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작은 교회의 대안 : 한우사육
남상교회 목사 장사도
조금씩 귀농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촌교회는 농촌의 공동화와 맞물려서 자연스럽게 비어가고 있는 실정임은 누구라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남은 이들이 적잖게 있음으로 교회의 사역은 오늘의 농촌현장에 맞게 계속되어야 한다. 농촌교회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자립하는 교회와 미자립한 교회로, 그리고 미자립교회는 외부 협력의존교회와 협력은 받지만 자립대안을 가지고 사역하는 교회로 나뉠 수 있다. 남상교회는 그 후자에 해당한다.
염치없는 사람, 염치없는 교회
필자는 타노회에서 목사고시를 끝내고 거창노회로 들어와 줄곧 사역하고 있다. 사역의 초기에 교파를 초월해서 특색있는 농촌교회들을 탐방하고, 나름 성공적인 사역의 열매일 수 있는 농촌관련 학위논문들을 탐독하며 작은 농촌교회의 사역들을 정리해 볼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이렇게 나름 준비해서 사역함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사면초가였다. 괄목할 만한 성장이 없고, 경제권한을 놓아버린 노인들이 주된 사역 대상이다보니 주님께도, 지원하는 교회에도, 염치없는 교회가 되고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한시라도 게으름 피운 적이 있는가? 머리가 나쁜가? 사역에 필요한 지식이 없는가? 기술 부족인가? 태도가 안 좋았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뻔뻔하게도 농촌의 현실과 명운을 같이 할 수 밖에 없는 농촌교회의 여건이 문제라고 치부해버리기로 하였다.
일의 이룸과 더딤이 ‘하나님과 헌신된 사람, 그리고 경제문제’로 귀결되지 않던가. 가난하고 작은 공동체를 놓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위해 기도하던 중에 ‘농촌교회를 섬기며 평생 농촌에서 살아가려하면 농민목사로 살면 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왔는데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교회사역의 이슈를 “자주 자립 공생을 통한 마을복음화”라고 정했다. 독자들은 농민처럼 일하며 목회한다고 해서 목회자의 과업에 소홀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를 이루기 위한 경제적 자립의 방편으로 현재는 영세농 규모이지만 한우사육을 하고 있다.
한우사육 영세농가의 눈물 : 현실과 전망
근자의 한우사육실태를 축산신문과 농민신문에 보도된 자료들을 정리하면, “한때 6∼7개월령의 암송아지가 가격이 300만원에 육박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60~70만원대로 폭락해 번식농가들의 존립을 위협하고 한우 번식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한우 번식기반은 전통적으로 소규모 농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소규모 농가들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50두 미만 농가들은 2009년도 16만3천호에서 지난해는 13만2천호로 급감했다. 그런데 대규모 전업농가로 분류되는 50두 이상 100마리 규모의 농가수는 2009년도 1천300호에서 지난해에는 9천500호로 증가했고 100마리 이상 대규모 농가들도 마찬가지로 3천800호에서 5천400호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국가는 한우사육두수를 현재 300만두를 올해 12월까지 260만두 수준으로 줄여 나가기위한 정책을 펴가고 있다. 그러나 대규모 전업농가의 증가로 사육두수는 좀처럼 줄어들고 있지 않고 있고 사료값은 오르고 있는 실정이기에 영세농가들만 한우가격의 불안 속에서 이 일을 지속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있다. 한우사육에 있어서도 역시 빈익빈 부익부현상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영세농의 한우 사육은 규모의 중 대형화와 국제관계의 변화로 인해 당장은 너무 힘들다. 그러나 그 장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한우사육, 그리고 덤(freebie)
알다시피 농촌교회 그 중에서도 미자립교회가 뭔가를 해본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무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존재하는 동안 영원히 보조금에 의지해서 평생 구제대상인 교회공동체가 되고, 목사는 사명과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입어 내상 깊은 사역자가 되는 과정을 거쳐서 농촌의 공동화에 맞물려서 마을인구의 감소와 함께 사라져가게 될 것이다. 메뚜기 한철이라고 어찌 내 시대만 생각하는 것이 옳은 태도이겠는가. 예배당 공동체의 불멸신화는 없다. 지난해에도 그 이름을 내린 예배당공동체는 부지기수이다. 특히나 열악하기짝이 없는 농어촌 미자립한 공동체의 존망은 더 말할 것이 없다. 무엇인가를 서둘러 준비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우사육의 직접적인 계기는 지금은 천성교회의 원로가 되신 박상율 목사님께서 농어촌위원장이셨던 시절에 ‘미자립 농촌교회 자립 위한 종잣돈 지원 사업’을 하셨는데 이 사업에 연결되어 500만원을 지원받은 것이다. 이 돈으로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산비탈을 100평 규모로 터를 딲고, 소집으로 사용할 비닐하우스 한 동 직접 짓고, 암송아지 두 마리 구매하였다. 물론 카드로 얼마정도는 더 긁어야 했음은 당연하다. 도시나 농촌이나 무슨 일이든 벌이려 하면 500만원이란 금액은 계획된 일을 충당시킬 만큼 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종잣돈이고 생각을 이루어가는 마중물 역할은 충분히 하는 것이다. 우리공동체의 한우사육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로부터 소를 사기는 쉬워도 먹이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나 혼자 먹고 살기도 어려운 판에 대식가를 식객으로 맞은 꼴이 되어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물론 첫경험인 소사육에 관하여서는 새로운 것을 공부해야 하는 부담, 소들이 함께 공생해야 하므로 사료비용 충당이라는 부담이 여간 큰 것이 아니다. 이제는 어미소가 4마리. 올해안으로 번식 가능한 암소 는 6마리로 불어날 것인 만큼 값이 없는 암송아지는 키우고 숫송아지는 내다 판다고 하면 내년부터는 우리들의 형편에는 적지 않은 수입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작금에 있어 교회의 한우사육의 전망이라고 해서 일반 영세 농축가와 다를 것 없이 녹록치 않지만 ① 조사료(풀, 볕짚 등) 확보를 위해 몸을 좀 더 사용한다면, ② 소값의 등락이 오늘만의 일이 아니기에 초연할 수만 있다면, ③ 일년 한 마리 생산의 기술을 터득할 수 있다면, ④ 암 수의 생산을 선택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 농촌의 수익사업으로 투자 시간을 고려한다면 이만한 것이 없다.
문제는 견딤이다. 불규칙하게 지급되는 그 많은 사례금(?) 중에서 주님의 아이들을 든든한 일꾼들로 키워내야 하고, 장래 경제 자립의 환경을 만들어 갈 소들의 사료값을 충당해야 한다. 분명 미자립농촌교회의 사역자로 자립을 위해 뭔가를 시도한다는 것은 무모하다. 그러나 차가운 눈이 녹으면 물도 되지만 봄이 온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이 일을 감당하면서 덤으로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 한우의 두수도 늘어가고, 교인 수도 늘어가고, 주민들의 칭찬도 늘어가고....어느 것이 덤으로 온 것인지는 모르겠다마는 인내하고 기다리며 감당하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공동체에 적으나마 교인성장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자주 자립 공생의 농촌사역에 공감하는 젊고 신실하며 게다가 힘이 되기까지 하는 가정들을 붙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주민들과는 진심을 나누는 참 좋은 이웃이다. 이것들은 주님이 덤으로 주신 것이다. 믿음으로 뜻을 품고 묵묵히 가다보면 주께서 여러방면으로 길을 열어주신다.
다시 변죽(邊竹)울리며
자립은 모든 사역의 기본이다. 농촌교회 사역의 미션인 마을 복음화를 꿈꾼다면 목회자의 개인적인 사역 역량을 개발하고 더욱 더 부지런을 떨어야 하고, 공동의 사명을 위해 성도를 증인화 하고, 마을복음화를 위해 세운 전술들을 머뭇거림 없이 실천해야한다. 그리고 경제 자립을 위한 인프라 만들기를 시작해야 한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투쟙, 쓰리쟙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어떤 것이 목회의 정도라고 섣불리 단정하지도 말아야 한다. 누구라도 자기에게 맡겨진 목회를 자기가 하다가 주님나라 가는 것이다. 대 사도이신 바울께서 먼저 이 길을 걸으셨다. 다른 지역의 사역은 몰라도 농촌의 미자립교회를 사역하고 있다면 이 일을 위한 시도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런 헌신이 자립의 기본 인프라를 만드는 디딤돌이 된다. 예수님의 그룹에도 전대맡은 이가 있었는데 하물며 한번도 무소유였던 적이 없는 무소유 예찬 인사들의 말과 글에 감동받지 말기를 권한다. 다만 자신과 공동체를 다섯 달란트 받은 선한 청지기로 세워가야 하고, 선한 청지기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자립을 위해 남다른 것을 시도하라. 새 길이 보일 것이다. 농어촌도 복음화해야 하리라. 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