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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시편 95:3
이 찬송가는 1절부터 3절까지는 스웨덴의 묀스트라스(Mὅnstras) 출생으로 15년간 스웨덴 국회의원을 지내고, 또 스웨덴 언약교회의 목사인 칼 구스타프 보버그(C.G.Boberg: 1859~1940)목사가 아름다운 숲과 호수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국 스웨덴의 강토를 거닐면서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놀라운 창조 솜씨에 마음을 뺏겼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시를 썼는데, 이 시를 러시아 선교사인 영국 런던 태생의 스튜와트 하인(S.K.Hine;1899~?)목사가 3절까지 영어로 번역하고, 4절을 첨가하였는데, 여기에 1949년에 스웨덴의 작곡가 에릭 아돌프 에드그렌(E.A.Edgren)가 스웨덴 민요풍으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울창한 삼림과 맑은 호수, 아름다운 초원, 흐르는 시냇물과 지저귀는 새소리를 연산하는 아름다운 선율의 이 찬송은 1954년 영국에서 빌리 그레이함 전도대회가 열렸을 때, 이 찬송을 주제가로 삼으면서 전 세계 교인들이 애창하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80년대 초반, 여의도에서 열렸던 빌리 그레이함 전도대회 이후 알려지게 되어 오늘의 찬송가에 수록되었습니다.
1절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작사자 칼 구스타프 보버그 목사는 1절에서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등 천체 우주 만물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며 “주님의 권능이 우주에 찼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19:1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잘 다듬어진 조각이 조각가를 영예롭게 하듯이 전능자 하나님의 피조물로 만들어진 자연은 그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으로 인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우주 만물과 자연이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듯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삶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0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바울은 혼돈과 공허, 흑암의 세계였던 세상을 조화롭게 만드시고 그 모든 것들이 질서가운데 돌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C. A. 콜슨은 “우리가 무엇을 보든 자연과 마주칠 때 우리는 하늘의 성례전과 마주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루이스 파스퇴르는 “자연을 연구하면 할수록 더 놀라게 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더욱더 감탄하게 된다는 것이다.”라고 찬미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연 속에 내재된 질서의 조화로움을 연구 끝에 깨닫고는 “하나님은 마술사가 아니라 과학자이시다.”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이렇듯 창조주 하나님은 오묘하신 창조의 섭리 가운데 자연을 창조하셨고 생명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피조된 자연은 오늘도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 섭리를 드러내며 그 영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하나인 우리는 우주의 질서와 자연 생태계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심의 오묘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연의 질서에 위배되는 삶의 자세를 개선하고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삶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욕심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오염되는 일이 빨리 중단되어야 합니다. 대기오염과 수질오염, 지구온난화, 이상기온 등으로 파괴된 생태계를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5)고 말씀하셨던 그 본 모습으로 돌려놔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이 아름다운 지구와 우주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전하므로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1절)를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께 돌아오는 백성들이 많이 나타나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2절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저는 텔레비전의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2절)을 보노라면 물장구치며 헤엄치던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하며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자연을 대할 때마다 무심히 대하지 말고 언제나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회복하심과 치유하심을 발견하고 찬양하며 영광 돌리기를 원하면서 구체적으로 자연이 주는 가르침 두 가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고 그것을 감상하기도 하고, 스스로 아름다워지고자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로 치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29에서 솔로몬의 그 부귀영화로 꾸민 아름다움도 들에 핀 한 송이 백합화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만든 어떤 가공의 아름다움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들에 핀 꽃들, 지저귀는 새들과 나무, 흘러가는 시냇물과, 꽃 물결치는 산등성의 아름다움은 정말 멋진 풍광 그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작은 들풀까지 세밀하게 돌보시고 백합화를 아름답게 입히시며, 하늘의 나는 작은 새들도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더러워진 영혼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해나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연의 조화로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섭리를 발견하고 찬양하는 주의 백성이이 되어야 합니다. 광활하고 다양한 자연이 그처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바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솜씨와 섭리하심 때문입니다. 욥기 42:2 말씀처럼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셔야 합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도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 때문인 것입니다(사 25: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자연의 조화로움을 볼 때마다 우리에게 합당한 삶을 주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그 앞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와 법칙은 영원불변하는 것으로서, 끝내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에 따라 이 땅이 다스려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매일 대하는 자연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그 속에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그것을 발견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3절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 내 모든 죄를 대속하셨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성도라면 거의 다 아는 말씀입니다. 이 한 구절에는 ‘하나님' '세상' '사랑' '독생자' '믿음' '멸망' '영생'과 같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주셨고 더 나아가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못 박혀 돌아가게 하신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오늘 성경에서는 “이처럼”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은 "너무너무 사랑하셨다. 최상으로 사랑하셨다. 한없이 사랑하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작사자 칼 구스타프 보버그 목사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의 운행보다도, 숲속에서 지저귀는 저 새들과 흐르는 시냇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기에 3절에서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없이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사 내 죄를 대속 하셨네”하며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구원의 은혜, 죄 사함의 은혜를 얼마나 느끼며, 감사하며 찬양하고 계십니까?. 죄인인 인간은 그 어떤 방법이나 수단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용서는 용서해주시는 권한을 가진 분이 선언해야 됩니다.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 법정에서 판사가 선고해 주어야 해결되는 것처럼, 인간의 죄는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선고해 주셔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고 구원 얻는 길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롬 10:10).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드릴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사랑이 느껴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보다 구체적으로 느껴지며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셨기에 러므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4절
내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사도 바울은 헬라인들은 지식을 자랑하고, 유대인들은 경험과 기적을 자랑하지만(고전 1:22~23) 자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 한다"고 갈라디아서 6:14에서 고백 했습니다. 바울은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십자가만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바울은 다른 것을 자랑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주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시기를 원하셨고 주님은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구원하고 속죄의 은총을 베풀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십자가 밖에 없기에 주님은 십자가를 기쁘게 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생명의 다리(The bridge of life)는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죄인 된 우리들이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올라갈 수도, 의인이 될 수도,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서 생명의 다리인 십자가의 다리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는 천국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철학, 윤리, 자기 수행, 도덕, 선행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둘째,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18입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이 천국에 갔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황홀경을 경험했습니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4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많은 아픔과 고난과 슬픔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눈물을 흘릴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으며,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이 귀한 천국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승리한 성도들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그 곳에 믿는 자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은혜의 종착점은 천국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저 천국에 날 위한 처소를 예비해놓으시고 나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4절) 성도들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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