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프랑켄슈타인을 위하여 (속)
#1. 우주력 6세기. 화성. 크류세 요새
눈이 온다는 것은 별이 호흡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크류세 요새의 폐허에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액화가 없는, 내린 즉시 기화하는 화성의 눈…… 지구교 화성회당 총사제 론078과 타이탄의 장미장원 소속 용병 론773을 따라 요새의 폐허를 찾은 우주 선교사 수선013은, 몸에 닿는 공기 눈의 감촉에서 얄궂은 감동을 얻고 있었다.
“1세기 때, 처음 눈을 맞은 초기 이주민들은 이 감촉을 여인의 품에 비유했지요.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당시만 해도 남녀 간의 교합이란 생존의 으뜸 목적이었으니까요.”
옛 지구 어느 나라의 언어로 황금의 땅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크류세 평원은 지구 최초의 화성행 유인 우주선이 상륙했던 곳이었다. 그곳에 요새를 만든 사람들은 초기 이주민들로 독립전쟁 막바지에 사라졌다고 했다…… 영통회의 통제실에서 정보를 얻기 전 수선013의 크류세 요새에 관한 지식은 거기까지였다.
“곧 살육이 시작될 테니 보아두시게.”
론773이 수선013에게 주의를 주었다.
#2. 앞 장면의 연속. 찰나 후
아무 것도 없던 공간에 요새가 나타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장을 갖추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떠오른 공간의 중심에 수선013은 놓여 있었다.
“나는 환상을 본 것인가요?”
옛 요새의 경치가 홀연 사라진 폐허 위에서 수선013이 물었다. 론078과 론773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과거를 보았어.”
“어떻게 그런 일이?”
“여기는 우리 론가의 성지일세. 우리는 그 증인이고. 당신은 우리의 기억을 보았던 걸세. 계속 보시겠나?”
수선013은 침묵으로 긍정을 표시했다.
#3. 화성. 지구력 2096년. 크류세 요새. 론773의 기억 재생
크류세 요새는 낮은 언덕을 품에 안고 만들어진 고대 성곽 형식의 석조 건물이었다. 물을 품지 못하는 크류세 평원의 붉은 색 대지위에 용케도 장미가 자라는 화원이 펼쳐져 있었고, 그 중심에 요새가 있었다.
“화성 식민지를 독립시키겠다고 천방지축 날뛰는 세력이 있지 않았다면 진작 철수했을 곳이죠. 생산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불모지가 황금의 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아이러니죠.”
안내역을 자처한 비행정 조종사의 설명이었다. 크류세 요새는 화성 특유의 붉은 색 대지 위에 홀연 떠오른 고성과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영통회의 김진욱입니다. 도움을 바라고 찾아왔습니다.”
김진욱을 맞은 것은 일단의 저항군들이었다. 그는 영통회의 무리들과 더불어 피난처를 찾는 중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화성독립연맹 소속 저항군 소령 오신이고, 이 친구는 제 동료인 물리학자 알렉산더입니다.”
저항군의 두목 격으로 보이는 짤막한 키에 단단한 체격을 가진 30대의 남자가 큰 키에 마른 체격을 한 기술자 풍의 남자를 소개하고 있었다.
“지구정부 화성주둔군의 공세가 만만찮던데 용케 피하셨군요.”
알렉산더로 소개받은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김진욱은 호쾌한 사람들이다 싶어 솔직히 고백했다.
“많이들 잡혀갔습니다. 작심하고 사냥을 하고 있어요.”
#3. 지구력 2096년. 화성. 장미장원. 앞 장면의 직전 시간
“신은 항상 기적을 베풀고 계십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저 푸르고 붉고 검고 하얗고 노란 원색의 세계…… 기적이 충만해 보이지 않습니까?”
영통회의 회합이 열린 장미장원의 누각 안에서 총수인 김진욱은 말했다. 주변에 가득한 장미꽃이 회합의 의미를 축하해 주는 듯 보였다. 장미장원은 화성생명법인의 식물원으로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덩굴장미의 경연장이었다.
“우리는 기적을 찾아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기적의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기적의 증거이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기적의 완성과 같은 것입니다.”
영통회는 지구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나그네족이 주축인 단체였다. 나그네족은 세류의 흐름에 적응치 못한 이단자들의 집단으로 자기류의 자유를 찾아 지구 세계 곳곳을 떠돌다가 이제 우주로 나선 길이었다.
“우리는 지금 화성에 왔습니다. 더 많은 우리가 올 계획이고, 더 멀리 갈 꿈을 갖고 있습니다. 화성은 신천지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아닙니다.”
화성은 2096년의 지구 세계의 외계 식민지 중에서 가장 유력한 별이었다. 화성 외의 유일한 유인 행성인 금성은 연구기지 성격의 소규모 세계가 이루어진 정도였고, 토성의 위성 타이탄과 목성의 위성 유로파는 희귀 광물자원의 공급처로서 각광을 받고 있었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가장 환경 조건이 좋은 화성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우리는 우선 목성 궤도 근처의 소행성지대에 갈 것입니다. 그곳에서 잠시 인연 있는 이를 만난 후에, 토성의 위성 타이탄이 다음 목표가 됩니다.”
토성의 위성 타이탄은 최근에 중간물질 인드라가 발견되어 가장 각광받는 신천지였다. 그리고 목성 궤도 근처의 소행성지대 트로이 행성군에서는 ‘이모님’이 탄 타임캡슐이 인공행성이 되어 공간을 떠돌고 있을 것이었다.
같은 시각, 지구별에는 또 하나의 인연이 떠돌고 있었다.
#4. 지구력 2096년. 어느 대도시 근처의 공원묘지
한 소녀가 무덤가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소녀는 손에 황금색 장미꽃을 한 송이 들고 있었는데, 온몸은 온통 흙투성이였고 손톱 밑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꽃 이파리는 깨끗했다. 소녀는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처해 있는 환경이 아름답지 못하여 사람들의 경원을 샀다.
사람들이 지나다가 던져 주는 음식은 충분한 식사가 되지 못했다. 그나마 참배객이 없는 날은 소녀의 식사가 끊기는 날이었다. 소녀는 무덤 옆자리를 떠나지 않아 식량을 구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참배객이 없는 날이 여러 날 계속될 때면, 열흘이고 보름이고 계속 굶었다.
그런데도 소녀는 죽지 않았다. 몰골만 앙상해져서 살아남았다. 흑장미의 장미극단이 그 도시에 들 때까지 소녀를 보살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름이 뭐니?”
검은 색깔 장미 문양이 선명한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성의 아빠에게 데려가야겠구나. 아빠가 고쳐 주실 게다. 네가 막내가 될 모양이다.”
검은 색깔 장미 문양이 그려진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의 뒤에서는 하얀색과 푸른색의 장미꽃 문양이 그려진 옷을 입은 두 여인이 어두운 눈빛으로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5. 2096년. 화성. 화성생명법인
“난 유라다. 셋째지. 그 두 잘난 여자들은 큰언니와 둘째 언니. 난 불치병으로 냉동인간이 되어 20년쯤 잠을 잤는데, 아빠가 병을 고쳐 주셨다.
둘째 언니는 너하고 같다. 불량재생 수술의 희생자. 큰언니는 우리와 많이 다르지만 차차 알도록 하고, 우선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 네 갈 길을 정하도록 해라.”
유라의 뒤를 따라 공연장에 들어선 순간, 엘리자벳의 인생은 결정되었다. 장미꽃이 가득 장식된 무대 위에서 검은색 장미 문양이 그려진 무대 의상을 입은 긴 머리카락의 여배우가 손끝에서 장미꽃의 꽃망울을 터뜨리는 마술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술을 하고 곡예를 하고 연극을 한다. 공연이 없을 때는 장미를 가꾼다. 큰언니는 네가 우리와 같은 부류라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힘들 거라고 하더라마는, 결정을 강권하지는 말라 하셨다.”
엘리자벳은 화성생명법인의 병상에서 깨어나기 이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 못했다. 자신이 공동묘지의 무덤가에서 좀비로 살고 있었고 묘비문에 엘리자벳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 그렇게 된 경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장미 문양의 옷을 입고 있는 여인들이 아빠로 부르는 노과학자에게서 대강 얻어들은 몇 마디 말이 그녀의 인생의 전부였다.
“너는 내가 지구에 남긴 지적 소유권의 산물 중 하나인 것 같다. 내 독보의 인간재생술의 소유권을 빼앗길 때 장미꽃을 사랑하는 유전인자를 낙관 삼아 심어 두었는데, 너는 그 기술의 영향을 받아 재생된 선천성 뇌기능 장애아인 것 같다. 그 때에 지구에 남긴 기술 중에는 너처럼 백치로 태어난 사람을 재생하는 방법도 섞여 있었다. 누군가 그 기술을 원용하여 선천적 뇌기능 장애아인 너를 고치려고 시도한 듯한데, 재생인간의 생명력이 정상인의 그것과 같지 않음을 모르고 가사상태의 너를 생매장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썩 뛰어난 솜씨는 아니었던 듯하다.”
엘리자벳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았음을 알았다. 그녀는 기꺼이 ‘아빠’와 ‘언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6. 지구력 2097년. 지구. 앞 장면의 1년 후. ‘4색 장미극단’의 공연 무대
“엘리자벳입니다. ‘4색 장미극단’의 막내로 이번에 새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노란색 장미꽃이 그려진 승마복을 입은 소녀가 공연 시작 전의 무대 인사를 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에 의하면, 소녀는 마상곡예를 할 예정이었다.
소녀-엘리자벳은 말 위에 올라 자신이 가진 유일한 기억의 세계를 떠올렸다. 공원묘지의 나무 그늘 저편으로 보이는 경치는 귀족들의 사냥터였다. 날아갈 듯이 차려입은 선남선녀들이 말을 몰아 사냥감을 쫓고 있었다. 사냥꾼의 시야 끝에서 출발하는 사냥감은 벌거벗은 소년일 때도 있었고, 갑주를 입고 무장을 갖춘 청년일 때도 있었다. 언제나 사냥꾼의 승리로 끝나는 그 죽음의 경주에서 엘리자벳은 말 위에 탄자들의 권위를 보았고 쫓기는 자의 고독한 질주를 보았다. 쫓는 자들의 환호와 쫓기는 자들의 비명이 진종일 어울린 후의 저녁이면, 엘리자벳은 그들이 버리고 간 장미꽃을 주웠다. 잘난 남성들이 잘난 여성들에게 사냥 성공의 기쁨을 표시하기 위해 바친 꽃들이었다.
엘리자벳의 마상 곡예는 그래서 늘 거칠었다. 엘리자벳의 손에 들린 활과 화살은 늘 과녁의 중심을 비켜가기만 했다. 사냥꾼의 화살이 사냥감의 등에 박힐 때 내지르던 단말마의 비명소리는 즐거운 추억이 아니었다. 그것이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 사냥감이었고, 비명소리가 녹음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그 기억을 새기던 시절의 엘리자벳은 인간과 인간형 로봇을 구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기피하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엘리자벳이 놓친 과녁에 구멍을 뚫어 주는 건 유라의 몫이었다. 유라는 경기관총을 사격용 소총을 쏘듯 다루어 탄통 하나를 다 비울 때까지 한 구멍에 몰아넣었다. 불치병자로서 새로운 의술이 개발될 때까지 2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냉동인간이 되어 냉동 캡슐 속에서 살아온 유라는, 꿈인 듯도 하고 생시인 듯도 한 기억의 파편들을 기관총탄을 명중시키는 것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전라의 몸으로 투명금속제의 캡슐에 담겨 있는 유라를 보고 많은 남성들이 군침을 삼켰었다. 학문적인 목적으로 조관(調觀)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들의 사내는 본능으로 꿈틀거렸다. 매일 냉동실에 들러 자신의 나신을 그리던 견습화가가 있었음을 느꼈는데, 동면중에 꾼 꿈이었는지 실제 있었던 상황이었는지 확인이 안 되는 사실이지만, 그의 남성이 항상 자신의 여성을 향해 발기해 있었음을 느꼈었다. 유라의 경기관총이 오로지 하나의 과녁만을 겨누어 파괴를 추구하는 데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이 있었다.
두 자매의 심중에 숨은 비밀을 털어놓게 만든 여인은 샤넬이었다. 샤넬은 남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독심술사로서 자신의 자매들을 무대에 세워 최면상태에서 부끄러운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었다. 그녀 자신이 누군가에게 마음이 읽혀버린 탓에 스스로 생명을 끊었던 과거 때문이었다.
사랑의 대상이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일 때 사랑하는 사람의 절망은 컸다. 샤넬은 의부를 사랑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양딸을 의부는 개조 프로그램에 넣어 살려내려 했다. 그녀의 의부는 재생의료학자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신의 딸의 불치병을 고쳐줄 만한 능력이 없는 아마추어 과학도였다. 열의만은 대단해서 수없이 약물을 투여하고 몇 십 차례고 수술을 시도했다. 샤넬은 의부가 낙담하는 모습을 눈에 익히며 몸이 자라고 마음이 자랐다.
샤넬은 의부의 열정에 답하고 싶었다. 벌떡 일어나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다 자란 병자 샤넬의 행동 공간은 침실 안이 전부였고, 그녀의 기억은 어릴 적부터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 전부였다. 다만 어릴 때 의모가 의부를 사랑할 때 의부가 즐거워하던 장면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샤넬은 그나마 기억이 있는 걸 다행으로 알고 흉내를 내려 했다. 엄마가 하는 것처럼 사랑을 하여 즐겁게 해주려고 잠든 의부의 바지를 벗기고 남성을 보아버린 날, 그녀는 자살을 시도했고 깨어난 곳은 화성생명법인이었다. 의부는 그녀의 행동에 놀라 질겁하고 뿌리쳤던 것이다. 즐거워할 줄 알았던 샤넬은 자신의 행동에 분노하는 의부에게 놀라 스스로 생명의 기운을 멈추었다.
샤넬의 불행은 거울을 본 적이 없었던 데 있었다. 그녀의 양부모는 기형의 아기를 입양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실험을 하는 것으로 생체예술의 흉내를 내려 들었던 아마추어 예술가였다.
샤넬은 의부의 마음을 읽지 못한 한을 독심술을 연마하는 것으로 풀었다. 다행히 샤넬을 치료한 화성생명법인의 총수 ‘교수’는 재생 육체에 당자가 원하는 회로를 만들어주는 법을 알았다. 샤넬이 ‘4색 장미극단’의 무대 위에서 자매들의 마음을 읽는 공연을 하거나, 관객 중에 자원한 이의 전생을 읊어 댈 때는, 그녀의 가슴속에 숨은 지옥이 울었다.
“‘뫼비우스의 띠’를 둘로 가르면 한 바퀴 뒤틀린 3차원이 만들어집니다. 다시 둘로 가르면 여러 개의 고리가 얽혀 다차원의 세계가 나타납니다. ‘뫼비우스의 띠’가 영원한 평면 세계의 실증이라고 하니, 우리는 스스로 온갖 우주를 품고 있는, 다차원의 복잡계 속에 살고 있는 마술 같은 생명체인 것입니다.
눈속임의 손장난이 아닌 진짜 마술은 그와 같습니다. 마술은 우리 안에 있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방법으로 나타내는 예술입니다.”
흑장미의 마술 공연 전에는 언제나 짧은 설명이 있곤 했다. 그녀 자신 마술의 소산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마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존 이유를 납득하고 싶은 본능의 발로였다. 자신이 생명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조생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흑장미는, 자신 안에 마술에 관한 온갖 기능을 심어 꽃을 피우고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투명 망토 속에 몸을 감추곤 하여, 순수 자연산 생물들에게 혼돈을 선물했다.
‘4색 장미극단’은 대표인 흑장미의 이름을 빌어 검은 색깔 장미를 상징을 삼았다. 흑, 청, 백, 황, 네 색깔의 장미꽃을 각기 색깔로 삼는 네 여인은, ‘4색 장미극단’을 만들어 공연여행을 다니는 틈틈이 화성에 들렀는데, 지구 곳곳에서 장미 묘목을 수집하여 농원을 만들었다. 그녀들의 생명이 재생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교수’가 네 자매의 생일 때마다 꽃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미안하구나. 네게 줄 선물이 마땅한 게 없어 네 이름을 빈 장미꽃을 만들어 보았단다. 천 번째 만에 성공을 보았으니, ‘검은 장미1000’은 어떻겠니?”
‘화성의 검은 장미1000’은 흑장미에게 주어진 선물이었다. 아울러 네 자매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화성의 검은 장미1000’의 탄생 비밀 속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숨어 있었다.
“‘검은 장미1000’은 지구계 밖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인조 식물이란다. 우주의 온갖 환경에 적응하여 유전자가 자동 전환되는 생존 메커니즘을 갖추었고, 주인 되는 인간에게 충실할 수 있도록 사랑회로를 가졌단다.”
엘리자벳이 자매 중의 하나로 인정받기 전의 화성생명법인은 그러한 곳이었다.
#7. 장미장원. 영통회의 회합. #3의 계속
“다차원계에 대한 연구는 20세기말부터 있었지만, 책상물림들의 공론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우리 우주가 차원과 차원의 상호 교환으로 이루어진 복잡계라는 이론이 확립되었는데, 우리 나그네족의 한 선배의 독자적인 연구의 결과였습니다. 영통회의 전대 총재이기도 한 그 분의 연구 덕택에, 우리는 모든 차원이 혼재(混在)되고 더불어 영계를 통해 일통된 다중적 구조의 복잡계가 우리의 우주임을 알았습니다. 우리 영통회는 지구라는 닫친 세계를 떠나 영혼간의 통신이 허용된 우주로 나섭니다.”
화원의 곳곳에 앉아 연단의 김진욱을 보는 이들 중에 흑장미가 섞여 있었다. 전생테 002를 안고 있는 흑장미는 자신의 안에 숨은 두 가지 의지 중의 하나가 김진욱에 대한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흑장미002의 두 의지 중에 ‘이모님’으로 불리는 18세기 청황실의 황녀였던 여인의 의지가, 인조 생명체 흑장미의 정신을 서서히 정복하고 있었다.
“가야 할 곳이 결정된 셈…… 나는 이미 내 의지를 찾았어.”
전생테를 얻어 흑장미002가 된 그녀는 자신이 누구에게 소속이 된 여자인지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4색 장미극단’을 이끌고 지구별 곳곳을 헤맨 방황의 결과였다.
“아버지는 내 운명을 결정해 두셨어. 나는 따라야해.”
‘4색 장미극단’이 지구별 순회공연을 중단하고 화성으로 돌아오게 된 건 그들의 아버지 격인 ‘교수’의 죽음 때문이었다. 화성생명법인의 총수 ‘교수’는 그가 귀여워하던 ‘판다 제4교배체’에게 습격을 받아 어이없이 죽었던 것이다.
#8. 지구력 2100년. 화성생명법인
김진욱과 간디는 상주가 되어 ‘화성생명법인’의 총수 ‘교수’의 장례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흑장미002를 비롯한 ‘4색 장미극단’의 네 자매는 소복을 입고 무덤에 드는 의부를 전송했다.
“그분은 자신의 유전자가 재생되는 걸 꺼리셨어. 자신처럼 불운한 재생의료학자가 다시 세상에 나오는 걸 원하지 않으셨던 거지.”
간디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는 ‘교수’의 유언으로 화성생명법인의 다음 대를 맡을 책임자로 낙점되어 있었다.
“복제 재생의 시대는 사실상 그분에 의해 열린 거나 다름없어. 스스로는 다음 생을 마다하셨지만 지구인은 누구나 기억을 보존한 채로 새 육체를 얻는 꿈을 꾸게 되었지.”
김진욱은 간디의 말을 듣는 동안에 ‘교수’가 생전에 했던 말을 차례로 떠올렸다.
“내 딸은 누군가를 일념으로 사랑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는 로봇에서 출발한 생명일세. 내가 내 딸에게 적용시킨 신형 사랑회로는, 스스로 선택권을 행사하는 기능이 강화된 외에, 일단 사랑의 방향을 정하면 일생 변치 않는 기능이 있네.”
지금의 흑장미는 ‘이모님’과의 합체였다. 김진욱은 ‘이모님’의 삶의 의욕이었던 사람이었다. ‘교수’는 생전에 말했었다.
“우성이 나타나면 곧 전체를 지배하게 되네.”
흑장미의 변신은 ‘이모님’이 과거의 흑장미를 대체하여 흑장미의 안에 나타난 현상으로, 우성의 출현으로밖에는 이해가 불가해한 사건일 것이었다.
“교수가 사고를 당한 경과는 알고 있겠지. 지구에 있는 내 동료가 강력한 공격의지를 심은 ‘판다 제4교배체’를 화성생명법인에 맡겼다고 전해왔더군. 주문자가 류우의 아버지 선대 류우라는 사실도.”
간디는 차마 꺼내기 힘든 말을 하는 양으로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김진욱은 간디의 다음 말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류우, 그 친구가 달라졌어. ‘판다 제4교배체‘가 화성생명법인에 주문되었을 때, 류우 수상은 이미 고인이 된 후였네.”
김진욱은 흑장미의 ‘4색 장미극단’이 지구 순회공연을 핑계로 화성을 떠날 때, 자신과 류우에게 보내던 복잡한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교수는 평생 지옥을 안고 산 사람이었어. 교수는 자신의 여자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일세. 그는 지체장애인으로 자신의 외모에 자격지심을 가져 스스로 자신을 고칠 방법을 찾았어. 자기증식피부와 재생장기의 연구를 하여 생체로봇을 만들어 내려 했는데, 최종 실험의 대상으로 불치병자였던 자신의 여인을 택했고, 실험에 실패한 후 자신의 지옥을 만들어 그대로 안주했던 것이네.”
#9. ‘교수’의 독백. 간디가 전한 이야기
파괴예술, 특히 생체예술이 시작된 이유는 인간이 매일 조금씩 죽어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떤 대단한 인간도 죽음은 피하지 못했다. 인간은 기억의 단절이라는 최악의 모습으로 영원히 잊어지는 완전한 소멸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피할 방법을 찾으려 들었다. 부활의 의미는 육체적인 회생에 있지 않았다. 기억이 살아나야 한다는 것,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자 하면서도 정작 잊혀지는 것은 싫어했다.
교수는 웃고 있었다. 내 딸은 사랑을 하고 있어. 오직 한 사람만을. 나는 완벽한 사랑회로를 가진 프랑켄슈타인을 만드는 데 성공한 거야.
#10. 2101년 6월. 화성. 지구연방군 화성주둔군 사령부
“영통회의 김진욱이 크류세 요새의 반란군들과 합세를 했습니다. 농성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구군 사령관 ‘도살자 헨리’가 류우에게 보고를 올리듯 말했다. 류우는 무관의 보좌관으로 사령관의 보고를 받는 묘한 위치의 존재였다.
“화성자치정부의 간디도 합류를 한 것 같습니다. 현재 화성에 있는 불온세력 중에서 화성생명법인을 뺀 모두가 크류세 요새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항을 폐쇄하여 영통회의 총회에 참석할 지구 쪽 나그네족들을 막은 게 효과를 본 듯합니다.”
화성행 우주선을 탈 수 있는 지구의 공항들은 영통회의 총회에 참석하려는 나그네족들에게 점령되어 폭동 일보 직전의 상태에 있다고 하였다. 본래의 영통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모든 나그네족 계열의 인사들이 화성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구군과 영통회의 대결에서 저항군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집결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저들이 모두 크류세 요새에 모인 후, 공항을 열고 나그네족들을 통과시키십시오. 길은 요새로 통한 외길이면 됩니다.”
류우는 나직하게,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11. 화성. 같은 달. 크류세 평원
화성자치정부의 깃발을 단 군용 비행정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태우고 크류세 평원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고대 지구 어느 나라의 언어로 황금의 땅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크류세 평원은, 지구 최초의 화성행 유인 우주선이 상륙했던 곳으로 물을 찾지 못한 불모의 땅인 탓에 초기 화성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화성은 우리가 개척해 온 땅입니다. 독립을 방해하겠다고 천방지축 날뛰는 세력이 있지 않았다면, 진작 개발되어 본래의 이름대로 황금의 땅이 되었을 곳이죠. 스스로 생산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군인들이 정의를 집행하겠다고 남의 땅을 점령한 현실은, 어느 시대에나 흔한 역사의 부조리일 것입니다.”
안내역을 맡아 마중을 왔던 비행정의 조종사가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지구인 최초로 화성에 발을 딛었던 우주비행사의 후손이라고 소개했다.
“내 할아버지와 내 친한 친구의 할아버지가 화성의 첫 번째 주민이었습니다. 옛날 지구의 대항해시대에는 이름 없는 섬은 첫발을 딛은 사람에게 주인 될 권리가 주어졌다고 들었습니다만, 화성 전체의 소유권을 주장해도 좋을 사람들에게 노예생활을 하라니, 우리가 화를 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크류세 요새는 화성 특유의 붉은 색 대지 위에 홀연 떠오른 고성과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요새 내의 온도와 공기를 보호해 주는 차단막이 열리고 비행정이 착륙했다. 일단의 저항군들이 사람들을 맞았는데, 그 선두에 김진욱이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흑장미 님과 ‘4색 장미극단’의 여러분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들 만세를 불렀습니다. 나는 화성독립연맹 소속 저항군 소령 오신이고, 여러분을 모시고 온 친구는 제 동료인 물리학자 알렉산더입니다. 우리의 대장이신 김진욱 님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저항군의 두목 급으로 보이는 짤막한 키에 단단한 체격을 가진 30대의 남자가, 자신과 비행정의 조종사를 한 묶음으로 묶어 소개말을 하였다. 그가 대장으로 소개한 김진욱은 이미 흑장미를 맞아 손목을 맞잡고 있었다.
#12. 2096년. 화성. 크류세 요새. #3의 연속 장면
오신과 알렉산더는 김진욱에게 저항군의 총수가 되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김진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옥의 이유를 밝힐 생각은 없었지만, 부득이 변명의 말을 해야 하였다.
“나는 한 사람의 예인으로 사는 삶에 만족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화성 식민지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줄 능력도 없거니와, 관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내게는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렇게 단호히 끊기는 하였지만 김진욱은 그들이 자신과 같은 나그네족의 한 부류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가장 자유로운 신분임을 자랑하는 나그네족은 김진욱의 조부와 증조부가 기둥을 세운 자유주의자들의 집단이었다. '완전한 자유는 자유라는 틀 자체가 거부되는 어떤 것’이라는 주장이 나그네족의 논리였고, 김진욱이 이끌고 있는 영통회 운동의 핵심 이론이기도 하였다.
김진욱의 가문은 대대로 파괴예술을 추구하여 이단시되는 전통을 잇고 있었다. 김진욱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아버지의 대에 끊긴 가문의 기질이 자신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자인하고 있었다. 자신의 환상극이 항상 일상의 틀을 벗어난 초자연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결국 저 사람들과 한 배에 탈 수 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지레 체념을 한 것이 김진욱이 생각하는 자신의 미래였다.
#13. 2101년 12월. 크류세 요새. #11의 연속
“아직 길이 열려 있을 때, 보낼 사람은 보내야 합니다.”
흑장미002를 대신해서 샤넬이 말했다. 크류세 요새가 지구군의 통제 아래 놓이자 급히 구원선을 끌고 달려온 화성생명법인의 사람들 속에는 흑장미 네 자매와 샤넬의 연인인 코넬이 있었다.
크루세 요새를 포위한 지구군이 길을 열어 통행을 허락한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김진욱과 간디를 비롯한 간부진들은 요새 내의 상황실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나그네족들을 모니터 화면을 통해 보고 있었다. 지구군이 포위망의 한 쪽을 풀어 공항으로부터 들어오는 나그네족의 무한 유입을 허용한 이유를 간부진들은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남겠네. 여러 사람을 지구까지 데리고 가는 역은 자네가 맡아 주었으면 좋겠어.”
김진욱이 간디에게 말했다. 크류세 요새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화성생명법인의 전용 우주선은 소형 행성간 여객선으로 태울 수 있는 인원은 한계가 있었다. 김진욱은 가능한 한 많은 나그네족을 지구로 돌려보낼 작정으로 노발대발 반발하는 간디를 설득하여 책임을 맡겼다.
(훗날 트로이 행성군의 ‘이모님’을 찾게 되어 재생 수술을 할 때는, 환상극 속의 이야기나 엮어내는 나보다 재생의료학자인 간디가 더 필요해.)
“저도 남고 싶습니다.”
‘4색 장미극단’의 유일한 남자 연기자였던 코넬이 김진욱과 동참을 선언했다. 그는 ‘4색 장미극단’의 둘째 샤넬과 정분이 생겨 극단이 해체된 후에도 화성에 남아 있었는데, 몇 달 머무는 동안 저항군 간부인 오신과 알렉산더를 좋아하게 되고, 김진욱을 또한 존경하여 우정을 택한 것이었다.
“우리도 남게 해주세요.”
남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은 또 있었다. 코넬의 연인인 샤넬이 머물 것을 청하고, 유라와 엘리자벳이 뒤를 따랐다. 김진욱은 유라와 엘리자벳의 사랑회로가 작동을 하여 저항군의 간부 오신과 알렉산더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까닭으로 그들의 뜻을 더욱 강력하게 거절했다.
“크류세 요새는 곧 실제로 죽고 죽이는 전쟁판이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여러분들이 우리 전력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남으면 방해가 된다는 말에 여인들은 마지못해 돌아섰다. 비행정에 오르는 동료들을 배웅하던 김진욱은 문득 흑장미의 눈물을 본 듯이 느껴졌다. 남을 것을 고집하다가 오신과 알렉산더에게 설득되어 아쉬운 작별을 하고 있는 코넬의 뒤에 조그맣게 숨은 흑장미를 김진욱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14. 2102년 2월. 크류세 요새
요새의 첨탑 위에서 백기가 날리고 있었다. ‘도살자 헨리’는 요새의 정문을 통과하는 전차부대의 선두에 섰다. 지구군 병사들은 머리에 손을 얹은 저항군들을 죄수 수송용 비행 열차에 태우고 있었다. ‘도살자 헨리’는 만족했다. 놈들, 어지간히 저항하더니 꼴좋군. 역시 식량과 에너지의 공급을 끊은 전법이 유효했어. 류우 그 친구, 젊은 친구가 머리는 좋아. 그런데 그 젊은 친구,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을까.
‘도살자 헨리’는 반란군 평정의 공로를 자신에게 양보하던 류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몇 달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류우의 돌연한 변신에 의아해 하면서도, “언론은 우리 류우 가문이 막아 주겠다.”고 다짐한 데 힘입어 크류세 요새의 생명줄을 끊었고, 끝내 항복을 받아냈던 것이다.
“재판은 필요 없다. 모조리 타이탄의 인드라 광산에 팔아넘긴다.”
‘도살자 헨리’가 부하 장교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식량과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해 미라처럼 마른 저항군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순간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저런 친구들을 재판정에 세워 좋을 건 손톱만큼도 없지. 언론에는 승전 소식이나 알리고 저 친구들은 영원히 햇빛을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 해. ‘도살자 헨리’는 통일전쟁 때에 가장 인도주의적인 전쟁을 치른 것으로 명성을 높인 러시아 전선에서의 승전을 기억해 냈다. 그 추운 나라의 친구들은 참으로 쉽게 항복을 했었어. 하기는 내가 내세운 미끼가 근사하기도 했지. 타이탄에 전용 광구를 주겠다는 데 안 끌려 들 수 있나. 인드라의 값이 얼만데. 원래 죄수 만들어 유형 보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던 친구들이라 노동력 걱정은 하지 않더군.
뇌격의 신 인드라의 이름을 빌린 신물질은 인간이 우주로 나갈 수 있는 열쇠가 될 중간물질이라고 하였다. 반물질의 기폭제가 될 수 있는 중간물질 인드라는 태양계 내에서는 토성의 위성 타이탄에서만 생산되고 있었다.
#15. 2102년 3월. 화성생명법인
‘4색장미극단’의 첫째 주인인 흑장미가 장미꽃에 광적으로 집착한다는 사실은 지구 세계의 기담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더불어 그녀가 지구세계 제일의 명문가의 자제 류우와 연인 사이라는 사실도 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화성생명법인으로 돌아온 흑장미를 류우가 장미꽃을 들고 방문했을 때, 정작 상황은 세상의 인식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큰언니가 만나지 않으시겠답니다.”
엘리자벳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류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탈출한 화성생명법인의 대표 간디를 잡을 방법이 있습니다.”
지구군 사령부로 돌아온 류우는 ‘도살자 헨리’에게 말했다.
#16. 2102년 5월. 소행성지대
“긴 여행이 되겠군.”
우주선 상황실의 전망창에 비친 화성을 보며 간디가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크류세 요새를 나와 화성생명법인에 흑장미 네 자매를 내려준 간디와 코넬은 지구에 들러 승선했던 나그네족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한 후, 목성 궤도의 트로이 행성군을 바라고 우주선을 달리는 길이었다.
“소행성지대입니다.”
항해사 역을 자임한 코넬의 보고였다. 간디는 요새에 남은 김진욱을 비롯한 영통회의 인사들과 오신, 알렉산더를 비롯한 화성 출신 저항군들의 최후에 대해서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타이탄이라, 이모님을 찾은 후에……”
간디는 화성생명법인의 ‘교수’에게서 후계자 수업을 할 때, 타이탄의 인드라 광산에서 이송되어 온 환자들을 대한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경험으로 타이탄으로 끌려갔다는 동료들의 운명을 연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드라의 독성은 그것이 중간물질이라는 데 있다. 상물질로 이루어진 인간의 육체를 중화시켜 골격을 약화시키고 조기 노화를 부른다.”
생전의 ‘교수’의 진단이었고 지금의 간디가 염려하는 바이기도 하였다.
“적입니다! 매복입니다! 포위되었습니다!”
간디의 생각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오퍼레이터들의 다급한 보고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소행성지대의 숱한 별들의 그늘에서 중무장한 우주선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달려들고 있었다.
#17. 위와 같은 시각. 지구 우주군 매복부대의 사령실
“내가 소유하지 못할 바이면 다른 누구에게도 주지 않겠다.”
류우는 전망창에 비치는 우주전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전망창 안에서는 화성의 크류세 요새를 탈출한 화성생명법인의 우주선이 지구우주군의 습격을 받아 나포되는 장면이 비치고 있었다.
“음? 무슨 말씀?”
사령관인 ‘정복자 헨리’가 류우의 중얼거림을 듣고 물었다. 류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복자 헨리’는 류우의 입술 사이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전망창 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묶인 몸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18. 우주력 6세기. #2의 연속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지대에서 벌어진 살육 장면까지를 보여준 론773은 기억을 닫았다. 수선013은 500년 전의 기억의 재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실제를 본 양 충격 속에 있었다.
“왜 내게……”
수선013의 질문은 힘이 없었다. 그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곧 종말을 볼 것입니다. 그 영원한 싸움의 끝…… 당신은 증인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시종 표정을 보이고 있지 않던 지구교 화성본부 총사제 론078이 론773을 대신하여 답변했다. 수선013은 그의 심중에 숨은 고뇌를 읽은 지 오래였다.
론078은 흑장미의 동생이 되는 복제인간이었다. 그와 론773을 비롯한 다른 론가의 화성인들은 지구력 2101년의 크류세 요새 절멸 때에 살아남은 화성생명법인의 말손들이었다. 흑장미를 좋아했던 사람들…… 수선013은 론773의 기억을 훔치는 도중에 알지 않아도 될 일들을 더불어 알아버렸다.
교수의 악취미는 많은 외곬 사랑을 낳았지요. 당신도, 그리고 나도…… 흑장미를 좋아한 사람은 많아요. 화성생명법인이 개조한 모든 인간에게 그녀는 여신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녀는 한 사람만을 사랑했어요. 김진욱. 18세기 청황실의 공주의 재생이었던 예진의 영혼이 씌운 슬픈 복제인간 흑장미…… 그녀의 반쪽 예진이 사랑한 사람의 이름이 김진욱이었지요. 두 영혼이 한 몸이 되었을 때 전체를 지배하는 감정은 언제나 사랑…… 비극은 그래서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비극은…… 수선013은 중얼거렸다.
“타이탄이야. 타이탄에 모든 은원의 열쇠가 숨어 있어.”
첫댓글 은근히 빠져들게하는 묘한매력이 있습니다 행복하세여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연결되는 단편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스토리를 이어가는 공상소설 잘 보았습니다. 젊은 분도 아니신 형님이 앞서가는 사고방식으로 이렇게 미래 공상 과학 소설을 집필하고 계신 그 열정과 지식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제 경우엔 상상력 빈곤으로 이러한 공상 소설은 감히 써 볼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30 대만 하더라도 당시엔 이러한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를 좋아했으나 지금은 미래에 관한 상상력과 소재의 빈곤인지 영화, 소설 모두 잘 접하지 않고 있는게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매 번 수고하세요.
읽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장르문학이 모두 그러하겠지만 공상과학소설은 특히 읽는 분의 취향에 의지하는 문학입니다. 현실에 없는 이야기로 스토리를 현실감을 느끼도록 써야하기 때문에 작가의 소양도 문제가 되구요.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등 소위 3대가의 작품을 보면 그 크고 깊음에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미흡한 실력으로 흉내를 내려니 부끄러움 투성이입니다마는, 방랑하는 마음 가족들은 한 식구이려니 하고 써보고 있습니다. 틀린 점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질책해 주세요.
공상 과학 소설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운 제가 어찌 작가 형님의 세련된 작품의 미진한 부분을 집어낼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제 자신에 대해 좀 아쉬운 점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공상소설과 영화를 좋아하여 007 영화 시리즈를 거의 구비해 놓고 옥탑 방에서 재미있게 디비디 영화를 시청했지만 지금은 이 것 저 것 바쁜 나머지 예전의 취미였던 이러한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재미있어야 할 미래 과학 소설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에스에프 소설 매니아 입니다.
아서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뷰나 아시모프의 로봇 같은 작품들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종종 시간 내서 님 작품도 읽어 보겠습니다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