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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공동체 사회'와 이행의 단계
송 태 경(민주노동당 정책위원, 자본론 전문강사)
※서강대 대학원 학술제 발제문, 2001년 11월 19일
1. 과거 사회구성체 논쟁의 한계
2. 정치경제학의 방법론 - 사회구성체와 관련하여
1) 자본주의 이후 계급이 해소된 사회 - 자유인들의 연합체(자유로운 공동체 사회)
2) 레닌의 단계론 및 이행론은 정당한가 - 황당무계한 낭설 국가독점자본주의론!
3) 사회구성체 구분의 기준
4) 자본주의 사회의 상이한 발전단계와 이행의 경로
5) <사적소유자본주의>와 <주식회사자본주의>의 기본적인 특징
6) 레닌이 보았던 사회상태 - 주식회사 자본주의
3. 20세기 정형화된 사회주의 사회 = 또 하나의 계급사회
4. 이행의 강력한 수단, 국가와 신용
5. 한국 자본주의 전개
6. 보론: 현재 한국 사회는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인가?, 계급론의 결함 등
※ 주요 참고자료 ※
'자유로운 공동체 사회'와 이행의 단계
송 태 경(민주노동당 정책위원, 자본론 전문강사)
1. 과거 사회구성체 논쟁의 한계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80년대 절정에 이르렀던 사회구성체 논쟁은 한국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주어진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문제의식과 함께 '계급사회 철폐를 위한 사회혁명'의 가능성을 밝히려는 정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당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민청련에 의한 CDR(시민민주주의 혁명론)/NDR(민족민주주의 혁명론)/PDR(민중민주주의 혁명론) 구분과 NDR적 입장 정립(이른바 'CNP 논쟁') 및 박현채/이대근의 논의로부터 시작하여 촉발되었던 사회구성체 논쟁은 하나의 세계사를 형성했던 '또 하나의 계급사회'(즉,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종료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는 것이기도 했다. 그 치명적인 결함들을 일반적으로(세부적인 사정 제외) 정리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첫째: 그 모든 논의는 국가와 노동의 관계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즉, 국가주의 사회)를 전망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행의 전망을 상실 당하는 순간 그것은 이론으로서 설득력을 잃게 됐다.
둘째: 사회구성체 분석의 방법론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점에서 사회의 상이한 발전단계와 이행의 경로를 제시한다는 기본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모든 논의에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점 대신에 경쟁, 독점, 국가라는 개념을 가지고 자본주의 사회의 상이한 발전단계와 이행의 경로를 설명하는 레닌주의적 편향을 답습하고 있었다. 예컨대 주변부자본주의론이나 식민지반봉건사회론(또는 식민지반자본주의론)조차도 유럽 미국 등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적용되나 저발전된 자본주의 사회 또는 한국사회의 특수성은 반영하지 못한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셋째: 과학적인 계급론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는 특히 국가의 인격적 담당자들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낳았다.
넷째: 국가와 노동의 관계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즉, 국가주의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는 한반도에 형성된 두 개의 적대적 생산유기체의 상호작용 및 이에 상응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했으며, 또한 두 대립물의 발전적 지양에 대한 문제의식의 생성을 차단했다.
2. 정치경제학의 방법론 - 사회구성체와 관련하여
1) 자본주의 이후 계급이 해소된 사회 - 자유인들의 연합체(자유로운 공동체 사회)
자본과 임노동관계에 기초한 사회(자본주의 사회)가 끊임없이 변화·운동하고 있음은 누구나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이 사회의 변화·운동의 궁극적인 방향은 무엇인가?> 또는 <변화·운동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는 현재를 지양하고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 새로운 사회는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아직 집단적 체계적으로 의식되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다. 이른바 '대안부재의 시대'라고 불리는 현재까지 그것은 결코 상식이 아니다.
물론 아직 우리의 물음에 대한 해답이 집단적 체계적으로 의식되지 않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일이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과 임노동 관계>에 주목할 때 해답을 구하는 일은 쉽다.
왜냐하면 자본의 운동에 대항하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운동인 노동운동은 기본적으로 생산과정 내에서 사용 당하지 않으려는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착취당하지 않으려는 운동방향성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이 운동의 궁극적인 종결지점은 결국 생산과정 내에서 지배-피지배 구조가 해소될 수 있는 사회적 관계 및 이에 상응하는 사회적 행위양식을 만들어 내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자유롭게 생산과정에 결합한 생산당사자들이 소유·경영·분배의 주체로 되기 위한 운동이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운동이며, 이 노동운동의 결과에 따라 만들어질 수 있는 사회는 자유롭게 생산과정에 결합한 생산당사자들의 소유에 기초한 사회(즉, 자유인들의 연합체 또는 자유로운 공동체 사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해답이 이와 같이 단순하며 또한 이미 오래 전에 그것도 정교한 이론적 연구를 거쳐 관련된 전체로 마르크스에 의해 제시되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마르크스의 이론을 믿고 따른다는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렇게나 많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해답은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였다. 바로 그 마르크스의 이름을 빌어 문제의 해답은 신비화되었으며, 전혀 엉뚱한 사회(이른바 '사회주의 사회': 노동자계급의 대변자라는 자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의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생산을 계획·통제하는 사회)가 노동운동에 의해 촉발되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인 것으로 설명되었다. 왜·어째서·무엇 때문에 이런 황당무계한 사태가 빗어졌는가?
2) 레닌의 단계론 및 이행론은 정당한가 - 황당무계한 낭설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자본주의 사회가 상이한 발전단계를 따라 발전해왔으며, 또 그 발전단계들에 따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거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18세기 말엽부터 시작해서 19세기 중반까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의 자본주의 시대와 이후의 자본주의 시대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실로 극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에 의거해서 이러한 발전단계들을 구분하고 이해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지난 시기 사회구성체 논의자들은 모두가 '자유경쟁자본주의 ⇒ 독점자본주의 ⇒ 국가독점자본주의 ⇒ 국유화된 사회(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주장한 레닌의 선례를 따랐는데,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자주 인용되는 것들이다.
'···낡은 형태의 자본주의, 즉 증권거래소라는 필수 불가결한 조절기를 가졌던 자유경쟁의 자본주의는 소멸하고 있다. 이것에 대신하여 나타난 새로운 자본주의는 과도적인 형태, 즉 자유경쟁과 독점의 혼합물로서 명백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이 새로운 자본주의는 무엇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가? 그러나 부르주아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제기를 두려워한다.'
'전적으로 자유경쟁이 지배적이었던 구 자본주의의 전형은 상품수출이었다. 그러나 독점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최근단계의 전형은 자본수출이다.'
'제국주의 전쟁은 독점자본주의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을 극도로 가속화시키고 강화시켰다.'
그러나 과연 이와 같은 레닌의 단계론 및 이행론은 정당한 것인가?
레닌의 주장이 옳은가 그른가를 말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경쟁과 독점 그리고 국가라는 개념들이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경제적 시대의 형태변환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개의 사물은 주어진 위치가 어떠한가에 따라 각각 다른 의의를 갖기 때문이며, 또한 그 구분의 기분이 어떠한가에 따라 상이한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경쟁·독점·국가라는 개념들을 피상적으로로 검토하더라도 우선 자명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경제적 시기를 규정하는 요소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쟁이나 독점이란 모든 상품생산자 사회에 공통적인 규정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생산물이 상품으로 등장할 때는 언제나 존재하는 개념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도 모든 계급 사회에 공통적인 것이며,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시기를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다.
그렇다면 경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상품소유자들의 상호작용의 총체를 말하는 개념일 뿐이다. 즉, '상품의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그리고 상품의 판매자들 및 구매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모든 상호작용의 총체'가 바로 경쟁이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경쟁에 대한 개념 정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만일 누군가가 이러한 경쟁을 수요와 공급의 상호작용의 총체라고 다시 정의하더라도 문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급자들 사이의 그리고 수요자들 사이의 경쟁을 우리는 또 다시 고찰해야 하며, 그리고 수요와 공급이라는 개념을 상품생산자 사회에 한정시켜서 사용하는 것으로 정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경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수요와 공급의 고찰에서는 공급은 특정 상품의 판매자 또는 생산자 모두에 의해 제공되는 상품의 총계와 같고, 수요는 그 상품의 구매자 또는 소비자(개인적 소비자와 생산적 소비자)의 총계와 같다. 더욱이 이 두 개의 총계는 각각 하나의 전체로서 집합력으로서 작용한다. 여기에서 개인은 다만 사회적 힘의 부분으로서, 집단의 원자로서 작용할 뿐이다. 이러한 형태에서 경쟁이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성격을 표출시키는 것이다.
경쟁에서 일시적으로 보다 약한 편의 개인은 자기의 경쟁자들의 집단과는 독립하여 활동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개인의 의존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반면에 보다 강한 편은 항상 다소 단결된 전체로서 상대방에 대항한다.
어느 특정 종류의 상품에 대한 수요가 공급보다 크다면, 어떤 구매자는 다른 구매자들보다 - 일정한 한계 안에서 - 높은 가격을 제시하고 이리하여 모든 구매자에 대하여 그 상품을 그 시장가치 이상으로 비싸게 만드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판매자들은 단결하여 높은 시장가격으로 판매하려고 한다. 반대로 공급이 수요보다 크다면, 어떤 상품을 보다 싸게 방매하기 시작하여 다른 판매자들은 그를 뒤따르지 않을 수 없는데, 구매자들은 구매자들은 공동으로 시장가격을 가능한한 인하하려고 한다. 각자는 공동으로 행동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이익이 나는 경우에만 공동이익에 관심을 가진다. 행동의 통일은 자기편이 보다 약하게 되자마자 깨어지고, 각 개인은 독립적으로 자기의 최선을 도모하게 된다. 어느 한 사람이 보다 값싸게 생산하여 현재의 시장가격 또는 시장가치 이하로 판매함으로써 더욱 많이 판매하고 시장의 점유율을 높일 수 있다면, 그는 그렇게 하며, 이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점차로 그보다 값싼 생산방법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이리하여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은 새로운 보다 낮은 수준으로 저하한다. 만약 한편이 우세하다면 그편의 구성원들은 모두 이익을 보게 되는 데, 이것은 마치 그들이 공동의 독점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 보다 약한 편의 경우에는 각자는 자기 힘으로 강해지려고 하며(예컨대 보다 적은 생산비로 생산하려고 하며), 또는 적어도 적은 손실을 입으려고 한다. 이 경우에는 각자는 자기의 이웃이 어떻게 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비록 자기의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모든 동료들에게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인용구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듯이 경쟁이란 상품소유자들의 상호작용의 총체에 불과하며, 상품생산을 일반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자 사회에서 모두를 지배하는 외적 강제법칙이 된다.
따라서 그 사회가 어떠한 역사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또는 역사적 잔재를 물려받은) 사회상태이든 관계없이 생산물이 상품으로 등장한다면 경쟁은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상이며, 따라서 상품생산의 범주 또는 상품유통의 범주인 경쟁을 가지고는 자본주의의 형태변환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독점도 그렇다. '경쟁에서 일방이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는 것들의 총체'를 말하는 독점도 상품생산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독점의 형태는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인위적 독점, 자연적 독점, 우연적 독점이 그것이다. 인위적 독점이란 법률적·제도적·직접적 폭력 또는 사적 탐욕의 충족에 기초해서 형성되는 다양한 형태의 독점을 말한다. 자연적 독점이란 노동생산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독점을 말하며, 우연적 독점이란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의 우연적인 불일치에 의해 발생하는 독점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 요소들은 다양한 형태변환의 계열로 존재할 수 있으며, 또한 상품생산자 사회에선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다시 말해 경쟁과정에서 독점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상품의 소유자들은 모두가 경쟁자로서 자신의 상품을 다소 유리하게 판매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이든 또는 집단이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항상 그렇게 한다. 상품생산의 전제 위에서 인간들이 이러한 독점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독점을 다소간 완화하거나 더 강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경쟁과 독점은 시장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존재하는 쌍생아일 뿐만 아니라 '상품생산 또는 상품유통'의 범주로 일정한 발전단계에 있는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범주가 아니다.
더구나 '경쟁과 독점'의 형태나 방식의 변화를 가지고도 - 사회의 일정한 발전단계가 어떠한가를 추론할 수는 있겠으나 - 발전단계 그 자체를 구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쟁과 독점의 형태나 방식의 변화를 관련된 전체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경쟁과 독점이 발현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정한 발전단계와 그 사회적 관계들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즐겨 지적하는 '현대독점의 전형적인 형태'인 콘체른의 경우, 이는 주로 자본참가 방식 또는 지주회사 방식에 따라 기업간 결합이 달성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최고의 발전결과인 주식회사를 상정하지 않으면 관련된 전체로 설명되지 않는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모든 계급사회에 공통적인 것으로 일정한 발전단계의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범주는 아니다. 또한 국가가 현실적으로 취하는 모습(절대왕정, 부르주아 공화정 등)이나, 또는 국가가 존재하는 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국가에 의한 경제개입의 형태나 방식의 변화도 사회의 일정한 발전단계와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관계들에 규정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통영역의 범주인 경쟁과 독점 또는 경제외적 변수인 국가를 가지고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이한 발전단계를 한 웅큼도 설명할 수 없다. 또한 '경쟁과 독점의 형태나 방식의 변화'나 '국가에 의한 경제개입의 형태나 방식의 변화'를 끄집어내어 자본주의 사회의 상이한 발전단계를 구분하는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경쟁과 독점의 형태나 방식의 변화'나 '국가에 의한 경제개입의 형태나 방식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일정한 발전단계와 그 사회적 관계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신비화된다(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의 일정한 발전단계가 경쟁과 독점, 국가에 의한 경제개입 등의 형태와 방식의 변화를 규정하는 변수이지 그 역이 아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경쟁이나 독점 또는 국가는 주어진 사회의 성격을 현상적으로 표현해 줄 뿐,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며, 주어진 사회의 상이한 발전단계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도 될 수 없다. 한 마디로, 레닌식의 구분은 현상의 외관만을 바라보는 지극히 피상적인 단계 구분일 뿐이며, 황당무계한 낭설일 뿐이다. 마치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안목처럼 지극히 협소하고 편협한 관념에 불과할 뿐이다.
3) 사회구성체 구분의 기준
경쟁, 독점, 국가라는 개념을 가지고 자본주의 사회의 상이한 발전단계를 구분할 수 없다면, 도대체 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일반적인 답은 이미 주어져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또는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인 소유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일반적인 해답은 이미 마르크스에 의해 오래 전에 주어져 있었으며, 레닌이나 레닌의 편향을 답습한 과거 사회구성체 논의자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던 상식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문제의 일반적인 해답에 대한 논의와 적용은 피상적·파편적이었을 뿐이며, 정작 현실에서의 적용에서는 도무지 성립될 수 없는 경쟁·독점·국가를 끄집어내는 황당무계함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즉, 그들은 마르크스의 지적을 상호 관련된 전체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마르크스가 제시한 일반적인 해답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바로 그 해답이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바는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는 엉터리 단계론을 폐기처분 하거나 또는 자신들의 관념을 혁명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이 범한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르크스가 도달했던 결론에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렇게 도달된 결론을 매개로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단계를 논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살아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를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의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소비욕망을 충족해야만 한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상태가 어떠하든 관계없이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은 자신의 생명활동에 필요한 자연물을 획득해야만 한다. 먹지 않고 쓰지 않고 입지 않은 채 살아갔던 인간을 우리는 볼 수 없다. 그가 종교적 신앙의 몽롱한 경지를 너울너울 밟으며 살아갔든 정치적 권력의 달콤함을 향유하며 살아갔든 그는 자연사적 필연성으로 주어진 소비욕망의 충족과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자연물은 인간들의 사회적 삶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이라는 형태변환의 공정을 거쳐야만 한다. 따라서 인간이란 자연은 이러한 생산과정에 어떠한 형태로든 관련을 맺어야만 한다. 물론 그가 충족하는 대상물이 직접적인 자신의 생산의 결과물인가 아니면 타인이 생산한 생산물의 일부를 탈취한 것인가는 지금 우리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소비욕망을 충족해야만 하고, 이러한 생산물을 생산해야만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생산에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생산일반이 인간 삶에 대해 규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삶에 규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하고 있는 생산일반을 검토해 보면, 다음의 사실도 알 수 있다.
즉, 생산일반이 진행하기 위해서는 - 아주 원시적이고 미개한 상태가 아니라면 - 일정한 생산도구를 포함하는 생산수단과 노동자들이 결합되어야만 하며, 이러한 결합이 있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경제학의 가장 일반적인 문제틀인 소유와 생산력과 생산관계( 및 이의 법률적 표현인 소유관계), 그리고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는 생산의 전제로서 주어져 있으며, 생산관계란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에 결합할 때 맺게 되는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를 말하여, 소유관계는 바로 이 생산관계의 형성과 더불어 표현되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인간들의 관계를 말하며, 생산력이란 이러한 결합을 통해 어떤 생산물을 생산해낼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특히 역학적인 종류의 노동도구의 발전정도 등)을 말하기 때문이고, 끝으로 생산양식이란 이러한 인간들이 생산수단에 결합하여 생산물을 생산해 내는 모든 방식(Method)들의 총체를 말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 세 가지 주요 요소를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며, 마르크스는 바로 이들 세 가지 주요 요소들의 유기적인 통일을 가지고 역사상에 나타났던 또는 나타날 수 있는 생산유기체들(원시공동체적 생산양식, 소생산양식, 노예제적 생산양식, 아시아적 생산양식, 봉건제적 생산양식,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사회주의적 생산양식, 연합된 노동의 생산양식 등)를 규정·구분했음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생산수단(이 중에서 특히 역학적인 종류의 노동도구)
둘째: 생산의 전제로서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
셋째: 결합하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조건
물론 이상 세 가지 주요요소들을 가지고 규정·구분되는 생산양식들 사이에는 다양한 형태변환의 계열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는 과도기적 국면에서 특히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봉건제적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과도기나, 또는 소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경계선을 고찰하거나, 또는 일제 강점기 한반도의 역사에서 전자본주의적 관계의 폭력적인 해체 및 자본주의적 생산의 폭력적인 이식과정을 고찰하는 등의 경우에 쉽게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사회구성체의 경제적 시기가 어떠한가는 항상 그러한 사회에서 일반적이고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비록 식물과 동물의 경계선으로 들어갔을 때처럼 또는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선으로 들어가거나 또는 역사의 지질연대를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들어갔을 때 그 구분이 모호한 것처럼 엄밀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사회구성체, 이를테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기초한 사회(자본주의 사회)를 보더라도 다양한 생산양식들이 발견된다. 개인적 사적 소유를 매개로 하는 소생산양식이 가내공업이나 소농경영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이들이 파편적이고 분산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결합하여 상호관련된 전체로 운동하고 있음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또는 고도로 발전된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서 조차도 사적 탐욕을 매개로 나타나는 다소 은폐된 형태의 노예제가 관찰되기도 한다(이와 관련된 한국 사회의 예는 노동력의 소유자들이 자유로운 임금노동자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새우잡이 배에 팔려 가는 경우가 그러하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사회의 경제적 시기를 구분하는 준거틀은 생산수단(이 중에서 특히 역학적인 종류의 노동도구)과 이러한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 그리고 결합하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조건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왜 다음과 같이 지적했는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생산되고 어떠한 노동도구로 생산되는가 하는 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형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노동자와 생산수단은 언제나 생산요소이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분리된 상태에 있다면 그들은 잠재적 생산요소일 뿐이다. 생산이 행해지려면 그들은 결합되어야 한다. 이 결합이 달성되는 독특한 형태와 양식(the particular form of mode)은 사회구조의 경제적 시기를 구분한다.'
물론 마르크스의 이상의 지적에서는 앞서 정리했던 요소 중 한 가지 요소, 즉 마르크스가 '역사 최대의 수수께끼' 또는 '노동자계급의 사활적 문제'라고 불렀던 소유문제('생산의 전제로서의 소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항상 경험에서 마주하듯이, 마르크스가 '생산의 전제로서의 소유'를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전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인간이 살고 있다고 말할 때, 그가 인간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가 이 공간을 이미 전제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를 마르크스가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논의와 관련된 문제 중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로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비과학적 구분인가는 지적되어야 할 듯하다.
우선 사회주의 사회가 시장경제인가 아닌가를 보면, 우리는 그 사회가 시장경제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잘 알려져 있듯이 사회주의 사회는 루블(소비에트)이나 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위안(중국)과 같은 화폐가 존재했었으며 현재도 존재하고 있고 또한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기 때문이다. 화폐가 존재하고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의 직접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곧 이에 대응하는 생산물이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생산물들은 가격을 가진 상품으로 유통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사회주의 사회는 발달한 상품생산, 즉 상품유통과 화폐가 존재하는 시장경제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시장(market)이란 상품소유자들의 상호관계(상품의 판매자와 구매자들의 상호관계)의 총체인 유통이 이루어지는 장(field) 또는 교환의 장소를 말하며, 따라서 상품과 화폐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시장경제다.
다만 이 시장경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다른 점은, 상품시장에서 상품의 판매자로 나타나는 것은 '일반적으로' 국가(엄밀히는 국가의 인격적 담당자 또는 이러한 인격화의 대리 역할을 하는 노동자)이며, 여기에 대응하는 구매자들은 화폐를 소유한 불특정 다수(국민)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리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독특한 상품의 구매자는 '일반적으로' 국가이며 국가가 일방적 독점적 지위를 행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를 말할 때, 이 사회가 시장경제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무의미하며,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왜 국가가 상품의 판매자로 일방적으로 등장하고 노동력의 구매하기 위한 구매자로도 일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이렇게 상품의 판매자로 그리고 노동력의 구매자로 일방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거의 대부분의 생산수단이 국가의 소유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 이를 전제로 하는 독특한 사회적 관계(국가와 노동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획경제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생산에 대한 각종 계획은 일반적으로 자본가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생산에 대한 각종 계획은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생산에 대한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모두가 계획경제다. 결국 여기서도 문제는 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국가가 일방적으로 생산에 대한 각종 계획을 수행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가 생산에 대한 계획의 주체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며, 첫 번째 문제와 마찬가지로 소유문제와 이를 전제로 하는 독특한 사회적 관계에서 그 해답이 주어진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때 항상 발생하는 문제는 과학적 사유의 실종이다. '시장 사회주의'라는 관념이 이러한 무개념적 혼동에서 탄생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4) 자본주의 사회의 상이한 발전단계와 이행의 경로
자본주의 사회의 상이한 발전단계를 구분한다는 것은 곧 이 사회 내에서 질적 차이를 갖는 상이한 경제적 시기를 구분하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 구분은 레닌식의 황당무계한 낭설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과 생산관계(또는 이의 법률적 표현인 소유관계)의 관점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미 앞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점에서 사회구조의 경제적 시기를 구분할 수 있는 세 가지 주요한 요소를 도출해냈으며, 따라서 이 세 가지 요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형태변환 되었는가 또는 형태변환 되고 있는가를 파악하면 된다.
① 물질적 규정성으로서의 노동도구(생산력의 측면)
생산력의 문제는 사회적 삶의 한 과정으로서의 생산에서 물질적인 규정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주어진 시대의 사회적·역사적 성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동일한 기계제 대공업에 기초하더라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전혀 다른 사회가 형성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력의 문제는 주어진 사회의 발전정도 또는 사회적 생산시대를 결정적으로 특징짓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어쨌든 생산력의 측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상이한 시대를 구분하면, 크게 두 단계가 등장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권 제14장과 제15장에서 구분하여 서술한 것처럼 매뉴팩쳐 시기와 기계제 대공업의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매뉴팩쳐 시기의 특징은 인간들의 상호 긴밀한 분업을 바탕으로 생산과정이 조직되었다는 점이며, 따라서 전체 생산공정을 움직이는 기관은 인간들의 심장의 고동소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계제 대공업의 특징은 다르다. 매뉴팩쳐 시대 이전까지 인간의 손에 들려 있던 각종의 생산도구들은 기계체계의 도구로 전환되며, 이에 따라 전체 생산공정을 움직이는 기관은 인간의 고동소리 대신에 기계의 고동소리로 대체되며, 인간의 노동은 이러한 기계체계의 작동에서 단순히 보조적인 도움(supplementary assistance: 예컨대 눈으로 기계를 감시하며 손으로 기계의 착오를 시정하는 형태의 노동)만을 주는 형태로 전환된다.
생산력의 측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상이한 시기를 구분하는 경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른바 컴퓨터/정보혁명과 같은 기술혁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산업혁명에 대비해서 제3의 기술혁명으로 불리는 생산요소 일부에서의 혁명적인 전환을 기계제 대공업이라는 시기구분의 범주를 넘어서는 어떤 독특한 경제적 시기로 구분할 것인가 그렇지 않고 이 기계제 대공업 시기 내의 한 시기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이론적 결론은 현재의 컴퓨터/정보혁명과 같은 기술혁명은 결코 기계제 대공업의 시기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생산과정에서의 각종형태의 기술혁신들이 기계제 대공업의 시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듯이, 지금의 컴퓨터/정보혁명과 같은 기술혁명의 결과물들도 기계체계의 범주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의 기술혁명의 결과로 생산에서의 노동형태들이 다소간 급격하게 변화했으며 또 변화하고 있고 이에 상응하는 시장이나 상품 및 의식변화도 놀라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들은 새로운 기술이 급격히 일반적으로 도입될 때에는 언제든 나타나게 된다.
② 생산관계의 측면
생산력의 문제가 주어진 사회의 역사적·사회적 성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를 매개로 해서 형성되는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는 그 자체로서 이미 역사적·사회적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 생산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상이한 경제적 시대의 사회적 성격이 결정된다.
가. 생산수단에 결합하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조건
자본주의 사회를 통틀어 노동자들이 자유로운 노동력의 판매자로서 생산과정에서 결합하고 임금노동자계급을 형성한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이들의 변화는 임금노동자계급이라는 전제에서 계급적 의식이 성숙하고 자본에 대한 대항력이 제고되는 것 등이다. 물론 이외에도 노동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많은 변화들을 언급할 수 있다. 예컨대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서 다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즉, 오직 자본의 권력으로 나타났던 경영권이 점차 노동의 권력으로 이양되고 있다는 점(경영참가라는 용어나 산업민주주의 또는 생산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이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도 해당 생산과정에 대한 소유주의 일원이 되고 있다는 점(각종 형태의 노동자 소유제나 한국의 우리사주제도 등이 그것이다)이다.
결론만 간략히 요약하면,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시기를 규정하는 제1의 전제조건인 임금노동자 계급의 항상적인 존재는, 예외적인 사정(노동자들의 일부도 자신들이 결합한 기업에서 공동소유자의 일원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정 등)을 제외하면 변함이 없다. 또한 이러한 예외적인 변화는 생산의 전제인 생산수단의 소유를 관련된 전체로 고찰함으로써 명확해진다.
나. 생산의 전제로서 생산수단의 소유
자기증식하는 가치로서의 자본이 사회의 전면을 뒤덮고 사회 전체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확립하는 것은 자본이 생산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자본이 생산과정을 장악하기 이전까지 자본은 고리대 자본이나 상인자본이라는 이름으로 유통영역을 떠돌고 있었으며, 하나의 역사적 생산유기체로 자리잡지 못했었다.
마르크스는 하나의 경제적 생산시기를 지배하는 자본의 발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자본의 역사적 존재조건은 결코 상품유통과 화폐유통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의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하나의 역사적 조건만으로도 하나의 세계사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처음부터 사회적 생산활동의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지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이, 자본발생의 전제에는 화폐소유자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가 전제되어 있으며, 또한 그 출발점에서의 소유형태는 '일반적으로' 개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사적 소유이다.
그러나 출발점에서 '일반적인 형태'였던 사적 소유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따라 - 한편으로는 투하자본이 증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윤율이 점진적으로 저하함에 따라 - 필연적으로 형식적 공동소유의 한 형태인 주식회사적 소유로 형태변환 된다(노동자소유제는 바로 이러한 주식회사의 일반적 출현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노동자들의 자사주 취득형태에 주목하여 하나의 제도로 발전시킨 것임도 자명하다).
따라서 물질적인 규정성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역사적 성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사회적 생산관계의 측면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시기를 구분하고자 시도할 때 고찰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변화는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인 소유관계의 변화(자본주의적 사적소유에서 형식적 공동소유인 주식회사적 소유로의 변화)이며, 우리가 바로 이 측면에서 시기구분을 시도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사적소유자본주의와 주식회사자본주의라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주식회사의 일반화와 더불어 나타나는 노동자소유제에 주목하고 이것인 표현하는 운동의 변증법적 발전을 고찰하면, 그 결과는 자유롭게 생산과정에 결합한 노동자들이 소유·경영하는 것(즉,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규정하는 생산관계의 측면에서 단계론과 이행론을 단순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사적소유자본주의 ⇒ 주식회사자본주의(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한계 내에서 사적소유 폐지 또는 이 한계 내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소유) ⇒ 연합된생산자들의 소유에 기초한 사회(즉, 자유인들의 연합체 = 공산주의 사회)
5) <사적소유자본주의>와 <주식회사자본주의>의 기본적인 특징
① 사적소유자본주의
사적소유자본주의에서 특징적인 현상들은 크게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개별자본가는 자신이 장악한 생산과정에서 일방적인 1인 독재권력을 향유한다. 그들 자본가는 자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권력분립도 없이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노동자를 독재의 사슬에 꽁꽁 옭아 멘다. 마르크스는 작업장에서의 자본가의 1인 독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장법전(the factory code)에서 자본가는 그의 노동자들에 대한 독재권력(the autocratic power)을 사적 입법자처럼 자기 마음대로(부르주아지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권력분립도 없이, 또는 그 보다도 더 좋아하는 대의제도 없이) 정식화하고 있다. 이 공장법전은 노동과정의 사회적 규제(대규모 협업이 존재하고, 노동수단 특히 기계의 공동적 사용이 존재하는 조건에서는 필요하다)의 자본주의적 만화에 불과하다. 노예감시자의 채찍 대신에 감독자의 처벌규정집이 등장한다. 물론 처벌은 결국 벌금과 임금삭감이며, 또 공장의 리쿠르구스(스파르타의 입법자)의 입법적 총명으로 말미암아 자본가의 법률을 위반하는 것이 준수하는 것보다 오히려 자본가에게 더 유리하게 되어 있다.'
둘째: 생산과정에서의 개별자본가에 의한 생산과정에서의 독재는 정치형태에도 반영된다.
사적소유자본주의에서 국가권력은 일반적으로 형식적으로도 독재권력이 된다. 또한 이에 덧붙여 국가의 경제개입 형태나 방식도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에 의해 매개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소간 설명이 필요하다.
사적소유자본주의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 즉 자본의 성장과 일반화 과정은 낡은 생산관계들을 급격히 타도해 나가면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대량으로 생성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상품생산을 일반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동의지의 표현으로서 적대적 공동체의 공동의 사업수행을 위해 사회적으로 조직되고 집중된 힘으로써 사회의 상부에서 사회를 지배하는 기구'인 국가는 바로 이러한 물질적 생활과정의 변화를 추동하는 강력한 지렛대로 역할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국가의 이러한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시초축적의 상이한 요소들은 일정한 연대기에 따라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에 분배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이 상이한 요소들이 17세기말에 식민제도, 국채제도, 현대적 조세제도 및 보호무역제도 등으로 체계적으로 통합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들은 부분적으로 잔인한 폭력들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예컨대 식민제도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들은 봉건적 생산양식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의 전환 과정을 온실 속에서처럼 촉진하여 그 과도기를 단축시키기 위하여 국가권력, 즉 사회의 집중되고 조직된(the concentrated and organized force of society)을 이용한다. 폭력은 낡은 사회가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 산파가 된다. 폭력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권력(an economic power)이다.'
또한 국가는 하나의 폭력으로서 스스로 운동하기 위하여 자신의 인격적인 담당자를 항상 필요로 한다. 우리의 문제에서 이러한 인격적 담당자는 봉건적 생산양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촉진할 수 있는 의지·의식이 부여된 인물 또는 세력이어야 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안정적이고 탄력적으로 운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계급투쟁에 의해 결정되는 국가의 인격적 담당자의 기본적인 사회적 성향은 주어진 사회의 사회적 성격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음도 분명하다. 대체로 다음 네 가지 사정들이 주요한 사정이다.
하나, 사적소유자본주의가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1인 독재의 성격
둘. 상품생산의 일반화 과정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성격으로 다양한 상품소유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야 한다는 점
셋. 상품소유자들의 관계는 계약관계이며, 따라서 이러한 계약관계에 적합한 형태로 권력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
넷. 구태의연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한 정치적·사회적 관계들이 함께 존속하고 있다는 점
역사 발전의 측면에서 이상의 사정을 고려할 때,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개인 또는 세력이 우선적으로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성향은 1인 독재의 성격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품생산으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성격(또는 행위양식: 대등성·평등성 및 이의 반영형태의 민주주의 등)은 일정한 정도의 성숙기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구태의연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전자본주의적 정치적·사회적 관계들은 지배자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의 요소가 강하기 때문이며, 끝으로 사적소유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부터 직접적으로 파생되는 성격도 1인 독재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러한 1인독재가 상품생산의 일반화에 상응하는 사회적 행위양식의 발전을 반영하여 다소 은폐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만...
어쨌든 이론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의 초기에 해당하는 사적소유자본주의에서는 국가권력은 형식적으로도 독재권력이었으며, 이러한 권력을 매개로 한 경제개입 과정은 경제외적 직접적 폭력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이다. 영국이 그러했고, 독일·일본·프랑스 등이 그러했으며, 한국·대만이 그러했다.
셋째: 노동계급 또는 이외의 수탈 당하는 계급들의 반항도 폭력적인 형태들을 취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즉자적인 형태의 투쟁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루소의 말처럼, 분명한 것은 노동자 계급의 자본가 계급에 대한 맹목적인 항복문서는 그것이 어떤 권리(소유권으로부터 파생되는 권리 등)나 강제(이 강제가 구조적인 것이든 아니든)에 의해서 주어졌건, 강자의 폭력이외의 다른 그 무엇일 수가 없다. 이것은 다른 모든 피수탈자들에게도 동일하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말이 일반적으로 타당하듯이, 노동계급 또는 이외의 수탈당하는 계급들은 자신들에게 강요된 직접적인 폭력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폭력으로 대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폭력이 폭발하는 데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맹목적인 항복문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하는 것뿐이다.
실제로 사적소유자본주의에서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투쟁은 파괴적인 양상으로 나타났었다. 즉, 이러한 투쟁들은 종종 국가권력을 전복해 버리기도 하며, 일시적인 폭동에 대한 엄청난 반동의 시기가 도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상태에서 피고름으로 얼룩진 메스꺼운 향기가 유령처럼 떠돌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페이지마다 조목조목 적혀 있다.
② 주식회사 자본주의
주식회사 자본주의는 주식시장의 거대한 팽창, 기존 산업자본가계급의 기생화 경향 등 사적소유자본주의와 비교하여 현저한 차이를 보여 주는데, 이와 대비시켜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형식적 공동소유의 한 형태인 주식회사의 일반화 과정은 동시에 개별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향유하던 1인 독재 대신에 - 비록 노동계급에 대한 독재를 폐지하지 않지만 - 집단지배체제(주주일반을 대표하는 이사회 체제)가 등장한다.
소유의 권력을 매개로 한 전체 주주들의 부르주아적 민주주의(1주 1표주의)가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성숙한다. 이제 권력사용은 그 형식에서 전체 주주들(내용면에서 최대주주)의 이익에 부합하는 형태로 나타나야만 한다.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서 기업은 관리·운영되어야 한다. 또한 자본의 표현하는 기본적인 권리로서 '동일한 투하자본에 대해서는 동일한 이윤!'이라는 슬로건이 주주일반에게도 주어져야만 한다. 만일 누군가가 전체 주주들에 의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1주1표주의)를 매개로 획득한 이사의 권력을 전체 주주들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사적 탐욕을 위해 사용하고 주주들의 공동이익을 침해한다면, 그는 계약관계를 위반한 것이며 따라서 법률적인 제재를 받아야 한다.
현실을 경험적으로 살아가는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향유하던 생산과정에서의 절대권력을 최대한 보장받을 수 있는 조건에서 기업을 주식회사로 형태변환 시키려고 한다. 그를 짓누르는 투하자본의 증대와 일반적 이윤율의 끊임없는 저하경향을 탈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선택되는 소유권의 매각(관념적 소유증서인 주식의 매각)은 이처럼 신중하게 진행된다.
둘째: 주식회사와 더불어 나타나는 전체 주주들의 부르주아적 민주주의(1주1표주의)는 공동의지의 표현인 국가에도 반영된다. 주식회사에서 개인의 사적 탐욕을 위한 1인독재를 인정할 수 없듯이, 국가 인격화의 1인독재도 생산의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파생되는 내용들과 모순된다.
비록 한편으로는 상품생산이 표현하는 사회적 의식(대등성·자유의지·소유에 대한 관념 등)이 더욱 성숙하고 이러한 의식에 적합하지 않은 사회현상들이 불합리한 것으로 인식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과 자본에 대한 그들의 대항력이 성숙함에 따라 일방적인 독재가 불가능한 조건으로 점차 전환되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주아지들조차도 스스로 대의제적 민주주의를 절대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은 주식회사가 일반화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생산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되는 사회적 성격이 언제나 핵심적인 규정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미 국가의 인격적 담당자로 독재를 향유하던 개인 또는 세력이 생산의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행위양식들에 완강히 저항한다면, 이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것은 격렬한 계급갈등일 것이다.
셋째: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도 명백히 불합리한 자본과 임노동 관계에서의 낡은 계약관계들은 해소된다.
사적소유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계급의식과 자본에 대한 계급적 대항력이 미성숙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에 의한 일방적인 독재가 관철될 수 있기 때문에 각종 계약관계의 침해나 불합리성이 나타난다. 그러나 주식회사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사적소유자본주의를 반영하는 정치적·법률적 형태들의 급격한 변화를 수반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변화에 의해 지탱되는 노동자계급의 대항력을 제고함으로써 낡은 계약관계를 정정하고 완화할 수 있는 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며, 따라서 어떤 특정 국면에서는 자신들에게 더욱 유리한 계약관계를 관철시키기도 한다.
물론 주식회사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기에도 명백히 불합리한 낡은 관계를 청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컨대 거의 모든 상품의 가격은 그 상품의 판매자에 의해서 우선적으로 책정되고 수요와 공급에 따르는 시장가격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노동력이라는 독특한 상품에 대해서도 이것은 관철되어야 하며 또한 계급의식의 성숙에 따라 관철된다.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은 자본이 독점하고 있는 노동력의 가격과 관계된 거의 모든 사항들에 대한 결정권의 양도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측면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바로 경영참가운동(또는 공동결정제)이다. 또한 이러한 유형의 투쟁이 주식회사 자본주의의 형성과 더불어 비로소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발전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즉,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의 경험적 자기부정 과정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약관계가 현상적으로 합리적인 것으로 등장하더라도 적대적 모순이 소멸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적·집단적으로 터득하게 될 때만 비로소 노동자들은 적대적인 모순 그 자체를 강요하는 하나의 권력(즉, 자본의 권력)에 도전하려는 투쟁으로 옮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노동자들도 소유자의 일원으로 등장할 수 있게 된다. 주식은 판매를 기다리는 상품이며, 화폐를 소유한 어느 누구나 일정한 양의 화폐만 있으면 구매할 수 있다. 즉, 주식은 배당을 낳는다는 독특한 성격과 이자율과 기대수익율에 의해서 탄력적으로 운동하게 된다는 사실이 추가되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매혹적인 상품 중 하나로 등장한다. 유통영역에서는 단지 화폐의 소유자로 등장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이러한 주식의 구매는 매력적인 것이며, 이러한 자연발생성에 입각한 주식의 구매과정은 동시에 기업에 대한 공동소유자의 일원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이 된다. 그들 노동자들이 점차적으로 자신들이 결합한 기업의 소유권을 자연발생적으로 구매하는 현상들이 나타나며, 이러한 과정에 주목하여 정형화된 사회제도로 나타난 것이 바로 노동자소유제이다(여기서 특히 주목되어야 할 사실은 주식회사자본주의에서 비로소 노동자들이 기업을 소유해야한다는 사상이 자연발생적으로 싹틀 수 있다는 것이다!).
6) 레닌이 보았던 사회상태 - 주식회사 자본주의
'사실이란 고집스러운 것이며, 좋든 싫든 그것을 고려해야 한다. 사실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레닌), 레닌이 보았던 사회상태는 독점자본주의 또는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아니라 주식회사자본주의였다.
분명히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자신의 한계 내에서 세계적인 규모로 형태변환 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레닌은 여기까지만 옳았다.
그가 본 사회상태는 사적소유자본주의가 주식회사자본주의로 급격히 형태변환 되어 가는 시점이었을 뿐이다. 다만 주식의 분산화 정도가 아직도 낮았으며 인위적 독점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성숙하지 못했던 그런 시대였을 뿐이다.
주식회사는 종종 독점을 낳게 된다.
왜냐하면 경쟁의 영역에서 기본적인 원리는 경쟁자들이 모두 자신이 우월한 위치를 점하려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기본적인 원리는 주식회사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며, 또한 주식회사로의 전환 필연성은 투하자본의 증대와 이윤율의 저하에서 찾아진다는 점에서 기업의 주식회사로의 이행은 종전에 비해 훨씬 더 비대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기업규모의 비대화는 경쟁의 영역에서 훨씬 더 우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며, 만일 독점의 폐해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성숙하지 못했다면 독점적 지위를 누리기 위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독점의 폐해는 곧 상품소유자들 사이의 부등가 교환의 발생을 의미하며 이는 곧 자신들의 계약관계(공동의지의 표현)에 대한 침해가 되며, 따라서 공동의지의 표현의 응고물인 사회의 상부기구(국가)는 이들 상품소유자들의 계약관계를 조절하기 위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주식회사는 한편에서는 일정한 분야에서 독점을 낳고 이리하여 국가의 간섭을 불러 일으킨다.'
어쨌든 주식회사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규모로 성립되는 과정은 곧 대자본에 의한 독점의 충동을 더욱 용이하게 충족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되었으며,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 특히 콘체른(Konzern)과 같은 용어를 보편화시켰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관계는 레닌의 설명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즉, 우리가 만일 집중(concentration)과 중앙집적(centralization)의 법칙 작용에 따른 현상을 무시하고 레닌이 설명하고 있는 {제국주의론}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는 레닌이 명명하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주식회사라는 사실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몇 가지만 보자.
'미국의 유명한 석유 트러스트인 스탠더드 석유회사는 1900년에 설립되었다. '그 공식 자본금은 1억 5천만달러(?)였다. 그리고 1억달러의 보통주와 1억 6백만달러의 우선주가 발행되었다. 1900년부터 1907년까지 우선주에 지급된 배당은 각각 48, 48, 45, 44, 36, 40, 40, 40%였으며, 그 총액은 3억 6,700만달러에 달하고 있다. 1902년부터 1907년까지의 총 순익 8억 8,900만달러 가운데 6억 600만달러가 배당금으로 분배되고 나머지는 적립금으로 비축되었다.'(레닌 {제국주의론} p51 백산서당)
'이와 더불어, 은행과 거대 상공업 기업 사이에는 주식의 획득을 통하여 그리고 상공업 기업의 이사회(또는 감사회)에 은행이사를 임명하거나 모종의 인적 결합이 이루어진다.···1895년부터 1910년까지 이 6대 은행은 각기 수 백 개(281개부터 419개까지) 산업회사의 주식과 사채발행에 참여했다.'(레닌, 같은 책 p71)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업무를 감독하기 위해서는 주식의 40%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분산되어 있는 소수주주들의 상당한 부분은 사실상 주주총회 등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주식 소유를 민주화···한다거나 소규모 생산의 역할과 의미를 강화한다는 따위는 사실 금융과두제의 권력을 증강시키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레닌, 같은 책 p79)
여기서 {제국주의론}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레닌이 보았던 사회상태가 주식회사자본주의였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할 따름이다.
즉, 그가 보았던 사회상태는 이상의 인용으로도 충분하듯이 주식회사자본주의였을 뿐이며, 레닌은 바로 이와 같은 주식회사자본주의를 경쟁이나 독점과 같은 유통영역의 범주들을 끌어 들여 독점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피상적인 관찰에서는 당시의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 콘체른 등이 주식회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핵심적인 공통점이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또한 그것들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독점을 하건 또는 그 규모가 백만승이 되든 200만승이 되든 공통적으로 주식회사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고 있다.
하나의 본질적인 규정으로서 생산관계의 측면을 사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유통영역의 개념을 끌어 들여 자본주의 사회 내의 상이한 시대를 구분하고 있는 레닌을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어쨌든 경제적 시기를 구분하는 틀로 자본주의 사회 자체 내의 형태변환 과정을 볼 수 없었던 그리고 이행의 경로를 제시할 수 없었던 레닌이 끼친 폐해는 이론과 실천의 영역에서 엄청난 혼동을 유발했다. 주식회사를 형태변환 시켜야 한다는 과학적 관념 대신에 독점자본을 형태변환 시키자는 그릇된 관념이 지배적인 것이었으며, 독점자본을 어떻게 형태변환 시켜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국가소유라는 사변이 나열되었다. 생산수단은 노동자들 자신의 소유여야 한다는 과학적인 사상은 완전히 증발해 버렸던 것이다.
또한 레닌의 문제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던 것은 경쟁과 독점의 문제에서 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 즉 이미 생산된 잉여가치의 분배문제였다. 노동자들에게 수탈한 잉여가치를 누구(독점자본이 또는 외국의 독점자본이 또는 은행자본이) 더 많이 분배받는가의 문제!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다.
중소자본이 독점자본에게 수탈 당하고 있다.
초과이윤이 외국의 독점자본에게 약탈당하고 있다.
부등가 교환이 발생하고 있다.
···
그러나 잉여가치가 근본적으로 소멸할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레닌의 문제틀에서는 자라날 수 없었다. 즉, 주식회사를 어떻게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로 전환시킬 것인가, 그럼으로써 계급을 소멸시키고 생산과정 내에서의 잉여가치 착취를 폐지하고 협동과 연대의 원리가 자연발생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만들어 냄으로써 모두가 실질적으로 자유롭게 실질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는 사회상태를 열어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설자리가 없었다.
3. 20세기 정형화된 사회주의 사회 = 또 하나의 계급사회
레닌과 볼셰비키에 의한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의 찬탈(이른바 '10월 혁명') 및 그리고 이러한 반혁명을 통해 탄생한 신화가 붕괴하기 시작했을 때, 레닌을 옹호하던 지식인들의 반응은 조금 묘한 것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예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전개하던 사람들의 반응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특성론이나 경향론으로 명명하고 국유화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군의 붕괴를 관료주의나 스탈린주의적 좌편향으로 진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단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점에서 사회를 봐야 한다는 과학적 관점을 그들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부여잡은 낡은 세계관(특히 국유화의 전망)을 고수하려는 허망한 편견까지도 스며있는 것이었다.
사실상 모든 오류의 근원을 과학적 전제에서 찾고자 하는 진정한 '유물론적 변증법자'라면 '왜(Why), 어째서(How), 무엇 때문에(by What) 사회주의 국가군에서 관료주의나 스탈린주의적 좌편향이 파생될 수 있었으며, 생산력이 소진하는 모습을 보였는가' 하는 문제를 우선 제기했어야만 했고, 하나의 독특한 사회적 생산관계인 국가와 노동의 적대적 대립관계 및 이 관계의 형성의 전제인 국유화 문제를 자연스럽게 주목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러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그들이 부여잡은 낡은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고 고수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스탈린 등이 아니라 그들이 국유화를 시킨다면 이미 죽어버린 유기체가 갑자기 스스로 자신의 혈압과 맥박과 호흡을 반복적으로 꿈틀거리며 살아 고동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죽은 것은 그냥 죽은 것일 뿐이며, 붕괴는 그냥 붕괴일 뿐임에도...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오류를 답습할 이유는 없다.
첫째로, 분명한 사실관계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규정하는 하나의 독특한 생산관계(국가와 노동의 관계)의 형성의 전제인 '모든 공업의 국유화'는 레닌과 볼셰비키(특히 1918년 6월말의 국유화령)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또한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처럼 국유화를 추진한 배경에는 <국유화 테제>를 레닌과 볼셰비키가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 기타 경제외적 변수 등 무엇을 끄집어내어도, 레닌과 볼셰비키의 국유화실천은 정당화될 수 없고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이는 엄밀한 이론적 작업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정부였던 1871년 빠리 꼬뮌의 실천적 경험을 비교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즉, 포위된 빠리, 당시 그 절박한 상황(1917년 10월 레닌과 볼셰비키의 정권찬탈 이후의 상황보다 <더욱> 절박한 상황)에서도 노동계급의 위대한 영웅 빠리 꼬뮌은 노동자계급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사실 2차세계대전 후의 독일-프랑스나 일본 또는 해방 공간의 한국에서도 보듯이, 1871년 빠리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서도 노동자생산통제 또는 노동자공동소유 또는 노동자자주관리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운동형태에 대해 <노동계급의 영웅 빠리 꼬뮌>이 취했던 태도와 <레닌과 볼셰비키>가 취했던 태도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노동계급의 영웅 빠리 꼬뮌>은 그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의 자연발생적 운동을 지지하고 의식적으로 촉진시키고자 한 반면에, <레닌과 볼셰비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예컨대 레닌에게 '노동자 통제'는 한 낱 '전술적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거꾸로 '철도를 철도 종업원에게 무두질을 무두장이에게 넘겨주는 것같이 웃기는 짓은 없다'(레닌)고 공공연히 선언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자연발생적인 요구를 비웃었으며, 노골적인 트집과 직접적인 폭력의 위협하에 국유화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이상의 객관적인 사실관계들에 의해 촉발된 국유화된 사회가 일반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그 사회의 물적토대에 상응하는 사회적 행위양식일 수밖에 없음도 자명하다.
즉, 생산이 일단 자본과 임노동의 대립에 의해서 진행되기 시작하면 재생산도 동일하게 자본과 임노동의 대립을 매개로 운동하게 되듯이, 마찬가지로 생산이 일단 국가와 노동의 관계라는 두 대립물의 적대적 통일에 의해서 진행되고 이를 매개로 생산력을 급속히 발전시켜야 한다는 관념을 관철시키려 하자마자, '노동계급을 위해서'라는 모든 도덕적 선의는 구체적 현실에서 철저하게 전도되어 버렸으며,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파생되는 계급간의 적대성보다도 더욱 참담한 형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저자 토니 클리프의 설명이 유효할 것이다. 비록 그가 국가와 노동의 대립이라는 사회주의 사회의 가장 규정적인 요인을, 그리고 이러한 대립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형태들의 상호 관련성을,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회적 조건 위에서 인간들의 의식은 다양한 형태로 상호 의존하고 배제할 수 있을 뿐 항상 그 물질적 조건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과학적 관점을 잊고 있으며, 이러한 망각의 늪 속에서 자신이 비판하는 체제가 레닌과 볼셰비키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지만, 그의 사실에 근거한 설명은 생산력의 측면에서 대공업과 생산관계의 측면에서 국가와 노동의 관계를 기초로한 사회가 어떻게 형태변환 되어 갔는가를 특징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혁명 직후, 모든 공장의 경영권을 노동조합의 수중으로 옮긴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8차 당대회(1919년 3월 18∼23일)에 채택된 러시아 공산당 강령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조직된 사회적 생산기구는 우선적으로 노동조합에 의존해야 한다.···노동조합은 거대한 생산단위로 전화되어 노동자의 다수를, 그리고 때가 되면 모든 생산분야에 등록시켜야 한다.
노동조합이 이미(소비에트 공화국의 법에서 명시되고 실천 속에서 인지된 바와 같이) 산업을 관리하는 모든 지방과 중앙기관의 참여자인 한, 노동조합은 나라의 경제생활 전체에 대한 관리업무를 그들 자신의 수중에 실제로 집중시켜야 하며, 이것을 그들의 통일된 경제적 목표로 만들어야 한다. 이와 같이 중앙 국가당국과 국민경제와 광범한 노동자 대중 사이의 확고한 결합을 지켜내어, 노동조합은 가능한 가장 완전한 정도로 노동자들의 경제관리 업무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
당세포는 노동자 공장위원회와 함께 산업경영에 참여했다. 전문경영자는 이들과 함께, 그리고 이들의 통제하에 일했다. 이 3자의 결합이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당과 노동조합에서 관료제가 강화되는 것과 함께 트로이카는 점점 더 이름 뿐인 것으로 되어 갔고 점차 노동자 대중의 위로 올라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5개년 계획이 도래할 때까지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압력에 매어 있었고, 노동자 통제의 요소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
·······
거대한 공업화 드라이브와 함께 트로이카 체제는 더 이상 용인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존재 자체가 자본축적의 필요에 노동자들을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을 방해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28년 2월에 최고 경제평의회는 [공업기업의 행정·기술·경영담당자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기본 법규]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를 공표했는데, 이것은 트로이카 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경영자에 의한 완전하고 무제약적인 통제권을 확보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1929년 9월, 당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노동자 위원회는 '공장의 경영에 직접 관여하거나 또는 어떤 식으로든 공장 경영진을 대신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모든 수단을 다해 1인 관리를 확보하고, 생산과 공장 발전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물질적 조건 개선에 일조해야 한다.' 경영자가 공장의 완전하고 유일한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모든 경제적 명령은 이제 '그에게 종속된 경영부서원들과 모든 노동자들에게 무조건 구속력 있는'것이 될 것이다. 등등···'(토니 클리프, {소련국가자본주의} p27∼29, 정성진 옮김)
이상의 인용구가 충분히 말해 주고 있듯이, 생산과정에서의 철저한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생산의 물질적 조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비록 토니 클리프가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이유를 '스탈린주의 관료'의 문제로 보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기본적인 관점(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점)에서는 토니 클리프와 같은 환상은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의식이란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속에서 상호 의존하고 배제할 수 있을 뿐이다. 주어진 물적 토대로서 모든 공업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이러한 국유화를 매개로 한 실천은 인간의 도덕적 선의와는 무관한 계급적대를 현상에서도 명백히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는 (스탈린의 선행자였던)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미 만들어낸 사회적 조건이 계급적대를 필연적으로 파생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 그 역의 경우는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의 계급으로서의 위치를 폐지할 수 있는 경제적 해방의 물질적 조건을 역사의 무덤 속에 묻어 버리고 현대적 프롤레타리아 노예제를 위한 물질적 조건을 창출했던 것은 레닌과 볼셰비키였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전도된 생산관계로부터 노동자들의 파업과 파업에 대한 전면적인 금지, 각종의 가혹한 법률의 도입과 노동자의 법적 자유에 대한 일체의 부정, 강제노동, 여성노동에 대한 파렴치한 착취, 빈곤의 강요, 거대한 규모의 군산복합체의 형성(이는 내적 요인뿐만 아니라 대외관계도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 결과다), 농민에 대한 파괴적인 수탈 등이 파생되어 나올 수 있었다.
자본이 피와 오물을 흘리며 세상의 전면에 등장했듯이, 모든 공업의 생산수단을 국가에 집중시킴으로써 노동을 국가에 종속시킨 사회주의적 생산양식(국가주의적 생산양식)은 인간들의 모든 도덕적 선의를 전복시켜 버렸다. 지옥으로 가는 길도 도덕적인 선의로 가득 채워져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간략히 요약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전면을 지배하는 것이 자본인 것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정형화된 사회주의 사회의 전면을 지배했던 것은 국가였다.
사회의 적대적 성격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국가가 사회의 전면을 지배함으로써 국가기구의 인격적 담당자에 대한 우상화, 관료주의, 노동에 대한 파렴치한 지배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 역은 아니었다. 더구나 자본주의와는 또 다른 유형의 계급사회(즉, 20세기 정형화된 사회주의 사회)의 참극은 이상으로 끝나지 않았다. 국가와 노동의 관계에 기초한 사회의 성립은 곧 어느 한 쪽이 패배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서는 도무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적대적 생산유기체의 극단적인 대립(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괴물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이어졌고, 이는 인류가 지구상 그 어떤 곳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목전에서 실증하듯 거대한 규모의 군산복합체와 상비군체제의 형성, 가공할만한 전쟁과 심지어 핵전쟁의 가능성들을 물질적으로 충족시켜 놓기까지 했다. 여기에 덧붙여 한편에선 자본주의 사회의 비판을 통한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 모순에 대한 옹호가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서 반공이데올로그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 의한 전체주의 과잉비판과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각종 적대적 모순들에 대한 신랄한 비난 및 자본주의 사회의 적대적 모순에 대한 옹호가 있었다. 서로의 체제를 비판·비난하는 일이 손쉬운 일이었기에 서로의 체제를 옹호하는 일도 손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가진 치명적인 결함들을 서로가 가지지 않고 있음을 강변하거나 서로가 가진 긍정적인 요소들을 포장하거나 하는 일은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불행한 일은 두 극단의 통일이 고통받는 계급들의 파멸적인 삶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양체제의 지배계급들은 낡은 소유 및 생산관계를 제거하고자 노력하기는커녕, 낡은 소유 및 생산관계의 적대적 모순들을 가능한 공공연하게 유지하려 했으며, 잔인한 역사의 퇴행을 강요하고 또 강요했다.
4. 이행의 강력한 수단, 국가와 신용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연합된 노동의 생산양식으로 이행해 가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필연이다. 비록 자본이 자기 증식할 수 있는 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생산력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존재하며 계속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태내에서 성숙하는 노동자 계급은 그 경험적 자기부정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착취당하지 않으려는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일방적으로 사용 당하지 않으려는 자연발생적인 운동을 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운동은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및 이의 법률적 표현인 소유관계를 발전적으로 해소함으로써 착취당하지 않을 지배당하지 않을 일방적으로 사용 당하지 않을 사회적 관계를 창조해 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의 경험적 자기부정 과정에 내맡겨 두는 경우 노동자 계급이 경제적으로 해방된 사회로의 이행은 오직 점진적으로만 진행될 수 있을 뿐이며, 또한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독점을 지키고 영구화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경제적 특권뿐만 아니라 이를 기초로 손쉽게 획득한 정치적 특권까지 언제나 이용하는 현실적 사정은 이러한 점진적 진행조차도 어렵게 하며 심지어 정체나 또는 끊임없는 퇴행을 강요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현실적 조건에서 하나의 사회적 필연성인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할 것인가? 일반적인 해답은 분명하다.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들의 경제적 특권에 끊임없이 도전해야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 정치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부르주아들의 정치적 특권을 폐지하고 이렇게 장악한 정치권력을 활용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해방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행에서 노동자계급이 장악한 국가의 가장 일반적인 역할을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을 촉진하기 위한 하나의 강력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이다. 또한 이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군사·관료기구가 걸림돌이 된다면 이를 타파해야 하며 구태의연한 법적·제도적 형태가 있다면 폐지하거나 개선할 필요가 있으며, 이행을 촉진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면 만들어야 하며, 기타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다면 판단을 해야한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들의 경제적 특권을 폐지하고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이익을 궁극적인 지점까지 관철시켜 가는 것, 따라서 노동계급의 정부(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서의 역할이 이행에서의 국가의 역할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사정도 분명하다. 즉,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이익을 궁극적인 지점까지 관철시켜 가기는커녕 기존의 계급질서를 유지하려 하거나 또는 자본과 임노동 관계를 새로운 형태의 계급적 적대관계로 대체할 뿐이라면, 이 때의 정부가 어떤 주장을 했건 또는 그 정부의 구성원들이 누구이건 또는 군사·관료기구를 타파했나 그렇지 않았나를 막론하고 노동계급의 정부일 수도 없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일 수도 없다.
이상의 일반적인 해답으로부터 크게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
둘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특히 주식회사자본주의에서는 주식회사)을 어떻게 연합된 노동의 생산양식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또는 '주식회사(또는 자본주의적 기업)를 어떻게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로 전환시킬 것인가'?
셋째: 연합된 노동의 생산양식으로 전환시킬 때 국가기구는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첫째: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
이에 대해 정치경제학의 제공하는 일반적인 해답은 노동자계급의 보유한 가장 기초적인 정치적 권력(즉, 보통선거권)을 집중시켜내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할수록 상품생산이 일반화되며, 이러한 경제적 조건이 직접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기본적인 것 중의 하나는 모든 상품의 판매자와 구매자들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의식이고 그리고 이러한 의식이 정치적으로 표현되고 성숙된 형태가 1인1표주의에 기초한 정치적 절차이며, 따라서 사회구성원들은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절차에 따라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타당하고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한 마디로, 국민주권에 기초한 국가통치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요구하는 국가의 통치양식이다). 결국 사회와 더불어 사회 속에서 운동하는 노동자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으며, 이 경우 가능한 방법이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과 더불어 그들이 보유하게된 가장 기초적인 정치적 권력인 보통선거권을 집중시켜내는 것이다(물론 이와 같은 일반적인 해답은 기존 정치권력의 폭력적 타도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성원 다수가 인정할 수 없는 부당한 권력이 성립되었을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인데, 예컨대 1871년의 빠리 꼬뮌의 성립이나 식민지 권력을 타도하기 위한 투쟁 등이 그러하다).
또한 이러한 일반적인 해답은 다시 세부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이 보유하게 된 가장 기초적인 정치적 권력인 보통선거권을 어떻게 집중시켜 낼 것인가(즉, 어떻게 그들의 정치적 신뢰와 지지를 끌어 낼 것인가의 문제), 집중의 주체는 어떻게 형성해 낼 것인가(노동의 정치를 위한 조직/정당의 문제) 등등.
둘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특히 주식회사자본주의에서는 주식회사)을 어떻게 연합된 노동의 생산양식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또는 '주식회사(또는 자본주의적 기업)를 어떻게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로 전환시킬 것인가?'
이 문제의 핵심은 자본가들이 갖고 있는 소유권을 어떻게 연합된 생산자들의 것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이며,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하나는 소유권을 몰수하는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연합된 생산자들이 소유권을 구매하는 방법이다.
우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권 몰수 방법(국가적 강제나 또는 생디칼리스트들이 취했던 방법으로 공장을 폭력적으로 접수하는 방법)은 특별한 사정이 발생하지 않는 한 거의 적용 불가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 방법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자본가들이 갖고 있는 소유권이 자본주의적 관념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구성원들에 대해서도 부당한 방법에 의해 획득한 것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특정한 조건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적용할 수 없다.
연합된 생산자들이 소유권을 구매하는 방법은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고 성숙시킨 하나의 원칙, 즉 등가교환의 원칙(주는 것만큼 받는다는 원칙)에 따라 소유권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조건에서 '일반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여기에서도 '소유권 확보를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데 이를 어떻게 조달할 수 있는가' 하는 곤란한 문제가 제기된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답은 무엇인가? 아마도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의 해답은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면 충분할 듯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연합된 노동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과정에서 신용제도가 강력한 지렛대로 역할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셋째: 연합된 노동의 생산양식으로 전환시킬 때 국가기구는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노동계급의 정부가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해방을 촉진하는 과정은 곧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및 이의 법률적 표현인 소유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과정이며, 따라서 이는 경제적 생활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국가의 경제개입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노동계급의 정부에 의한 국가의 경제개입'은 이른바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국공유부문의 확장 등을 위한 경제개입 행위가 아니며, 또는 케인즈주의적 견해에 기초한 경제개입 행위도 아니며, '국가에 의한 경제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떠들면서도 정작 자본의 편의에 맞게 국가가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개입 행위도 아니다.
또한 경제적 생활과정에 대한 국가의 경제개입행위와 국가가 직접 생산을 통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사정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경제개입이 국가의 본질적 속성(적대적 공동체 내·외부의 공적업무를 담당하는 속성과 국가와 국민대중 사이의 대립으로부터 발생하는 특수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속성)의 발현에 따르는 필연적인 현상인 반면에, 국가가 생산을 통제한다는 것은 국가가 개별생산 또는 국가내의 전체 생산에 대한 소유·경영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정부에 의한 국가의 경제개입의 확대는 결코 국가가 생산과 분배의 주체 또는 소유·경영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국가의 본질적 속성 중에서 적대적 공동체의 공적업무를 담당한다는 속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연합된 노동의 생산관계로 재편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한 마디로, 국가의 경제개입의 방향성이 신자유주의자나 케인즈주의자들 파시스트나 이른바 국유화를 꿈꾸는 자(국가주의자)들과 명확히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활용하여 자본주의적 기업을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으로 전환하면 국가기구는 어떻게 변화할까?
우선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은 노동자공동소유와 직접 민주주주의 원칙에 따른 노동자자율경영 및 생산의 성과를 전체 노동자들이 자율적으로 분배할 것이기 때문에, 기업 내부에 적대적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반영하는 법률적 표현, 즉 노동관계법이나 그 기구들, 주식 등과 관련된 법률과 그 기구들, 또는 파생된 법률들과 그 기구들 등등은 불필요하며 소멸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상으로부터 분명히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산물이며 물질적 생활관계에 뿌리하고 있는 국가는 그 존립근거가 해소되면서 소멸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과도기의 국가, 스스로 자신의 존립근거인 경제적 생활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면서 소멸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는 국가, 이것이 지구적으로 진행될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화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정부(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다.
5. 한국 자본주의 전개
한국 자본주의도 사적소유자본주의 단계에서 특히 80년대 산업순환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주의 '최고·최후의 발전단계'인 주식회사자본주의로 완전히 이행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또한 한국의 노동운동은 97∼98년 한국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국면에 직면하여 바로 이 주식회사자본주의의 물적토대 위에서 전혀 새로운 요구(소유경영참가와 노동자기업인수)를 제기하기 시작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한국자본주의 생성 및 발전과정에는 간과될 수 없는 몇 가지 특수한 측면이 있다.
첫째: 한반도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의 강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즉, 조선을 강점한 식민지 통치권력에 의해 전자본주의적 관계의 폭력적인 해체와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식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토지조사사업(1911∼1918) 및 1930년대 공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권의 확립 및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정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물론 한반도에서의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이 식민지 조선사회의 성격을 완성된 자본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식민지 조선사회는 특히 식민지 통치권력에 의해 조선사회에 형성되어있던 독특한 전자본주의적 관계들이 폭력적으로 해체되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하기 시작한 과도기 사회였을 뿐이다.
둘째: 한국자본주의 생성사에서 시초축적(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시기를 포함하는 해방후 미군정기)의 대부분(전자본주의적 관계들의 폭력적인 해체, 프롤레타리아의 광범위한 형성,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의 축적, 사적소유권의 확립 등)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요구하는 국민(인민) 주권에 기초한 국가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셋째: 해방과 더불어 미소 등에 의해 주도된 분단 그리고 이어 발생한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두 개의 주권국가(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와 두 개의 적대적 생산유기체를 고착화시키고 적대적으로 상호 작용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는 특히 한국 자본주의에서 노동·사회운동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 동질적인 사회구성체에 기초한 하나의 통일국가 수립의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할 수밖에 없게 하는 역사적 조건이 되었다.
6. 보론: 현재 한국 사회는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인가?, 계급론의 결함 등
우선 정치적으로 한국 사회를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1948년 인민주권에 기초한 국가가 성립된 이후, 박정희 군부가 등장하면서 인민주권을 부정한 시기가 있었을 뿐 주권국가로서의 기본적인 체제가 유지되어왔기 때문이다. 비록 체제대립과 한국전쟁의 산물로 군사작전권, 한미행정협정, 미군의 주둔 등 부분적으로 주권을 포기한 측면이 있으나, 이 정도 수준을 가지고 주권국가가 아닌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라고 규정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한국전쟁 후 한국 자본주의는 거의 독자적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서 미국·일본자본주의(수출입 시장)에 대한 의존성 같은 것들도 그 기본적인 골격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법칙들을 가지고 설명되어야할 성질의 것(예컨대 자본주의적 생산은 기본적으로 세계시장을 필요로 하며, 한국 자본주의는 성장과정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두 개의 발전된 시장 - 미국·일본의 자본주의 시장 - 에 불가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등)이지,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라는 범주를 가지고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끝으로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의에서 또 하나의 치명적인 결함은 체계적인 계급론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예컨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3대 계급(산업자본가 계급, 토지자본가 계급, 임금노동자 계급) 중에서 건축지 지대 등을 기초로 광범위하게 재생산되는 토지자본가 계급에 대한 이해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과거 사회구성체 논의에선 임금노동자계급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면 계급·계층분석에서 초보적인 진전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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