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차 중동전쟁.1967年[6월 전쟁 혹은 6일 전쟁]
그 유명한 6일전쟁을 치를 당시에 이스라엘의 수상은 심하고 중한 병으로 쇠약한 골다메이어 여자 수상과 한쪽 눈밖에 볼 수 없는 모세 다얀이 국방상이었다. 1차 2 차 중동 전쟁을 겪으면서 이스라엘의 앞날에 언제 끝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전쟁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를 예견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골다메이어 수상은 당시에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중병을 앓으면서도 전 미국을 돌면서 연설을 하였고 상당한 후원금을 얻어서 무기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1. 전쟁의 원인과 전개
제3차 중동전의 원초적 동기는 시리아와 이스라엘간의 빈번한 충돌에서 찾을 수 있다. 시리아의 바아스당은 가장 강력한 반유대주의 및 반서구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는데, 바아스당의 실권을 장악한 아민 하페즈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강경정책을 취하였다.
1966년 10월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은 시리아는 대이스라엘 강경책을 더욱 촉진시키게 되었다. 당시 시리아-이스라엘간에는 골란고원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1967년 4월 제1차 중동전쟁의 정전협정에서 비무장지대로 설정된 골란고원 일대에 이스라엘이 농작물을 경작한다는 일방적인 조치를 발표하여 대시리아 감정을 격발 시켰다. 이것이 이스라엘-시리아간의 무력충돌을 유발시킨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리아와 요르단은 이집트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고 나세르는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공격한다면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라고 천명하게 된다. 나세르는 요르단 및 이라크과 동맹관계를 맺어 대 이스라엘전에 대한 준비를 서둘렀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측에 미리 포착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1967년 5월 29일에 전시체제에 돌입해 있었다.
1967년 6월 5일 새벽 이스라엘 공군은 공격 3시간만에 아랍제국의 비행기 400여대를 폭격하였다. 이중 286대가 이집트의 비행기였으니 이집트는 초기에 이미 기선을 제압 당하였던 것이다. 이 때 이스라엘의 비행기 손실은 19대 밖에 되지 않았다. 이집트는 아랍국가들의 맹주격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의 주대상은 이집트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전쟁발발과 동시에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를 지나 수에즈운하까지 진주하였다.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이집트의 군장비가 거의 파괴되어 전쟁 시작 4일만에 UN의 정전 권고를 수락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시리아는 제 3차 중동 전쟁의 기본 동기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전과 동시에 대 이스라엘전에서 적극성을 띠지 않았으며 이집트와의 협조체제도 미약했다.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작전이 끝난 6월 8일 주력부대를 골란고원의 시리아 전쟁에 이동시켰고,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기갑 부대의 도착과 동시에 UN의 정전권고를 수락하였다. 요르단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에 제공권이 완전히 위축되어 6월 7일 정전을 수락하였다. 즉 제3차 중동전쟁은 요르단과는 불과 3일전쟁이며, 이집트와는 4일전쟁, 시리아와는 5일전쟁이었으며, 6일만에 전쟁에 참가한 아랍국들은 모두 UN의 정전권고를 수락하였던 것이다.
2. 대 이집트전 전황
(1) 대 공 습
1967년 6월 5일 새벽, 이스라엘의 기지에서 발진한 미라지 III전투기들이 4대씩 편대를 이루어 새벽의 여명에 반짝이는 지중해의 해면을 스칠 듯 날아 수평선 너머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2시간 후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던 이집틍의 공군력은 이미 지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개전의 첫 새벽에 그들이 자랑하던 미그 21전투기들은 한번 날아 오르지도 못하고 대부분 지상에서 박살나 버렸던 것이다.
항공기가 전쟁에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가장 완벽한 기습이라고 일컬어 지는 이 작전은 체코 군 출신의 이스라엘 공군 사령관 호드 소장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적의 레이더 망에 포착되지 않으면서, 광대한 사막에 수 십 개로 분산된 비행장을 일시에 때려 부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가 수집한 온갖 정보를 -( 적 조종사들의 가족사항에서 레이더 요원들의 근무 습관까지 )- 완전히 분석하여 컴퓨터처럼 정교한 타이밍에 따라 구성된 이 작전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예술품 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랍 공군과 60:1이라는 믿기 힘든 전력을 가진 이스라엘 조종사들의 기량이 이것을 뒷받침했다.
시리아와 요르단 공군도 똑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 두 나라의 공군이 사라져 버리는 데는 단지 25분이 걸렸다고 한다. 이에 반해 3차 중동 전 전기간을 통하여 아랍측의 전투기가 이스라엘 본토를 공습한 것은 단 1건으로서 이 불벼락에서 살아 남은 이라크 공군의 TU-16폭격기가 이스라엘의 나타냐 지역에 3발의 폭탄을 떨어뜨린 것이 유일하다. 즉각 응징에 나선 이스라엘 공군에 의해 이들의 미그 21대대 역시 순식간에 궤멸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개전 첫날 이스라엘 공군의 대승을 2차 대전의 진주만 공습에 비유한다. 하지만 이 비유는 적절치 못하다. 기술의 완벽도와 그 이후의 전황 전반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이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보다도 훨씬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집트 당국은 이 사실을 일절 은폐하고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공군의 '빛나는 전과'를 떠들어 대었지만 그들은 개전 첫날부터 이렇게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채로 이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다.
현대전사의 기적이라는 6일 전쟁의 신화를 만들어 낸 이스라엘 육군의 등뒤에는 이렇게 정예화된 공군의 활약이 있었다.
(2) 기갑부대의 진격
1967년 6월 5일 새벽, 이스라엘 남부 군 사령관 가비시 장군은 떠오르는 햇살에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광활한 시나이 사막의 모래 벌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3개 사단 6만 5천의 병력과 650대의 전차는 이미 14일 전부터 극비리에 이집트 국경까지 전진 배치되어 초조하게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07시 45분, 그 동안 철저히 통제되던 무선통신이 침묵을 깨고 예하 전 부대를 호출하여 병사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공격 명령의 제일성을 터뜨린다.
"전 부대 통신개방, 08시 정각 공격 개시 - 전 부대는 사력을 다하여 적을 격파하고 목표를 탈취할 것"순식간에 일제히 시동이 걸린 전차의 엔진 폭음으로 사막의 아침 공기가 찢어지고, 어느 사이 보병을 가득 실은 병력 수송 장갑차들이 내닫기 시작했다.
이 시간은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공격으로 이집트군의 각 비행장이 불타오르고 있을 순간으로, 이런 공격은 139마일 시나이 전 전선에 걸쳐 북, 중, 남부의 3방향에서 동시에 맹렬한 기세로 일제히 개시되고 있었다.
이 개전 첫 아침의 전투 양상은 완벽한 기습이었다.
이집트는 먼저 전쟁을 부추겨 놓고서도 도리어 기습적인 선제공격에 얻어맞는 꼭 같은 실수를 다시 한번 되풀이 하고 만다. 이스라엘군의 파죽의 공격 앞에 이집트군의 방어선은 허무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 전쟁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개전 수시간만에 시나이 반도의 중심 도시인 라파가 어이 없이 무너지고 이집트 군은 변변한 반격조차 없이 아수라장의 혼란속으로 빠져 들어 갔는데 여기에는 다음가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집트군의 각 전방사단장들 중에 이 날 아침 정위치에서 부대를 지휘할 수 있었던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집트, 시리아 통합군 사령관 아메르 원수가 방문하기로 되어있는 빌타마다에 그를 마중하기 위해 주요 야전 지휘관들이 부대를 비우는 상식밖의 우를 범하였고 원수 자신은 그곳으로 날아오는 중 개전을 맞았던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역시 지난번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집트군의 안일과 방심 때문이었는데, 이것은 라파 지구의 요충지인 칸 유니스로 맹진을 거듭하고 있던 타르 사단의 전차 여단장 사무엘 대령의 경험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공격을 개시하자 무전기를 통해서 당황한 이집트 군들의 외침이 똑똑히 들려 왔다. -그들은 놀랍게도 무전기의 주파수 마저 2차 중동 전 내내 사용하던 그 채널을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이집트 방어진의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읽으며 작전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세번째는 항상 지적되었던 대로 역시 이집트군의 훈련 부족이었다. 전차들이 접근해가자 대전차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지만 엉뚱하게도 포탄은 이스라엘 전차대의 머리 위를 지나 근처 마을 한복판에 떨어지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이집트 군 포병은 소련이 공급한 이 대포를 제대로 조작조차 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한편 공급받은 소련제 JS_III스탈린 중전차와 최신형 T55전차들은 비능률적이고 복잡한 지휘체계 하에 효과적인 방어 작전을 방해하고 있어서, 이스라엘의 불시의 기습공격으로 지휘 통신 체계가 무너진 이집트군의 이 전차부대들은 앞다투어 날아드는 서로 모순되거나 상반된 명령 전문에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여기에다 이들의 무선 채널을 간파한 이스라엘군의 역정보까지 가세하여 이들을 더 혼란 속에 빠뜨려 놓고 있었다.
개전 반나절 사이 이미 시나이 반도의 반 이상을 석권한 이스라엘군에 비해 멜리츠에 주둔하고 있던 이집트 최 정예의 샤자리 사단 전차들조차 별 의미 없이 진지와 진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스라엘군에 맞선 이집트 전차들도 전차병의 기량에서 이스라엘 전차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장애물이 전혀 없이 탁 터진 넓은 사막에서 육안으로 적의 전차를 발견하고 제 1탄을 발사하는 거리는 통상 900~1200M라고 하는데, 이 거리에서 이스라엘의 포수들은 항상 초탄 내지 제 2탄에서 T55의 포탑을 날려버렸지만 이집트군의 T55는 더 우수한 사격 통제장치를 갖추고도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역시 훈련 부족이었던 셈이다.
부족한 사격 실력을 통감한 이집트 전차들은 모래언덕 뒤에 숨어 있다가 이스라엘군이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 왔을 때 기습포격을 가하는 궁여지책을 시도 했으나, 이미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에 정확한 지상폭격을 뒤집어 썼다.
게다가 2차 중동전부터 사용되던 이스라엘의 AMX-13경전차도 쾌속을 자랑하며 전차대의 선두에서 전방 수색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 꼬마 전차들에 위치가 발견된 T55는 뒤 따르는 M48 패튼, M51센츄리언 같은 주력 전차들의 밥이 되었다.
이런 전력의 차이는 격차가 더욱 벌어져서 시나이 남쪽에서 발진한 예비역으로 구성된 요페사단의 샤드미 대령이 이끄는 전차여단은 이집트 군이 통과불가능이라고 단정했던 36마일의 험로를 돌파하여 빌라판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었다.
밤 10시 경 그는 최소한 완전 편제된 1개 여단 이상의 이집트 전차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대로 전투가 벌어진다면 야간전투장비가 전혀 없는 그의 부대는 우수한 야간 적외선 조준장치를 갖춘 T55에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있기에 약간 지대가 낮은 도로변에 전차를 매복시키고 적을 기다렸다. 마침내 이집트 전차들이 언덕을 넘어오는 순간 밤하늘을 배경으로 공제선상의 T55가 검은 실루엣을 드러냈고 이 순간 일제 사격을 가하여 순식간에 7대를 완파시겼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집트 군은 공격을 가해오기는커녕 정확도가 떨어지는 포탄을 난사 하면서 방향을 돌려 엘 아이리시로 이어지는 *와디를 따라 도주하기 시작했다.(와디란 사막의 강으로 평소에는 물이 말라버리고 없으므로 엄폐물이 전혀 없는 사막에서는 종종 부대의 은신처나 공격로로 이용된다.) 그러나 와디의 모래지면이 전차가 통과하기에는 너무 부드러워 이집트의 전차들은 여기에 고스란히 주저앉고 말았고 샤드미 부대는 이 발이 묶인 전차들을 향하여 화력을 쏟아 부었다.
이스라엘 군의 운이 좋았는지 날이 밝자 이 어림만으로 쏜 포격이 대부분 명중하여 총 50대의 신형 T55전차들이 파괴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무력한 이집트의 전차대보다 오히려 낫세르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시나이 사막 요소요소에 깔아 둔 지뢰 지대와 시나이 특유의 험난한 지형이 이스라엘군의 큰 장애물이 되었다.
또한 이집트 군 중에서 가장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은 독립전쟁이후 이스라엘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인들로 구성된 팔레스타인 20사단으로 그들의 저항은 매우 집요하여 타르 사단이 완전히 장악한 가자 지구 전역에서 이들은 끊임없는 게릴라 전법으로 진격에만도 바쁜 이스라엘군의 배후를 위협했다. 결국 이들을 소탕하기위해 예후다 보병여단을 투입하는데 60여명이 전사하고 200여명이 부상당하는, 전 시나이 전선에 걸쳐서 가장 극심한 전투를 벌였고 날이 밝아올 무렵 이 팔레스타인 20사단은 무력화 되었다.
승패를 가늠하는 최초의 24시간은 이렇게 지나갔다.
이스라엘이 사용한 미국제 M-48전차
(3) 제2방어선 붕괴
이집트군의 제 2 전방 방어선인 칸 유니스, 엘 아이리시, 아부 아게일라 등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계속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수에즈 운하를 향하여 조여들기 시작한다. 이처럼 맹 진격을 거듭하고 있는 이스라엘군이 애를 먹었던 것은 선두의 기갑 부대가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고 있었으므로 한없이 길게 늘어진 보급선으로 인해 계속적인 연료와 탄약, 식량의 보급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혹서 사막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손실된 염분을 보충하기 위해 정제 소금이 보급되었지만, 이제 이것마저 떨어져 버렸고 심지어 요페 여단장조차 이 3일 동안 몇 모금의 쥬스 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로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헬리콥터로 긴급히 공수되는 보급품도 항상 탄약이나 연료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었으므로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지만 그 투혼은 놀라운 것이어서 제벨리브니와 쿠세이마 같은 이집트의 제 2방어선까지 계속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이집트 지휘부는 호되게 얻어맞은 초반의 기습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각 방어진지를 호출해 보지만 태반은 연락이 두절이고, 기껏 연결이 된 진지에서는 이스라엘 병사들이 히브리어로 조롱을 퍼붓고 있었다. 전선 상황이 이 지경이었음에도 정말 웃기는 것은 이집트의 국영 방송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공군의 빛나는(?) 전과와 각 전선에서 유태인을 말살시키고 있는 이집트군의 눈부신(?) 활약을 소리 높여 방영하고 있었다. 이것이 병사들의 사기에는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패주하고 있는 아군을 더 큰 곤경에 빠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효과적인 통신수단이 모두 두절되어 이 방송만이 유일한 정보였던 많은 부대들이 상황을 오판함으로써 효과적인 철수나 탈출계획조차 세울 수 없었다.
개전 3일째, 미트라를 향해 내닫던 샤드미 여단의 바르암 전차대대 소속 전차 9대는 마침내 연료가 떨어졌지만 한가하게 보급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연료 탱크의 바닥까지 닥닥 긁어 5대의 전차에 모두 채워 넣고 나머지 전차를 케이블로 매 단채 진격을 서둘렀는데, 얼마 뒤 이들은 뒤쪽에서 달려오는 이집트군의 대부대의 불빛을 발견했다.
'이제 전멸이구나!'라는 생각에 대대장은 눈앞이 아득했지만 어이없게도 이집트군의 경장갑차량, T55, JS-III등은 그들을 그냥 지나쳐 달려가고 있었다. 이 적군의 한복판에 어이없이 휩쓸려 버린 그도 덩달아 속도를 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어둠 때문에 바르암의 전차에 그려진 이스라엘국적의 마크를 보지 못했음에 분명했다. 게다가 연료가 바닥이 난 전차를 끌고 가는 초라한 몰골의 부대가 공격군이라고 상상도 못했던 모야이다.
이스라엘 군은 적군의 대부대에 휩쓸려 행군을 하고 있던 이 대대장은 샤드미 여단장에게 보고를 하였으나 보고를 받은 이 여단장은 "모두 깨부숴라!"
지난 사흘 동안의 격전으로 만신창이가 된데다 연료 마저 떨어진 체 완전히 포위된 9대의 전차로 최소한 여단급 규모의 장비를 갖춘 적군을 깨 부수라니?..
그 순간 하늘이 그들을 도왔다. 야간 은밀 이동의 원칙조차 무시하고 라이트를 환히 밝힌 채 질주하던 이 전차대는 상공을 맴돌고 있던 이스라엘 공군의 후거 전투기에 발각되었고 후거 전투기들은 이 바보같은 이집트 군에게 맹폭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바르암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력 질주로 대열에서 뛰쳐나와 곧장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몇 대의 T55전차가 뒹굴때까지도 이집트군은 지금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모른 채 당황하다 비로소 바르암부대의 정체를 깨닫고 반격을 시도하려 하지만 이스라엘 후거 전투기의 맹폭에 변변히 반격도 못하고 허둥지둥 미트라 고개를 넘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사람과 전차가 모두 녹초가 되었기는 하지만, 바르암은 무전기를 들어 여단장에게 자랑스럽게 보고를 한다.
" 적을 모두 격파했습니다."
(4) 텅빈 시나이
이집트군이 지난 2차 중동전의 경험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전이 단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셀름알 세이크이다. 이곳은 아카바만을 봉쇄하는 포대가 설치된 거대한 요새로 지난 1956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 곳을 점령하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최대의 혈전이 될 것을 각오한 이스라엘은 공군의 폭격과 바다로부터의 함포 사격에 이어 정예의 공수부대를 강하시킬 계획을 세웠지만 가장 먼저 도착한 해군 함대가 발견한 것은 텅텅 비어버린 진지였다.
이집트군은 많은 희생을 내고서도 결국 항복하고 말았던 지난번의 경험을 충분히 활용하여 이미 꽁무니를 빼버렸던 것이다.
드높은 사기로 출격했던 공수부대원들은 낙하도 해 보지 못한 채 기지로 회항한 수송기에서 내려서면서 잔뜩 부은 얼굴로 툴툴거렸다.
개전 4일째, 시나이 전역의 전투는 사실상 끝을 고하고 있었다. 시나이 북부 전선에서 출발한 샤론 사단은 길도 없는 험난한 모래벌판과 바위산을 돌파하여 이집트의 최 정예 샤자리 기갑여단과 제 2, 제 6사단을 요절내어 버렸고, 타르사단과 요페사단은 이미 수에즈 운하의 뚝에 도달해 있었다.
샤론 역시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어이없는 대 전과를 올리는 기회를 잡았다. 이들은 이집트의 샤자리 여단을 향하여 진격하던 중 제벨카림 부근에서 이집트군의 대부대와 조우하게 된다. 마침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야간 투시장비가 없는 이스라엘 전차로서는 매우 불리한 여건이라는 것쯤은 그들의 타오르는 사기에 비하여 아무 것도 아니었으나, 전방 수색대가 그들과 적군 사이에 폭넓은 지뢰 지대가 널려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는 수없이 전차를 전투대형으로 산개시켜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지뢰를 제거해 가면서 공격하기로 하고 그날 밤을 세웠다. 저쪽도 웬일인지 포 한발 날아오지 않았고, 이렇게 숨막히는 긴장 속에 하룻밤이 흘러갔다.
이튿날 아침 그들이 발견한 것은 완전 무장한 1개 여단규모의 이집트군 전차, 자주포의 대열이 마치 열병식이라도 하듯이 줄지어 서있는 광경이었다. 개중에는 시동도 끄지 않은 것도 있었다.
지난밤 어둠속에 나타난 이스라엘군의 그림자에 놀란 이집트군은 지휘관에서 병졸에 이르기까지 아주 공평하게 전차를 버려둔 채 살금살금 소리없이 꽁무니를 빼버렸던 것이다. 이후로 벌어진 전투들 역시 이미 전투가 아니었다.
이 뜻밖의 대전과를 올린 샤론사단이 나클에서 마주친 1개 여단의 이집트군은 이스라엘 전차병들의 월등히 뛰어난 사격술과 용의주도한 작전 운영에 의해 일방적으로 살륙 당한다. 입구와 출구가 좁은 계곡에서 샤론의 매복에 걸려 들어 선두와 후미의 전차가 피격된 그들은 도로를 따라 일렬로 늘어선 채 꼼짝 못하고 이스라엘군의 사격에 지리멸렬했다.
이 두 시간의 전투에서 50대의 이집트 전차, 300대의 차량과 1000여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피격된 전차가 내뿜는 검은 연기와 사람의 살타는 냄새가 계곡을 가득 메웠다.
뒷날 이스라엘의 수상이 된 샤론 장군은
"승리의 기쁨보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연민으로 눈물이 나왔다" 고 술회를 했다.
특히 지난 전쟁에서 첫 총성이 울렸던 미트라 고개는 이집트군의 묘지가 되었다.
무질서한 궤주를 거듭하던 이집트의 패주 차량들이 앞다투어 이 고개를 넘다가 이미 주요 목표를 완전히 제압한 이스라엘의 요페 사단과 샤론 사단의 함정에 걸려 이스라엘 공군까지 가세해서 퍼붇는 화력에 전부 고철덩어리 신세가 되어버린다. 한 이스라엘 장교는 이 광경을 보고
"진 풍경이었다. 시커멓게 타버린 소련제 차량 위에 트럭이 올라타고, 그 트럭의 꽁무니에 또 한대의 트럭이 기어 올라가는 기묘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한대의 T55전차가 올라앉아 있었다.
비르 기프가파 에서는 1090여대의 T55가 참호를 파고 주저앉은 채 최후의 결전을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이스라엘군의 우수한 사격술에 하나 둘씩 파괴되어 간다. 3000미터 거리에서 횡대를 지어 방어진과 평형으로 천천히 이동하면서 정확히 날려 대는 M51슈퍼셔먼의 포격에 이 T55전차는 하나 둘씩 파괴가 되어 간다. 패주의 대열에서 낙오한 소수의 이집트 전차들의 산발적인 저항을 제외하고는 이제 시나이 전역에서의 심각한 위협이 될만한 이집트군의 활동은 없었다. 그나마 수에즈 부근에서 얼쩡대던 2개 중대 규모의 T54/55는 운하를 건너 도망을 치고 말았다.
(5) 이집트의 선물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군의 우수함보다도 이집트군의 무능이 6일 전쟁의 신화를 낳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쟁이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아무리 무능하다 하지만 수년에 걸쳐 당시로서는 최신예 무기체계를 구축해왔던 이집트군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역설적으로 이스라엘군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이집트군이 잘 훈련된 정예의 강군이었다 하더라도 더 우수한 강적 앞에서는 무능한 군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 강둑에 서서 이집트 본토를 위협하고 갈갈이 찢어진 이집트군이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마냥 허우적대고 있는 상태에서 낫세르는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
6월 8일 저녁 낫세르 대통령이 UN의 휴전 중재안을 수락함으로서 전 시나이 반도의 총성이 멎게 된다. ( 실질적으로는 항복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낫세르는 침통한 표정으로 이집트의 전력 80퍼센트가 상실되었음을 공식발표를 한다. 이집트의 발표에 따르면 전사 12,000명 포로 5,500여명,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전사 275명, 부상 800명에 불과했다.(대 이집트전의 피해만) 또 이스라엘이 총 61대의 전차를 상실하는 데 비해 이집트군은 900대이상의 전차가 파괴되거나 나포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900대의 전차 중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신품이 태반이었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전 지역을 뒤져 가며 이 차량들을 회수해 갔다는 사실이다.
훗날 이스라엘은 이때 노획한 다수의 T54/55전차를 개조하여 Ti67이라 개칭하고 독립전차여단을 편성하며, 그래도 남아도는 노획장비들을 다른 나라로 수출까지 하여 실속을 챙겼다.
결국 낫세르는 이스라엘에 풍성한 선물을 베풀어 준 꼴이 되어버렸고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군은 손상을 입히기는커녕 25억 달러 상당의 무기 무상공여까지 받은 것이 되었다.
게다가 이스라엘 영토의 약 6배에 달하는 시나이 반도를 완전히 점령하여, 경제적 가치가 없는 사막땅이라 하여도 최소한 이스라엘의 코 앞에다 전차 등을 가져다 놓을 수 없는 전략적 가치를 얻게 되었다.
지난 2차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도 정치적 수세에 몰려 이 지역을 다시 내줘야 되었던 것에 반해 이번은 어떠한 압력이 들어오더라도 이 땅을 다시 내놓을 의사가 없었고, 시나이 반도는 이제 이스라엘의 국토가 되었음을 정식 선언한다.
흔히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은 요르단강 서안의 웨스트 뱅크와 이 시나이의 가자지구는 이 전쟁이후 강제로 이스라엘 시민이 된 아랍인들이 모여 살고 있기때문에 후일 반이스라엘 폭동으로 뉴스에 자주 오르게 된다.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의 진격상황
3. 대 요르단 전 전황
압도적인 우세로 시나이 전역의 이집트 군을 일소해버린 이스라엘군이지만 그들의 난적은 이 이집트만이 아니었다. 아랍권에서도 가장 강경파로 알려진 시리아와 가장 서구화된 정예의 군대를 보유한 요르단이 바로 그들이다.
이 당시 시리아는 이집트 대통령 낫세르가 제안한 아랍권 통일이라는 웅대한 계획에 따라 이미 통일 아랍공화국의 일원으로서 군대의 지휘권까지 이집트와 통합된, 적어도 이스라엘과 한판 전쟁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요르단의 경우는 조금 달라서 아랍권의 가장 온건하며 서구감각의 소유자인 후세인 국왕이 통치하는 요르단은 신생 이스라엘의 후견자인 미국, 영국과도 비교적 친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므로 때때로 다른 아랍 강경파 국가들로부터 배신자로 매도 될만큼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적대감이 덜했다.
여기에 희망을 건 이스라엘은 어쩌면 요르단이 이번에도 1956년의 2차 중동전 때처럼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고 공격 개시 전에 전군에 요르단 군에 선제 공격을 가하지 말 것이며 먼저 발포해오더라도 신중히 대응할 것 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정도였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가장 실질적인 이유는 시나이 전역의 이집트군을 맞아 싸우기도 힘이 벅찬 이스라엘이 당시 아랍권으로서는 유일하게 미국제 m48 영국제 센츄리언등의 서방제 장비로 무장을 한 정예의 요르단군까지 한번에 상대하기는 힘이 벅찼으므로 UN휴전 감시단을 통해 싸우기 싫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역시 요르단과의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요르단 총 GNP의 절반을 생산해내는 비옥한 웨스트 뱅크는 그 지리적인 위치가 이스라엘 영토에 빙 둘러싸여 있는 형태로 한방만 제대로 먹이면 이걸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유태인 마음의 고향인 예루살렘이 여전히 요르단 영토에 속해 있었으므로 이번 기회에 이것을 수복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시나이 전역이 개전한 이후에도 3개 기갑여단, 6개 보병여단, 2개의 독립 기갑부대의 대병력을 요르단을 대비하여 남겨 두고 요르단 이스라엘의 국경을 이루는 사마리아산맥의 암반지대를 돌파하는 훈련을 연일 계속하고 있었다.
(1) 요르단의 참전
이런 이스라엘의 바램이 주효했음인지 시나이 전역의 불뚜껑이 열린 6월 5일 아침까지도 요르단군은 여전히 주춤거리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역시 같은 아랍인이라는 피는 속일 수가 없었다.
온건한 합리주의자인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도 범 아랍인의 단결과 유태인 격멸에 동참을 독려하는 낫세르의 강요를 뿌리칠 명분이 없었다.
게다가 개전 수시간만에 이미 아군이 쑥대밭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빛나는 승전보를 소리 높여 떠드는 이집트 카이로 방송도 한몫을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기회에 위협적인 유태인들을 제거하고 항상 불안해하는 웨스트뱅크지역의 보존을 튼튼히 한다면 나쁠 것이 없었다.
낮 12시 40분 마침내 전 요르단군에 공격 명령이 떨어지고 미국제 M2 롱톰 장거리포가 이스라엘 본토에 맹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 총 참모장 다얀의 결의는 단호했다
"그들이 마침내 우리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총성은 성도 예루살렘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예루살렘은 요르단 국토 안에 있으면서도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반쪽씩 나눠 가진 이상한 국제지역으로 남아 있었고, 그 분할선의 비무장 지대를 먼저 침공한 것은 요르단 군이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보병여단은 이들과 치열한 총격전을 전개한 끝에 이 지역을 탈환하고 요르단 관할의 수르 바히르 마을까지 진격하였다.
이순간 중부군 사령관 나르키스 장군의 명령을 받은 벤 아리 대령의 기갑여단이 이스라엘국경을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2) 예루살렘 혈전
앞서 이야기 했듯이 요르단 군은 아랍권에서도 가장 잘 훈련되고 장비가 현대화된 정예군으로, 이들과의 전투는 이스라엘로서도 상당한 희생을 각오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유태인들이 이집트 전토를 얻는 것보다 더욱더 가치있다고 표현한 이 조상들의 도시를 탈환하는 어렵고도 명예로운 임무를 부여받음으로써 3차 중동전 전역에 걸쳐 최대. 최악의 혈전을 기록한 것은 모르데카이 구르 대령이 지휘하는 제 55공수여단이었다.
하지만 담벽마다 총탄자국 없는 곳이 없고, 골목마다 핏자국이 새겨지지 않은 곳이 없다는 이 난투전의 서막은 시작부터 잘못되어있었다. 그들은 공수 작전의 정석대로 낙하산으로 강하한 것이 아니라 전혀 무장이 없는 전시 징발된 민간인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고 병사 대부분은 개인화기 조차 소지하지 못한 맨손이었다.
이유는 이들은 처음부터 시나이 전선에 투입되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의 중화기와 각종 보급품은 언제라도 시나이를 향해 날아갈 수 있도록 텔아비브 공항에 대기시켜둔 수송기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던 것인데, 이런 완벽한 준비가 도리어 화를 불렀던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요르단의 개입이 너무 빨랐던 데다가 예루살렘의 위기가 너무도 급박했던 것이다.
"맨주먹으로라도 적을 막으라"는 나르키스 장군의 명령은 단호했었기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본격적인 공격 명령인줄도 모르고 집결했던 일선 지휘관들은 예루살렘 여단으로부터 각종 소화기와 실탄을 얻어 오느라 우왕자왕하는 북새통을 연출했고, 이 기가막힌 공격준비가 끝난 시간이 6월 6일 새벽 2시, 전날 밤 9시로 하달된 공격시간에 5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목표지역은 요르단 수중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구시가 지역으로 이 곳은 유태인이 거주하는 구역인 신시가보다 비교적 높은 지대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원전 시대부터 축성된 견고한 방벽과 좁고 구불구불 미로와 같은 골목길이 뒤엉킨 천혜의 요새지인데, 이 주위에다 요르단 군은 자연석의 암반과 콘크리트로 형성된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구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군의 탄약고가 있었다고 해서 탄약의 언덕이라는 별명이 붙은 스코푸스산기슭은 인간의 몸을 으깨는 거대한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공격 개시 포격과 동시에 이스라엘군의 머리위로 거대한 화염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이 십자포화에 걸린 병사들은 순식간에 시체로 변해 비탈로 굴러 떨어졌다.
정상적인 상식대로라면 진작 공격이 포기되었어야 할 그런 순간에 공수병들의 눈에는 의지가 넘쳐 흘렀고 그들은 우지 기관단총의 총신이 뻘겋게 달토록 사격을 퍼부어 대며 아귀와 같이 비탈길을 기어 올라 갔다.
최초의 장애물인 철조망과 지뢰지대를 돌파하는데 2시간이 소요되었고 병력의 절반이상을 상실하였으나 마침내 선두의 인간 불도저들이 요르단군의 참호속으로 뛰어들면서부터 상황은 일변하였다.
요르단군이 종횡으로 거미줄처럼 건설해놓은 참호선은 양군의 숨바꼭질과 같은 전투양상을 만들어 놓았고, 이런 근거리 육박전에서는 요르단군의 미국제 M1개런드 소총보다 이스라엘군의 짧고 간편한 우지 기관단총이 그 위력을 발휘했다.
한 이스라엘 병사는 당시의 격전을 한마디로 압축하여 그 목격담을 이야기하는데,
"비탈진 콘크리트제 교통호를 따라 피가 마치 개울처럼 흘러 내리고 있었다." 라고...
이들과 혈전을 벌인 요르단군 역시 최고의 정예를 자랑하던 제 1 왕실 근위사단이었으므로 이 증언은 그다지 과장이 아닐듯 싶다.
동이 터올 무렵 공수병들이 천신마고끝에 개척한 기동로를 따라서 증원부대의 M 50 셔먼전차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전황은 이스라엘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아침 9시 스코푸스 산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고 이스라엘군의 수중에 떨어진 요르단 경찰학교 연병장에서 사상자 확인과 병력 재편성이 이루어졌는데, 라피 대위가 이끌고 온 증원 기갑중대 역시 피해가 극심해서 대부분 전차장들이 전사한 후였다. 통상 다른 나라의 기갑전 상식과는 달리 이스라엘 전차 부대는 충분한 시계 확보를 위해 전투중에도 상반신을 드러내는 용감한 전통에 따른 필연적인 희생이었다.
(3) 셔먼과 패튼
예루살렘 주변의 전력적 거점을 확보하기위해 딜랴어단 벤 아리 대령이 이끌던 기갑여단은 1차 중동전 당시 그들이 개설했던 버마 도로를 따라 진격을 서둘렀지만 지난 20여년간 인적이 끊긴 채 버려져 있던 이 통로는 고스란히 자연상태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여기에다 요르단군이 구축해 놓은 튼튼한 참호와 대전차호는 더욱 그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영국제 센츄리언과 2차 대전의 퇴물인 m4셔먼 전차를 개조한 M50/M51로 무장된 그들은 이 험로를 돌파하는데 만도 벌써 상당수 잔차의 캐터필러가 끊어지고 바퀴축이 부러지는 비전투 손실로 주저앉아 버렸다.
요소요소에 매복한 요르단의 대전차포를 보병 척후조가 탐지해내는 대로 전차포 사격을 가한 후 깊게 파인 대전차호에는 보병들이 바위 덩어리를 굴려넣는 난공사와도 같은 행군이 이어졌다.
그나마 요르단군이 병력을 집중함이 없이 전 전선에 걸쳐 엷게 산개시켜 놓은 작전상의 결정적인 실수에 힘입어 6월 6일 새벽 4시경에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로에 들어설 수있었다. 전차가 아니라 보병이라 하더라도 통과하지 못할 급경사의 산악지대를 돌파해낸 것만으로도 이들은 이미 세계 기갑사에서 유래를 찾지 못할 기록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텔하자라 촌락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요르단군 미국제 신형 M48전차 20여대와 조우하였는데 여기서 벌어진 3시간 남짓의 전투는 우월한 병기와 잘 훈련된 병사, 그 어느 쪽이 더 승패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인가를 시험하는 무대가 되어 버렸다.
고물 셔먼 전차가 부대의 주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포격을 날려대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요르단군 전차대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12대의 불타는 패튼전차를 버려두고 여리고쪽으로 도망쳐버렸다.
이때 이스라엘군의 손실은 단 4대의 M3반궤도 장갑차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전과에 만족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강행군을 계속하면서 텔엘풀, 스와파트등의 강격한 요르단군 요새지들을 돌파하는 동안 그들의 손실은 점차 커져 갔다.
하지만 방어전 자체에 목적을 두고 소극적으로 응전해 오다가 그 중 두어대만 피격되면 도망쳐 버리는 군대와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관철해야만하는 명확한 목표를 부여받은 부대는 전투를 이해하는 개념부터가 다른 법이다.
특히 좁다란 아랍식 골목길과 요르단군이 설치해둔 각종 장애물이 가득 들어찬 스와파트읍은 이스라엘군의 장기인 전차를 동원한 충격 요법이 먹혀 들 수 있는, 그런 지형이 아니었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동안 요르단군의 대전차포에 의해 또 2대의 전차와 3대의 장갑차, 40여명의 사상자와 함께 여단장의 지휘 장갑차까지 직격을 맞는 피해를 입었지만 다행히도 벤 아리 여단장은 무사했다. 마침내 그들의 선도대대가 예루살렘 외곽에 도달했을 때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던 구르 공수여단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항상 간단한 경장비만을 소지한 채 적 후방 깊숙히 투입되어 우군의 주력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 체질화된 공수부대와 주력 전차대와의 이런 연결은 2차 대전이래로 현대전의 또 한가지 전형처럼 되어 있는데, 수 천년 고도 예루살렘의 성벽 아래서 이런 감격적인 장면이 또 한 번 연출된 것이다.
(4) 통곡의 벽
벤 아리 기갑여단은 아이탄 대위의 1개 전차 중대를 55공수여단에 배속시키고 부대의 주공은 웨스트 뱅크의 라밀라를 향해 이동한다. 이 라밀라의 예루살렘을 점령하면 웨스트 뱅크 전지역은 사실상 완전히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라밀라에서는 무수한 골목길과 지붕마다 은신한 요르단의 저격병들이 사격을 퍼부어댔지만 소총탄으로 전차를 뚫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해가 저물기 직전인 오후 6시경에 도시는 점령되었다.
시내를 수색하던 한 병사가 요르단인 상점의 창문을 깨뜨리고 나팔을 한 아름이나 안고 돌아왔는데 이 전리품은 곧 성경에 쓰여진 역사를 재현하는데 요긴하게 쓰인다.
한편 서전에서부터 합류한 라피 전차 중대와 함께 더욱 증강된 구르의 55공수여단은 예루살렘 구도시를 향해 공격을 개시한다. 이 작전은 이미 포위, 고립된 요르단군을 찾아내어 소탕하는 수색 섬멸이 목적이었지만 이들은 여기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수많은 일선 지휘자들이 수천년 묵은 좁은 골목길들이 미로와도 같이 엉켜있는 이도시의 지리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M50전차를 몰고 칠흙같은 어둠속을 내닫던 라피대위의 전차 중대는 애초부터 길을 잘못 들어 여리고 쪽으로 가는 도로로 접어들고 말았다. 라피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오던 길을 되돌아 섰을 때 이미 전차 없이 내던져진 공수병들과 요르단 수비대 사이에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 잃어버린 전차대를 찾아나섰던 공수여단의 정보참모 카푸스탄 소령역시 이 어둠속에서 길을 잘못 들어 헤메이다 요르단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전사하는 불행을 당했다.
바로 이 순간 구르 여단장은 40여대의 요르단군 M48전차가 접근중이라는 보고를 받았고 어둠속을 헤매고 있는 우군의 2개 전차 중대가 모두 도착한다 해도 그들의 열세는 명백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전쟁 시작부터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공군이 있었다.
지원 요청을 받은 즉시 날아온 이스라엘군의 푸가 매지스터 연습기에 장착된 로켓포가 불을 뿜기 시작하자 우왕좌앙하던 패튼전차들은 변변한 공격도 없이 여리고쪽으로 퇴각해버리고 말았다.
구르 여단장이 탑승한 선도 지휘 장갑차는 이미 직격탄을 맞아 열려 있는 예루살렘의 성문을 박차고 달려들어 가는데, 6월 7일 오전 10시경이었다. 공수병들은 골목 골목을 뒤지며 요르단 저격병들을 소탕해 나갔고 그들은 드디어 예루살렘 구도시의 중심부 '통곡의 벽'앞에 도달한다.
2000여년 전 로마 제국에 의해 유태왕국이 멸망한 이래 유태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감격의 예루살렘 재입성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병사들은 모두 철모와 탄띠를 벗어 던지고 성벽에 머리를 기댄 채 흐느꼈고, 이 낭보를 듣고 급히 날아온 모세 다얀 총참모장과 나르키스 중부군 사령관도 함께 울었다.
(5) 나블루스로 진격
예루살렘을 비롯한 웨스트 뱅크의 중요 거점들이 완전히 함락되고 이스트뱅크까지 위협당하는 지경에 이른 후세인 국왕이 취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이집트 대통령 낫세르에게 달려가 지원을 요청해보지만 이미 이집트의 군대는 시나이 사막에서 증발해버린 뒤였고 피를 나눈 형제를 강조하던 이라크의 태도 역시 믿을 만한 바가 못되었다. 개전 직전까지 지원을 호언장담하던 이라크군이 취한 유일한 행동은 요르단강을 건너 보려고 시도하다가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을 받고는 황급히 오던 길을 되돌아 가버린 것이 전부였고, 여기서 딱 얼어붙은 그들은 한 발자욱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요르단 전역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6월 7일, 웨스트 뱅크 북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나블루스로 공격해 들어간 롬 여단의 경험은 숫제 코메디에 가까웠다.
AMX-13경전차로 구성된 이 여단의 선발대가 한바탕 격전을 각오하고 이 도시로 뛰어들었을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온 시민이 모두 떨치고 나와 입성하는 이스라엘군을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이었다. 이 뜻밖의 광경에 전차병들은 어떨떨해졌지만, 곧 이건 '좀 열렬한' 항복의 뜻 정도로 생각하고 전차 밖까지 몸을 내민 채 마주손을 흔들어 주기까지 했다.
선두 전차에 탑승한 장교는 이들 중에 자동소총을 소지한 사람들이 드믄 드믄 끼어있는 것을 보고 무장해제를 명령했지만, 그들이 히브리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이 장교는 뛰어 내려가 한 젊은이의 소총을 잡아채, 하늘에다 위협 사격을 가했고, 이 한발의 총성이 울리자마자 순식간에 상황이 돌변했다.
환영의 불결로 가득했던 광장은 비명을 지르며 앞다투어 도망치려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는데 그 진상은 간단했다.
이스라엘군의 진격이 이토록 빨리 이루어지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나블루스 주민들이 이들 이스라엘군 전차대를 자신들을 지원해 주러온 이라크군으로 착각했던 것이었다. 하여간 나블루스는 이렇게 어이없이 함락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41대의 요르단전차가 달려왔지만 이미 기운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덩치는 작지만 강력한 75mmFL/10 대전차포로 무장한 롬여단의 AMX-13전차는 교묘한 포위망을 형성하여 16대의 요르단군 M48전차를 격파해 버렸고 그 나머지는 전차는 전차병들이 전차를 버려둔 채 뿔뿔이 도주해버렸다. 롬 여단의 피해는 전사 6명에 부상 42명, 시나이에서 거둔 믿기 힘든 손실의 격차에 비교한다면 비교적 큰 피해였다.
이제 각 방향으로 발진했던 이스라엘군 부대들이 목표 지역을 소탕하고 나블루스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는데, 사람과 전차 모두 역전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모두 저마다 입은 손실의 몇 배를 적에게 갚아 준 전공을 한 아름씩 안고 있었다.
(6) 여리고의 나팔소리
이무렵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총성을 울린 바 있는 아미티 대령의 예루살렘 여단은 이미 텅텅 비어있는 예루살렘 구도시를 종단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을 함락시키고 헤브론, 다히리아를 거쳐 엣사무에 도달해 있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의 영토를 완전히 점령한 셈인데 이 전투의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한 것은 벤 아리 대령의 기갑여단이었다.
일단 나블루스에 집결했던 이 여단은 여리고를 점령하라는 총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출격했다. 도시 입구에서 그들의 발견한 것은 바나나농장의 진흙 구덩이에 꼼짝 못하고 처박혀 있는 16대의 요르단국 M47/M48전차였는데, 이들은 이 상태어세도 제법 용감하게 포격을 가해왔다.
멀쩡한 전차를 버려 두고 도주해 버리던 시나이의 이집트군에 비한다면 놀라운 투혼이었지만 이들이 이스라엘 기갑병들의 수준에는 못 미치는 것이 확실했다. 벤 아리 여단의 기갑여단은 이들을 간단히 제압한 후 시내 중심부로 달려 들어갔다.
산발적으로 날아오는 소총탄과 함께 미국제 M2롱톰 곡사포의 직접 사격은 상당히 위협적이었지만 사기 충천한 이스라엘 병사들은 이 저항을 숫제 무시해 버렸다.
반궤도 장갑차를 타고 괴성을 질러대며 달려가던 병사들은 라밀라에서 노획한 나팔을 꺼내어 요란스레 불어제쳤고, 흡사 이 나팔 소리가 신호이기라도 한 듯 저항군의 사격이 갑자기 뚝 그쳐 버렸다. 구약성서에 '여호수아'의 나팔 소리에 여리고(제리코)의 성벽이 무너졌다고 했던가? 여리고 시의 중앙 광장에 천천히 백기가 올려졌다.
이제 이스라엘의 주력부대는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불과 40km가지 육박하였고 웨스트뱅크 전지역은 이미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져 버렸다.
후세인의 지원 요청에 낫세르는 고작 "대병력의 미군이 이스라엘군으로 위장하여 이 전쟁에 개입했다" 라는 완전히 생떼적인 성명을 공동으로 발표하자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침내 후세인 국왕은 UN안보리가 제의한 휴전 조건에 동의하고 전군에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오늘날까지 완전히 자국 영토로 병합해버린 웨스트 뱅크 전 지역을 점령하는데 소요된 시간은 약 50시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손실은 의외로 컸다. 전사자만 해도 시나이 전역보다 1/3정도 많은 299명, 부상자만도 1.457명이나 되었다.
이에 반해 요르단군은 지리멸렬 되기는 했으나 알려진 바와는 달리 그다지 결정적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군이 즐겨 쓰는 전법은 전차를 앞세운 과감한 강습 돌파인데, 주거지역이 밀집한 이곳의 지형은 넓게 탁 트인 시나이 사막과는 달리 전차의 기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너무 많았고, 이렇게 이스라에군 전차들이 꾸물대는 사이에 방어진이 무너진 요르단군은 보다 효과적으로 신속히 철수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나이의 모래바람 속에서 군 자체가 완전히 녹아 없어져 버린 이집트와는 달리 요르단은 대전후에도 2/3이상의 장비와 병력이 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르단측이 밝힌 15,000여명의 손실에 비해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는 요르단군 손실을 1,5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어 피해는 줄이고 전과는 부풀린다라는 전쟁의 일반적인 상식과 어긋나는 재미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무래도 같은 아랍의 형제들에게 대한 엄살정도와 같다고 본다.
4. 대 시리아 전 전황
(1) 고원위의 시리아
이렇게 시나이 전선과 요르단 전선이 잔뜩 달군 남비처럼 끊어 오르는 순간에도 의외로 조용한 정적이 감돌고 있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골란고원의 이스라엘-시리아간의 국경지대로 그간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대해 취하여 온 도발적 행동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평온 상태는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리아는 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도발 당사자였고, 전쟁전에도 툭하면 이스라엘 본토를 향해 포탄을 날려대던 골란고원에 배치된 포대는 어떻게든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대단히 위험한 존재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어떻게든 이 시리아에 대해서 만큼은 그 동안의 빚을 톡톡히 갚아 줄 심산이었고 병사들이 가진 적개심도 상대적으로 강했다. 다만 시나이와 요르단 전선의 전황의 급박함에 따라 전병력이 이 지역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시리아를 공략할 여유가 없었을 뿐인데, 다행히도 시리아로부터의 이렇다 할 선제 공격이 없었던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던 셈이다.
시나이 전선에서 포문이 열린 이튿날인 6월 6일, 이집트 군이 대승리를 거두고 있다고 떠벌리는 카이로 방송의 거짓말에 자극받은 시리아군이 각기 10여대의 전차를 앞세운 2개 대대규모의 병력으로 다프나와 아시모레트 두방향에서 간단한 견제 공격을 걸어온 것이 시리아가 벌인 공격행동의 전부였다.
이들은 이스라엘 북부군 사령부의 호된 반격을 받고 200여명의 전사자를 낸 체 황급히 철수해 버린 뒤로는 단단히 구축된 골란 고원의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작전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북부군 사령관 엘리자르 장군은 그의 휘하 병력들은 대부분 시나이와 요르단의 중,남부군에 배속시키고 있었으므로, 우선 이들 전선이 평정되어 병력이 충원되는 순간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2) 골란고원의 마지노선
그럼 시리아군이 이처럼 느긋하기까지 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천혜의 요새지라 일컬어지는 골란고원의 험난한 지형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의 최고봉인 헤르몬 산의 한 자락으로 이루어진 해발 1000m의 이 고지대는 동쪽의 시리아 본토와 연결된 방향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향이 깎아지른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이스라엘과 접경을 이루는 서쪽 언덕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여 군사 작전은커녕 등산조차 힘든 그런 지형인 것이다.
결국 시리아는 이 높은 고지대에서 이스라엘을 내려다 보며 마음대로 관측과 공격이 가능한데 반해 이쪽에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조차없는 천혜의 요새지가 바로 골란고원이었고, 시리아는 여기에다 수년에 걸친 대공사로 난공불락의 방어 시설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들이 건설한 두께 1m이상의 철근 콘크리트제 포좌속에는 필요 할 때는 기동도 가능한 T34/85전차와 2차 대전당시 독일군이 사용하던 4호 전차 30여대가 버티고 있었고 총연장 8km에 달하는 참호선은 모두 강철판으로 뚜껑이 덮여 있어 공중폭격에도 끄떡이 없도록 설계되었다.
이곳을 둘러본 소련 군사 고문단 요원들은 이 곳을 2차 대전당시 프랑스가 독일 국경에 건설했던 마지노 요새보다도 더욱 튼튼하다고 감탄한 바 있는데, 독일군은 이 마지노 선을 우회함으로써 프랑스를 점령했지만, 이 중동의 마지노선은 달리 우회할 루트도 없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시리아가 이토록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 골란 방어선에도 몇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 첫번 째는 요새가 가질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자체의 약점이다. 이 거대한 요새지에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하는 병력과 물자의 보급선이 끊겼을 때의 문제로서 이 보급선 자체가 끊긴다면 요새안에 병력들에게는 요새가 콘크리트 무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헌데 시리아군은 개전 초에 공군력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소멸이 되었으므로 요새 상공을 이스라엘군 공군기가 마음대로 누비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보급선이 끊길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두번 째로는 시리아 내정의 불안이 있었다. 쿠테타로 집권한 공산 바트당 정부는 끊임없는 정변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전쟁이 벌어진 이후에도 상당수의 병력과 전차를 수도 다마스커스의 치안 유지를 위해 빼돌려 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 피의 등산로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이스라엘 북부군 사령관 엘리자르 장군은 신바람이 났다. 시나이와 요르단 작전이 종결됨에 따라 숱한 전차와 병력들이 모래 바람을 날리며 속속 그의 휘하로 집결하고 있었고, 이미 이틀 전에 공격 준비 명령 전문도 받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9일 아침,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공격 명령이 떨어졌는데 그 내용이란게 자못 까다로웠다. 총사령부가 제시한 조건 중 첫째는 이미 이집트와 요르단이 항복해 버렸으므로 더 이상 이 전쟁을 계속할 명분을 상실했기 때문에 '최단시간 내'라는 내용을 강조했는데, 전쟁을 더 끌어 보았자 국제 여론의 비난 대상으로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UN안정보장이사회가 소집되고, 공동성명이 채택되고 어쩌고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이루어지기 전에 시리아의 목을 죄어 버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두번 째 조건은 역시 같은 이유로 해서 시리아 내륙으로의 진격은 엄금한다는 내용으로 즉 이스라엘 본토를 위협하는 골란 고원 일대만을 점령하여 차후에 반복될 위협을 원인적으로 제거하되 그 이상의 진격은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작전은 명백했다. 강력한 요새지를 공략하는 전형적인 전법 공군을 이용하여 보급선을 차단함으러서 요새를 말려 죽인다는 장기적인 전법은 구사할 수가 없게 되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면 공격을 감행하여 견고한 벙커 하나하나를 깨뜨려 나가야만 할 판이었다.
물론 막대한 희생이 따를 명령이었지만 오히려 명령이 취소될까 안절부절하던 엘리자르 북부군사령관은 공격 명령이 떨어진지 불과 2시간 후인 6월 9일 아침 9시부터 전면적인 공격의 포문을 연다. 맹렬한 공군의 폭격에 이어 골라니 보병여단과 알버트 기갑여단을 선두에 세운 전면 지상공격이 시작이 된 것이다.
알버트 여단의 전차들이 인간의 발길조차 닿은 적이 없는 험한 비탈길을 덜컹대며 기어 올라가기 시작하자마자 언덕위의 시리아진지로부터 엄청난 포화가 쏟아져 내렸다. 게다가 정작 더 문제는 머리 위의 불벼락이 아니라 발 밑의 땅바닥이었다.
전차가 간신히 기어올라 갈까말까한 급경사에다 도로 따위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 거친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이 고지의 지표는 오랜 풍화 작용으로 사람의 발길만 닿아도 부슬부슬 떨어져 나가는 그런 곳이었다.
공격의 양상은 포화속의 토목 공사와 같은 꼴로 변해 버렸다. 머리 위의 이스라엘 공군기가 시리아군 벙커위에 폭탄을 떨어뜨리면 벙커는 잠시 조용해지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보병들이 줄줄 미끄러지는 암반을 네발로 기어 올라간다. 이들이 폭약을 터트려 암반을 날려버린 뒤 맨손으로 잔돌 파편을 쓸어내어 기동로를 개척하면 전차가 그 길을 따라 일보 더 다가선다.
그리고 명중도가 높은 전차의 포가 벙커의 총안구를 조준하여 일격을 가하면 그 틈에 선도 보병들이 한발 더 전진한다. 전혀 엄폐물이 없어 노출된 능선에서 후속보병들은 전차 뒤에 몸을 숨기고 연신 미끄러져 내리는 전차의 캐터필더 밑에 돌을 굴려 넣기에 바쁘다.
정말 위협적인 것은 이런 구릉지대의 곳곳에 묻혀 있는 지뢰였다. 이 지뢰를 잘못 건드린 병사들은 갈갈이 찢어져 공중으로 튀어 올라 사라져 갔다.
인류 전쟁사 전체를 통털어 정복되지 않은 요새는 없다고 했던가?
이런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알버트 여단의 선두 전차들이 나무시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기를 쓰고 비탈길을 기어 올라온 이스라엘군을 시리아군이 엄지 손가락으로 툭 튕기기만해도 저절로 벼랑 저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리는 그런 전투 양태가 서서히 뒤집어 지기 시작했다.
벙커 코앞에 이스라엘군의 전차포가 비쭉이 디밀어지자 시리아 병사들은 진지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골라니 보병여단이 치루어야 했던 희생은 이보다도 더욱 처절한 것이었다. 요나 대령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일반 보병여단임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를 오히려 우습게 여기는 최강의 정예부대로서 이 고원에 산재한 13개의 시리아군 진지를 점령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 중 하나인 텔 파할요새는 그 중에서도 가장 튼튼히 구축되어 있는데다 100m이상의 철조망과 지뢰지대로 보강되어 있었다. 모세 클라인 중령이 이끄는 골라니 여단의 제 1대대는 우선 차량 통과가 가능한 지점까지 최대한 M3반궤도 장갑차를 밀어 올렸다.
곧장 시리아군의 벙커에서 발사된 대전차포 세례를 받은 장갑차 두어대가 비탈로 굴러 떨어졌고, 보병들은 차에서 뛰어내려 급경사를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한발을 전진하면 두발이 미끄러지는 비탈길을 기어올라 철조망 앞에 도달한 병사들도 탄환의 비를 뒤집어 쓰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부상을 입은 몇 명의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기어가서 철조망 위에 자신의 몸을 던져 뒤따르는 전우들이 자신의 몸을 밟고 통과할 수 있도록 하기까지 했다.
불과 100여 미터 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를 주파하는 동안 단 8명을 제외하고 전 대원이 전멸해버린 중대가 생겨나기도 했으며 항상 최고 지휘관이 공격의 선봉에 선다는 이스라엘군의 빛나는 전통에 따라 특히 장교들의 희생이 극심했다. 대대장 클라인 중령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 소대장들이 벌써 이 초전에서 전사를 했고 그에 따라 지휘권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며 위임되어 마침내 목표 진지에 도달했을 때는 한 명의 중사가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경우마저 있었고 단 3명의 병가가 시리아군 참호속으로 뛰어든 중대 조차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요나 여단장은 작전이 실패한 줄로만 알고 절망적인 심정에 빠졌다. 하지만 역시 골라니 여단은 그 이름값을 해내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훔쳐내며 망원경을 들여다 보는 그의 시야에는 벙커 앞에서 서서 손을 흔드는 부하들의 모습이 하나 둘씩 늘어 갔다. 그는 그만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텔 아즈지야트 진지로 공격해 올라갔던 2대대 병사들도 목표를 점령하고 이 진지를 지휘하던 시리아군 장교를 생포해 왔다. 이제 죽음의 등산은 끝나고 고지의 정산부에 교두보를 구축한 이스라엘은 이제부터 좀더 수월하게 전차 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4)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이렇게 전투 초반에서 알버트 기갑여단과 골라니 보병여단이 치룬 희생은 이스라엘군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참담한 것이었지만 역시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