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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주(旦州) 류림/유림(柳林, 1894-1961) 생애와 연관 인물들
2022, 12, 29. 임시작성.
# 단주(旦州) 류림/유림(柳林, 1894-1961) 연보
1898 선생의 관향(貫鄕)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단주(旦洲)이다. 1898년 5월 3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북면 계곡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화영(柳華永)
아버지는 은사 이흠공(隱士 頤欽公)이다. 조선조 세종(朝鮮朝 世宗) 집현전 학사(集賢殿 學士) 도승지(都承旨) 의손(義孫)의 후예이며, 삼산공(三山公) 대사간(大司諫) 정원(正源)의 현손(玄孫)이다.
어머니는 김녕 김씨부인 김성옥(金寧金氏夫人 金性玉)이다. 단종충신(端宗忠臣) 충의공 문기(忠毅公 文起)의 후예이며, 증 통정대부 대응파(贈通政大夫 大凝派) 종손(宗孫) 성규(成圭)의 여식(女息)이다.
1910년 협동학교(協東學校) 수학 중 한일합병이 되자,「忠君愛國(충군애국)」네 글자를 손가락을 끊어 혈서(血書)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의하였다. 고성 이씨 부인 이난이(固城李氏夫人 李蘭伊)와 혼인하였다.
1915년 정진탁(鄭振鐸) 등과 대구를 중심으로 각지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흥회(復興會)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도모하던 중,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7년 김용하(金容河) 등과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뜻을 둔 청년들의 모집에 힘쓰다가,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8년 독립운동전선의 고양을 위하여 동지들과 대규모의 암살 파괴를 계획하였다.
1919년 3·1독립선언 선포에 사전부터 협력하였고 운동이 개시되자 이운형(李運衡) 등과 함께 가담했으며, 제령위반(制令違反)죄로 쫓기자 준비된 계획에 따라 군사력 확보를 위하여 만주로 탈출하였다. 이상용(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등과 협의하여 서로군정서특파원(西路軍政暑特派員)으로 두 차례 비밀리에 입국하였다가, 봉천에서 일경에게 구금되었다.
1920년 북경에서 신채호(申采浩), 남형우(南亨祐) 등과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에 노력하였으며,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데 힘썼다.
1921년 북경에서 신채호(申采浩), 김창숙(金昌淑), 김정묵(金正墨), 남형우(南亨祐) 등과 순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해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담하였다. 중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독립운동의 실상을 널리 알렸고, 상해에서 망명한 각국 혁명자들과 교류하며 혁명이론을 연마하였다. 사천성 성도에서는 작가 파금(巴金 1904-2005)에게 에스페란토어를 강의하였으며, 에스페란토어의 보급에 힘썼다.
1922년 상해에서 김두봉(金枓奉) 등과 ‘깁더조선말본’을 저술하여 한글운동에 앞장섰다.
중화민국 국립성도고등사범학교 영문부(中華民國 國立成都高等師範學校 英文部)에 입학하였다. - 중국이름 고상진(高尙眞)으로 사용했다.
1925년 중화민국 국립성도대학 사범부 문과(中華民國 國立成都大學 師範部 文科)를 졸업하였다. 광동에서 김원봉(金元鳳) 등과 한인청년연맹(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 양성에 노력하였다. 상해에서 민중사(民衆社)를 조직해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널리 계몽하였다. 이때 대구에서 신재모(申宰模), 방한상(方漢相) 등이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하자, 방한상(方漢相)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고 폭탄 및 무기 반입을 추진하는 등 아나키즘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1926년 상해에서 홍진(洪震) 등과 독립운동 진영의 규합에 노력했으며, 봉천에서 중국 국민당원들과 한중혁명 세력의 연대를 꾀하였다. 광동, 상해, 남경, 무한 등지에서 중국 국민당 좌파의 아나키스트 원로들 및 진독수(陳獨秀), 진형명(陳炯明) 등 혁명가들과 교류 연대하였다. 광동기계공인총동맹(廣東機械工人總同盟)[생디칼리슴]을 통해 십만 노동자를 조직 지도하고, 홍콩과 광주의 대규모 노동자 봉기인 광동의거에 참여하였다.
1927년 3월 하순경 독립운동전반의 기본문제 및 당면과제에 관하여 김좌진과 격론을 벌리면서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 무정부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27년 무한에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모색하다가 한구 영조계 회수투쟁에 참여하였다. 북경대학총장 채원배(蔡元培), 양계초(梁啓超), 임서(林序) 등 개혁사상가들과 조선의 독립 및 중국의 정세에 대한 방략을 토론하며 연대하였다. 이청천(李靑天) 등과 더불어 중국인 유격부대와 합작하여 독립군의 강화에 노력하다가, 봉천에서 일경에 구금되었다.
1928년 길림에서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韓族勞動黨 中央執行委員)으로 피선되었다. 김동삼(金東三) 등과 정의부(正義府)에 참가하여 교육사무를 담당하였다. 길림에서 여준(呂準), 이탁(李卓) 등과 재만한인교육회(在滿韓人敎育會)를 조직해 교과서 편찬, 교원양성 사무를 담당하였다. 길림 오상현에서 한인의 권익을 위하여 중국 관헌과 항쟁하던 중 중국 경찰에 구금되었다.
1929년 김동삼(金東三), 김좌진(金佐鎭) 등과 재만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에 노력하였다. 북만주 해림에서 김좌진(金佐鎭)과 독립운동 방략에 관해 토론하며, 민족진영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침투를 막기 위해 무정부주의 사상으로 무장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후 길림으로 되돌아와, 중국 관헌의 한인 압박에 항쟁하다가 영안현에서 중국 경찰에 구금되었다. 11월 10일과 11일 평양에서 개최될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 주최,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에 참석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왔다. 수차례 회합 끝에 이홍근(李弘根), 최갑용(崔甲龍) 등과 11월 1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고 본부 및 만주부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동 연맹은 만주를 군사훈련장으로 결정하였다. 단주는 11월 7일 평양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30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1930년 1월 24일 김좌진, 1931년 7월 김야운과 이준근, 8월 26일 김종진이 각각 암살 – 왜?]
1930년 만주의 봉천에 독립운동 간부 양성을 위하여 의성숙(義誠塾)을 설립하였다. 국내에서 20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고 교육을 시켜, 중국의 여러 학교에 배치하다가 일경에 구금되었다. 이 무렵 아나키즘 노동운동을 재건하고 국내 연락을 위해 남상옥(南相沃)을 원산으로 파견하였다. [야체이카의 성립이 경주 월성, 안동 영주, 충청도, 그리고 제주도에도 있었고 원산에도 있었다고 한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중국인들과 함께 한중인민항일군을 조직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 일제 치하 최초이자 최후의 아나키스트 전국 조직이었던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은 1931년 7월 원산지역 노동운동 재건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전모가 드러났다. 결국 유림을 비롯한 주모자들이 모두 검거되었다. (박정희, 2020학위논문, 87)
1933년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사건 판결문: - 이홍근(李弘根) 28세, 유화영(柳華永) 34세, 최갑룡(崔甲龍) 30세, 조중복(趙重福) 32세, 강창기(姜昌璣) 21세, 한용기(韓容基) 24세. - 柳林이라는 이름은 1933년의 이 판결에서 처음 등장.
[중국은 1936년 12월 12일의 서안사변 이후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將介石과 延安의 毛澤東이 합작으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1937년 치안유지법 제1조 위반으로 서대문, 원산, 함흥 등의 감옥을 거쳐 대전에서 징역 5년을 만기 출옥한 다음, 만주로 탈출하였다. 가택 수색을 당한 뒤 구류 처분을 받은 시점부터 만기 출소까지 만 6년 이상 구금되었다.
1938년 남북만주를 순회하며 독립운동 세력의 재편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0년 북경, 천진 등지에 체류하면서 중국인들과 함께 한중항일연합군 조직을 도모하였다.
1941년 일본군이 천진의 각국 조계를 점령하자 천진을 탈출하였다.
1942년 국민정부 제3전구사령부에 체류하며 한국독립군 원조 문제를 토의했다. ‘일개민족(一個民族) 일개정부(一個政府), 일개이념(一個理念) 일개집단(一個集團)’, ‘당파 합동연이(黨派 合同聯異), 정부 공대균담(政府 共戴均擔)’의 사상을 전개하고,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를 중심으로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총결집을 위해 노력하였다.
- 유림이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1929, 11월 평양)을, 1942년 10월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이하 조선무총)으로 개칭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원(大韓民國 臨時政府 議政院議員)으로 피선되어, 환국할 때까지 가장 많은 의원입법안을 제안 통과시켰다.
1943년 대한민국 임시헌장 수개초안 작성위원(大韓民國 臨時憲章 修改草案 作成委員)으로 피선되었다.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종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大韓民國 臨時憲章)과 그 전문(前文, 머리말)을 입법 제안하여 통과시켰다. 4월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을 대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務委員)으로 피선되었으며, 관제수개 기초위원(官制修改 起草委員)으로 피선되어 새로 제정된 헌법에 의한 관제를 설정 수립하였다. 대한민국 건국강령 수개위원(大韓民國 建國綱領 修改委員)으로 피선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 건국강령 기초위원(大韓民國 建國綱領 起草委員)과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大韓民國 憲法 起草委員)으로 피선되었다. 8월 9일 일본의 항복을 예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해서 중국 중앙방송국을 통해 국내 동포들에게 질서유지, 연합국에 대한 편의 제공, 임시정부 환국 대비 등을 방송하였다. 일본의 항복 후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연립 5개 당파 중 3개 당파가 환국하기 전에 임시정부를 해산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위기 상황이 전개되자, 아나키즘 진영인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朝鮮無政府主義者總聯盟)의 대표로서, 3·1운동에 의해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강조하며 끝까지 옹호 유지하였다.
8월 10일 당면정책 기초위원(當面政策 起草委員)으로 피선되어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임시정부의 당면정책 14개 항을 집필하여 의정원에 제출했다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으로 귀국하였다.
“나의 理想은 强制權力을 排擊하고 全民族, 나아가서는 全人類가 最大限의 民主主義 하에서 다같이 勞動하고 다같이 自由롭게 思想하는 世界를 창조하는 데 있다. (= 나의 이상은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아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 하에서 다같이 노동하고 다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귀국전야.
1945년 12월 22일 서울 태고사에서 ‘작고 동지 추도회’를 갖고, ... 1945년 9월 말 경에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1946년 2월 1일 오전 10시 시내 천주교회 대강당에서 90여 단체 대표자들과 각도 5명씩 지방대표, 저명 민중지도자 등 201명 초청에 167명 참석하여 비상국민회의가 개막되었다. .. 미상국민회의 대의원 중에 저명한 민중 지도자로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권동진, 오세창, 김창숙, 조만식, 홍명희 등 8인이었다.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는 유림, 조소앙, 조경한, 최동오, 조성환, 장건상, 이시영, 조완구, 김원봉, 홍진, 엄항섭, 유동열, 김상덕, 문덕홍 등 14명이 명단에 실렸다. (박정희, 312)
1946년 2월 13일 오후 1시 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회를 먼저 조직하는 형식을 취했다. 장소는 한미호텔 내 회의실이었고, 상임위원 13명은 비상국민회의 의장 홍진, 부의장 최동오, 정무위원장 안재홍, 외교위원장 조소앙, 산업경제위원장 김성수, 국방위원장 유동열, 법제위원장 김병로, 교통위원장 백관수, 문교위원장 김관식, 예산위원장 이운, 노농위원장 유림, 후생위원장 미정, 선전정보위원장 엄항섭, 청원징계위원장 조경한 등이다.
1946년 2월 21일과 22일 부산 금강사에서 개최된 경남북아나키스트대회에서 유림은 조선무정부주의자 총연맹 서기부 총무위원의 자격으로 축사를 통해 과도정권의 수립과 함께 다음의 4가지 원칙을 요구한다.(위, 315)
1946년 민족자주를 내세우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섰고, 비상국민회의 노농위원장(非常國民會議 勞農委員長)으로 피선되었다. 용추사에서 열린 4월 21일부터 시작하여 23일에 끝난 경남 안의의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에서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 1946년 6월 6일 백여 명의 발기인이 총회를 연 후 7월 7일 천여 명의 당원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 시내 연무관에서 독립노농당 결성 대회가 열렸다. 위원장 유림(柳林)...
한반도 아나키즘 진영의 역량을 총결집한 동 대회의 만장일치 결의에 의하여, 7월 7일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이 창당되었으며 당수(黨首)로 피선되었다. 노동자와 농민 등 일반 근로대중을 근간으로 하는 자주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당 이념 전파를 위해 독립노농당 기관지인 독립노농신문(獨立勞農新聞)을 창간하였다. 창당 6개월 만에 백만 명에 육박하는 당원을 확보함으로써 해방정국 최대 규모로 당세가 신장되었다. 민족자주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민주의원(民主議院),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입법의원(立法議院)을 반대하였다.
1947년 1월 14일 한국독립단의 주류 김구와 비주류 조소앙 및 독립노농당의 유림이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를 방문했다. 미소공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묻고 반탁운동의 전개를 예고 한 것이다. (359)
1947년 비상국민회의 부의장(非常國民會議 副議長)으로 피선됐고[3월 3일], 전국혁명자총연맹(全國革命者總聯盟)을 결성하여 중앙집행위원장(中央執行委員長)으로 피선되었다[6월 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도하의 남북협상 안을 제시하며 남북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발표하였다. 김구(金九)의 한국독립당이 김성수(金性洙)의 한국민주당과 합당을 꾀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극우화시키려 전횡하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 견제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좌익 계열을 제외한 백여 개의 정당 사회단체와 연합하여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統一獨立運動者中央協議會)를 결성하고 대표간사(代表幹事)로 피선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大韓民國 臨時政府 議政院)을 확대 계승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국민의회 國民議會) 의장(議長)으로 피선되었다[4월 3일]. 환국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확대 강화책으로 영입되었던 주석 이승만(李承晩), 국무위원 김성수(金性洙), 국무위원 이청천(李靑天) 등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제명하였다. 김일성(金日成) 주도의 평양회담이 미리 짜여 진 각본에 의한 것이고 자주적이지 못함을 들어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등의 남북협상을 반대하였다. 남북협상은 이 나라의 수도인 서울에서 개최함이 바른길이라며 서울에서의 회담을 역설 제안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 문제를 들어, 김구(金九)에게 평양의 남북협상에 나설 경우 임시정부 주석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임할 것을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자격으로서 요구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한편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이에 따른 정부 수립은 필연적으로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올 것이므로, 제헌의회 참가를 거부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였다. 제헌의회 당선자 14명을 비롯하여, 당의 결의를 어기고 선거에 참가한 출마자 전원을 제명하였다. 이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이승만(李承晩) 정권 지지를 선언하며 참여한, 박열(朴烈)과 이을규(李乙奎) 등 당의 부위원장 2명도 아울러 제명하였다.
1949년 5월 7-8일양일에 걸쳐 독노당 제3차 전당대표자대회가 서울 시내 필동 역경원에서 개최되어 다음과 같이 임원을 개선했다. / 중앙집행위원장: 유림, 중앙집행위원: 이주록 외 99명, 중앙감찰위원장: 신재모, 동부위원장: 유우석, 동위원: 이해용외 8명
1949년 10월 1일 프랑스 파리의 세계아나키스트대회에 한반도를 대표하여 초청받았다. 이 대회를 통해서 세계아나키즘운동의 방향을 바꾸려고 준비했으나,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탄압으로 참가하지 못하였다.
1950 2대 국회(1950년 5월 30일 실시) 선거 - 안동군 을구: 유림(柳林), 9,438표 독로당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와 시민 희생에 대한 책임을 묻는 강도 높은 비판 성명을 발표하여 피난지 부산에서 3개월간 불법 구금되었다.
1952년 이승만(李承晩)의 영구 집권을 위한 대통령직선제 개헌 정치 파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임시수도 부산에서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韓國民主主義者總聯盟)을 조직하고 이승만(李承晩) 독재에 반대 항거하였다.
1953년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휴전협정 반대에 나서자, 더 이상의 민족 살상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휴전협정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휴전협정을 촉구하였다.
1958 4대 국회(1958년 5월 2일 실시) 선거, 「유림의 대구시 을 선거구 입후보 서류」, 대구시 을 선거관리위원회, 1958. - 대구시 을구: 유림(柳林), 독립노농당, 1,437
1960년 4·19 민주혁명으로 이승만(李承晩)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김창숙(金昌淑), 장건상(張建相), 조경한(趙擎韓), 정화암(鄭華岩), 김학규(金學奎), 권오돈(權五惇) 등과 조국의 완전한 자주통일독립을 쟁취하고자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고[5월12일] 혁신동지총연맹을 발기하였다. [5월 27일 준비위원회] 또한 혁신동지총연맹(革新同志總聯盟)을 결성하고 유림(柳林), 장건상(張建相), 정재용(鄭在鎔), 박석홍(朴錫洪), 권오돈(權五惇), 최천택(崔天澤) 등 6인 집단지도체제의 지도위원(指導委員)으로 피선되었다. 7·29 총선 이후 분열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위해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사회대중당(社會大衆堂), 한국사회당(韓國社會黨), 혁신동지총연맹(革新同志總聯盟) 등 5당의 통합을 주도하였다.
1960 5대 국회 민의원(1960년 7월 29일 실시) 선거 -「유림의 안동군 을 선거구 입후보 서류」, 안동군 을 선거관리위원회, 1960. <민의원> 안동군 을구: 유림(柳林), 독로당[혁신동지총연맹], 6,106표.
1961년 민족의 시련은 미진하여 조국통일과 완전자주독립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모든 과제를 동지들에게 남긴 채, 4월 1일 정오 향년 63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사회장이 거행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국민장(建國勳章 國民章)을 추서하였다.
* 이 자료의 일부는 단주 류림선생기념사업회에서 발췌 했습니다. (54OLB)
1988 하기락(河岐洛, 1912-1997)의 주도로 서울에서 아나키스트 세계대회 개최.
1990년 4월 6일 YWCA 대강당에서 사회당 창당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독립노농당의 마지막을 지켰던 이들에 의해 당의 강제해산 후 무려 30년 만에 사회당을 결성하였다.
2001. 4. 1. 국가보훈처 차장 김종성: 단주 유림선생 제40주기 추모제 – 추모사,
2002 2월에는 한국아나키즘학회까지 창립
2005 “단주 유림의 사상과 독립노농당: 아나키즘 학술대회”, 저자: 유림, 류림,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발행사항: 서울: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2005 / 장소: 세종문화회관 4층 컨퍼런스홀. 일시: 2005년 11월 17일(목) 오후 2시-6시 .
2008, 2008. 4. 1.(화) 12:00 단주 유림선생 47주기 추모회가 수유리에 소재하는 유림 선생의 묘전에서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국민의례와 단주유림선생의 약력 보고로 시작한 이 날 추모식에는 이명현 서울북부보훈지청장, 정인식 한국자주인연맹 의장, 김영천 단주유림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및 기념사업회 회원과 유족 등 총 50여명이 참석하여, 선생의 굳은 애국정신과 넋을 기렸다.
2019 4.1 단주 유림선생 제58주기 추도사: 안경환 교수 /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김영천 – 아래 글, 참조.
2022 04 01 추모회에 참석. 코로나로 다른 이들이 없고, 단주 류림 기념사업회가 주관하였다.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김영천과 박사학위를 논문을 낸 박정희를 만나다.
(5:15 55QMB) (7:05, 55W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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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주 류림(1894-1961)과 연관 인물들 ***
1858 이상룡(李相龍, 1858-1932)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독립운동가. 1925년 9월 24일부터 1926년 1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 일명 이상희(李象羲), 이계원(李啓元).
1862 여준(呂準, 1862-1932) 경기 용인, 아명 조현. 호 시당(時堂). 한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1919년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21년 재만학생교과서편찬위원회의 위원장,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재결성하였다. - 재만한인교육회(在滿韓人敎育會)
1865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1865-1928) 독립운동가
1867 이회영(李會榮, 1867-1932)[옥사] 자 성원(聖元), 아호는 우당(友堂).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 시대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유교(양명학) → 개신교(감리회).
1875 남형우(南亨祐, 1875-1943) 경북 고령 출신. 호는 수석(瘦石). 190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고, 다음 해인 1909년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 1922년 4월 친일분자 및 밀정 총살과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1875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본관은 전주,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대통령,
1876 김구(金九, 1876-1949)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정치인. 백범은 암살범에게 암살 되었다. 대일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한국독립당
1877 김응섭(金應燮, 1877-? ) 경북 안동, 호는 동전(東田). 의열단원 김지섭의 일가. 일제강점기 평양지방법원 판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간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926년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1928년 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한족노동당을 개편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 때 경북 출신의 김동삼·김원식·이영형·김상덕·이일심 등도 참여한다.
1878 김동삼(金東三, 1878-1937) 본관은 의성. 아명(兒名)은 김긍식(金肯植), 아호는 일송(一松). 대한제국의 군인 겸 정치가, 독립운동가. 협동학교 설립.
1879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경북 성주(星州), 본관은 의성(義城). 자(字): 문좌(文佐), 호(號): 직강(直岡), 심산(心山), 벽옹(躄翁). 독립운동가, 정치가, 시인, 교육자.
1880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충청도 대덕,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사학자.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서.
1881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동래 도호부, 노론계열, 미국 유학, 종교인(장로교)·교육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정치가·학자·시인·사회운동가·교육자,
1882 장건상(張建相, 1882-1974) 경상도 칠곡,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다. 본관은 인동(仁同). 아명(兒名)은 장명상(張明相)이고 자(字)는 찬성(贊成)이며 아호(雅號)는 소해(宵海).
1885 신재모(申宰模, 1885-1958), 경북 칠곡, 아나키스트, / 1925 대구에서 신재모(申宰模), 방한상(方漢相) 등이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
1886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 경기도 양평,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독립운동가, 저술가. 근로인민당(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1886 정재용(鄭在鎔, 1886-1976) 황해도 해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887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겸 교육자. 외교활동, 해방 전야까지 이승만과 교류하였다. 해방정국에서 사회당 쪽으로.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1888 해산(海山) 김정묵(金正默, 1888-1944), 선산 구미. 1923년 1월에 발표한 일명 의열단선언이라고 하는〈조선혁명선언〉은 1922년 12월 조선의열단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으로 부터 요청을 받고 완성한 것이다.
1888 지청천(池靑天, 1888-1957) 일명 이청천(李靑天), 본관은 충주(忠州), 호는 백산(白山), 본명은 지대형(池大亨). 조선의 군인, 항일 독립운동가, 정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하였다. 독립 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지냈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 종두법의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은 그의 재종숙이다.
1889 김좌진/김상현(金佐鎭, 1889-1930) 일제 강점기의 군인.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본관은 안동. 김상용의 11대손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1889 김두봉(金枓奉, 1889-1960) 경남 기장,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백연(白淵)·백련(帛連)이며, 별명은 태항산의 호랑이,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한글학자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주시경의 제자로서 《조선말본》과 《깁더 조선말본》. 《말모이》의 공저자. 대종교, 아나키스트.
1889 이탁(李鐸, 1889-1930), 평남 평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자는 태연(跆然). 호는 동우(東愚·東禹). 본명은 제용(濟鏞). 일명 동우(東雨)·춘우(春雨). - 재만한인교육회(在滿韓人敎育會) [동명이인?: 이탁(李卓) 등과 재만한인교육회(在滿韓人敎育會) / 이탁(李鐸), 이탁(李卓), 이탁(李拓) 동일인물? ]
1891 이운형(李運衡 1891-1972) 안동 출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중약(重若), 호는 백광(白光). 독립운동가, 개신교 목사.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고 3.1운동에 참여했다. 부친은 안동에서 최초 만세운동을 했던 이상동(李相東)이며, 백부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이상룡(李相龍)이다.
1891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전라도 고창, 인촌(仁村), 대한제국의 교육가,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이고, 한국민주당.
1892 박석홍 (朴錫洪, 1892-1956), 평북 선천, 임시정부 의정원에 관여.
1894 단주(旦州) 류림(柳林, 1894-1961)
1894 유자명(柳子明, 1894-1985)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이다. 남과 북에서 유일하게 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개명 前 이름은 유흥식(柳興湜)이고 본관은 문화이며 호는 우근(友槿)이고 개명한 이름 유자명(柳子明)은 원래 별명이었다. 《행동하는 지식인 류자명 평전》(원제 《불멸의 지사 류자명 평전》)(류연산 지음, 충주시 예성문화연구회, 2004년)
1894 이을규(李乙奎, 1894-1972) 아나키스트, 1924년에는 이회영· 이정규(李丁奎)· 유자명 등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 기관지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간하였으며, 1929년 7월에는 김좌진 등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해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
1896 정화암(鄭華岩, 1896-1981), 전북 김제,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로도 활동. 본명은 정현섭(鄭賢燮). 자는 윤옥(允玉), 호는 화암(華岩)이다.
1896 최천택(崔天澤, 1896-1961)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 정치인, 언론인. 1927년 7월 신간회 부산지회가 결성.
1898 단주(旦洲) 유림(류림, 柳林, 1898-1961) 본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단주(旦洲)이다. 경상북도 안동군 임북면 계곡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화영(柳華永)
1899 방한상(方漢相, 1899-?), 경남 함양. 아나키스트. 1925 대구에서 신재모(申宰模), 방한상(方漢相) 등이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
1900 조경한(趙擎韓, 1900-1993) 전남 순천,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본관은 옥천이며, 호는 백강(白岡), 다른 이름은 안훈(安勳). 한국독립당대표
1900 김학규(金學奎, 1900-1967) 독립운동가, 광복군 제3지대장 등을 역임. 1948년의 남북 협상에 반대하여 임정 인사들을 설득하려다가 실패하고, 단정을 지지, 협상에 불참하였다. 이후 김구와 갈등하던 중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해 주었다.
1901 권오돈(權五惇, 1901-1984) 경기도 여주, 본관은 안동(安東). 아호(雅號)는 포명(抱溟). 일제강점기 충주에서 비밀결사인 문예운동사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한학자. 연세대교수
1901 김종진(金宗鎭, 1901-1931) 본관은 안동, 호는 시야(是也), 독립운동가.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이 암살되자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하였고 1931년 7월 11일 중국 중동선 하이린역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1902 최갑룡(崔甲龍, 1902/4-미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이명은 최우진(崔又震). 본적은 평안남도 평양시(平壤市)이다. 1927 관서흑우회. 1929년 11월 1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
1902 조중복(趙重福, 1902-?) 함경남도 단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
임중학(林中鶴, ?-?)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1902 박열(朴烈, 1902-1974) 경북 문경, 1919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3.1운동 가담. (本)朴準植 朴爀. 아나키스트, 黑濤會 조직자.
1904 이홍근(李弘根, 1904?-?) 28세 [류림과 여섯 살 차이] 아나키스트, 본적: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용산리 751번지, 주소: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동고동. 당시 사무원. 1929년 11월 1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
1906 이진언(李聄彦, 1906-1964) 함안군 안의면 출생, 아나키스트 운동가이자 교육자. 아나키스트로서 활동하던 하기락을 안의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영입. 셋째아들 이동원.
1912 김일성(金日成, 1912-1994) 평남 대동군, (本)金成柱 (汪淸유격대대 정치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지도자.
1912 나월환(羅月煥, 1912-1942), 전남 나주, 호는 송죽(松竹). 한국의 독립운동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 1942년 3월 1일 변절자 박동운(朴東雲), 이하유(李何有), 김동수(金東洙), 이해평(李海平), 이도순(李道淳), 고여순(高如淳), 김송죽(金松竹), 김용주(金龍珠) 등 8인에 의해 피살되었다. 중국전간사단(中國戰幹四團)은 박동운 사형, 이하유·김동수 무기징역, 이해평·이도순·고여순 징역 15년형, 김송죽·김용주 징역 2년형을 선고하였다.
1912 양일동(梁一東, 1912-1980) 현곡(玄谷) 정치인. 전라북도 옥구군 출신. 1973년 민주 통일당을 창당, 대표 최고위원과 총재를 지냈다.
1912 하기락(河岐洛, 1912-1997) 경상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출생. 유림이 조직한 독립노동당에 가담하여 기관지 『독립 노동 신문』을 편집하였다. 1952년 안의고등학교를 설립.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1981]
정진탁(鄭振鐸, ?-?), 대구
김용하(金容河, ?-?), 대구
남상옥(南相沃, ?-?) 류림은 1930년에 아나키즘 노동운동을 재건하고 국내 연락을 위해 남상옥(南相沃)을 원산으로 파견하였다.
[정인식(鄭仁植) 1956년도 독립노농당 입당, 현재 한국자주인연맹 의장, 단주유림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1914 유원식(柳原植, 1914-1987), 만주군 장교, 아버지 류림과 단절. 박정희와 함께 5·16 군사정변을 주도, 혁명위원회 재경위원장.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인물연구소, 1987).
1948 안경환(安京煥, 1948-) 대한민국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며,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경남 밀양 출신인 안병준(1922-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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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 채원배/차이위안페이(蔡元培, 채원배 1868-1940) 1916년 말 중화민국 근대 베이징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자는 학경(鶴卿). 호는 혈민(孑民)이다.
1873 양계초/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1873-1929)는 청말, 중화민국의 근대 사상가이자, 정치가, 언론가, 개혁가, 철학가, 문학가, 사학가, 교육가이다.
1879 진독수/ 천두슈(陳獨秀, 진독수, 1879-1942) 호는 실암(實庵), 자는 중보(仲甫), 필명은 척안(隻眼). 중국의 공산주의자, 코민테른 혁명가, 언론인, 트로츠키주의 혁명가, 정치인이다. 1920년에는 레닌주의자로 시작.
?-? 임서(林序, ?-?) 중.위키에 안나옴.
?-? 진형명(陣炯明, ?-?) 중.위키에 안나옴. 1925년 장개석 군과 싸운 광뚱성 군벌로 나온다. 이 군벌은 국민당과 합작 또는 배척을 여러 번 하였다고 한다.
1904 바진(巴金, 파금 1904-2005) 본명: 리야오탕(李尧棠, 이요당)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설가, 저술가, 아나키스트이다. 자는 페이간(芾甘, 비감)이다. 루쉰(鲁迅, 노신, 1881-1936), 라오서(老舍, 노사, 1899-1966) 등과 함께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필명 '바진'은 러시아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巴枯寧, 바쿠닝)과 표트르 크로폿킨(克鲁泡特金, 커루파오터진)에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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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김성국(金成國, 1947-) 서울대 학석사, 미국에서 박사 <The Political Economy of East European Relations with the U.S.S.R. 1982, Indiana University at Bloomington> “단주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독자성(2001)” “유자명과 한국 아나키즘의 형성”(2003) “허유 하기락의 아나키즘 소고(1998)”, “잡종사회의 도래와 잡종이론(2011)”
1948 김용옥(金容沃, 1948-) 호는 도올(檮杌) 철학자, 종교학자, 사상가, 한의사, 대학 교수. 본관은 광산.
?-? 김영천(金永千, ?-?), 「단주(旦洲) 유림(柳林)의 아나키즘과 독립운동(2008)」 - 단주류림선생기념사업회 회장
1954 김희곤(金喜坤, 1954-), 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립운동사 전공. “단주 유림의 독립운동과 사상.(1992)” 안동문화연구회.『안동문화연구』 6: 111-123. “旦洲 柳林의 독립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 2001), “안동출신 사회주의운동가 李準泰 연구”(한국근현대사연구, 2003).
1954 오장환(吳장煥, 1954-). 건국대 학석사, 프랑스 박사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 연구: 그 기원에서 1931년까지, 1987, 파리7대학 Pierre Brocheux.>1998.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 국학자료원.
1956 이호룡(李浩龍, 1956-) 서울대 학사, 계명대 석사, 서울대 박사. <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 2000, 서울대, 한영우.> “柳林의 아나키스트 사상과 활동(2005)”
1957 조광수(趙廣洙, 1957-) 영산대학교 교수, “중국의 아나키즘, 1998”
1958 박환(朴桓, 1958-) 수원대 교수, <서북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연구, 1990, 서강대, 이광린.> “중일전쟁이후 중국지역 한인무정부주의 계열의 향배, 1997”(한국민족운동사연구). 식민지시대 한인아니키즘 운동사(2005)(신인)
1962 박정희(朴貞熙, 1962-)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형성과 변동과정에서 독립노농당 아나키즘 연구, 2020, 중앙대, 정치대학, 장훈.>
1965 조세현(曺世鉉, 1965-) 서강대학 학석사, 박사 <청말민국초 아나키스트의 문화사상, 1999, 北京師範大學, 공서탁>
1966 김명섭(金明燮, 1966-) <재일한인아나키즘운동 연구, 2001, 단국대 한시준>
1978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전편·민족해방투쟁(1978)』
2019-03-04 작성자: 문화재청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의 양복 - 글. 안보연(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안보연(安寶蓮, 1980-),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석사: 우리나라 모피와 피혁 복식 연구, 2005, 이화여대, 홍나영.>
(5:25, 55OKA) (8:38, 55RMB) (10:07, 55RMG) (11:31, 55WMCH)
* 참조: 가계 – 류림은 류정원의 현손이다. **
## 류정원(柳正源, 1703년(숙종 29)-1761년(영조 37). 조선 후기 문신‧학자. 본관 전주(全州).
여섯 아들이 있는데, 단주는 넷째 경휴 집안이다.
# 진(震)휴, 명(明)휴, 일(日)휴, 경(敬)휴, 만(萬)휴, 필(弼)휴 ****
경(敬)휴(넷째)
(1)경휴 - (2)수문(수문), 술문(술문)
(3) 치섭(치섭) - (4)호흠, 이흠
(5) 만영, 돈영, 희영, 화영(림)
* 백형 晩永은 백부 灝欽에게로, 중형 暾永은 재종숙 性欽에게로 각각 출계.
* 曦永을 양자로 받아들여 대를 잇게 하였다.
류림– 류원식
류광식 세희
태규 - 분당(주거)
(55O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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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주 류림을 좀 더 깊이 알 수 있는 논문. : 논1954k김영천2015개정4단주
“단주(旦洲) 류림(柳林)과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김영천(한국정치사상연구소 소장) (개정판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