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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스크랩 이순신(李舜臣) 장군에 대한 사후(死後) 평가
milkyway 추천 0 조회 59 14.08.18 07: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http://todayhumor.com/?humorbest_927655

요즘 영화 '명량' 때문인지 역게가 이순신 장군 이야기로 흥하고 있네요^^



□ 이순신(李舜臣오마주(hommage) 


1.  비변사에서 수군에 거북선을 만들기를 청함.

“옛날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 이순신(李舜臣)은 기이한 꾀를 내어 왜적을 막으면서 바다를 방위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순신이 왜적을 방어하던 법식에 따라 거북선을 만들고 기계를 갖출 일을 
전라 좌수사와 우수사에게 명백하게 지시하소서. ”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 빨리 순신의 거북선을 만들며 무기를 수리하고 사졸들을 훈련시켜 착실히 변란에 대비하기를 
한결같이 순신이 한 것과 같이 하도록 각별히 (전라 좌,우 수사에게) 말해 보내라.” 
광해 14년(1622 임술) 7월

2.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 설치 문제
비변사에서 아뢰기를“...<중략>... 일찍이 들으니, 고(故) 수신(帥臣) 이순신(李舜臣)이 수사(水使)로 있을 때 
여러 섬에다 둔전을 널리 설치하였는데, 이 섬들은 모두 방수(防守)하는 곳이어서 입방(入防)하는 군사들이 대대적으로 농사를 짓되, 
경작과 수비 또는 망을 보는 것도 모두 군사들을 이용하였으므로 
백성들에게는 털끝만큼도 폐해는 없으면서 소득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선책(善策)이라 말한답니다
....<후략>" 
- 인조 5(1627 정묘11

 

3. 임금이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완(李莞)과 공조 참판 심명세(沈命世)를 인견하는 자리.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반드시 먼저 중국군의 환심을 산 다음에야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주선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상국인을 대우할 때만 그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이 중국 장수와 함께 일을 할 적에도 그들의 환심을 얻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중국 사람들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이순신은 중국 사람들을 잘 대우하였는데, 호궤할 때도 매우 성대하게 했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이순신을 이야(李爺,여기서는 이씨어르신 정도로 보면됨)라고 불렀다 합니다.” 
- 인조 2년(1624 갑자) 11월

4. 당시 군용 선박에 대한 제작 기준과 운용에 대해 말들이 많았음.

비변사에서 "?전선의 체제의 척수(尺數)를 줄이는 것에 대해 전후 갑론 을박(甲論乙駁)이 한두 번뿐만이 아니었으나, 

필경 옛날 체제대로 하기로 한 것은 대체로 이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남긴 제도로서 

충무공이 적군을 깨뜨린 공이 대부분 큰 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더구나 조선(漕船)과 상선(商船)은 모두 급할 때 사용할 수 있는데 옛날의 제도를 고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박할 곳을 옮겨 설치하는 건은 전에 이미 각도의 수영에 알리어 편리에 따라 포구를 파라고 하였으니, 

지금 다시 논할 것은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두말 없이 그렇게 하라고 하심. 

- 정조 10년(1786 병오) 10월

 

 

□ 임금이 경연을 마치고 승지 이경억(李慶億)에게 이르기를,

“아침에 이순신(李舜臣)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 효종 10년(1659 기해) 윤3월


□ 영조 임금 시절
?황해 수사(黃海水使, 황해도의 수군 책임자)가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황해도에 돈과 재물 등 예산이 부족해서 
관할 구역의 군용 선박 제조에 어려움이 있고 중앙 정부에서 좀 지원을 해달라고 보고를 함. 
영조 임금이 말하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戰般)을 만들었었는데 
옹진(瓮津)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帥臣)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라고 콩깍지 까이듯이 폭풍 까임을 당함. 
여기서 까임을 당한 당사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였음. 
- 영조 20년(1744 갑자) 2월 

 

 

□ 충무공 덕후 정조 대왕


1. “근래에 이 충무(李忠武, 이순신)의 유사(遺事, 기록)를 보다가 노량진 싸움을 추억하면서 

저도 모르게 넓적다리를 딱! 치며 길게 탄식하였다."

 

2. 정조 대왕은 이순신과 관련된 여러 서적을 탐독 하는 버릇이 있었음.


3. 당시 이순신 장군의 공식적인 존칭은,
"유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 공신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덕풍 부원군 행 정헌 대부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겸 삼도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有明水軍都督朝鮮國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德?府院君行正憲大夫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制使忠武公李舜臣)

4. 그때까지 좌의정으로 추증 되어 있던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업그레이드 시킴.

5. 임금이 직접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탁월한 공적과 충절을 생각하여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전례가 드물게 친히 지어줌.

6.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를 임금의 명으로 발간하고 임금이 개인 사비를 보태어 책을 인쇄하게 함.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는 14권 8책의 활자본으로 출판 됨.

7. 충무공 덕후인 정조 대왕 덕분에 당시 이순신과 함께 참전 하였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후손들이 벼슬을 받는자가 많았음.


□ 기타 여러가지 잡설
1. 이순신이 죽고 난 뒤 수백년 동안 이순신의 생존 당시 조금이라도 연고가 있던 지역에서는 이순신을 모시는 사당 건립이 많았음.
사당이 남해안과 이순신의 고향 등 여러군데 우후 죽순으로 난립하여 서로 자기네 사당이 원조라고 우기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함.
"우리가 원조할매국밥집임!!!"

2. 순조 임금 시절. 당시 거제 등 남해안 일대에는 여자들이 흰치마를 입는게 대대로 유행이었임.
유행의 시발점에 대한 증언은 순조 8년(1808년) 수군 통제사 였던 이당(李?)의 말로 미루어 볼 수 있음.
"충무공의 상(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때문에 200년 이상 지속되는 유행 패션임.

2. 지금 경상남도 통영(統營)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 통제사 군영이 있던 자리의 명칭이 이어저 오다가 
1914년 통영으로 지명이 공식적으로 지정됨.

3. 백원짜리 동전의 이순신
이 동전의 성분은 구리 75%, 니켈 25%. 1970년 11월 30일 부터 한국은행에서 발행됨.

4. 일제 치하인 1935년 동아일보에서 신년 특집으로 선정한 "세계에 자랑할 보배 열가지"
해인사 팔만대장경
세계최초 고려 목판 활자
세계최초 천문 관측 기구 경주 첨성대
세계최초 기우 측정 측우기
석굴암
고려자기
금강산
세계최초 금속활자 
세계최초 잠항선 이순신의 거북선
세계최초 비행선 정평구의 비차
1937년 이후 일제의 거지 같은 조선민족의 본격적인 문화 말살 정책으로 세계에 자랑할 보배 따위는 없어지게 됨.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일본놈들은 아주 많이 나쁜놈들임.


예상 못한 결말이네..."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일본놈들은 아주 많이 나쁜놈들임."
존칭쩌네요.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생각나네요..
비차는 뭔가요? 첨들어보네요 ㄷㄷ...
1/ 비차는 정평구라고도 불린 하늘을 나는 수송선(?)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약 20여명?정도를 성 내부에서 성 외부로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기록이 있으나, 비차에 대한 명확한 설계도가 없어서 라이트 형제보다 먼저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설에 힘을 실어줄 수 없는 실정입니다.
조선의 정조께서 적은 이순신 신도비 中
"슬프구나! ...(중략)... 8년 동안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지키면 반드시 보전하여서 나라의 형세가 그 강하고 약함에 따랐고 적의 예봉은 그에 의해 좌절되어 온 국토에 굴을 판 교활한 오랑캐(일본군)들로 하여금 그 뜻을 피지 못하게하여서 우리 열조의 중흥의 공로에 기틀을 만든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에 힘입은 것이니 충무공에게 특별히 명을하지 않고 누구에게 할 것인가?
이순신의 졸기를 듣고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은 대성통곡을 했습니다.(얼마나 놀랐으면 의자에 떨어져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다고 했을까요.)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고향으로 옮겨질 때, 모든 군사들이 통곡을 했다고 하며 운구행렬이 지나는 곳마다 모든 백성들이 수레를 붙잡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술조차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이순신의 고향 아산에서 제문을 지어와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조선의 조정도 이순신 사후에 어떤 자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더라도 이순신의 공적에 대해서 논란이 없었습니다. 논란이 있었다면 "이순신의 후손에 대한 '대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였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이기고 죽었으며, 죽어서도 이겼다."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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