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매 /황혼의 불청객
어느날 사랑했던 사람이 떠났다.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은 아니다.그렇다고 죽음을 맞이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애도할 수는 없다.그는 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치매의 그림자는 이처럼 소리없이,치명적으로 다가온다.환자 뿐만 아니라 환자를 아끼고 사랑하던,주변의 사람들까지 황폐하게 만든다.미국 펜실베니아대학 가족사회학과 보스 교수는 치매환자의 주변 사람들이 겪는 감정의 혼돈을 ‘모호한 상실(ambiguous loss)’로 표현한다.이 상실감은 스스로에 대해 무거운 죄의식과 분노를 갖게 만들며 도대체 어디서 그 매듭을 풀 수 있을 지 알 수가 없어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지난 12일,서울 미아동 강북신경정신과의원 5층 입원실.10여명의 할머니,할아버지가 둘러앉아 무엇인가를 크레파스로 그리고 있었다.의사와 간호사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는 할아버지,크레파스를 잘라 입에 넣을까 말까를 망설이는 할머니….
곧이어 아코디언을 연주한다는 할아버지가 나서자 주변에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처음 듣는 낯선,불협화음의 연주곡에 맞춰 박자가 엇갈리는 박수소리가 계속 이어졌다.하지만 음이나 박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닌 듯했다.함께 연주를 하고 박수를 치는 할머니,할아버지의 얼굴이 미소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가톨릭대 여의도 성모병원 정신과 김광수 과장은 “치매란 이차적으로 발생한 원인에 의해 일어난 전반적인 인지기능의 장애를 가리키는 말로 지적 능력의 전반적인 기능저하가 일어난 상태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과거에는 치매를 ‘노망’이라고 부르면서 노화에 따른 정상적인 생리현상으로 간주했으나 최근엔 노인의 중추신경계의 대표적 노인병으로 인식되고 있다.치매는 익히 알려진 대로 환자 본인의 생존 기능만 잃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지역사회에도 타격을 주는 경우가 많아 그 고통은 다른 병과 비교하기 어렵다.
치매의 종류로는 널리 알려진 알츠아이머형 치매(50∼60%)와 혈관성 치매(10∼20%),중추신경계질환과 신체적 질환,향정신성 물질에 기인한 것 등 기타 치매(20∼40%) 등으로 나뉘어진다.일반적 증상에는 인지기능(기억력,언어기능,판단력 등)장애와 비인지기능 장애(정서,감각,행동 등)가 있다.
알츠하이머형 치매의 위험인자는 고령,유전인자 등 몇 가지가 제기되고 있으나 미리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현재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하지만 다른 유형의 치매는 혈압조절,금연,심장질환 치료,아스피린과 항응고제 투여 등의 방법으로 뇌졸중 발생을 억제함으로써 치매의 진행을 예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90년부터 치매환자를 둔 가족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는 치매가족회 이성희 대표는 “치매는 조기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치매로 의심되는 증상이 있을 때 건강진단을 겸한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권했다.
강북신경정신과 이강희 원장도 초기의 적극적인 대응을 강조했다.이원장은 “치매증상이 확인되면 방 한구석에서 돌보기 보다는 밖에서 좀 더 많은 사람과 접할 수 있는 주간시설이나 단기시설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악화를 억제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이 치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그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끊임없이 환자에게 기억이나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키기 때문이다.치매환자를 돌볼 때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다른 신체질환의 발생 여부.감염이나 골절 등의 문제가 생기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는데 치매환자는 대부분 통증 등에 대한 지각이 없거나 표현을 잘 못하기 때문에 가족들이 주의깊게 살펴보는 수 밖에 없다.
치매 치료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우종인 교수는 “치매를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고 생각하고 방치하는 경우나 나이가 들면 누구나 자연스레 겪는 현상이라고 치부하는 경우는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치매클리닉’을 개설했고 ‘한국치매협회’를 창설하는 등 치매에 대한 사회적인 대비책 마련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우교수는 “치매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치료 가능성을 낮춘다”며 치매에 대한 인식 전환을 강조했다.치매환자중 20∼40% 정도는 어느 정도 치료가 가능한 가역성 원인(약물중독,우울증,뇌종양 등)에 의해 비롯되므로 이런 경우에는 원인 질환을 잘 치료하면 치매도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우교수는 “치매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아울러 그 환자를 돌보는 가정의 문제 해결도 우선시되어야 한다”며 “각종 보험혜택이나 장애인 지정 등 정책적으로 배려할 부분이 많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이런 의견들은 모두 치매에 대한 인식변화를 전제로 한다.치매가 여전히 온 가족의 부끄러움이 되며,내 집값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는 치매요양시설의 건립은 절대 안된다는 생각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한 그 해결방안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치매에 대응하려 할 때 한 가족의 힘만으론 역부족이다.
이웃과 함께 하는 생활을 기반으로 지역적인 연대나 협동, 국가적인 지원 등이
무척 중요하다.
이 성희 대표는
“사회적인 고통분담의 정도야말로 곧 그 나라의 사회복지 서비스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국민/11/16/99-
- <고령화 사회 치매환자 급증…사회적 대책 시급>
경제발전과 급격한 의료기술의 발달로 우리나라 인구에서 노년층 비율이 훨씬 높아져 거의 선진국 수준에 이르고 있다.그야말로 노령화 사회가 머지 않은 것이다.그러나 문제는 아직 우리나라는 노령화 사회에 대한 대비가 미흡하다는 점.대표적 노인병인 치매 환자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98년 12월 현재 전국의 치매환자는 25만1천여명이었으며 2010년에는 43만4천여명,2020년에는 61만9천여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치매는 하루 24시간 간병인의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족들의 시간적·경제적인 어려움이 다른 질병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다.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치매환자를 둔 가족들에 대한 대책이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는 지난 96년 ‘치매대책 10개년 계획’을 수립해 추진중이지만 치매환자 증가추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치매가족회 이성희 대표는 “정부의 정책은 급속도로 변하는 현장의 요구를 반영해내지 못하고 있다”며 “특히 ‘치매 10년 계획’이 주로 생활보호대상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일반인에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우종인 교수는 “치매에 대한 사회적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며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을 거의 퇴치했듯 ‘실버 씰’을 만들어 치매 대책을 위한 공적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