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主啊,祢要去哪里?)
“마라아 자매님, 잠깐만 함께 기도하실까요?”
권대복 아오스딩은 작은 묵주 하나씩 마리아 부부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이어 성령기도를 시작했다. 마리아 부부 역시 아오스딩과 함께 기도에 몰입해 갔다. 몇 초가 지났을까? 이들 앞에 조용한 파도가 일렁거린다. 잔잔한 기도가 한동안 이어지더니 먼 바다에서 대형 해일(海溢) 이라도 밀려오는 듯 점점 격해져 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창밖이 무척 시끄럽다. 개미들이 한 줄로 이사를 가고 있었다. 애완견들이 거리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어서 들고양이, 노루, 사슴, 늑대, 호랑이 그리고 거구 코끼리들까지 한 방향으로 내달린다. 짐승들이 대형 지진이라도 예견하는 것일까? 다급하다. 요셉과 마리아 발밑까지 다가온 해일(海溢)은 멈출 줄 모르고, 이어 따라오는 산더미 같은 파도는 이제 막 모래톱을 지나 인근 해안 도시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비바람, 그리고 거센 폭풍속의 빌딩 숲이 한순간에 무너져 갔다. 로마의 황제 반지처럼 번쩍이던 인간의 권력과 부귀영화(富貴榮華) 역시 쾌락의 신흥도시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파도는 지평선 넘어 아주 먼 곳까지 계속 밀려갔다. 세상 끝까지 가려나.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는 것 일까’ 얼마 후 아오스딩은 성령 기도를 마감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기도는 당신의 영광을 위혀여 바치나이다’
“아오스딩 회장님,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식의 기도로 인사합니까?”
“아닙니다. 요셉 마리아와 함께 기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불편하셨지요?”
“아닙니다. 그런데 회장님, 이탈리아 유학 다녀 오셨어요? 라틴어 성경을 유창하게 하시던데요!”
“조금 알 뿐입니다. 라틴어보다 영어가 더 편해요.”
“아, 그래요? 그런데 회장님은 유창하게 라틴어 성경을 읽고 설명하셨어요”
“그런 것을 성령 기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마리아 자매님은 어떻게 저의 성령 기도를 알아 들었지요?”
“성령 기도라니? 보통 우릿말로 설명하시던데요?”
“하하하..., 마리아 자매님은 벌써부터 성령을 가득 받으셨나 봅니다. 성령 기도 말씀을 알아듣고 계십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아오스딩과 마리아 부부는 기도후 중국 선교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오스딩 회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마리아 자매님,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선교사가 되려면 적어도 봉사자 십계명은 늘 숙지하고 계셔야 합니다.”
봉사자 십계명
-. 내가 봉사자인 것보다, 봉사자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 내가 하는 것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
-. 나 홀로 봉사에 몰두하는 것보다, 봉사자들 안에서 일치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 나 홀로 성당 안에서 머무는 것보다, 이웃을 위한 기도와 말씀의 봉사가 더 중요하다.
-. 나 홀로 많은 활동을 하기보다, 협조자들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바쁘게 많은 일들을 벌려 놓기보다, 생명력을 발산하는 몇 가지 일에 주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 하는 것보다, 협조자와 일치 안에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재능과 인간적 노력의 열매보다, 십자가가 가져다주는 열매가 더 중요하다
-.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보다, 모든 공동체에게 열려진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일반적인 많은 요구들을 충족시키기보다, 모든이에게 믿음을 증거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리아 자매님, 중국 선교사를 찾으셨지요? 그분들은 자매님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 분들과 함께 일을 시작하셔요.”
“회장님, 난 본당 신자들 잘 모릅니다. 풋내기 신자라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본당이 흑룡강성 하얼빈이시지요? 성령 세미나 팀장을 맡아 보셔요. 팀 구성 후 절 초대해 주시면 바로 가겠습니다.”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 함께 권대복 아오스딩의 초대로 한국 입국이 가능했다. 입국 목적은 취업보다 선교사 활동을 위한 것이었다. 마리아 부부는 권대복 아오스딩과 함께 베드로 성령 봉사회 활동을 하면서 중국 선교의 기초를 만들어 갔다. 그때 마리아 부부는 그곳에서 수 많은 선교사를 만났다. 이제 막 중국을 가려는 사람, 중국에서 한국을 찾아든 사람, 정말 선교사들이 넘쳐났다.
마리아 부부는 권대복 아오스딩의 초대로 한국에 들어 올 때마다 수 차례 제기동 약령 시장을 찾았다. 마리아의 불임 때문이었다. 결혼 한지 이미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권대복 아오스딩 회장과 함께 제기동 약령 시장을 찾았다.
“약사님, 또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오래전 단골 손님이셨군요. 아직도 좋은 소식이 없나요?”
“넷, 다시 한번 부탁드려요.”
“그런데..., 손님, 약보다 환경이 더 우선입니다. 신혼 분가하실 수 있어요?”
“가족 모두 좋으신 분들입니다. 아직은 함께 살고 싶어요. 걱정하지 마셔요.”
권대복 아오스딩 회장이 약사에게 다가서더니, 탕약을 주문한다. 수년째 단골이라는 사실에 화가 치민 것이다. 처방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약초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의심이 되기 때문이었다.
“약사님, 고급용 약초 자료로 사물탕 부탁합니다.”
“사모님께 드릴 보약입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들에게 줄 선물입니다. 확실한 효과를 보려면 몇 첩 정도 먹어야 하나요?”
“글쎄요. 아직 젊고 건강해 보이시니 두첩 정도 드려 볼까요?”
“수년째 실패랍니다. 넉넉히 합시다. 다섯 첩 부탁합니다.”
“어르신, 보약의 양보다 환자의 환경이 더 중요합니다. 각종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편안한 신혼 환경, 즉 분가를 권해드립니다.”
한방에서 사물탕은 여성들에게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월경불순, 월경과다, 불임증, 임신중독, 산후증 등에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약사는 약보다 환경을 줄곧 강조하고 있었다. 불임 원인이 환경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나 보다. 사실 마리아 부부 주변 환경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만 본인들의 불임으로 머뭇 거리는 동안 바로 아래 동생이 먼저 아이를 낳은 것이 문제였다. 둘째 며누리, 그녀는 아이 출산 후 점점 거칠어져 갔다. 집안의 큰 어른, 시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시자,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듯 집안에서 폭언과 폭행이 일상화 되어 갔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공산당 집단 농장 일거리였다. 집단 농장은 가족 수 만큼 일거리 양이 배당된다. 남녀노소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차별이 없으며 일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늙어도 젊은이들처럼 일할 수 있을까?
가족 상황은 이러했다. 시어머니, 첫째 부부, 둘째 부부, 막내 시누이, 합이 여섯이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늙어 노동력이 떨어져 있었다. 막내 시누는 철부지 아가씨이기 때문에 일보다 몸 단장이 우선이었다. 첫째 부부는 지도자급 공무원이기 때문에 집단 농장 보다는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집안의 가장 큰 수입원은 첫째 부부였지만, 노동력은 둘째 부부가 맡아야만 했다. 거칠고 힘센 둘째 며누리가 문제였다. 점점 심통이 심해져 갔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오늘 저녁 그녀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시어머니 밥상을 포기한 일이었다.
둘째 며누리의 심통, 그것은 논리적 근거가 있었다. 집단 농장에서 남녀노소 모두 똑같은 노동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은 일상적인 사회생활에서도 일맥 상통된다. 전통적인 가정이라면 부자(父子) 지간 효(孝)와 자비(慈悲)가 존재한다. 당연한 수직(垂直) 관계이다. 그러나 공산당 사회에서는 모든 수직 관계는 포기되고 수평(水平) 관계로 통한다. 동무라는 호칭은 절대적인 수평 관계를 의미한다. 둘째 며누리, 그녀는 철두철미한 공산당 당원이었다. 공경하올 어머니가 아니라 친애하는 어머니 동무였던 것이다.
해가 서산에 지자, 농부들은 밭일 끝내고 모두 귀가 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아직도 밭에 머물고 있었다. 하던 일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젊은 시절, 두사람 몫도 거뜬히 해 치우던 노동력이 요즘 들어 삼분의 일로 뚝 떨어지고 있었다. 할배가 먼저 떠난 후 체력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 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둘째 며누리가 시어머니 몫까지 하더니, 일보다 잔소리가 더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어머니는 팔자소관이러니 하면서 자기 몫을 해내려고 억지로 오기(傲氣) 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다. 늦은 밤 집에 도착해 보니 집안은 너무 조용했다. 저녁 식사 후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간 모양이다. 할매 역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가라 입고 조용히 부엌으로 갔다. 밭통을 열어보니, 고구마 두 개와 옥수수 한 개뿐이었다. 둘째 며누리가 시어머니를 위해 저녁밥 대신 배려한 것인가 보다.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챙겨들고 방으로 갔다. 한동안 침묵이 흘러갔다. 이어서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한없이 원망스럽다. 이불을 감싸고 펑펑 울어버렸다. 얼마 후 발자국 소리가 문 가까이 들려왔다. 둘째 며누리 같았다. 꽝꽝 문두드리는 소리 대신 조용히 문이 열리더니, 막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 몫은 처음부터 없었다. 고구마와 옥수수를 보자 그녀는 그것을 냉큼 먹어 치운다. 시어머니는 냉수로 저녁 밥상을 대신했다. 그후 그런 일이 습관처럼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는 그런 일을 비밀처럼 감추고 살아갔다.
권대복 아오스딩은 마리아 요셉 부부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쌍둥이 출산이었다. 마리아 요셉 부부는 정말 신났다. 다만 둘째의 심통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나뿐 소식도 함께 들려 온 것이다. 첫째 부부는 늘 너그럽고 지혜로웠다. 가족 모두의 평화를 위해 둘째와 떨어져 분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주택 분양 담당자를 찾아가 신규 주택을 신청했다. 주택 신청, 그것은 그 당시 관례였다. 주택은 서울에서처럼 팔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공급하는 배급제였기 때문이다. 주택을 정부에 신청할 경우, 심사위원회에서 승낙하면 주택을 배당 받게된다. 요셉 마리아 부부가 신청한 주택은 이런 경로를 통해 혼쾌히 허락 되었다. 현재 신축중이니 수 개 월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요셉 마리아 부부는 신축중인 자신들의 집을 때때로 찾아가 현장 진행 과정을 살펴 보고 있었다. 50평 정도의 크기로 홀로 계신 어머니와 막내 동생까지 함께 거처할 수 있는 집이었다. 그런데 분양 받은 신축 가옥 입주 몇 일을 앞두고 요셉 마리아 부부 가정에 갑작스런 시련이 찾아왔다. 요셉이 직장에서 갑자기 졸도한 것이다. 빠른 응급조치가 있었다면 치료가 가능한 일이었지만, 동료들의 무관심으로 사망에 이른 것이었다. 늘 성실한 요셉이었지만, 그것을 시기한 동료가 의도적으로 방치한 것이 분명했다. 불행은 연이어서 일어났다. 분양받은 신축 가옥 역시 남편 요셉 사망으로 자격이 박탈되어 미망인 가옥으로 변경되었다. 주택 분양 담당자에게 아무리 사정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미망인 가옥 역시 여유만만이지만 자신에게는 배당되지 않았다. 그것 역시 이유가 있었다.
공산당 사회는 공명정대하다. 원리 원칙대로 움직인다. 그런데 가끔 문제가 생긴다. 심의 평가 기준은 일정하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담당자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심(私心) 때문에 문제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재심의가 가능하지만 특정 심의 위원과 함께하는 파벌 집단 이기심과 충돌할 수도 있다. 이 지경이 되면 심의 결과를 뒤집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마리아, 그녀는 바로 특정 집단 이기심과 충돌하고 있었다. 늘 정직한 삶을 살아 왔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경계 대상이 되었던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마리아, 그녀는 주택뿐만 아니라 요셉 사망 연금 역시 불투명 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아이 출산 이후 휴가 중 자신의 직장으로부터 퇴출당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뒤죽박죽 되어 버렸다. 원인은 무엇이었나. 알고 보니 둘째 며누리의 밀고였다. 첫째를 향한 시기 질투, 둘째는 요셉 마리아 부부를 공산당 당국에 고발했던 것이다. 죄명은 공산당 당원이 금하는 천주교 믿음이었다. 신자(信者)라는 죄명, 개혁개방 이후 별일도 아니다. 그러나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도구로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마리아, 그녀는 신앙 때문에 모든 꿈을 잃어버렸다. 직장 동료로부터 버림받았고, 가족으로부터 배신당한 것이다. 갓 태여난 아기와 함께 그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권대복 아오스딩의 말씀 선포 대상은 만주 조선족 신자들이었다. 공산당 통치 아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마리아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 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침 북경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가 권대복 아오스딩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권대복 아오스딩, 그는 기차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主啊,祢要去哪里?)
그 물음에 주님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대신 만주 벌판의 차가운 바람이 권대복 아오스딩의 옷깃을 깊숙이 파고 들었다. 기차가 몰고 온 바람인가 보다. 혹시 주님의 손길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람, 바람, 바람아, 제발 멈추어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