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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첫 전도부인은 누구인가? 노 종 해 선 교 사
1. 시작하는 말
한국 기독교 형성과 성장에 있어서 여 교역자(女 敎役者)의 헌신과 희생을 잊을 수 없다. 여 교역자는 복음전도와 신교육(新敎育)에 서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과 사회개혁을 주도해 온 선구자들이었다. 또한 서구문화를 수용하고 생활개선에 앞장서 온 신여성(新女性)의 선구자들이다. 한국교회에 여 전도사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남자 전도인양성은 1887년 10월 9일, 정동에 별도의 집, “베델”을 마련하여, 7명의 신학도로 “신학교”(Theological School)가 시작되었다.(188년 통계표 참조) 그러나 전도부인(Bible Woman)이 세워진 것은 1888년 3월이었음이, 1888년, 1889년 미 감리교 선교사 보고서“(Annual Report of the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ARMEC), ”감리회 여성해외선교사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WFMS), 아펜젤러 일기(Appenzeller' Diaries), 스크랜튼(M.F. Scranton)의 글 등 ”여선교사회(女宣敎師會) 보고” 부분에 밝혀져 있다. 당시 한국의 문화와 관습에 의하여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거나 교육 받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스크랜튼(M.F. Scranton) 집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주일학교”(女性主日學校, Sunday School)가 시작되었고(1888.1.), 곧이어 3월 11일에는 "여성교회"(女性敎會, Women‘s Church)가 21명의 한국인 여성으로 설립되었으며, 이 때 2명의 전도부인들(Bible Women)이 세워져 이들이 한국의 첫 여 교역자(女 敎役者인 셈이다.
2. “여성 주일학교”(女性 主日學校, Sunday School) 설립-1888.1.
1886년 5월에 첫 학생이 입학하여 교육선교를 시작하였고, 곧 이어서 3명의 소녀가 입학하게 되었다. 1887년에는 국왕으로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 이라는 교명(校名)을 받았으며, 10명의 소녀 학생들이 찬송과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만큼 신앙이 성장하였다.(Annual Report of the Korea, W.F.M.S. 1887. p50-52. 이하 WFMS로 표기) Mrs, M.F. Scranton는 “1889년 WFMS선교보고”에서, “여러 명의 학생들의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놀랐으며, 2년 전(1887)에도 그들의 방벽에 붙어 있는 기도문을 발견하였다“고 감격하여 기도문과 놀라운 광경을 선교부에 보고하였다. 즉, “그들은 아버지께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나아갔다.
어린소녀들의 찬양과 기도에 놀라고 감동한 스크랜튼은 1888년 1월, 자신의 집에서 한국 최초 여성주일학교(女性主日學校)를 19명으로 시작 하게 되었다. 이때 참석자 19명은, 소녀학생 12명, 부인 3명이었고, 선교사 4명이었다.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는 “한국에서의 여성사업”(Woman's work in Korea)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888년 1월에 우리는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조직했다. 물론 구성원은 이미 비공식적으로 다소의 종교적 교육을 받아왔었는데, 이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감리교”에서 말하는 우리의 책무가 학생들을 모으고 가르치는데 있으므로 좀 더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고 느꼈고 주장하였다. 이에 주일학교는 12명의 소녀, 3명의 여성. 3명의 선교사 그리고 선교본부의 1명으로 시작되었다.“(M.F. Scranton. "Woman's work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 Jan.1896. p5)
3. “여성교회”(女性敎會) 설립-1888.3.11. 이어서 곧 스크랜튼은 “여성교회”(Womens Church, 女性敎會)를 설립하였고, 첫 전도부인 2명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아펜젤러 일기에서는 여성예배가 형성된 것은 “1888년 3월 11일 주일저녁이었고, 21명으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크랜튼 여사는 저녁에 여성들을 위한 예배를 시작했다. 첫 날 밤에 21명이 참석했으며, 주께서 우리 일에 함께 계시고 영광스러운 사업을 확장하여 나아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아펜젤러, 일기 1888.3.12. 노종해 역)
1888년 연례회 중 선교사 보고 부분에는 2명의 전도부인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밝혀 주고 있다. 즉, “기독교인 양육을 위한 규칙적인 주간 집회(regular weekly meeting)가 열리고 있다. 두 명의 전도부인(Two Bible Women)이 계속적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 열정에 넘쳐 그들의 사업을 수행하며 매우 고무적인 보고를 하고 있다. 주일저녁집회는 잘 모이고 있으며, 현재 50명 이상 모이고 있다. 이미 4명의 여성들이 세례를 받았고 다른 회원들도 이 예식을 기다리고 있다”.(ARMEC Report 1888. p340.) 1888년 통계에는 WFMS의 본처 전도인 2명, 신학교(Theological School) 1, 주일학교 3개, 교회와 예배처(Churches and Chapels) 2개로 보고하고 있다.
4. 확장되는 여성교회(1889)
‘여성교회“는 1888년3월에 설립 되었지만, 그 해 “영아소동”으로 쉬게 되었고, 이듬해 2월(1889년)에 재조직 되었다. WFMS선교회 보고서를 보면 1889년 2월 12일 “여성교회”가 재건되어, 선교사회 관리자인 아펜젤러도 방문 참여하였고, 그 다음주일에는 9명에게 세례 베풀었다고 했다. 또한 9월, “한국 선교회‘에서는 몇 달 전 한국에 도착한 올링거(Rev, F. Ohlinger)목사를 파송하였으나, 실질적인 담임자는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요, 2명의 전도부인들이 인도해왔다.(WFMS1889-1890, p52) 또한 “여성교회”(Woman's Church)는 1889년 4월까지 서울 외곽에서도 모여들어 예배실을 가득 채우도록 성장하였다. 스크랜튼 선교사는 90명이 모인다고 보고하며, 더 이상 방에서 모일 수가 없어 주간에 기도회로 분산하여 작은 “신도반”(Band)으로 나누어 모이도록 했다고 보고했다.(WFMS1889. P66). 전도부인은 1889년 가을부터는 공개적으로 채용되었고, 본격적인 지방전도활동으로 확산되었다. 스크랜튼의 WFMS 선교보고에 처음 밝혀진 전도부인은 이드르실라(Duscrilla, 이경숙)이였고, 겨울(12월)에 임명된 3명은 “프리스실라(Priscilla)와 Sara, 우리의 소녀 엄마“이었다. 1889년 통계표에는 5명의 전도부인들이 있었다고 보고하였다.(WFMS, p65-66. cf, 초창기 전도부인들에 대해선 윤춘병, 韓國監理敎 敎會成長史, 監理敎出版社, 1997. pp286ff을 참조하라.)
5. 최초 전도부인들의 신앙과 활동
스크랜튼 여사(M.F. Scranton)의 “1888년 여성해외선교회 연례보고서“에는 2명의 전도부인에 대하여 같은 내용이 보고되어 있다. 즉, “10명에서 약 20명의 여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 집에서 모이는 주일저녁 집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들에게 예수께 우리를 위해 오셔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설명해 줄 때 경청하였다. 두 명의 한국 부인들(Native Women)이 그들의 자매들을 찾아가서 그들 가운데서 활동하며 번역된 성서를 읽어주고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도록 설명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이 충분히 교육을 받은 전도부인이나 성숙한 기독교인이기를 우리가 요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변화된 것을 알고 있다. 우선 그들 중 한 사람이 내게 왔을 때,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고 묻자, 즉시 “그렇습니다.”고 답했다. “왜 그를 사랑합니까?”고 다시 묻었을 때, 주저함 없이 즉시 “예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고 답하였다." (Annual Report ofW.F.M.S. 1888. pp46-47.)
이 두 명의 전도부인은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은 나의 죄를 사하신 구주(救主)이 심을 확고히 믿고 복음을 전하였다. 스크랜튼 여사는 이들 전도부인에게 ”책을 얼마 읽었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전도) 했는가?“고 물었을 때 집집마다 방문하여 1백 명을 만났다고 했으며, 마가복음과 감리교교리문답을 읽었다고 대답하였다. 무명의 첫 전도부인들은 1888년3월11일에 시작된 여성교회(女性敎會)의 전도부인(傳道婦人, Bible Woman) 2명이며, 딸이 이화학당에 다니는 학생의 어머니들로써 스크랜튼 여사의 주택에 살며 돕던 분들이다. 두 명의 전도부인은 1886년 6월, 이화학당(梨花學堂, Pear Flowers School)의 첫 고정학생인 “별단이”와 두 번째 고정학생인 “꽃님이” 어머니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꽃님이 어머니는 1886년 여름 콜레라로 인하여 딸과 함께 버려져 있던 분이었다. 스크랜튼 의사가 이들을 병원에 데려다 치료하며 돌보아 주어 목숨을 건진 모녀(母女)였다. 꽃님이 어머니는 딸을 이화학당에 맡겼고, 자신은 스크랜튼 집에서 일하며 살았다. 그러나 버려져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과 딸을 구해 준데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넘쳐있었고, 딸을 맡아 교육시켜 주는데 더욱 감격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사랑을 선교사들의 믿음에서 온 것인 줄 알게 되었으며, 복음으로 형제자매가 된 것도 알았다.(참조, 鄭忠良;梨花八十年史, 梨花女大 1966. p45-46. 이덕주, 메리 스크랜튼, 이대2010. pp67ff) 여성성교사회(WFMS)의 보고서에는 이드루실라(Duscrilla, 이경숙) 씨가 전도부인으로 이름이 밝혀졌지만, 드루실라는 스크랜튼과의 첫 만남이 1889년 4월이었고, 9월에 세례를 받았으며, 곧 전도부인으로 스크랜튼과 함께 동행하며 순회전도활동 하였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교회 최초 여 교역자, 전도부인은 1888년 3월 11일에 형성되었고, 첫 명칭은 “전도부인”(Bible Woman)이며, 2명의 전도부인은 스크랜튼(M.F. Scranton) 집에서 모인, 여성 주일학교(1888년1월)과 여성교회(女性敎會, 1888년3월 11일)에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참조, 이덕주, 스크랜튼, 공옥출판사 2014. pp189ff)
6. 맺는 말 스크랜튼 여사는 1888년 12월에 여성 전도인 양성을 위해 별도의 큰 가옥, 남대문 안 달성궁을 매입하고 ”전도부인 양성소“(傳道人養成所, The Bible Women Institute)를 세웠으며, 예배당으로 ”달성교회“도 설립되었다. 이 때 스크랜튼 박사도 1893년 달성궁 건너편 상동(尙洞)에 약 2천2백여 평을 매입하여 의료전도의 기지로 삼고 “상동병원”(尙洞病院)을 설립하였으며, 교회도 신축(1901)하고 “달성교회”를 옮겨 “상동교회”(尙洞敎會)라 하였다. 스크랜튼의 “전도부인양성소”는 “감리교부인성경학교”(The Methodist Bible Womem,s Training School)로, “협성여자성경학교”(協成女子聖經學校)로 이어졌다. 우리는 올해(2016년)가 한국기독교에 여 교역자가 세워지고 활동한지 128년 되는 해임을 알 수 있다. 한국기독교는 여 전도사의 헌신과 희생 봉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초기 한국감리교회 형성에 대해 윤곽을 잡을 수 있다. 초기선교는 세 가지 방향, 즉 의료선교(Dr. W.B. Scranton), 복음(교육)선교(Rev H.G. Appenzeller)와 여성선교(M.F. Scranton)로 정동선교기지(1885)에서 삼위일체로 상호연관 협력하여 형성되고 확장되어 나갔다. 초기 한국감리교회 형성을 도표로 작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신학교”(Theological School)는 “배재학당”에서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으나, 감리교 선교부에서 목회자, 전도인 양성 기관으로 “정동 베델”(1887.10.9.)에 가옥을 마련하고 설립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베델 가옥”은 교회의 창립이 될 수 없다. 전도인양성소인 “베델”은 “감리교신학대학 창립일“로 지키고 있으나, 설립과정은 다시 수정하고 밝혀야 한다. ”베델“은 당시 정치상황에 의해 1개월 만에 곧 닫게 되었고,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내에 신학부를 두려고 계획구상은 하였으나, 목회자 양성은 감리교회의 ”신학반”에서 이루어졌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첫 목사안수는 1901년이며, 배재학당 출신이 아니었음은 이를 가르쳐 준다. 감리교회 목회자 양성은 교회에서 출발하여, 신도회, 지방회, 연회에서 권사, 신학반 과정을 거쳐 양성되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감리교회는 신학대학을 나와야만 목회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속회, 주일학교 등에서 충실한 일꾼으로 검증, 선발양성 되고, 전문 신학과정, 지도자 교육과정도 거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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