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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랑,문화시민 스크랩 도동서원(道東書院) 답사
김상경 추천 0 조회 195 14.08.29 10: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도동서원(道東書院) 답사

 

바람도 쉬어가는 다람재 표석

도동서원 가는 길 다람재 표석에서 약 1.2km 내려가면 도동서원이다.

 

다람재에서 본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 자락에 세워져있는 도동서원

 

다람재에서 내려다 본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조선시대 유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으로

소수서원, 병산서원, 도산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 중 하나다.

고종 때 대원권의 서원 철폐령에도 보존된 47개 서원 중 하나로 선조 1년에 쌍계서원에서

현풍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뒤 선조 37년에 보로동 서원이란

이름으로 지금 이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으며, 광해군 2년에 도동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도동이라는 의미는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람재 옆에 세워진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시비(寒暄堂 金宏弼 先生 詩)

 

路傍松 길가의 소나무

處獨居閑絶往還(처독거한절왕환) 한가로이 홀로 살아오고 감이 끊어지니

只呼明月照孤寒(지호명월조고한) 밝은 달을 불러와 외로운 나를 비추네!

憑君莫問生涯事(빙군막문생애사) 그대여 생애 일이 어떠한지 묻지 마오!

萬頃烟波數疊山(만경연파수첩산) 넓은 바다 안개 낀 물결 첩첩한 산들이 가득하니라!

書懷(서회) 김굉필

 

도동서원(사적 제488호) 안내문

도동서원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인 강학과 제사가 이뤄진 장소로, 조선 성리학의

정수를 배울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공립학교였던 향교와 달리 서원은 오늘날의

사립학교나 대안학교와 비슷하다. 인재를 키우고 선현에게 제향을 지내는 사설기관이다.

운영 주체가 다른 만큼 두 기관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우선 향교에서는 교육의 목적이

과거 준비였던 반면, 서원에서는 학문을 배우고 토론하는 데 치중했다.

또한 향교는 대부분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중심지에 건립됐으나,

서원은 인적이 드물고 풍광이 수려한 장소를 택해 세워졌다.

제사 대상도 향교는 공자와 그의 제자이며, 서원은 우리나라의 학자로 서로 상이(相異)하다고 한다.

 

도동서원 배치도

달성 도동서원은 사적 제 488호로 도동서원 강당 및 사당 담당은 보물 제35호 지정 되었으며,

또한 2014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신청 중에 있다.

 

 도동서원 수월루 앞 김굉필 나무

가지를 옆으로 늘어뜨린 노거수로, 수령이 약 400년이며,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가 심었다고 하며, 이 은행나무는 김굉필 나무라 불린다.

 

文敬公 寒暄堂 金宏弼碑

김굉필(金宏弼)은 뉘구?

문경공 한훤당(文敬公 寒暄堂)김굉필은 454년 한성에서 태어나 1504년 세상을 뜬

성리학자로 27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정6품 형조좌랑 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갑자사화 때 억울하게 숨졌지만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된다.

김굉필은 21세 때 당대의 석학 김종직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그에게 있어서 유학은

마음을 수양하고 몸을 가다듬는데 필요한 학문이었다.

그는 유학이 정치의 도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도학(道學)의 전통은 길재에 그 뿌리를 둔다.

그러나 김종직에 이르러 꽃을 피웠고 김굉필에 의해서 집대성되었다고 한다.

 

이 비는 조선시대 유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려 세워졌다.

 

1970년대에 복원한 수월루(水月樓)

조선 말기에 서원을 증축하면서 새로이 세운 정문으로 누마루에 오르면 굽이치는

낙동강과 은행나무가 내려다보이며, 시간이 멈춘 듯한 정경이 인상적이다.

 

환주문(喚主門)

수월루를 통과하면 진정한 대문인 환주문(喚主門)이다.

'마음의 근본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인데, 정문치고는 너무 작고 좁다.

한 명씩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데 스승에게 자연스럽게

존경의 인사를 하도록 설계한 것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환주문(喚主門)과 토담(울타리)

1963년 아름다운 토담은 전국 최초로 보물(제350호)로 지정된 곳이다.

돌담이 아름다운 환주문을 지나면 선비들이 공부를 하던 영역으로 정면에는 중정당(中正堂)

좌우에는 유생들이 머물던 기숙사인 거의재(居義齋)와 거인재(居仁齋)가 있다.

 

환주문에서 본 중정당(中正堂) 보물 제350호

도동서원의 중정당은 강학이 이뤄지던 장소로 웅장한 목조 건축물로 기품이 느껴진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보면 이 건물이 북향으로 지어졌다.

김굉필을 기리는 서원은 본래 1568년 도동서원 인근의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하며, 흥선대원군이 중앙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원 대부분을 철폐했을 때도 훼철되지 않을 만큼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도동서원이 건축물은 숨어있는 그림 찾듯 곳곳에 이색적인 것들이 많다,

지붕의 기와 한 장, 기단에 쓰인 돌덩어리 하나에도 의미가 배어 있다.

 

 전국각지에서 유학온 유생들이 가지고 온돌들로 기단을 쌓았으며 거북모양 기단석과

네 마리 용머리 모양이 기단에 박혀져 신비감을 더한다.

이 용머리 모양 기단석은 한 개만이 진품이고 나머지 3개는 분실되어 복재되었다고 한다.

 

용머리 조각상(진품)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들을 끼워 맞춘 기단에는 용머리 조각상 4개가 튀어 나와 있다.

동강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의 신인용을 집어넣은 것이라고 한다.

 

 형태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기단석

전국의 유생들이 하나씩 들고와 기단을 쌓다보니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다.

 

기단석 새호(細弧)라 불리는 는 다람쥐 모양이 문양

석축을 자세히 보면 새호(細弧)라 불리는 다람쥐 모양과 꽃 한송이가 피어있는 조각이 보인다.

올라가는 왼쪽계단 쪽은 머리가 위를 향해있고 내려오는 오른쪽 계단쪽은 머리가 아래를 향해 있는데,

석공의 해학과 미학을 엿 볼 수 있다.

 

1604년 선조가 사액(賜額)한 현판인 ‘道東書院(도동서원)’이 강당에 걸려 있다.

아래에 있는 ‘中正堂(중정당)’은 강당 이름이다.

 

강당 안에는 다양한 현판

 

강당 안에는 다양한 현판이 걸려 있는데, 내용이 흥미롭다.

삼강오륜 같은 유교 윤리, 조선의 왕과 왕비의 묘호와 능호 등이 새겨져 있다.

또 단청이 없는 지붕 아래에는 '도동서원'이라고 적힌 커다란 편액이 두 개나 달려 있다.

 

중정당에서 본 환주문과 수월루

 

 기단아래 거북이 머리 龜頭石

 

거의재에본 환주문과 거인재 뒤로 보이는 대니산

 

유생들이 머물던 기숙사인 거인재(居仁齋)

 

유생들이 머물던 기숙사인 거의재(居義齋)

 

내삼문(內三門) 보물 제350호

중정당 뒤편의 계단을 오르면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가 세 개 있는 내삼문(內三門)이 나온다.

그 안쪽은 제향 영역으로,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이 있다.

사당에서는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내삼문 계단 조각

 

내삼문 계단 조각

  

굳게 잠겨있는 내삼문(內三門) 문 틈으로 보이는 사당의 석등

 

내삼문 기단 아래 예전에 사용되던 '우물'이라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었다.

 

 

사당(祠堂) 보물 제350호

 

사당(祠堂) 뒷편에서 본 모습

 

대니골 충효 산책로 안내도

 

대니골 충효 산책로

대니산 등산로를 따라 한훤당 묘소를 지나 석분산성과 정수암으로 이어지는 대니골 충효 산책로

 

수월루에서 보이는 장정 다섯명이 끌어안아야 둘레를 잴 수 있는 400년된 은행나무

 

구지하얀가람길 안내도

 

구지하얀가람길에서 본 낙동강

도동서원을 기점으로 자리잡은 대니골 마을은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뒤로는 대니산을 품은

아름다운 도동마을 구지하얀가람길 도동나루, 자연배움터, 수달습지, 청보리뜰 등으로 이어진다.

답사일정상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을 낙동강 풍경을 대신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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