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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고려인 농업정착지원 사업에서 동북아 생협으로
(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삼각협력농업 3 )
김 현 동 2009. 10. 31
1. 지원 사업의 취지 와 목표
농업정착지원사업을 시작한지 2010년이면 7년 차를 맞게 된다. 2005년에 2004년부터 약 1년 6개월간의 농업 실험과 계획을 정리해서 동평 기관지인 미르지에 “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삼각 협력과 농업” 이라는 글로 1차 정리한 적이 있고 , 2007년 11월에 동북아 코리안 네트워크 세미나에서 “연해주 고려인 농업정착 지원사업과 연해주 농업” 이라는 글을 통해 중간 평가와 정리를 한 적이 있다. 이글은 앞에 두 글들에서 밝힌 취지와 계획에 기초해서 6년 동안의 사업을 비교, 평가하는 방식으로 서술하여 보고 다시 이를 기초로 향후 전망을 모색하여 보려 한다.
동평의 연해주 농업정착사업의 취지와 목표는 “ 우리의 당장의 목표는 간단하다. 고려인이 정상적으로 농업에 정착하도록 돕자는 것이다. 고려인이 농업 정착에 성공하면 한국의 농업, 농가공, 농축 산업과 당연히 결합하게 될 것이다. 북한의 식량 지원도 가능하게 되고, 효과적인 지원을 위하여 북한의 인력도 연해주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연해주의 농업 활성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길게는 동북아 농업 먹거리의 안정적 공급을 통해 평화 실현의 가장 중요한 고리를 확보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2005년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삼각 협력과 농업)” 이라고 규정 하여 동평이 연해주 농업에 참여하는 이유는 고려인의 정착을 돕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 이후 한국이나 북한과도 농업협력을 하게 될 희망과, 궁극적으로 연해주의 농업을 살리고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 이라고 그 취지를 밝혔다.
연해주에서 고려인이 농업을 통해 정착할 이유와 개연성에 관해서는 러시아에서의 고려인의 농업역사에 주목하였고 다음과 같이 정리 하였다 “1860년대 초반부터 연해주로 이주한 고려인은 농업을 기반으로 정착하여 왔다. 이주 초기 기아와 식량난에 허덕이며 한반도에서 거의 빈손으로 이주한 고려인은 황무지 개간과 사회주의 이후 집단농장 형성 과정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지금도 고려인을 이야기할 때는 ‘농업을 개척하는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뺄 수가 없다. 1937년 예상치도 못했던 고려인 이주사에서 최대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18만 명의 강제 이주가 있었다. 당시 고려인 사회는 러시아 소수민족으로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400여개의 학교와 극장, 대학교, 집단 거주촌 등 한반도가 식민지이던 상황에서 조국보다도 든든한 민족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강제이주로 인하여 고려인 사회는 중앙아시아에서 완전 무일푼으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고려인은 특유의 고분질 농업이라는 것을 통하여 단 몇 년 만에 농업을 일으켜 중앙아시아 농업의 대명사가 된다.
러시아 사회에서 농사짓는 고려인을 고분자, 농사를 고분질, 농사짓는 시스템을 고분지라 하는데, 이는 고려인만이 갖는 농업 특성 때문 이었다. 고려인들은 연해주 이주한 초기부터 소작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고려인은 개인적 소작 방식이 아니라 고분지라는 단체 농업 팀을 조직하여 지주나 정부와 계약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생산부터 유통까지를 담당하는 ‘스스로 생산/ 운영/ 분배하는 조직’이었고, 조직 내에서는 성과급 제도를 시행하여 사회주의의 병폐를 예방하는 시스템이었다.
중앙아시아 이주 초기에도 이러한 고분지 농업을 통하여 신속하게 정착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 시절 고려인의 고분지 농업은 계절 이주 농업과 결합하여, 중앙아시아나 러시아의 대규모 농장으로 계절마다 옮겨 다니며 수박, 양파 등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리기도 했으며, 소비에트 시대의 가장 모범적인 농장으로 불리던 황만금 농장, 김병화 농장 등을 건설하기도 하였다”(2005년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삼각 협력과 농업) 러시아에서 끊임없이 개척하고, 특유의 농업 시스템을 개발하고, 러시아에서 중요한 식량자원을 생산하는 일을 했음을 상기하며 고려인의 농업정착의 당위성을 확인 하였다.
현재의 러시아와 연해주의 농업 현실과 관련해서
“ 소련 붕괴와 더불어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등 현지의 민족주의 경향과 내전을 피하기 위한, 그리고 후손의 교육과 미래를 위하여 고려인들은 다시 60년만의 재이주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재이주를 시작한 고려인은 현재까지 약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그중 할아버지의 고향, 역사적 조국 한반도의 바로 위인 연해주로 약 4만 명이 이주하였다. 환율 차이, 부동산의 현금 전환 어려움 등으로 겨우 가족의 이주 교통비 정도만 만들어서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옮겨 온 고려인은 다시 농업을 통하여 정착을 시도하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소련 붕괴 직후 계획경제 하의 지원이 끊어져 집단 콜호즈, 소포즈등의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이 급격히 붕괴하였고, 러시아 극동 시장의 농산물은 중국 농산물로 채워지고 있었다. 60년 만에 이주한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의 따뜻한 기후에서 시베리아형 연해주 기후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농업 개혁을 통하여 급격한 농업 생산성 향상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값싼 농산물은 이미 연해주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곡류나 콩 농사는 소련 하에서 대규모, 집단화, 기계화되어있는 상황이라 무일푼의 고려인으로서는 진출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고, 벼농사는 관리 부족으로 거의 전멸 상태여서 막대한 복구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업 정착을 시도 하려던 고려인들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쳤는데,1999년 시기에 벌어진 3년간의 이상 기후는 안간힘을 써서 지은 농사를 흉작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고려인들은 중국의 농산물과 기후, 재정 여력 등으로 인해 연해주에서는 농사가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농사를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파스크, 시비리즈보, 노보그라스키 같은 곳에서는 농업 정착에 성공한 사례가 나타났다. 스파스크는 중앙아시아에서의 고분질 농업에서 익숙해진 수박 농사를 통하여 수익을 올리며 정착에 성공한 경우다. 스파스크는 우수리스크보다 100km 정도 북쪽에 소재하지만, 여름 한때는 집중적인 복사열에 의해 기온이 올라가 수박 농사의 적지가 되었다. 수박 농사에는 중국인들이 직접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먼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중국 수입 수박과는 경쟁 관계에 있다.
시비리즈보, 노보그라스키는 전체 1000가구 중 약 30%가 고려인들로 구성된, 연해주에서 고려인 구성 비율이 가장 높은 농촌이다. 이곳은 약 10년 전 정착 초기부터 비닐하우스 농업을 도입하여 출하시기를 조절하는 데 성공하여 소득을 올리며 많은 고려인들이 경제적으로 정착에 성공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인들이 비닐하우스를 연해주에 들여오던 초기에 그 방법을 배우고 받아들여서 가능했던 것이다. 최근 중국의 저임금, 저가격의 비닐하우스 농업이 늘어나면서 예전만큼 수익을 올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10여 년 동안 어느 정도의 초기 자본 축적에는 성공하여 이를 활용한 육묘 농사, 수박 농사 등 생산의 다양화를 꾀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의 농업과 직접적으로 결합하여 농장을 꾸리고 성공한 사례도 있었다. 중국 동영 시로 가는 길목의 빠쁘로프카라는 지역의 아리랑 농장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러시아 고려인이 토지와 일정한 자본을 대고, 중국 농업 팀을 받아들여 고분질과 같은 방식으로 생산계약을 맺어 농장을 운영한 경우다. 초기부터 중국의 비닐하우스, 육묘 농업 등을 들여와서 이 지역의 채소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상당한 정도의 자본을 축적하고 수백 명의 조선족 농업 팀들이 들어와서 일을 하고 있다.
먼저 정착에 성공한 고려인들은 농업보다는 중국 조선족 동포들의 도움으로 중국 농산물의 수입과 유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리를 잡았다. 농업 정착에 실패한 고려인들은 여기서 형성된 중국 농산물 시장에서 임노동자나 점원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농산물 시장에 이어 중국 소비재 상품의 연해주 유통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중국 시장 등을 형성하고 임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주로 중국 농산물을 연해주에 반입하는 유통은 중국의 흑룡강(헤이룽장) 조선족과 연해주의 고려인 경제 네트워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뚱잉지역 조선족과 우수리 지역 고려인의 농산물 무역은 이 세관 무역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이 변경 지역에는 현재 거대한 중러 자유무역지대가 건설되고 있다. 재이주한 고려인의 주요한 정착 흐름이 농업에서 유통부문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2005년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삼각 협력과 농업)이라고 정리하며 연해주 재이주 이후 당연히 농업을 통해 정착하려는 고려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확인하고, 지원사업의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찰과 모색을 통해 “ 동평은 이러한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1) 고려인의 농업 능력은 연해주라는 지역에서 여러 가지 조건상 현재 잠재되어 있지만, 조건만 되면 현실화될 것이다. 2) 현재 이러한 농업 정착을 고려인의 입장에서 효과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3) 동평이 이러한 모델을 만들어 보자. 이러한 생각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1) 농촌에서 정착하여야 하므로 일단 소규모 텃밭을 활용한 농축 복합 영농을 통하여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자. 2) 자립적 농가 수가 일정정도 되면 규모 있는 곡물 농업이나 콩 혹은 축산 등의 농장을 자립농가들의 농업 연대를 통해 실현하여 보자. 3) 이 시기에 자본의 도움은 한국에서, 기술은 중국 조선족 동포들에게서, 노동력은 북한의 도움을 받도록 노력하여 보자.(2005년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삼각 협력과 농업)”라는 방향을 세우게 되었다
2. 지난 6년간의 농업정착지원 사업 약사
1. 제1기 : 2004년 - 2005년 : 모색 및 시동 (비닐하우스와 자연농업)
- 우정마을 비닐하우스 설치
- 우정마을 솔빈 센터, 사택 설치
- 끄레모바 주택결연 및 영농결연
- 청국장 가공 시작
- 고려인 농업 희망 운동 본부 출발 , 자연농업 채택
- 주요 후원 : 재외동포재단 , 대한주택 건설 본부, 자연농업연구소 등
“ 농업지원사업의 전초기지로서, 한국의 주택건설협회가 1000가구를 목표로 진행하다가 31동으로 사업이 중단된 우정마을 정상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우정마을을 하나의 고려인 공동체 마을로 정상화, 안정화시켜 내기 위한 노력들이 2004년부터 진행되었는데, 솔빈 문화센터와 사택을 준공하고, 25동의 비닐하우스를 보급하고, 청국장 공장(교육장)을 만들고, 제조방법을 교육하여 집집마다 고려인 청국장으로 수익을 창출케 하였다. 각종 문화교육과 풍물교육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이제는 여러 행사, 축제 등에 초청되기도 하고, 초기부터 한글교육에 참가한 학생들은 어느 정도의 한국어 소통이 가능하게 되고 어른들은 일상통화를 한국어로 하게 되었다.” (2007년 연해주 고려인 농업정착 지원사업과 연해주 농업)
2004년 사업 초기 , 연해주 대규모 영농에 대한 순차적 접근 방법 그리고 고려인의 우선적 정착모델의 개발 필요성, 중국 농산물의 물량 전에 대비하기 위한 방안 등이 우선 과제로 제기 되었고, 이를 위해 우정마을 10여 가구와 직영 텃밭 등을 중심으로 영농시기를 조절할 수 있고 , 소규모 실험이 가능한 비닐하우스 시설 농업을 시작 하였다 (대출방식, 재외동포재단 ). 하지만 우리가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 하려던 시기에는 중국의 영농도 이미 비닐하우스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있어서 좀 더 미래적인 영농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 세계적인 영농 추세가 지속가능한 영농, 생태적인 영농의 시대로 가고 있음을 주시하며, 중국의 생산량 만을 중시하는 관행 화학 영농과 차별화되는, 무제초제, 무농약, 무화학 비료를 하는 자연농업을 채택하게 되었다.
21세기 고려인의 연해주 재 정착농업의 상징을 자연농업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한국에서는 동평과 자연농업 협회 등 단체가 함께 고려인농업희망본부를 결성하여 이 사업을 지원하기 시작 하였다, 한편 두 번째 고려인 정착 마을로 끄레모바를 선정하고 고려인들의 이주와 주택결연 및 농업대출 지원을 위한 결연사업을 시작하였다. 1500달러 상당의 주택 구입 지원을 위한 주택결연과 영농을 위한 3000달라의 영농 결연을 끄레모바 부터 시작하였다.
2. 제2기 : 2006년 - 2007년 : 건설기
- 그루터기, 보금자리, 아름드리, 코피온 센터
- 6개 마을 주택 결연 50여 가구, 대출 100여 가구
- 청국장 가구별 가공 공장 20여 곳 , 50가구 종사
- 귀향 과 고향마을 시작
- 프림코 농장 확보
- 사회적기업 “바리의 꿈” 설립
- 연해주 다민족 평화 축제
- 재외동포재단 , 아름다운가게, 사회연대은행, 사랑의 리퀘스트, KBS 6시 내 고향, MBC 귀향 팀, 개별 결연자
기존의 러시아 농촌 마을에 비어 있거나, 팔려는 주택을 사서 입주하는 방식의 새로운 고려인 정착마을을 조성사업을 본격화하기시작 하였다. 끄레모바를 필두로 아시노브까, 쑨야센, 노보루사노브까, 치까로브까 등의 마을에도 결연사업방식으로 주택구입 (2009년까지 50여채)과 대출(100여가구)을 중심으로 마을사업을 넓혀갔고, 각 마을 마다 센터를 만들어 총 6마을 6센터를 만들었다. 그 중 쑨야센, 노보루사노브까, 치까로브까 등의 마을은 주로 기존의 거주 고려인들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마을사업이 이루어졌다. 이 마을들에는 영농 대출과 자연농업 교육이 이루어졌다
“ 2006년 1년동안 미하일로프까와 스파스크지역에 6개의 지역 농업센터가 만들어졌다. kbs 6시 내고향 백년가약 프로그램 지원사업으로 우정마을에 그루터기 센터 건설을 시작으로, 삼성봉사단이 끄레모바 마을 사랑방을, kbs 사랑의 리퀘스트에서 쑨야센 보금자리 센터와 치까로브까 아름드리 센터를 자원봉사단체인 코피온에서 아시노브까 센터를 , 노보루사노부까 고려인이 자신의 집을 센터로 제공하여 6개의 센터가 만들어 진 것이다. 특히 첫 농업센터 그루터기 건축을 지원한 노블하우스는 이후 정착지원사업에 다방면의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2007년 11월 연해주 고려인 농업정착 지원사업과 연해주 농업)
“ 신규 농업 이주 가구 이외에 기존에 6개 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150여 가구의 농가를 대상으로 하여, 2006년 겨울에 10회의 자연농업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을 이수한 70가구에게 1000달러씩의 자연농업 대출을 실시하였다. 500달라는 기존의 농업을 위한 대출로 하고 500달라는 새로 자연농업을 위한 자재와 종자등으로 대출을 하였는데 옥수수 종자, 고무통, 모터, 그물막등 자연농업을 위한 새로운 자재는 한국에서 공동으로 구입해와 나누기도 하였다.” (2007년 11월 연해주 고려인 농업정착 지원사업과 연해주 농업)
2005년부터는 이미 끄레모바에 자리 잡은 한국 고합그룹의 투자 농장인 프림코 농장에서 생산한 유기농 콩으로 청국장 가공을 실험하고, 제조 방법을 가구별로 전수하여 가구별 청국장 공장을 20 여 곳 만들어 생산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에서 후원자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 농산물과 가공물의 판매를 위해 바리의 꿈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였고, 이 기업은 후에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 받게 되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통한 청국장 판매는 이후 지원 사업을 안정적으로 꾸려 가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고, 현재에도 일정양이 지속적으로 판매되고 있다. 2007년에는 장치혁 고문의 물심양면의 지원으로 프림코 농장을 인수게 되었다.
“ 고합이 운영을 포기한 한.러합작 끄레모바의 프림코 농장의 지분인수를 2007년 10월 마무리 하였다( 지분 54.6%). 원래는 4200ha규모의 농장이었으나, 약 10년간 방치되어 720ha의 토지만 남긴채 나머지 토지는 군과 개인에게 토지가 반납 또는 이전된 상태였다. 하지만 10년 이상 제초제, 화학비료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콩, 보리, 밀, 귀리 등을 윤작으로 생산하여 자연농업 생산지로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이 농장에서 생산한 콩으로 약 50가구의 고려인 가구가 청국장 등을 생산하여 한국의 안전한 먹거리를 원하는 소비자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농장은 원래 사료 농장 시설이었는데 현재 침체 상태에 있다. 마을에서 고려인들이 다시 시도 중인 돼지, 소 등의 자연축산에 필요한 유기농 사료를 보급하는 방향으로 사료농사를 재개할 것이다. 옥수수생산과 사료가공시설이 들어서면 작지만 실험모델로 충분히 기여하게 될 것이다.”(2007년 11월 연해주 고려인 농업정착 지원사업과 연해주 농업)
한편 “70-70 귀향”이라는 고려인 이주 70주년 기념 프로젝트를 통해 이주한 사람들을 시작으로 쑨야센에 고향마을 조성이 시작되었다. 이 고향마을은 약 100ha에 달하는 부지와 인근에 250ha의 호수와 숲 초지 등 100만 여평의 부지를 가지고 있어 장기적으로 채소, 축산, 여가 등의 자연농업 시범마을로 조성되고 있다. 이 마을에는 현재 총 13가구가 입주를 완료하고 5가구가 건축 중이며 2009년 중으로 18가구가 입주 예정이다.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와 연해주등지의 러시아 사이에서 이산화 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쪽도 저쪽도 정착이 만만치 않아 유민화 되어 있는 것이다.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아 충분하지는 않지만 상징적으로 이들의 사정을 알리고 다음 사업의 초석으로 삼고자 70명의 이산가족의 상봉 이주를 지원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skc등의 지원으로 60명의 상봉과 40여명의 이주를 지원하였다. 초청하는 가족들은 먼저 6개 마을에 이주하여 살던 사람들 중 희망자들에 한하여 신청을 받았다. 이들은 1인당 300달러씩의 교통비 지원, 200달러씩의 국적회복지원, 가구당 2000달러의 주택비 지원, 1000달러의 주택마련 대출, 3000달러의 농업대출, 월 300달러 이상의 동계 일자리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 중 4가구는 쑨야센의 고향마을 신축 부지로 이주하여 고향마을 건설과 청국장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 사업은 MBC의 강제이주 70주년 특집 2부작 “귀향” 으로 방영되어 일반국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2007년 11월 연해주 고려인 농업정착 지원사업과 연해주 농업)“
“2007년 초에 대한주택건설협회로부터 우정마을 건설본부로 쓰던 90ha 27만평 (밭 9만평)의 로지나 농장(구 연해주 최대의 계사)을 기증받아 쑨야센 25고려인 가구와 새로 이주한 가구들이 힘을 모아 자연농업 시범 고려인 마을 “고향마을 농장”을 조성 중이다. 현재 4가구가 입주한 이 마을에는 약15가구의 고려인들이 입주할 예정이고, 자연농업 방식의 돈사, 계사, 우사와 채소 비닐 하우스 단지, 청국장, 된장 등 장류 가공공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주변 30ha의 밭에는 감자와 옥수수 등의 농사가 진행될 것이다. 동평의 농업센터도 2008년초에는 우정마을에서 고향마을로 이주할 예정에 있다. 한편 이 마을 한쪽에는 대규모 청년 텐트 캠프장을 조성하여 동북아 평화, 생태 교류의 장을 조성할 예정이다 (2007년 11월 연해주 고려인 농업정착 지원사업과 연해주 농업)“
“ 2007년 8.15에는 미하일로프까군과 함께 500여 명의 지역 다민족과 한국의 청년들이 참여하는 “다민족 평화축제”를 우정마을내 공원에서 개최하며 어엿한 고려인 마을로 거듭나게 되었다. 한편 한국뿐 아니라 유럽 등 외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이제는 이주민들의 정착모범마을로 연해주내 명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07년 11월 연해주 고려인 농업정착 지원사업과 연해주 농업)“
자연농업 도입과 함께 연해주의 춥고 긴 동계 등 계절적 원인으로 인해 축산의 중요성이 제기되고 양돈을 중심으로 자연 축산이 제기되게 되었다. 이 시기 가구별 양돈을 위한 3000달러 대출이 7여 가구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 돼지 새끼 대출도 하게 된다 ( 아름다운가게, 사회연대은행 등). 또한 양돈이외에 비닐하우스, 육묘 , 노지 농업, 양계 등 영농분야도 희망에 따라 영농 계획서를 제출하고 심사 받은 뒤 대출을 진행받게 되었다.
전체 지원 가구 중 약 25% ( 육묘, 양돈, 비닐하우스)는 대출을 통해 지속적 영농을 이루어 가게 된다. 이러한 가구는 몇 친척, 가족이 모여 육묘 생산에서 판매까지 운영하는 경쟁력을 갖추거나, 비닐하우스, 양돈 등에 특별한 적성이 있는 가구들 이었다. 하지만 개별적 노력은 유통, 판매, 정보 등에 한계를 갖게 된다.
3. 제3기 : 2008년 - 2009년 : 자립방안 모색기 방법 ( 프림코와 공동 작업장)
- 프림코 농장 운영
- 공동 작업장 5곳 신설 및 확충
- 고향마을 본격 건설 ( 총 18가구 )
- 재외동포재단 , 고려학술문화재단 , 고도원의 아침편지 (꽃마), 대한 주택건설 본부, 경희대, 사회복지 공동 모금회, 로타리
2008년부터 판매에 대한 문제를 함께 모색해 왔던 가구별 청국장 공장은 효율성과 위생 등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을 공동 작업장으로 변화, 발전하게 되었다 ( 사회복지 공동모금회, 로타리 ). 우정마을, 고향마을, 끄레모바, 아시노브까, 노보루사노브까에 공동작업장을 만들어 청국장에서 된장, 메주 등의 장류, 민들레, 고사리 등의 채취 임산물 가공, 고춧가루, 김치 농산 가공으로 생산 범위를 넓혔다. 프림코 농장도 약1600여ha (500만평)으로 기반을 넓혔다. 양돈사업도 개인농에서 협업농을 위한 출발로 모돈사를 운영하게 되고, 소축산도 개별사육을 하나 유제품의 공동판매를 모색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가구별 모색에서 협업적 모색으로 전화하는 시기를 맞게 된 것이다. 소련시절의 경험으로 협업은 안 된다는 인식에서 다시 협업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제기되며 다양한 협업 방식이 고민되는 시기가 되었다.
유통과 판매에 있어서도 그 동안의 경험을 총괄하여 우선 마을 센터, 식당 등 내부 식자재부터 자급자족하자는 취지로 먹거리를 공급하기 시작하여 내부시장을 운영하고, 주말마다 우수리스크 기념관내에서 주말시장을 운영하여 11월 현재 약 20여 차례를 운영하였다. 2009년에는 우유, 돼지고기, 계란, 된장 각종 채소, 김치, 고사리, 나물, 치즈, 드보락 등 내부 센터와 식당에는 대부분의 식자재를 자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산가구가 100-200여 가구에 이르고, 500만평의 콩 등 곡류 시장에서 생산되는 산품들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더구나 2009년 경제 위기와 함께 한국 경제 사정도 나빠지면서 약속했던 청국장 구입 약속과 한국 유수한 단체들의 지원 사업 중도 포기 등이 발생하면서 여러 계획이 난항에 빠지고, 오히려 판매 목표가 후퇴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생산자들이 안정적으로 정착 발전 할 수 있는 유통과 판매 조직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게 되었다.
한편 2009년 고향마을도 총 18가구가 입주하게 되고, 제3회 다민족평화축제와 , 연해주 다민족 총회를 개최하는 등 마을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에 의하여 약 50가구에 자가 수도를 파게 되어 농업환경이 한결 개선되었다.
3. 평가와 과제
1. 지원 사업 초기에는 소련의 사회주의적 협업 방식이 결국은 망하는 길이었다는 경험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 친척끼리도 협업을 꺼리고 생산에서 판매까지 개인 혹은 가구별로 진행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독자적으로 모색하던 가구는 실제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한계를 느끼고 협업으로의 필요성을 느껴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공동작업장과 공동 판매의흐름이 만들어 지게 되었다.
2. 200 농가구와 농장, 가공장등 일정한 생산규모와 생산품목을 확보하였다. 대부분의 먹거리는 자급이 가능하게 되었고 , 우수리스크나 한국의 회원들에게 공급할 정도의 생산량도 가능하게 되었다.
3. 소수민족 정착과 인구 증가 사례
러시아 사회에서도 고려인 농업정착지원사업은 소수민족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례로 적극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올해에는 연해주 정부가 건설 중 인 고향마을에서 연해주 민족총회를 개최하여 고려인 사례를 적극적으로 토론 평가하였고, 군과 기금은 다민족 평화축제를 고향마을에서 개최 하였다. 한편으로 극동의 고질적인 문제인 농촌 살리기와 인구증장에도 모범적 사례로 평가되었다. 러시아라는 다민족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소수민족으로 고려인이 평가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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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초기에 설정한 바 있는 북한 등의 식량지원문제는 아직 현실화 되고 있지 못하지만 연해주가 동북아의 안정적 식량기지로 되어가기 위하여 한국의 기업과 단체들이 활발하게 진출하도록 하는 노력은 이스트 엔시라는 자문회사를 만들어 진행하고(별도 발표) 있다. 이 회사는 우리의 농업 경험과 프림코 운영 경험을 토대로 컨설팅을 실시하고 있다. 다양한 농업주체들의 연해주 농업 진출을 돕는 노력과 프림코 같이 대규모 농업에서의 자연농에 대한 재평가를 통한 대안적인 동북아 차원의 식량기지 논의는 시기를 좀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5. 고려인 농업정착지원사업의 확대 : 3기는 이후 연해주에서의 고려인 농업 경제의 모델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 시기라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정착 마을이나 가구를 확대하는 것은 잠시 정체 되었다. 향후 유통과 시장 등 에서 대안이 만들어지면 이를 위한 가공과 생산시설을 중심으로 정착마을을 확대하여 갈 것이다. 이 지원 사업은 기존의 사업에서의 성과물과 한국 등에서의 지원이 기초가 되어 진행해 가게 될 것이다. 약 5-6 개 마을이 이런 지원을 기다리고 있다.
4. 4기 전망 ( 2010년 - 2011 년 : 동평 생협 ( 동북아 생협) 건설기 )
1. 협업 방식으로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공동생산, 공동판매, 공동구매등 협업적 방식으로 가는 것이 경쟁력을 갖추는 길일 뿐 아니라 지원사업의 공익적, 공동체적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생산자회는 채소, 축산, 가공, 곡물분야로 나뉘어 정비 할 수 있을 것이고, 특히 숙제 인 판매에 있어서는 일단 기념관에 농산물 공동 판매(생협) 매장을 내는 것을 기초로 연해주 곳곳에 고려인 전통식품을 중심으로 판매하는 공동 매장을 만들어 가는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 매장을 통해서 회원을 조직하고 소비자회을 조직하고, 생산자회와 함께 생활협동조합운동으로 발전시켜 볼 계획을 세우고 있다.
2. 건강한 먹거리로 ( 자연농업 )
시간이 흐를수록 연해주에서도 유기농, 건강한 식품의 수요는 점점 늘어가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연해주 유기농 콩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장기적으로 유기농이 생산량이 적다는 통념도 비닐하우스 농사 5년의 경험으로는 맞지 않는다고 보여 지고, 콩 생산도 러시아식 휴경과 윤작을 통한 자연농이 관행농과 비교 할 때 생산비와 생산량을 종합하면 결과적으로 크게 차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지속 가능한 생태 농업으로는 더욱 긍정적 측면이 확인 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연해주의 유기농 제품에 대한 수요가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3. 동북아 생협 방식으로
연해주 고려인정착사업팀은 자생, 자립을 기본으로 하지만 광활하고 청정한 자원을 기반으로 국가적 장벽을 넘어 동북아와 협력하는 것은 매우 근본적인 일이고, 역사를 회복하는 일이다. 역사적으로도 동북아는 먹거리 공동체라 할 수 있다. 한국, 일본, 중국, 북한등과 생협적 방식으로 교류 협력을 만들어 가는 것은 동북아 평화를 위한 근본적인 노력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생협운동이 국내 농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외국산 농산물에 대한 경계를 가지고 있는 문제와 관련하여 동북아 생협이라는 주제를 놓고 좀 더 생협운동을 보편화 시키는데 이바지 하게 될 것이다.
5. 방법론 ( 동북아 생협 운동 토론의 활성화를 위하여)
회원들과 함께 동북아 생협(동평 생협)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한국 국민들의 따뜻한 지원 속에 2004년 진행해 왔던 고려인들의 농업 생산기반이 어느 정도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6개 마을의 200여 생산농가가
500만평의 콩등 곡류 농장,
5개의 가공장 ,
30여동의 비닐하우스와 노지에서의 채소 농사,
100만평의 임산물 산지 등에서,
완전 유기농 자연농업과 자연채취로만의 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차가 청국장과, 청국장 쿠키, 청국장 효모, 메주와 된장은 이미 유통되고 있고
콩가루를 이용하여 두부, 두유 등을 실험 중이고
자연채취 민들레로 차가 민들레 엑기스를
야생도라지와 자연 꿀로 야생 도라지 꿀 청을
농장에서 나오는 수백 톤씩의 밀과 귀리, 보리로 가루, 빵, 국수, 보리차, 선식류를 실험 중입니다.
천연 방목지에서는 소를 키우기 시작해서 신선한 우유와 치즈를 시험 생산중이고
돈사에서는 자연 농 돼지가 연해주 기금 내 먹거리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2년 안에 벼농사를 일구어 갈 계획인데, 쌀만 나오게 되면 거의 모든 농업 먹거리가 생산 될 것입니다.
이 먹거리를 연해주 뿐 아니라 한국의 뜻있는 후원자들과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려인 정착사업의 측면에서 안정적 판로도 중요하지만,
이 좋은 먹거리를 함께 나누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안정된 소비자가 준비되면 연해주 고려인 생산자들은 더욱 안정된 생산을 계획하고
다양한 물건들을 공급하는 기반을 계획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동북아( 동평) 생협”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
더 이상 우리가 안고 있을 문제가 아니고 이 과정을 도와주신 여러분들과
다시 풀어 놓고 고민하며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어떻게 만들까요? 토론을 위하여 지금까지의 아이디어를 제안하여 보면
동북아 생협은 한국과 러시아 연해주에 동시에 만듭니다.
한국 생협은 "동북아평화연대"와 "사회적 기업 바리의 꿈"이
연해주 생협 준비를 위해서는 기금의 농업정착지원팀과 생산자회가 주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연해주는 그간의 생산자들과 사무국 200여 가구 그리고 기념관의 매장이 중심이 되어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비자는 적극 조직 되어 있지 못하나 생산자가 한편으로는 소비자이므로 최소한의 소비자 회원은 조직 되어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생산자이자 소비자 회원들의 지인과 그동안 우수리스크를 중심으로 기금이 해온 활동을 바탕으로 소비자를 확대 할 수 있습니다.
연해주 생협의 출발은 10월말에 개장하는 기념관(고려인문화센터)내에 매장을 먼저 설치하며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고, 지역은 미하일로프까와 우수리스크를 중심으로 하나 블라디보스톡 한인회, 하바로브스크, 사할린 등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습니다. 연해주 미하일로프까에는 기존의 생산자들을 콩 등의 곡물 생산반, 야채 생산반, 가공반, 축산반 등 생산자회로 재조직 합니다
한국은 바리의 꿈의 청국장 판매와 회원 조직의 경험을 살려 전국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직이 가능할 것입니다. 한국은 그 동안의 후원자들에게 지원사업의 성과를 알리고 다음 단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함께 토론하면서 소비자 조직을 제안 하며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연해주 생협이 먼저 활동을 시작 할 것 이므로 이를 격려하고, 지원, 동참하면서 동력을 얻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초기에 생활재의 가지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다품목을 대
상으로 일반 생협처럼 조직하기는 어려울 것 입니다. 초기에는 적극적인 이해자와 후원자들이 중심이 되어 생협 준비팀의 성격으로 현재 가능한 청국장, 된장, 민들레엑기스, 효모, 청국장 쿠키, 각종 나물류 등을 중심으로 정액의 정해진 물건을 공급하는 회원제가 용이할 것 같습니다. 매달 2만원에서 5만원 정도의 회비를 내면 그 액수에 상당하는 그달의 생활재를 선정하여 보내는 방식이지요.
1000명 정도의 회원이 모여질 즈음에 본격적인 생협으로의 조직을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때 쯤이면 한국의 생협도 동북아적 지향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판단이 가능할 것 같으므로 동북아 생협으로 독자적 전망을 개척할 것인지 기존의 국내 생협과 통합할 것인지를 결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한국의 생협도 2년 정도면 회원들이 연해주의 생활재를 매장에서 판매 할 수 있을지를 결정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독자적 동북아 생협으로 간다고 해도 한국의 생협 조직들과는 적극적 교류, 연대를 해야 할 것 입니다
한국의 생협과 러시아의 생협은 상호 독자적 조직이지만 동북아 생협 혹은 동평 생협이라 칭하고 서로 연대해가며 전망을 함께 만들어 가는 조직입니다. 초기에 연해주는 주로 생산자 기능 한국은 주로 소비자 기능을 담당 할 것이나, 조만간 한국에서도 연해주의 1차 원료를 대상으로 가공 생산 시설들이 들어설 수 있고, 연해주에도 한국의 생활재들이 판매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양국 간의 거래는 공정무역을 원칙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양국의 생협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최대한 보호하는 신뢰의 원칙을 지켜가게 될 것입니다. 이 사례는 코리안 네트워크를 통해 동시적으로 중국, 일본, 북한 등의 관계로 확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연해주의 생활재는 한국의 많은 사람에게 좋은 먹거리를 값싸게 보급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며, 기존의 생협 운동이 한계로 지적하는 비싼 유기농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좋은 생활재로 바뀌어가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생협 회원들은 이런 먹거리를 통해 연해주와 구체적으로 관계 맺으며, 한반도의 삶을 대륙으로 확장시켜 가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땀방울이 흐르는 신선한 내용들을 천천히 읽어 보면서 존경.감탄도 하고 진정으로 동행이란 단어도 느끼며 많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정말 고민 좀 해 보렵니다.
감사합니다. 진지한 고견 과 협력 부탁드립니다. 가능하시면 호프데이 정모에 한번 참가하시면 어떨까요? 여러가지 정보와 사람들을 보실 수 있는 기회와 정보가 될 것 같아서요. 12월10일 오후 5시 부터 계속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