 4후퇴로 부산 피난. 이승만대통령 하야경고문 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투옥 1952년 6월 20일 이른바 ‘부산정치파동’ 때 이시영 · 신익희 등과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 를 주도하여 40일간 옥고 1953년 성균관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 초대 총장에 취임 1956년 성균관대학 총장직 사임. ‘효창공원 칠열사묘이장 반대투쟁위원장’ 으로 이장반대투쟁 성공. 이승만의 ‘대통령 삼선취임에 일언(一言)을 진(進)함’ 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각료 가운데 몇몇 간신배를 해임시키고, 민의 조작의 주동집단인 자유당을 해체하며, 부정선거를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 1957년 성균관장 · 유도회 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남 1958년 12월 24일 이른바 2 · 4보안법 파동이 벌어지자 손자의 등에 업혀 상경 1959년 1월 8일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위한 전국민총궐기연합체를 구성하자고 제창하는 호소문 발표. 1월 16일 보안법은 우리민족을 억압하는 망국법이며, 이 대통령은 국민 앞에 사과하고 하야하라는 장문의 성명서 발표. 성균관 · 유도회가 ‘정 · 부통령 선거대책위원회’ 라는 간판을 걸자 자유당의 불법을 성토하는 성명서 발표 1960년 4 · 19혁명 이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로 추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추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선출, 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김구선생살해내막이라는 성명서 발표 1962년 3 · 1절에 건국공로훈장 중장 수여. 5월 10일 서울중앙의료원에서 84세로 서거. 5월 18일 사회장으로 수유리 산 127-4 묘지에 안장 [출처]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삶과 자취(연표)|작성자 레오
베이징에서 김창숙과 신채호와 함게하며 김창숙을 도와
김씨무사방면중외일보 대성학원 유지방침 토의 1927.5.28일자 김창돈
김창돈33세 사망1928년사망(고문 휴유증) 김중현28세사망1939년 사망(김창돈아들) 중호행방불명1914년 탄생(김창돈아들) 중구 행방불명1929년 탄생(김창돈아들)
봉영운동자 동맹 김창돈 발의 해방운동의 통일(영주봉화)운영자 동맹 봉화 청년회 김창돈씨구속
1927.5.30봉화청년 정총김창돈
물야 청년기념야유회 김창돈 27.8.20
물야 청년 야유회 김창돈 검색 대한협회보 제8호(국사편찬 위원회1+08-11-25 대성확원 유지방침 토의27.5.28 봉화청년 정총27.5.30 물야청년회 기념 야유회27.8.20
봉화청년 총회 27.5.30 김창돈씨 구속 내용은 비밀에 부쳐
아래는 김희곤 교수의 봉화독립운동사 218 민립대 (상무위원 김창돈, 실질적으로는 김창돈이 설립주도함) 김창돈은 심산가의 혈연으로 홍기와도 택동가의 혈연 집행위원장 김창근도 혈연임 홍기와 교류임물들 권중철(부위원장), 창근(집행위원장), 집행위원 김보림<바래미,학포 우수아들→윤영(이만손사위)아들→김보림아들→창식),김창식,간찰25통>, 해저 위인천편찬도 김우림(해저 바래미,개암공파족보 388페이지 참조?,한자를 참조) 강교원(춘양 교류),권태영(성동우창멤버(교류함),김사민(두월 간찰20통), 김창희(김뢰식의 아들),강준(교류) ,강필(외숙 독립운동가)
이며 주로 닭실의 상자 춘양 원자등으로 바래미 홍기 유관인물과 바래미와 닭실 춘양이 주도한 것으로 보여 춘양과 닭실은 청암정고모댁 춘양 만산은 홍기의 외숙임
봉화 청년회간 정기총회 제6회 1923년 김우림이 회장(바래미,개암공파족보 388페이지 참조?,한자를 참조) ,권중환 부회장 김창돈 총무 이종명 서기로 선임 강교원상담역(홍기에게 간찰) 민립대학 설립건나옮
봉화청년회 대성학원 운영
봉화청년동맹결성과 대중운동 김창희 문화교화부장 의연금보집 제2조 김창희 ,김창식(해저,윤영의 손자 김보림의 아들,조사연구부원)
*신간회봉화지부 김창근(회장),신간회 간사: 김창돈(실질적 주도) ,,김창희 , 김창돈(정치문화부장) 김만기(조사,김창백의 아들),김성기 (조직선전부)선임 1927년12월10일 조직정비 김창돈 의장 본부파견 5명선물 서무부 총무간사 김창돈 간사 김창희 김태섭(서신교류 홍기오록종손 학사종택)) 본부파견 대표위원 김창돈 신언직(서신교류) 신간회기금모금 신언직(서신교류 홍기) 김창돈7월 대성학원 폐쇄조치당함
신언직 회장,1928 김창희 상무간사, 김창희 ,김창돈 간사 서무부장 김위식, 재무부 부원 김창희,교 육부원 김창은(서신) 봉화향교철폐운동 현재까지의 행적입니다 지속수집해야 김창희 또한 지속활동함을 보여
김 만기(경능 창백의 아들) 신간회 활동에 이어 이재유 그룹의 조공재건운동 이효정과 김만기 김만기는 재2경성재건그룹당시 활동했던 인물 이재유그룹은 1933년부터1936년가지 경성 트로이카 경성재건그룹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상당한 성과 1906=19771925년3월 보통학교졸업 1930년4월 일본으로 건너가 오오사까 노동자생활(경능창맥의 아들임을 감안해야 창돈에서 보듯이 전부가 창숙계열인 김택동의 후손들 1932년 귀국 함남 자유노동 서울세탁소운영 1934년 이재유그룹산하 산업별적색 노동조합 결성 노력 1935년 용산 경찰서 체포 1936년7월 경성지법 징역1년6개월 김창백의 독립운동으로 사실 전체가 핍박 받은 택동가호림과 심산가)는 요절 행방불명 가세가 기울고 집이 허물어지고 뿔뿔이 흩어지며 어렵게들 노동종사등 공산당이긴하나 마찬가지로 신간회등에 간여하고 나라 찾기에 나선 것이 공산당이었을 뿐으로 보여
이후 김만기는 정재철그룹이 복원되면서 다시 활동 1934년7월 반전 격문 살포
택동가의 후손들은 특히 절손과 행불 조기사망을 잘보셔야 떠돌이 몰락 정진의 학생운동도 고문으로 동료4분이 조기사망함 그러니 홍기는 유집에서 젊은 원혼이 하늘을 찌른다고 했음 30명이 매타작에 시달린다고도 했음 의병활동으로 파산한 집들 고문으로 사망하신 분들 절손된분들 떠돌이 생활하신분들 우리민족의 정통성을 세우지 못한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이를 밝히기도 힘들었던 세월 이제야 진실만이라도 밝혀야 하지 않을까 바래미와 홍기의 간찰을 보시면 만인소에서 의병활동사 심산의 탄생배경과 활동사 그리고 우리의 학생독립운동 젊은이들의 학생운동 신간회 민립대학 봉영청년동맹이란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외에도 그 당시 단발령 신사참배 창씨개명까지도 단호히 거부하고 우리의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섷로 격려하고 다짐했던 산역사를 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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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희직을 검토군이라 한 것은 홍문관 교리가 경연(임금에게 강의 하는 자리)의 검토관을 겸직하기 때문에 표림공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창훈:족보 337,표림 희직(수찬)후손,중종가 진춘>
*창익(송암 경헌→범동→희승→호영→창익/섯밭댁,용하)
*김보림[문천 희소→ →학포 우수아들→윤영(이만손사위)아들→김보림아들→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