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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주의 신학을 알자
언약주의 신학이라 불리는 신학체계는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 츠빙글리와 같은 종교개혁자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근원을 어거스틴이나 초대교부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후에는 청교도로 알려진 사람들의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1647년에 작성된 웨스터민스터 고백문에도 나타나 있다. 이 언약주의신학 운동은 특별히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신학체계를 믿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해왔지만, 지난 50년간 언약주의신학의 교리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증가해왔다. 그 결과 언약주의신학자들과 세대주의신학자들 사이에는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기초
그렇다면 언약주의 신학의 기초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강력한 언약주의신학 옹호자 가운데 한 사람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대답해보겠다.
“성경의 근간은 .... 지상에 하나님 자신의 기쁨과 그 백성들의 기쁨을 위해 언약을 통해서 하나의 백성을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의도가 공간과 시간 속에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는 복음의 약속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누리기 위해서, 그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다.”
기본적으로 언약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오직 하나의 백성을 소유하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구약 시대의 교회였으며, 교회는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이라고 믿는다. 성경의 모든 것은 두 개의 언약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율법의 언약과 은혜의 언약이다. 결국 언약주의신학자들은 이 두 언약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언약을 다른 측면에서 보는 것일 뿐이다.
행위에 대한 강조
언약주의 신학자들은 행위를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강력하게 강조하기에, 은혜 언약은 행위 언약을 무효로 만들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신자의 행위를 신자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왜냐하면 아담 아래서 모든 인류는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원을 위한 것으로 믿으며, 신자에게 의를 전가해주기 위한 근거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강조한다. 오늘날 언약주의 신학의 옹호자 가운데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아담과 우리의 불순종을 속죄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사역이 (저주를 감당했다는 측면에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잊는다. 우리 주님은 적극적으로 순종하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을 성취하셨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무죄한 상태로 또는 중립적인 상태로 서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우리가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또한 율법 전체를 지킨 듯이 적극적으로 의로운 사람처럼 실제적인 대우를 받는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의인처럼 즉시 낙원으로 옮겨진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을 이루었다.”
세상 재건주의자
이러한 사상의 결과로 언약주의 신학은 신자들이 이 세상의 발전과 진보를 위한 일에 참여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언약주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을 재건설주의자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대부분 언약주의 신학자들은 주님이 천년왕국 이전에 오실 것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문자적인 천년왕국을 믿지 않는다. 대부분 언약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대환난을 A.D. 69-70년 로마의 타이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멸망시킨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천년왕국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지금 현 시대로 믿고 있다.
또 다른 언약주의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루어지고 또 성취되고 있다.”
그들의 강조점은 복음 전파를 통해 온 세상 복음화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다. 그들에겐 주님이 조만간 재림하신다는 기대감이 없다. 왜냐하면 아직 온 세상이 복음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온 세상을 뒤덮는 날이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들
일반적으로 기독교 간증은 언약주의 신학의 오류들과 그에 대한 관심의 부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빛 가운데서 걸어오지 않았다. 너무나 자주 은혜가 잘못된 방향에서 강조되어 왔고, 결과적으로 유다서에서 말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는 결과를 초래했다(유 1:4). 신자들은 제자도의 중요성은 간과한 채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의 확실성에만 안주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자랑했지만,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던 사실은 망각했다. 하나님 나라는 주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의 도덕적 상태가 일치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대사로 살기 보다는, 세상의 소금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었기에,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종종 핍박과 멸시를 받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도덕적인 탁월함 보다는 오히려 경솔하고 부주의함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스도를 향한 충정과 헌신 보다는 자아를 추구하고 안락을 추구하는 것이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모든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우선 언약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면만을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바로 두 사람, 타락한 인류와 새로운 인류의 머리로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서 합법적인 통치자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가시적인 왕국을 세우실 것 또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이 그들의 삶 가운데 열매로 나타나는 것을 기대하고 계시며, 또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딛 2:14) 하신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언약주의 신학은 다양한 중요한 부분에서 하나님의 전체적인 진리를 보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을 영적으로 낮은 수준, 즉 구약성경의 계시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하늘 왕국과 지상 왕국
무엇보다 언약주의 신학은 에베소서의 진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하나님의 목적은 지상에만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는 하늘에서 교회를 축복하는 것 또한 있다. 교회는 지상에 속한 백성이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 가운데 있지 않다. 물론 교회는 새 언약의 유익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받았고, 교회의 축복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 안에 있지 않다. 언약은 항상 땅과 관계가 있고, 또한 지상 백성들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교회는 하늘에 속한 백성이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언약주의 신학은 교회의 하늘에 속한 부르심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
둘째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언약주의 신학은 신자에게 살아있는 현재적 소망으로서 주님의 재림을 파괴시킨다. 그들은 언제라도 오실 수 있는 주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주님이 오시기 이전에 이 세상에서 권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기대한다. 그들의 소망은 우리를 위해 오시는 주님의 재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확장하는데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원받은 사람들은 사실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살전 1:9-10) 기다리기 위해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주어지는 의
세 번째, 언약주의 신학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완전한 순종을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획득한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들이 값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온전히 무죄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키신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 어디에도 율법을 지킨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의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켰기 때문에 주어진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고 말한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차이
네 번째, 언약주의 신학은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부인한다. 하나님이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천년왕국 시대에 그들에게 약속한 지상에 속한 축복 속으로 이끄실 것이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교회는 하늘에 속한 축복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언약주의 신학은 실제적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신분을 간과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는 비밀이며 또한 신비이다. 여기서 비밀이란 말은 사도 바울이 교회에 대한 특별한 계시를 받을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교회와 이스라엘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가진 이러한 특별한 특권들을 무시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교회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성경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록된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세상의 발전
다섯 번째, 언약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영혼들을 하나님의 나라 속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것과 더불어 세상이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언약주의 신학자 가운데 주도적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자신들의 소명은 망각한 채 다만 사람들을 세상에서 불러내는 일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신들의 책임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사도 바울과 베드로와 유다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현재 세상은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이며, 마지막 때로 갈수록 전례 없는 악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고전 4:8)라고 책망하는 말을 했다. 현 시대는 신자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리를 차지할 때가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서 거절당한 주님을 따르는 시기이다. 왜냐하면 신자는 사실상 이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차 이 세상에 엄청난 복이 임할 것으로 가정하고 있는 언약주의 신학은 은혜 언약은 복음 전파를 통해서 새롭게 변화된 사회 질서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사 26:9)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심판에 의해서만 이 세상은 정화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은혜 복음과 천국 복음
여섯 번째, 언약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천국 복음을 혼동하고 있다. 두 가지를 하나로 생각하기 때문에, 엄청난 혼동이 온다. 세례 요한과 주님의 제자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속죄하는 보혈, 그리고 부활에 기초하고 있다. 천국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주는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두 가지 복음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엄청난 오해를 초래한다. 천국 복음은 지상 백성을 위한 것이며, 지상에 속한 축복만을 약속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불러내어 교회를 이루게 하며 하늘에 속한 축복을 약속한다.
율법과 은혜
마지막으로, 언약주의 신학은 결론적으로, 신자를 율법 아래에 둔다. 언약주의 신학은 모세의 율법을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갈 3:34)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신자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하지만 로마서 7장 4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한다.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존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이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할 때 이루어진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언약주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오류를 드러내기에는 충분하다. 언약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것은 인간을 높이고, 궁극적으로는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 삶을 마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W. J. 프로스트(Pr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