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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가 아닌 몽골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몽골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과거 사회주의 국가였던 나라, 한반도보다 7배나 큰 나라, 바다가 없는 나라, 땅은 넓은데 인구가 적은 나라, 지도상에 온통 사막과 적갈색으로 표기된 불모의 땅이나 다름없는 나라, 동북아시아에 있으면서도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로 인식되지 않았는가. 우리 민족과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몽골리안 루트, 유목생활, 칭기스칸, 고려와 원과의 관계 정도의 지식이나 알고 있지나 않았을까.
이번 여행에서 몽골을 최종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무엇에 이끌려 이 나라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몽골여행에 대한 사전 지식을 습득하기 위하여 책과 인터넷에서 자료를 뽑아 보기도 하였다.
몽골(Mongolia)은 원래 하나의 작은 부족명이었으나 칭기스칸이 통일함으로써 민족 명으로 변화된 말이고 국가명칭이 되었다. 몽고(蒙古)라는 명칭은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인들이 주변 민족을 비하시키기 위해서 쓴 말이다. 여지껏 교과서에 실린 대로 몽고라고 알고 있었으니 무지의 소산이었다.
현지에 가서 배운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몽골은 소련 다음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나라며, 당시 사회주의 국가에 육류를 지원한 나라이며, 소련 다음으로 사회주의를 버린 나라라는 것이다.
왜 우리 일행은 몽골(Mongolia)을 최종 여행지로 선택하였을까?
바이칼바다에서 시작되는 몽골리안 루트를 확인하고 싶었고 우리와 문화적, 유전적으로 가장 비슷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농경민과 유목민의 문화적 차이와 기후 조건에 따른 생태적 차이 등 많은 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18살 처녀의 정강이뼈로 악기를 만들었다.]
2002년 7월 21일 오후 4시
춘천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탑승객은 버스기사와 우리 일행 4명이 전부였다. 3시간 가까이 차창으로 전개되는 낯익은 풍경을 보며 내일부터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게 될 설레임이 가벼운 떨림으로 전해졌다.
인천공항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공항 대기실에서 잠을 자기로 하였다. 공항 부근에는 마땅히 잘 곳도 없고, 인천이나 서울 쪽에서 잠을 자더라도 다음날 일찍 서둘러야 되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선택하였다. 집 떠나면 고생인데 배낭여행 예행연습하는 셈치고 달게 잤다. 때로는 이런 거친 잠도 보약이 될 수 있다.
7월 22일
6시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공항 이용권을 끊고, 출국신고서를 쓰는 등 탑승준비를 완료하였다. 울란바타르행 비행기의 탑승 예정시간은 7시 40분이었다. 탑승시간이 약간 지연되어 8시 5분에 이륙하였다. 울란바타르행 KE 867편은 앞으로 2시간 50분 동안 서해바다, 북경, 고비사막 상공을 통과하며 울란바타르(Ulaanbaatar)의 보얀트오하 공항에 10시 55분 경에 착륙할 것이다.
10,000m 상공에서 시속 1,000km로 KE 867편 비행기는 날아가고 있었다. 저 아래 뭉게구름이 떠있고, 뭉게구름 아래로 낯선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사막과 초원에 띠처럼 사방으로 난 길, 민둥산에 언뜻언뜻 보인던 숲일지도 모르는 검은 모습들…
정확하게 울란바타르행 KE 867편은 보얀트오하 공항에 착륙하였다. 기내에서 미리 작성한 입국신고서와 세관신고서를 제출하고 배낭을 챙겼다. 공항 대기실로 빠져나오자 팻말을 들고 사람을 찾는 모습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공항 대기실에는 가이드를 맡기로 한 김장구씨가 나와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고 몽골사를 배우기 위하여 왔다고 하였다. 여기에 온지 2년 6개월 되었으며 철저하게 동화되어 생활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생활 모습을 바로 알고자 한다면 철저하게 동화되어 생활하는 자세가 바람직할 것이다.
울란바타르. 옛날 세계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스칸의 자손이다.라는 민족적 자긍심이 대단한 사람들이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염원하기 위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해발 1,400m의 울란바타르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햇빛은 강열하였고 따가운 날씨였다. 하지만 습기가 없어 더위를 느끼지 못하였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에서 습기가 없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일 것이다.
공항 주차장에서는 7살 정도의 사내아이가 차를 닦고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닦고 있었다. 그 아이로 보면 세차비를 받는다면 좋을 것이다.
한국회관에서 나온 승합차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공항 쪽에서 본다면 토올강의 물줄기를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울란바토르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시내를 관통하는 토올강은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여러 지류를 모으고 오르콘강에 합쳐져 셀렝게강으로 흘러들어가 울란우데를 거쳐 바이칼바다로 간다고 하였다.
폭이 작고 수량도 적은 토올강변에는 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었고 풀의 색깔도 제법 푸르렀다. 강변에는 한가하게 소와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구릉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산에는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에는 나무가 없는 회갈색의 민둥산이었고 그 반대인 북쪽에는 나무가 보여 푸른색을 띄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한국회관에 여장을 풀고 그 건물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20,000투그릭으로 차를 빌려 2시부터 울란바타르 시내를 관광하기로 하였다. 20,000투그릭는 우리 돈 20,000원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자연사 박물관 관람으로 붉은 영웅으로 알려진 울란바타르 여행의 첫 포문을 열었다. 관람료는 외국인 1,700투그릭, 내국인 1,500투그릭이었다. 사진을 촬영하려면 별도의 돈을 내야 되었다. 사진 촬영비는 1,000투그릭, 비디오 촬영비는 5,500투그릭을 내야 되었다.
자연사 박물관에는 약 7,000만년 전의 공룡들로 가득하였다. 공룡들이 다시 환생하여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알모사우르스, 바르스볼드, 모나미쿠스, 파키스팔로 사우리아, 오스트리히 라이크 카니보르스 디노사우르스, 오스트리히 라이크 디노사우르스 갈리미노스, 제일 크고 거대하여 몸무게가 2-3톤이나 되는 자이언트 이쉬 타르보사우르스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르보사우스의 전신뼈 화석, 디노사우르스의 앞발 화석, 맘모스의 이빨 화석, 코뿔소 화석, 공룡알 화석이 전시되어 있는 고생물관이 유명하였다.
다른 방에는 몽골지역에 살고 있는 각종 야생동물들인 사슴, 곰, 독수리, 눈표범 등이 박제되어 있었고, 다른 나라에서 온 동물들도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린이들을 위해 교육용으로 만들어놓은 방도 있었다.
자연사 박물관을 관람한 후 잠시 휴식을 취하며 물을 사 먹었다. 탄산이 들어있는 바이칼 생수 밖에 없었다. 쉬고 있는 우리들 앞으로 왔다갔다하는 몽골 아가씨들의 복장 때문에 아찔한 현기증이 났다. 젊은 여성들의 복장은 한결같이 짧은 핫팬츠, 배꼽티 차림이었다.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긴 서구식 체형이었다. 육식과 유제품으로 인한 체형의 변화일 것이다.
비싼 돈 들여가며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나라에 와서 젊은 아가씨들의 복장을 곁눈질하며 졸음을 쫓는 여유는 분명 사치일 것이다. 에로티시즘의 작가 바타유는인간에게는 세 가지 사치가 주어져 있다.라고 말하였다. 먹기, 섹스, 죽음이 세 가지 사치라고. 여기다가 여행을 하나 더 추가하여 네 가지를 사치라고 규정하면 어떨까.
다음 예정지는 역사박물관이었다. 입장료는 1인당 2,000투그릭였다. 물론 사진과 비디오 촬영비는 별도로 내야 되었다. 박물관에서는 한국과 몽골의 공동유적조사 5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지난 번에 한국에서 이미 전시되었다고 하였다. 2시에 개막했다고 하였는데 팜플렛같은 자료는 보이지 않았다. 자료를 구하려고 했는데 구할 수가 없었다. 자료가 귀한 나라이기 때문에 불티나게 없어진 모양이었다.
사슴돌, 선그림의 바위그림, BC 7,000년-BC 2,000년 전의 동물뼈에 사람 얼굴이 그려진 유물 등은 우리나라의 선사시대와 흡사하였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집자리 밑에 뼈를 구부려 넣은 무덤 유적이었다. BC 7,000년-BC 2,000년 전의 신석기시대 여자의 무덤이었다. 이 방법으로 무덤을 만들었다면 우리나라의 고인돌 유적에 대한 의문점 하나가 해결될 수도 있겠다.
BC 100년-AD 100년 경의 흉노시대 비단옷도 눈길을 끌었다. 옷장식이 화려하였다. 과거나 현재나 몽골인들은 현실을 중시하였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코담배도 많이 구입하고 큰 것을 구입하여 자랑하였다. 코담배는 돌이나 뼈를 파서 담배 비슷한 것을 넣어 흡입하는 것을 말한다. 허리에 찬 장식도 화려하였다. 허리에는 칼, 젓가락 등을 꽂았다. 현재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젓가락 대신 포크를 즐겨 쓴다. 현대 몽골인은 젓가락질을 잘하지 못한다.
흰색과 검은색의 말총은 칭기스칸을 상징하였다. 아랍에서 도입된 녹색염료는 칭기스칸의 후손만 사용하였다.
쿠빌라이칸 시대에 만들어진 황제복음이라는 글씨가 분명한 비문에는 황제라는 글자를 두 칸 앞에 썼다. 그렇게 쓴 것은 세계를 황제 밑으로 둔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1246년 몽골제국에 왔던 카르피니를 통하여 구육칸이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1920년 발견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하늘 아래 모든 땅은 몽골의 땅이니 너희들도 복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즉시 천명이 내릴 것이다.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던 칭기스칸의 후예들이 회회포로 바그다드를 공격하고 그 기세로 헝가리까지 공격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왜 거기서 발길을 멈추고 돌렸는가. 말과 소의 먹이도 안되는 거친 풀이 무슨 쓸모가 있었겠는가. 농사를 짓는 것은 가축이나 하는 것, 농사를 짓는 사람은 가축과 같은 것, 그래서 오늘도 그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풀을 찾아 가축떼를 이끌고 초원을 누비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민족들의 전통복장, 유목민들의 생활용품은 유목민들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몽골의 역사적, 인류학적 전시물이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 18살 처녀의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가 이 자리를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게 붙잡았다.
유목생활을 하는 몽골인의 문화와 농경생활을 하는 동북아인의 문화는 분명히 다르게 느껴졌다. 이번 여행을 통해 중국 쪽으로 기운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는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고려 무신정권시대 위정자들이 강화도로 도망갔을 때 본토의 피해는 엄청나게 컸다.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피해가 커진 것은 그 당시의 정세를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한 우매함이 아니겠는가. 세계 정세를 바로 인식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교만일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몽골제국에 고려만 40년 동안 줄기차게 항전하였다고 자랑스럽게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무지함의 극치가 아니었는가.
그렇게 배운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결국 고려는 몽골에 굴복하고 혹독하게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았는가. 여자와 매까지 조공으로 바치지 않았는가.
이번 여행을 통해 또 하나 교정한 것이 있었다. 징기스칸이 아니고 칭기스칸이라고 써야 옳다는 것이었다.
칭기스칸은 누구인가. 10세기 초부터 12세기 말까지 대략 300년 가까이 몽골평원의 유목민들에게는 의탁할 주인이 없었다. 위구르가 서남쪽으로 도망가서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 때 그가 나타나 유목민들을 장악하였고, 여세를 몰아 전 부족을 통일하고 몽골평원의 지배자가 된 것이었다.
몽골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지면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힘이 없음을 한탄한다. 그러나 힘을 길러 복수하는 사람들이다. 얼마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인가.
세 번째 찾은 곳은 초이진 람 사원이었다. 입장료는 1인당 2,200투그릭이었다.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하려면 별도의 돈을 내야 되었다.
초이진 람 사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35분이었다. 거의 대부분 6시까지 관람객을 입장시킨다. 시간 전에 입장한 관람객에 한하여 6시 이후에도 관람을 허용한다. 울란바타르에 있는 티벳불교의 대표적인 사원이며 만주인의 통치시대 몽골 건축의 걸작품이다. 17-20세기 회화, 주조, 자수, 조각품, 몽골식 아플리케가 보는 이를 매료시켰다. 자나바자르가 조각한 석가모니와 신의 나무, 청동상이 있었다. 자나바자르의 초상도 있었다. 입구에는 사천왕상이 있고 안에는 흥인사라는 간판이 보였다. 중국, 만주, 몽골, 티벳불교가 혼재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라마교라고 알고 있던 상식은 잘못된 것이다. 티벳불교라고 수정하여야 한다.
첫날부터 많은 것을 수정해야 하였다. 잘못 알고 있던 지식을 올바르게 수정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초이진 람 사원에도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다. 몽골생활을 우리보다 오래한 김장구씨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는 생각날 때 기념품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재고 저리재다 가는 하나도 못산다는 것이다. 내일은 없다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세 군데 기념품을 파는 곳을 지나쳤는데 빈 손이었다.
초이진 람 사원의 관광을 끝내고 걸으면서 시내 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숙소까지 걸어서 30분이면 된다고 하였다. 차를 돌려보냈다.
차도는 적당히 건너가면 되었다. 신호등은 거의 무시되었다. 걸어가다가 다른 사람의 발을 밟으면 돌아서서 손을 내밀어 악수하면 된단다. 악수하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고 하였다.
나착도르지 시인의 동상도 보았다. 원래는 서울의 거리에 있었는데 이 곳으로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자본의 위력이 여기서도 통하는 모양이었다. 한류 열풍이 울란바타르에 불고 있었다.
도시구획이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다. 넓은 도로, 넓은 인도, 그 사이의 조경이 아름다웠다. 인민혁명당사, 정부종합청사, 오페라극장, 문화궁전 등 건물의 규모가 웅장하였다. 사회주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은 어느 도시나 비슷하였다.
사회주의 시절의 냄새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사회주의 시절의 향수를 가장 잘 웅변해주는 것은 전기설비에 있었다.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을 구석구석까지 전파시키기 위해 전기시설의 설치를 강조하였다.
건물은 크게 만들고 소비보다도 많이 생산하는 것이 사회주의 경제의 특징이었다. 비효율적인 경제정책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경제는 쇠퇴하고 말았다.
큰 건물 주변에는 어김없이 이동식 전화가 있었다. 전화를 걸면 통화가 안되더라도 기본요금을 내야 한다. 전차버스도 있다. 전차버스비는 100투그릭, 일반버스비는 200투그릭, 소형버스비는 200투그릭이다. 일반버스와 소형버스의 차이점은 소형버스는 시골 구석구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는 신호등이 더러 있으나 거의 무시되었다. 다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건너면 되었다. 낡은 차들이 잘도 달린다. 간혹 시동이 꺼져 멈춘 차들도 보이고 접촉사고로 싸움을 하는 장면도 눈에 띄었다.
밤 10시가 넘어 해가 졌다. 하늘은 새떼소리로 가득하였다. 북쪽의 여름이라 해가 늦게 뜨고 늦게 지는 것이다.
한국회관 건물에는 호텔과 식당과 노래방과 나이트클럽이 있었다. 노래방과 나이트클럽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밤늦게까지 시끄럽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비교적 싼 숙소를 구하여서 그런 줄 알았는데 울란바토르에 있는 모든 호텔의 공통점이라는 것이다.
[복드한 겨울궁전에도 수흐바타르 광장에도 바타르는 없었다.]
7월 23일
울란바토르에서의 첫 일출을 보기 위하여 6시에 밖으로 나왔다. 반바지에 반팔티 차림인데 약간 추웠다. 바람이 스치고 간간이 자동차소리와 새소리가 섞여 들리는 상쾌한 아침이었다.
6시 45분
해가 울란바토르의 동쪽 산 위로 떠올랐다. 햇빛이 너무 강열하여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없다. 선그라스를 끼지 않고는 햇빛을 바로 볼 수 없다. 현대인은 선그라스를 이용하여 햇빛을 차단할 수 있지만, 옛날사람들은 눈을 작게 하고 광대뼈를 튀어나오게 하는 진화과정을 통하여 햇빛과 모래바람을 차단하면서 기후에 맞게 적응하여 왔다. 이들이 현재 몽골에 사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9시 15분
복드한 궁전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입장료는 1인당 2200투그릭이다. 사진 촬영과 비디오 촬영은 별도의 돈을 받았다.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인 복드한이 겨울에 살던 궁전이었다. 8대 복드한인 젭춘담바 호탁트 8세가 1924년까지 20년 동안 여기서 통치하였다. 복드한은 8대로 끝났다. 토올 강둑에 있던 여름궁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겨울궁전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파괴되지 않았다.
복드한은 서쪽에서부터 끊임없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왔다. 마지막 복드한이 정착한 곳이 울란바토르이며, 사회주의 혁명의 와중에서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수도가 되었다. 만약 9대 복드한이 나타난다면 동쪽으로 이동할지도 모르겠다.
자나바자르상이 눈에 들어왔다. 자나바자르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데 보살상은 젖가슴이 드러난 모습이었다.
눈표범의 가죽 150장으로 만든 게르에서 통치자가 작전회의를 했을 것이다. 이곳 복드한 궁전은 겨울용이었다. 여름에는 북쪽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10시 35분
자이상 전망대에 올라갔다. 차가 전망대 중턱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염소떼가 길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사회주의 시절에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는 레닌 뱃지를 펼쳐놓고 팔고 있었다.
자이상 전망대는 동몽골의 할가강에서 소련군과 몽골의 연합군이 일본의 관동군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는 전승 기념관이었다. 전망대에는 하과수렝 장군의 동상이 있었다. 전쟁에서 죽은 무명용사와 영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전망대 바로 뒤에는 오보라는 돌무더기가 있고 가운데 박혀있는 버드나무에는 어김없이 푸른색의 천이 매어져 있었다.
전망대에서 시내가 한 눈에 보였다. 가까이는 토올강이 동에서 서로 길게 흐르고 강건너에는 제법 높은 건물들이 보였다. 그 너머 언덕으로는 게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몽골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옥은 세 가지가 있다. 사회주의 시절에 많이 만들어진 것과 현재 건축되고 있는 아파트는 비교적 잘사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나무판자로 울타리를 하고 그 안에 나무로 집을 짓거나 마당에 게르를 설치한 집들도 있다. 초원에는 게르가 있다.
현재 울란바타르에는 국가에서 토지를 임대해주어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이 많았다. 땅을 국가가 소유한 것은 사회주의 경제의 유습일 것이다.
전망대 바로 밑에는 이태준 애국지사를 기리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직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토올강의 평화의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복드한의 겨울궁전이 나타난다.
정부종합청사, 문화궁전, 국립 오폐라와 발레극장 같은 사회주의 시절에 만들어진 큰 건물로 둘러쌓여 있는 광장에는 수흐바타르가 칼을 빼어든 기마동상이 있었다. 1921년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새 국가의 기틀을 세운 수흐바타르를 기리는 동상이었다. 그가 민족적인 성향을 나타내자 소련은 재빨리 제거하였다.
만일 우리 모두가 공통된 노력과 의지가 있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배우지 못할 것이 없으며, 실패할 것이 없다.이런 문구가 동상 밑에 새겨져 있었다.
얼마나 자신감에 찬 의지의 표현인가. 수흐바타르는 몽골의 영웅이었다. 수흐바타르 광장, 수흐바타르시, 수흐바타르역…
자이상 전망대에서 내려와 점심을 먹고 러시아연방 중의 하나로 부리야트 공화국의 수도인 울란우데로 가는 국제열차를 타기 위해 울란바타르역으로 갔다. 울란우데나 이르쿠츠크를 가야 바이칼바다를 갈 수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로 향하는 국제열차는 오후 1시 50분에 울란바타르역에서 출발하였다. 모스크바로 가는 국제열차는 화, 목, 금요일 이 시간에 출발한다.
[부자도 조드 한 번이면 족하고, 영웅도 화살 하나면 족하다.]
7월 23일
오후 1시 50분부터 7월 29일 오전 9시 30분까지 바이칼바다 여행을 끝내고 다시 몽골의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 7월 28일 오전 7시 30분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부리야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를 거쳐 장장 26시간을 달려와서 울란바타르에서 멈추었다.
우리 일행은 6박 7일 동안의 바이칼바다 여행이 무사히 끝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울란바타르역에서 사진을 촬영하였다.
한국회관으로 이동하여 짐을 정리하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여독을 풀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휴식에는 잠이 최고일 것이다. 밖이 소란하여 잠에서 깨어났다.
몽골에서는 고학년의 학생들 중 희망자에 한하여 방학동안에 야영활동 같은 교육과정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교육활동은 돈이 들어가므로 주로 잘사는 학생들만 참가한다고 하였다. 부모들이 학생들을 자가용으로 데려오고 데려갔다. 학생들을 싣고온 버스가 4대 대기하고 있었다. 한국회관 주변은 야영활동을 끝내고 돌아오는 학생들과 야영활동을 가려고 모여드는 학생들로 어수선하였다.
몽골의 교육제도는 10학년제이고 국가에서 교육비를 부담한다. 대학부터는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오후 4시
사막여행의 일정과 코스를 확인하기 위하여 최종 회의를 하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4박 5일 동안의 몽골 역사기행인 셈이었다. 유적답사와 함께 경치가 좋은 곳이나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 있으면 보려고 했으니 유람도 함께 하는 셈이었다. 일정과 코스는 이미 만들어졌으므로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우리 일행 4명과 김장구씨와 현지인 가이드 촐롱이 참여하여 지도를 보면서 마지막 점검을 하였고, 차량문제는 촐롱이 확인하기로 하였다. 촐롱이 한가지 부탁을 하였다. 가는 길에 시간을 내주면 자기 고향에 들려서 가겠다는 것이었다.
현지인 가이드비 하루 20달러, 이스타나 승합차 하루 사용료 30,000투그릭, 기름값은 별도로 지불, 운전기사와 가이드의 먹고 자는 비용은 본인들이 알아서 하겠단다.
일단 우리한테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오후 6시
이후에는 문닫는 상점이 많으므로 물건을 살 때 주의해야 한다. 한국회관 사장님의 도움으로 사막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 분은 문막이 고향이라고 하였는데 우리에게 잘해주셨다. 깔판과 모기향은 사장님이 빌려주셨다. 몽골빵, 물, 라면, 쌀, 일회용 카레, 일회용 짜장, 쨈, 가스, 일회용 컵 등 사막에서 4박 5일 동안 먹고 쓸 것을 준비하였다. 사탕과 초콜렛은 선물용으로 준비하였다. 김장구씨가 브르스타와 큰 냄비를 가져오기로 하였다.
현지에 가면 그곳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주장과 적당히 우리 것을 먹어도 된다는 주장이 공존하지만 만일을 위해, 그리고 사먹을 곳이 없는 곳에서는 해먹어야 되기 때문에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것이 옳다.
대구에서 혼자 몽골로 배낭여행을 오신 84세의 김준기 어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15일 동안을 머무른다고 하셨다. 원래는 할머니와 함께 오실 작정이었는데 갑자기 편찮으셔서 혼자 오셨다고 하였다. 그 분은 여러 방면에 박학하셨고 특히 역사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우리와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주로 그 분이 많이 말씀하셨고 우리는 경청하는 쪽이었다. 몽골 땅에 와있을지도 모를 고려청자나 금속활자를 찾는 것이 소망이라고 하셨다. 11시가 넘었는데도 이야기를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연세가 많은 데도 흐트러짐이 보이질 않았다. 엄청난 모험을 하시는 그 분이 존경스러웠다. 그 나이까지 살 수 있을까. 만약 살아있다면 배낭여행을 할 생각을 할까.
잠을 많이 자야 하는데 잠이 쉽사리 오질 않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때문인가. 아니면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설레임 때문인가.
7월 30일
6시 50분에 일어났다. 지난 밤은 아주 잘 잤다. 바이칼여행에서의 피곤함이 밖의 시끄러움도 전혀 문제가 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행 후 처음 있었던 달콤한 잠이었다. 일찍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둘렀다. 식당에서 아침을 김밥으로 싸주었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하였다. 이스타나 승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배낭을 차에 싣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문제가 하나 생겼다. 운전기사가 정비사를 한명 더 데리고 왔다. 사막길을 잘 모르거나 정비를 못하는 기사일 것이다. 약속과 다르다.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하지 않으면 만만히 보고 덤벼들 염려가 있었다. 남의 나라 땅에 온 우리는 약자가 아닌가.
차를 바꾸기로 하였다. 시간이 길어져도 관계없다. 잠깐의 불편으로 4박 5일 동안 편안하다면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촐롱이 전화를 걸었다. 러시아제 승합차인 포르간으로 교체하였다. 포르간은 사막과 같은 험한 지형을 운행하는데 좋은 차라고 하였다. 하지만 목받침이 없어 조금은 불편하고 장시간 타면 목이 아프다고 하였다. 차가 튈 때는 머리가 천장까지 닿을 수도 있다. 단단히 조심하여야겠다.
휘발류값은 별도로 계산하고 하루 운행료 40,000투그릭에 계약하였다. 휘발류 1L에 305투그릭, 휘발류가 경유보다 싸다. 엔진오일도 한통 샀다.
운전기사는 갑자기 사막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으므로 짐을 꾸릴 시간이 필요하였다. 운전기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잠시 정차하였다.
10시 40분
드디어 사막으로 출발하였다. 미터기가 17,676Km를 가리켰다. 포르간은 울란바타르 시내를 빠져나와 공덕이 있는 언덕이라는 이름의 보얀트오하 공항을 끼고 남쪽 방향으로 선회하여 달렸다. 아스팔트길을 시원스럽게 달렸다.
두려움으로 표현되는 아이다스 언덕에 오보가 있었다. 오보를 촬영하기 위하여 포르간을 세웠다.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고 정차한다고 하였다. 그래야만 행운이 온다고 하였다.
투브 아이막의 종모드를 지났다. 아이막은 도에 해당되며 종모드는 작은 숲이란 뜻이었다. 초원지대의 숲이라니 신기하지 않은가. 이곳에서 가이드 촐롱은 외할머니와 함께 고학년을 공부하였다.
잠시 후 만조시르사원에 도착하였다. 이 사원에는 18살 처녀의 정강이뼈, 혹은 임신한 여자의 정강이뼈로 만든 간랑호르라는 악기가 있단다.
입장료는 외국인 3500투그릭, 내국인 700투그릭, 차량 300투그릭이며, 사진 촬영과 비디오 촬영은 별도의 요금을 내야 되었다. 입장료 차이가 너무 커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만조시르사원은 1750년에 만들어졌고, 1937년 파괴되었으며, 1990년에 다시 복원하였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몽골 역사에서 1937년은 대단히 중요한 해였다. 이 때 많은 사원과 사원의 문화재들이 우상 또는 아편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우리 민족은 3이라는 숫자를 가장 좋아하는데 몽골인들도 3과 9라는 숫자를 좋아하였다. 특히 9와 그 배수를 아주 좋아하였다. 왜 18살 처녀의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인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81이라고 하였다.
18살 처녀의 정강이뼈, 혹은 대퇴부뼈로 악기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도 가축도 똑같이 취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축을 잡을 때도 단숨에 숨통을 끊어 고통을 덜어준다. 사람이 살기 위하여 짐승을 죽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말, 소, 염소, 양떼를 다른 초지로 이동시키고 있는 유목민을 만났다. 낙타가 마차를 끌고가는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마차에는 그들의 생활용품이 전부 실려있을 것이다. 이동하고 있는 유목민 중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던 사람이 우리에게로 왔다. 뎀베렐이라는 75세 된 노인으로 촐롱의 할아버지 친구 분이 라고 하였다. 우리가 예견했던 것처럼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담배를 한 대 권하였다.
12시 45분
처음으로 초원에서 게르를 보았다. 길에는 얼마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소의 사체가 있었다. 냄새를 맡고 날아온 독수리들이 사체 주변에 모여들었다. 죽은 동물을 버릴 때는 반드시 산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바람부는 쪽으로 버린다고 하였다.
몽골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무덤을 만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안가는 곳에 버린다. 3년이면 강열한 태양과 모래바람과 추위로 뼈까지 분해되어 버린다. 3년 후에 그 자리에 가족이 가서 꽃을 꺾어 바친다.
울란바타르 등 큰 도시에서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집 가까이에 무덤을 만들고 꽃다발을 걸어놓는 광경이 늘어난다고 하였다.
양떼가 산으로 올라가니까 온통 흰색이 되었다. 양들은 끼리끼리 모여 그늘을 만들어 더위를 피하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초원에서 보이는 하늘은 아주 가깝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같은 착각에 빠졌다. 초원에는 여기저기 타르박이 뚫어놓은 구멍이 보이고 송장메뚜기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13시 40분
사슴돌 이전 단계의 선돌을 보고 점심을 먹었다. 해발 1,400m의 초원에서 빵을 먹는 식사. 먹는 것은 항상 즐거운 것이다.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다녔다. 뭉게구름이 햇빛을 가리자 원형의 거대한 그늘이 초원에 만들어졌다. 비행기에서 땅을 내려다 보았을 때 보였던 검은 물체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경배의 산, 사나운 산, 산의 이름을 말하여도 안되고 산을 넘어서도 안된다. 그것은 유목민들의 금기사항이었다.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겨울집을 처음으로 보았다. 겨울집 옆에는 나무로 울타리를 친 가축우리가 있었다. 겨울집은 북쪽에 언덕이나 산이 있어 최대한 바람을 막아주는 곳에 지어져 있었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삶의 흔적일 것이다.
몽골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부자도 조드(재앙 : 가뭄, 눈, 바람, 추위) 한 차례면 족하고, 영웅도 화살 하나면 족하다.
새끼 한 마리를 거느린 쌍봉낙타 10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초원에 놓아 기르다가 주인이 이동할 때 데리고 간다고 하였다.
15시 10분.
13세기 몽골시대 석인상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석인상의 머리가 잘려져 나갔다. 남녀 석인상으로 동쪽에 있는 것이 여자일 것이다. 티벳불교가 들어오면서 두상이 파괴되었다. 석인상 주변에 큰 돌들이 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었다.
몽골평원에서는 주인공이 바뀌면 전 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철저히 파괴하는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 약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배려인가. 강자만이 살아 남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보여주려는 과시인가. 초원은 여러 민족의 격전장으로 그들의 흥망성쇠에 따라 묘, 성, 석상, 사원 등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후흥 헝거르. 석인상이 있는 산의 지명이 사랑스런 아가씨란 뜻이란다. 산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동쪽에 있는 석인상의 이름을 사랑스런 아가씨로 지어주면 어떨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18살 사랑스런 아가씨로 불러주면 어떨까.
촐롱의 부모가 거주하는 게르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게르가 어디쯤 있느냐고 물으니까 웃으면서 산너머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자기도 1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기 때문에 게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단다. 이동하기 때문에 찾으면 된다고 하였다.
누구에게나 고향에 온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촐롱은 신이 났는지 어릴 때 있었던 추억거리를 들려주었다. 여섯살 때 할아버지와 함께 염소를 보러 나갔다가 길을 잃었었다. 천둥과 번개가 치는 비오는 밤이 무서워 말밑에 안장을 깔고 앉아 있었다. 일곱 살 때 누나와 함께 낙타 달구지를 끌고 소똥을 주으러 나갔다가 길을 잃었었다. 낙타를 붙잡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찾으러 나왔다.
몽골의 가족제도는 모계사회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다. 남녀평등의 개념은 사회주의 이전부터 있었던 유목민들의 특징이었다. 따라서 촐롱이 말하는 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로, 누나는 이모라고 하여야 맞을 것이다.
16시
드디어 촐롱이 게르를 찾았다. 세 개의 게르가 보였다. 차들도 보이고 오토바이도 보였다. 촐롱의 고향에 온 것이었다. 돌이 있는 강이라는 촐로트강에서 돌처럼 강하게 살라는 뜻으로 외할아버지가 촐롱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오늘까지 촐롱은 이름처럼 강하게 살아왔다. 인구 2,500명 밖에 안되는 작은 바양차강솜에서 모스크바 사범대학에 유학하고 있는 것은 큰 자랑거리일 것이다. 솜은 우리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군에 해당되지만 크기는 도와 비슷하다.
옛날에는 촐로트강에 물이 많아 목욕도 하였는데 지금은 비가 와야 흐른다고 하였다. 비가 왔는지 제법 물이 고여 있었고, 소들이 물을 먹고 있었다. 큰 돌들이 많이 보였다.
촐롱이 손님들을 데리고 온다고 미리 연락을 하였는지 임시로 게르를 만들어 놓았다.
유목민들의 이동식 천막집인 게르는 이렇게 만들었다. 출입문을 남쪽으로 내었고 중앙에는 2개의 기둥이 있다. 흰천으로 덮인 둥근 천정에는 4개의 줄로 단단히 묶어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가운데 구멍을 만들었는데 낮에는 환기를 시킬 수 있고 밤에는 덮는다. 겨울에는 난로를 놓고 연통을 뺄 수 있게 만들었다. 당구치기 막대 크기의 버드나무를 서까래처럼 우산살 모양으로 얹었다. 둥글게 만든 벽은 격자 모양의 나무로 연결하였는데 말총으로 단단하게 묶었다. 양털로 짠 덮개를 둘러쳤다. 옆으로 3번 줄을 매어놓았다. 겨울에는 몇 겹 덧씌운다. 바닥에는 깔판같은 것을 깔아놓았다.
들어갈 때 문지방을 밟은면 안된다. 중앙에 난로를 설치하도록 되어있다. 기둥 사이로 사람이나 물건이 왔다갔다 하면 안된다. 2개의 기둥 뒤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손님 접대용으로 일종의 음식상인 셈이다. 준비해간 선물은 처음 게르에 들어갈 때 상에 놓으면 된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사탕, 초콜렛, 일회용 라이타, 스타킹, 양말, 비누, 치약, 담배, 볼펜, 손수건, 화장품 등이다. 남자들은 담배를 좋아하고, 여자들은 화장품을 좋아한다. 특히 즉석 사진기로 사진을 빼주면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최고의 대우란 게르에서 공짜로 잠을 잘 수 있고, 염소 허르헉 요리와 운좋으면 타르박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신은 벗고 들어가는 것이 예의다. 북쪽 방향에는 불상이나 가족 사진을 놓고 손님이 오면 북쪽에 모신다. 북쪽이 상석인 셈이다. 생활도구를 넣어두는 궤는 원형을 따라 놓아둔다. 들어가면서 왼쪽에 침대를 2개 놓으며 오른쪽에는 부엌용 탁자가 있으며 침대를 2개 놓는다. 용무를 끝내고 나갈 때는 되돌아나오는 것이 아니라, 앞쪽을 지나 오른쪽으로 나와야 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그들의 전통과 사고를 잘 보존하고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이락이 들어왔다.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한데 흰색이었다. 잘못 먹으면 설사를 할 수 있다. 물도 없고 목욕할 수 없는 곳에서 설사가 나면 큰일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숙성이 잘못되고 변질된 것을 먹으면 설사를 할 수 있단다.
식도락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 지방의, 그 나라의 자랑거리인 음식을 맛보는 것이 최대의 즐거움인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겠는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왔는데 안먹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설사할 때는 하더라도.
고비에서 나는 아이락이 가장 좋다. 남쪽 고비에는 아이락이 없다. 가장 좋은 아이락은 가을에 만들어진다. 가을에는 풀이 다르고 말이 그것을 먹기 때문에 17도까지 올릴 수 있다.
아이락 만드는 법은 이렇다. 소가죽통에 먹다남은 아이락, 혹은 효소를 넣고 새로 짠 말젖을 넣는다. 그리고 3천번 이상 막대기 끝에 구멍이 뚫린 도구로 젓는다. 숙성이 잘된 것은 흰빛이 나며, 걸죽하면서 달고 시큼하다. 숙성이 잘못된 것이나 변질된 것은 걸죽하지 않으며 신맛이 난다.
촐롱의 아버지가 아이락을 따라주었다. 두 손으로 그릇을 들고 막걸리 마시듯 먹으면 된다. 깨끗하게 비워버리면 벌로 3잔을 받아야한다. 먹다가 바닥에 조금 남겨야한다. 조금 남기면 다시 가득 따라준다. 사양하면 안된다. 먹기 싫거나 배가 부르면 그냥 놓아두면 된다. 두 기둥 뒤에 있는 상에는 각종 유제품으로 만든 음식이 있었다. 그 중에는 우리의 약과와 다식과 비슷한 것도 있었다. 그것은 달고 말랑말랑하여 먹기 좋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양고기를 넣은 올이 굵은 국수도 놓여 있었다. 우리와 몽골의 식문화 중에서 처음으로 공통점들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물이 부족한 곳이기 때문에 물 대신 아이락을 먹는다. 촐롱의 외할아버지는 하루에 2L-30L를 마신다고 하였다.
촐롱의 집안은 옛날부터 아이락을 잘 만들기로 소문이 났다. 7-8월 휴가철에는 아이락을 먹기 위해 울란바토르에서 160km를 달려오는 친척도 있다고 하였다.
초원에 난 여러 갈래 길에서 차들이 오고 가축 떼를 몰고 나갔던 젊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들어왔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이었다.
촐롱의 아버지가 말을 타보라고 하면서 잘 길들여진 놈으로 끌고 왔다. 말이 사람을 태운다. 말타기를 할 때는 왼쪽에서 타며 왼발을 먼저 올리고 탄다. 안장에서 일어서면 달리므로 처음에 조심하여야 한다.
촐롱의 아버지가 하루 저녁 자고 가라고 하였다. 유목민들의 생활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고, 촐롱과 가족들간의 1년만의 해우를 위하여 우리는 하루 묵어가기로 하였다.
촐로트강에 가서 큰 바위도 밟아보고 물을 먹는 소떼도 구경하고 초원을 걸어 보았다. 화장실은 사람이나 짐승이 잘 안가는 곳에 가서 볼일을 보면 된다.
몽골에서는 7-8월이 휴가철이기 때문에 촐롱의 친척들이 거의 다 모였다. 무엇보다도 촐롱이 모스크바에서 1년 만에 돌아오고 또한 한국인 손님을 데려왔으므로 염소를 잡는다고 하였다.
염소를 잡을 때 앞다리를 잡고 명치를 칼로 찌르고 그 안에 손을 넣어 손가락으로 대동맥을 끊었다. 염소 1마리의 숨결이 감쪽같이 끊어졌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고기와 가죽을 분리시켰다.
염소 허르헉하는 방법은 먼저 고기의 각을 크게 뗀다. 각을 뗀 고기를 젖짜는 통속에 넣는다. 미리 달군 돌을 화덕에서 꺼내 고기 사이에 넣는다. 사이사이에 통감자, 양파, 소금, 고추처럼 생긴 양념과 물을 넣고 통을 밀폐시킨 후 불을 때면서 끓인다. 통풍 구멍이 뚫린 화덕은 사방이 막혀 있고 나무와 말린 소똥을 땐다. 고기가 익으면 통속에서 꺼낸다. 익은 염소고기와 담백한 국물과 통감자를 함께 먹는데 맛이 그만이다. 고기를 꺼낼 때 뜨거운 돌도 함께 꺼내는데 공기놀이하듯 양손에서 왔다갔다 반복하면 몸에 좋다고 해보라고 권한다. 이것도 손님 먼저 하라고 한다. 돌을 땅에 떨어뜨리면 웃음거리가 된다. 뜨겁고 서툴렀기 때문에 몇 번 떨어뜨려 웃음거리가 되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던 사냥꾼이 돌아오는데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타르박을 한 마리 잡아가지고 왔다. 생긴 것은 토끼와 비슷한데 무게가 많이 나갔다. 쥐과에 속하는 타르박은 떼를 지어 땅굴을 파고 산다. 초원에 있는 큰 굴들은 대부분 타르박이 파놓은 것들이다. 타르박의 강한 호기심을 이용하여 잡는 독특한 사냥법을 쓴다. 헐렁한 흰색 옷을 입고 흰말 꼬리털을 매단 막대기를 흔들어 타르박의 시선을 빼앗으며 가까이 접근하여 때려잡는 독특한 사냥법이다. 현재도 이 방법을 쓰기도 하는데 총으로 머리를 쏜다. 머리를 쏘지 않으면 보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르박 사냥법을 들으면서 다람쥐를 생포하여 용돈을 쏠쏠하게 벌었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긴 막대기 끝에 올가미를 만들어 다람쥐 앞에서 흔들면 앞발로 올가미를 뒤집어써 잡힌다. 다람쥐가 미국과 일본에 수출되어 외화를 벌어 들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미련한 다람쥐, 미련한 타르박…
아니다. 인간이 동물의 생태를 역이용하는 교활함일 것이다.
타르박 보독하는 방법은 이렇다.
털가죽을 손상시키지 않고 내장과 고기를 떼어낸다. 내장은 버리고 고기의 각을 작게 떼어내 달군 돌과 양파, 소금 등의 양념과 함께 넣는다. 머리는 떼어버리고 목 부분을 단단히 묶는다. 도치램프를 이용하여 털을 끄슬리며 굽는다. 안팎에서 열을 내는 원리를 이용한 요리법이다. 껍질을 태운 고기가 맛이 있다. 안에서 익은 타르박 고기도 담백한 게 맛이 좋았다.
이것은 분명 행운이었을 것이다. 여행 첫날 좋은 아이락을 맛보고 염소 허르헉하는 방법과 타르박 보독하는 방법을 동시에 다 구경하였으니 분명 행운일 것이다. 촐롱의 게르에서 잠자기로 한 결정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오후 9시 30분
시원한 바람이 초원을 지나갔다. 서쪽 하늘에는 일몰이 시작되려는지 엷은 구름으로 가득하였다.
사방에 흩어졌던 가축들이 게르를 향하여 몰려왔다. 말탄 애들과 젊은이, 그리고 검은개 3마리가 가축 떼를 몰고 왔다. 말, 소, 양, 염소는 몇 마리인지 세지 않는다. 대신 자기 가축들의 특징을 다 알고 있다. 말 한 마리에도 360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염소와 타르박이 요리되는 시간에 가족들이 모여 배구를 하였다. 초원의 배구. 말만 들어도 멋있다. 방금 가축 떼를 몰고온 젊은이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몽골 장기인 샤타르를 하는 여유도 보였다.
여러 갈래 길에서 트럭과 오토바이가 몰려왔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이지만 몽골평원에 불어오는 강력한 변화의 바람이기도 하였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촐롱의 외할아버지가 전 가족과 친척을 데려와 인사를 시켰다. 유난히 형과 누나라는 호칭이 많았다. 여기서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거나 아버지 형제들 중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형이라고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버지 형제들 중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남자은 삼촌동생이라고 불렀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이거나 어머니 형제들 중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들을 누나라고 지칭한다고 하였다. 어머니 형제들 중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여자는 누나동생이라고 불렀다.
촐롱의 외할아버지는 우리가 선물한 소주를 한 잔씩 서열 순으로 돌렸다. 이 소중한 만남의 의식은 12가 조금 지난 시간에 끝났다.
밤이 깊어 그들과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우리는 게르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온 사람들은 트럭을 타고 돌아갔다.
하늘에 있는 별들이 모두 초원을 향하여 쏟아질 듯한 밤이었다. 초원에 누워 별을 보며 잠을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굉장한 바람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7월 31일 새벽 5시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게르가 흔들거렸다. 어젯 밤에 초원에 누워 별을 보며 잠을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객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촐롱의 이모가 트럭에서 잤는데 굉장히 춥다고 하면서 잠을 잘잤느냐고 인사를 하였다. 말들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가축 떼를 초원으로 이동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새벽 하늘에는 반달이 걸려 있었다. 태양은 지평선에 모여 있는 얇은 구름층을 뚫고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일출 광경은 어디서나 보아도 황홀하였다. 이 황홀한 일출 광경을 보기 위하여 매일 일찍 일어났던 것이다. 산에서 솟아오르던 울란바타르, 울란우데, 타이가 숲에서 떠오르던 동바이칼의 엥헬룩, 울란바타르행 열차를 타고 오며 본 일출이 제각각이었다. 몽골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 일출 광경을 볼 것이다.
양치하고 세수할 물이라며 작은 주전자에 담아왔다. 여기 방식대로 해야한다. 물이 귀한 곳이기 때문에 아껴 써야 한다. 촐롱이 시범을 보였다. 말 그대로 고양이 세수하는 방법이었다.
물이 떨어지면 사람도 가축도 죽는다. 그렇게 물이 흔한 동바이칼의 엥헬룩에서도 물을 절약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아침식사는 수태차를 마시며 빵을 우름에 발라 먹었다. 우름은 쨈과 같은 것으로 우유로 만들었다. 올이 굵은 국수를 수태차에 말아먹는 것도 괜찮았다.
오늘은 먼 길을 가야 한다.
8시 40분 촐롱의 가족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촐롱의 사촌동생에게 일회용 라이터를 선물하였더니 좋아하였다. 가슴을 부딪치며 양쪽 볼을 부비는 몽골식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바양차강솜을 지나 풀이 아주 작은 초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준비해 온 아이락을 한잔 하였다. 미터기가 17,857km에 멈추어져 있었다.
데렝에서 경주마를 훈련시키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경주마는 다른 말들과 격리시켜 매어놓았다. 말의 몸통을 덮개로 씌웠다. 땀을 내어 몸무게를 줄이려는 훈련의 방법이라고 하였다. 기수는 끊임없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말과 교감하고 있었다. 마치 시골 농부가 밭갈이할 때 소를 부르는 소리와 비슷하였다.
솜 나담에 출전하기 위하여 훈련하고 있다고 하였다. 투브 아이막에서는 8월 달에 별도의 나담을 한다고 하였다.
전국적인 나담축제는 울란바타르에서 7월 11일-13일까지 거국적으로 열린다. 몽골의 전통적인 3대 민속경기인 말타기대회, 버흐라는 씨름대회, 활쏘기대회가 성대하게 열린다. 옛날에는 종교적인 성격이 강하였으나, 1921년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된 7월 11일을 기념하는 전국민적인 축제형태로 바뀌었다.
아이락을 먹고 쉬어 가라고 하였다. 필요하다면 잠도 재워줄 수 있다고 하였다. 인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아이락을 맛보기 위하여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게르 안에는 나무침대가 두개, 생활용품을 넣어두는 궤가 4개, 북쪽에는 사진틀 2개가 정리되어 있었다.
사탕과 초콜렛, 손수건을 선물로 주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볼펜을 하나씩 주었다. 담배를 남자들에게 권했더니 여자들도 달라고 하였다. 여자들도 담배를 피우는 걸 또 잊어먹었다.
아이들 세 명이 한국으로 돈벌러갔고 한 명은 헝가리로 갔다. 사진틀 속에는 한국에서 찍은 사진도 들어 있었다.
11시 20분
작별인사를 하였다. 아주머니 한 분이 게르에서 뛰어나왔다. 잘가라며 우리에게 유제품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우리의 시골 인정과 생활 모습의 비슷한 면을 보는 순간이었다. 포르간의 미터기가 17,907km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자 초원에는 풀보다 모래가 많아졌다. 드디어 사막에 온 모양이었다. 가도 가도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며 나타났다. 가끔은 색다른 모습도 나타났다. 색다른 모습을 보는 재미 때문에 사막여행은 지루하지 않은 것이다.
초원에서 시동이 꺼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낡은 차를 만났다. 낡은 차는 짐을 가득 싣고 있었다.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몽골인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내일처럼 도와준다고 하였다. 언제 이런 어려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시동을 걸어주었다. 우리는 대신 바위그림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물어보았다.
한참동안 우리와 평행선을 달리던 낡은 차는 다른 길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다시 손짓으로 알려주었다. 멀어져가는 낡은 차에는 할아버지와 운전기사와 아이가 타고 있었다. 여자는 없었다. 게르를 설치할 장소에 미리 가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한국으로 돈벌러간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혼하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은 아닐까.
멀어져가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인천공항에서 울란바타르로 올 때 한국에서 일하다 돌아간다는 얌이라는 여자가 짐 하나 들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 떠올랐다. 짐이 많아서 통과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작은 상자를 테이프로 꽁꽁 묶었는데 사탕이라고 하였다. 의심나면 풀어보이겠다며 서툰 한국말을 하였다. 여행자 신분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야박함이 이제야 후회스러웠다. 우리는 너무나 메마른 인정 속에서 이웃도 모르고 정신없이 살아오지 않았는가.
몽골인이 한국인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첫째, 두살 때부터 말타기를 배운다. 둘째, 열살 이상이면 세차, 이동전화, 장사, 구걸 등 무엇인가 일을 한다. 셋째, 상대방이 잘못했다면 바로 따진다. 넷째, 곤경에 처한 상대방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오후 1시 20분
우연히 게르를 설치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게르를 설치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동바이칼의 엥헬룩에서 울란우데로 돌아오는 길에 러시아인 장례식을 본 행운이 계속 좋은 일만 생기게 하는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염소 허르헉, 타르박 보독, 경주마 훈련, 게르 설치 광경, 코담배 피우는 법 등 어제 오늘 아주 희귀한 일만 보았다.
우리는 담배와 사탕과 초콜렛을 선물로 주며 사진을 찍겠다고 양해를 구하였다. 주인은 아이락을 대접하였다. 이틀 동안 다른 아이락을 세번째 맛보고 있었다. 아이락 맛이 다 달랐다. 코담배도 피워보라고 권하였다.
코담배 피우는 방법은 이렇다.
코담배통을 오른손으로 받아 뚜껑을 열고 살짝 떠서 코에 대고 소리나게 맡은 다음 주인에게 오른손으로 돌려주면 된다.
2시 10분.
델게르 촉트의 바위그림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바위들은 강열한 태양과 풍화작용에 의하여 훼손되고 있었다. 산양이라고 부르는 양기르, 사슴 등이 면그림으로 새겨져 있었다.
바위그림을 본 후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촐롱의 게르에서 싸가지고 온 올이 굵은 국수와 염소고기와 타르박 고기도 함께 먹었다.
3시 10분.
두번째 바위그림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여기에는 대형사슴이 그려져 있었다.
대형사슴이 그려져 있는 바위그림을 뒤로 하고 또 초원을 달렸다. 초원지대에서 보기 드물게 바위가 많은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아주 색다른 초원의 한 모습이었다. 유적답사나 경치좋은 풍경을 보려고 했으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또한 운전기사 엥헤는 험한 바위길을 잘 달렸다. 처음 계약하였던 이스타나 승합차로는 이런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길로 갈 수 없으면 다른 길로 몇 시간 돌아가야 하였다. 사막에 와서 보니까 차를 포르간으로 교체한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되어졌다. 많이 염려했던 것처럼 뛰지도 않고 목도 아프지 않았다. 이스타나 승합차는 아스팔트길이나 좋은 초원의 길이 제격일 것이다.
바위가 많고 나무가 많은 곳에 수드트 폐사원이 나타났다. 수드란 이 초원에 자생하는 약용식물이며 이 이름으로 사원 이름을 지은 것이다. 사원은 밖에서 보이지 않게 요새처럼 바위 속에 숨겨져 있었다. 주어진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만든 이 사원은 건물 벽을 황토흙으로 견고하게 만들었다. 사원 위 바위 봉우리에 올라가면 넓게 트인 사방을 조망할 수 있었다.
멀리 돌아온 포르간 2대가 수드트 폐사원 앞에서 멈추었다. 서양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이들도 폐사원을 보고 바위봉우리 위로 올라가 사방을 조망하였다. 구경하는 형태는 거의 비슷한 모양이었다
5시 10분.
아다착에 도착하여 휘발류를 가득 채웠다. 1L에 310투그리였다. 포르간은 양쪽에 기름 탱크가 있고 안에는 플라스틱 기름통을 하나 여분으로 가지고 다녔다. 사막을 여행하는 전문 차량인 것이다.
6시 40분.
아르샹트에 도착하였다. 샘물, 온천, 약수가 유명한 모양이었다. 물이 귀한 곳에 이런 지명이 있다니 놀랍다. 색깔이 변한 풀들은 아주 작았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아이들이 어린 사슴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8시 20분.
촉트 타이지 비를 보았다. 1640년 청나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촉트 타이지가 애쓴 것을 비석에 새겼다고 하였다. 표시를 한 것인지는 몰라도 높은 곳에 안테나가 세워져 있었다. 주변에는 바위그림이 많았다. 처음 발견한 줄 알고 기뻐했는데 주변에 널려있는 것이 바위그림이었다.
흐리더니 간간이 비가 내렸다. 점점 어두워졌다.
초원길은 고속도로였다. 시속 70km로 달렸다. 바위 위에 앉아있는 덩치가 큰 독수리가 바위처럼 보였다. 초원은 노을에 의해 황금색으로 빛났다. 노을이 서쪽에서부터 북쪽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노트에 씌여지는 글씨도 빨갛게 보였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초원을 달렸다.
9시 40분.
빛나다라는 뜻이 있는 델게르항 솜에 도착하였다. 미터기는 18,182km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잠잘 곳을 찾아야했다. 델게르항 솜의 인구는 2,500명, 8년제 학교가 있고 300명이 학생이라고 하였다.
숙소를 구하는 것은 촐롱의 몫이었다. 군수에게 우리를 몽한 학술연구단이라고 소개하여 솜의 숙소를 싸게 빌렸다. 1인당 2000투그릭이었다.
밥을 하고 카레와 짜장, 김치, 고추장 등을 동원하여 모처럼 한국식으로 푸짐하게 먹었다. 11시 30분에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휴지로 간단하게 하여 정리한 후 한 양동이 물로 양치하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발까지 닦았다.
8월 1일
6시에 일어났다. 일찍 일어난 덕분에 델게르항 솜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다. 이 작은 솜에도 크게 지은 사회주의식 건축물의 특징이 보인다. 크게 지어진 건축물은 폐가와 다름없는 것들이 많았고, 보수하지 못해 낡은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공중화장실이 두개 있었는데 하나는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멀리 산이 높게 보였다. 솜을 통과하고 있는 전기선은 나무 전봇대에 의지하고 있었다. 전봇대 아래에는 타르박같은 놈들이 갉아먹지 못하도록 콘크리트 구조물로 땅에 밖혀 있었다. 어디를 가나 전기선은 똑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6시 40분
해가 엷은 운무층을 뚫고 빛줄기를 하늘로 보내며 비상을 준비하였다. 해가 약간 언덕으로 이루어진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까마귀떼가 여러 소리를 내며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숙소를 안내한 사람은 사회주의 시절에는 트랙터 기사로 초지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고 하였다. 아직도 그 시절의 향수에 젖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5년 전에 솜에 취직하여 잡일을 하고 있었다. 40살이라고 하는데 50살도 더 넘게 보였다. 항상 건조한 곳에서 생활하여 피부가 꺼칠해지고 따가운 햇볕에 피부가 그을려 그들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아 보였다.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9시가 넘었는데도 솜에는 출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출근시간이 몇 시인지 모르겠다. 7-8월이 휴가철이기 때문일까?
출발 직전 그에게 아이들 나누어주라고 사탕과 초콜렛을 한 움큼 주었는데 주머니에 넣고 아이들에게는 하나도 안주는 게 아닌가. 이제야 겨우 그들의 습성 하나를 알았다. 자기에게 준 것은 전부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아버지와 자식간에도 자기 물건은 주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을. 살기 힘든 풍토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옆에 있던 아이들에게 다시 사탕과 초콜렛을 나누어주고 9시 8분에 출발하였다.
물이 고여있던 웅덩이에는 물이 하나도 없고 얼음이 얼어 있는 것처럼 하얗게 보였다. 하얗게 보이는 것은 호지르라는 것이다. 말이 먹는 염분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없으면 말은 죽는다고 하였다.
TV에서 본 여우를 초원에서 보았다. 초원에 숨어 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언덕을 넘어가 버렸다.
10시 30분
AD 6세기-8세기의 투르크시대 무덤과 순장한 무덤을 보기 위하여 정차하였다. 미터기가 18,235km에서 멈추었다. 무덤 남쪽에는 사슴돌이 있었다.
11시 20분
몽골산맥을 통과하였다. 사막이 끝나는 곳이기도 하였다. 초원에는 나무가 보이지 않는데 사막에는 나무가 있었다. 초원에는 나무가 있고 사막에는 나무가 없다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었는데 또 틀렸다. 모래와 관목, 국화같은 노란꽃이 만발한 사막을 뚫고 타르닌강에 도착하였다.
타르닌강에는 작은 풀이 많았다. 차힐닥과 데르스란 풀이 물을 가두어 흙이 둥글게 올라온 게 엄청나게 많다. 그만큼 물이 많다는 증거였다. 이 풀은 뿌리가 10m나 내려가기도 한다. 초원의 물저장고 역할을 하는 셈이다. 소똥과 동물뼈가 즐비한 이곳에서는 송장메뚜기 소리도 요란하였다. 고비가 끝났음을 알리기 위해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12시에 타르닌강에서 출발하였다.
1시간쯤 달렸을까. 가까이 보이던 산이 더 멀리 보였다. 모래언덕이 도시의 아파트처럼 보였다. 착시현상이었을까. 아니면 신기루를 보고 있는 것일까. 쌍봉낙타도 보이고 여행자를 위한 게르도 보였다. 처음으로 아스팔트길을 만났다. 몽골 알타이 여행사란 한글 표지판도 만났다.
엘슨 타사르하이는 울란바타르, 아르바이헤르, 하르허린(역사상의 카라코룸)으로 가는 방향의 삼각점에 있었다. 여행자 숙소 겸 식당이었다. 미리 예약한 한국사람들이 있어서 음식의 여유가 없다고 하였다. 보츠가 조금 있다고 하였다. 친절하게도 밥과 라면을 할 수 있게 장소를 제공하여 주었다.
오후 2시 20분
하르허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하르허린으로 가는 아스팔트길 주변의 초원에는 거의 풀이 없어 땅색만 보였다. 초원길을 달리다 아스팔트길을 달리니까 기분이 이상하였다. 1시간 정도 지나서 흉노, 돌궐, 몽골의 중심지였던 하르허린의 에르덴 조 사원이 눈에 들어왔다. 에르덴 조 사원의 둘레에 있는 백팔번뇌를 상징한다는 108개의 탑이 보였다.
하르허린은 우브르항가이(항가이산맥의 품, 즉 남쪽)에 있는 옛날 도시였다. 오르콘분지에 있는 도시로 투르크어로 검은 자갈밭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땅이었다. 화산폭발이 있었으며, 오르콘강이 흐르고 에르데 조 사원이 있는 인구가 17,000명인 도시였다.
오르콘강이 흐르는 곳에 옛날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체덴발이 사용하던 별장이 있었다. 현재는 여행자 숙소로 제공되고 있었다. 버드나무숲이 우거져 있고 별장 건물 양편 화단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다. 목욕물이 주어지며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별장 건물은 1인당 20,000투그릭, 게르는 10,000투그릭 였다. 배낭여행자의 숙소로는 너무 비싼 편이었으므로 인근에 있는 싼 게르를 골랐다.
내일의 숙소를 미리 예약하여 놓고 4시에 AD 840-920년에 만들어진 위구르시대의 도성을 찾아나섰다. 1시간 후 아르항가이(아르-북, 등)의 카라 발가순성에 도착하였다. 우브르항가이와 아르항가이의 경계선인 호통트솜에 카라 발가순성이 있었다. 옛날에 호통트는 이슬람교를 믿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오르콘강은 하르허린부터 하류로 내려오면서 동서의 길이가 더욱 길어지는 분지의 특이한 특징이 나타났다. 거대한 분지 속에 폐허가 된 성벽만 덩그러니 남아 한 때 이 곳을 지배하였던 위구르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성벽을 따라 관계수로의 흔적도 보였고, 도망자를 감시하였을 망루의 흔적도 보였다. 망루였을 높은 곳에는 오보가 터 잡고 있었다.
이 시대의 물류기지 역할을 했을 성터에는 위구르의 영화는 간 데 없고 정적만 흘렀다. 아는지 모르는지 새떼가 낮게 날고 양과 염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깨어진 비석도 그들의 퇴락과 비운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초원에는 주인이 바뀌면 전시대의 것들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5시 20분 출발하였다.
미터기가 18,426km를 가리켰다.
얼마 못 가서 타이어가 펑크났다. 운전기사 엥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솜씨 좋게 타이어를 교체하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바퀴를 꺼내고 튜브를 꺼냈다. 펑크난 곳을 찾아 쇠줄로 문지르고 접착제를 발라 말렸다. 엥케를 도와주기 위하여 한쪽 손잡이가 없는 타이어펌프를 이용하여 열심히 바람을 넣었다. 망치로 타이어의 상태를 파악해보려고 텅텅 치기도 하였다.
카레이서 출신이라는 엥케의 정비솜씨는 수준급이었다. 그는 키가 작고 얼굴이 검으며 팔뚝이 굵었다. 28살의 나이로는 배가 너무 많이 나왔다. 남자들의 배가 많이 나온 것은 권위를 상징하였다. 아무리 배가 많이 나온 것이 권위의 상징일지라도 변화하고 있는 몽골이지 않는가. 배에 찬 복대가 보일 때마다 싱긋 웃는 엥케였다.
초원 길을 달리는 운전솜씨도 최고였다. 1960년대 우리의 시골길을 달리던 트럭운전사와 비슷하였다. 그때 그들이 최고의 신랑감이었듯이 몽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달 월급이 3만-5만 투그릭인데 그는 5일 동안 20만 투그릭을 벌었다. 물론 이렇게 운수 좋은 달은 6월, 7월, 8월뿐이었다.
6시 40분.
타이어를 교체하고 출발하였다. 1시간 후 노란 강의 언덕이라는 샤르골린 다와에서 엥케는 오브를 향하여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더니 차를 멈추었다. 왜 세 바퀴를 돌지 않느냐고 하였더니 씩 웃었다.
10살 정도의 아이들이 아이락을 팔려고 말을 타고 달려왔다. 나이를 물으니까 15살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아이들도 나이를 올려 대답하고 있었다. 나이를 올리는 것도 권위의 상징이었다. 아이락 한 잔이 100투그릭이라고 하였다. 촐롱이 먼저 아이락 맛을 보았다. 맛이 좋다고 하였다. 정확한 나이를 알려주지 않으면 아이락을 안먹는다고 하니까 10살, 11살이라고 하였다.
아이락을 먹고 조금 더 체체를렉 쪽으로 가자 쳉케르 타미르강이 보였다. 강을 따라 길게 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강변에는 물저장풀인 차힐닥과 데르스가 많아서 흙이 봉긋봉긋 솟아올라와 있었다. 강가에는 소와 함께 사를락이 풀을 뜯고 있었다. 사를락은 소와 야크의 교배종으로 털과 뿔도 유용하게 쓰이는 가축이었다.
드디어 오늘 여정의 끝인 체체를렉에 도착하였다.
8시 40분 아르항가이의 아이막에 도착한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심에는 나무가 잘 가꾸어진 정원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도시 체체를렉에 들어온 것이었다. 서쪽 능선은 동산처럼 보였고 북쪽은 바위산으로 나무도 있고 제법 웅장하였다. 해지는 쪽에서 약간 우측으로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 보였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페인트칠을 하여 불상을 가렸는데 지금은 칠이 벗겨져 볼 수 있었다. 도심보다는 동북쪽 능선에 게르가 많이 모여 있었다.
훕친 어르드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말이 호텔이지 여관보다 못한 시설이었다. 1인당 2,500투그릭, 침대없이 바닥에서 자면 1,500투그릭, 목욕를 하려면 2,000투그릭을 별도로 내야 되었다. 아래층에는 식당이 있기 때문에 방에서 식사준비를 하면 안된다고 하였다.
호텔에서 잡일을 맡고있는 돌람수렝이라는 여자는 서른 살로 제법 뚱뚱하였다. 울란바타르에서 의학을 전공하였는데 일자리를 찾아 여기까지 와서 전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9시 30분.
해가 서쪽의 바위동산으로 가라앉았다. 해가 뜰 때처럼 빛줄기가 구름을 뚫고 부채살 모양으로 퍼졌다. 산봉우리에 구름이 걸려있는 틈을 비집고 비추는 빛줄기가 강열하였다.
10시 30분.
저녁식사를 끝냈다. 촐롱과 엥케는 우리 음식을 먹기가 힘들었는지 식당에 내려가서 시켜먹겠다고 하였다. 김장구씨도 그들과 같이 먹겠다고 하였다. 양고기와 국수를 넣은 럅샤를 먹었더니 힘이 난다고 웃었다.
11시가 넘어서 따뜻한 물이 나왔다. 목욕을 하니까 기분이 좋았다. 손톱의 때도 발냄새도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와 함께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 촐롱의 게르에서 본 북두칠성은 멀리 북쪽 하늘에 보였는데 이틀동안 서쪽으로 많이 이동한 모양이었다.
새벽에 너무 목이 말라 깨어났다.
정적을 깨는 개짖는 소리만 요란하였다. 달무리진 게 보였다. 하늘에는 별이 많지 않았다.
동료들은 피곤한지 코를 골며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코를 골며 자는 것이 같다고 한 메카를 순례하던 말콤엑스의 말이 기억되는 밤이었다.
편안하고 안락한 밤이 되기를…
위대한 바타르나 영웅이 나타나 타이하르 촐로 꼭대기에서 바위를 던져 거대한 뱀을 죽인다.
8월 2일 7시.
새떼소리가 요란하였다. 날씨가 쌀쌀하여 잠바를 꺼내 입었다. 건너편 주유소의 가로등 3개는 아직도 켜져 있었다. 가로등 주변에는 밤새 죽은 흰나방이 널려 있었다.
해가 떠올랐다. 동쪽 하늘에 구름이 많아 해뜨는 것이 선명하지 않았다.
훕친 어르드호텔을 출발하여 시내에 있는 민속박물관을 관람하였다. 1724년에 건립한 자야 반디타 사원을 민속박물관으로 쓰고 있는데 몽골에서 두번째로 큰 박물관이라고 하였다. 1인당 입장료는 3,000투그리이며 사진과 비디오 촬영은 별도 요금을 내야 되었다.
몽골 박물관의 공통점은 입장료가 비싸며, 사진과 비디오 촬영비는 별도로 내며 18살 처녀의 뼈로 만든 악기가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늑대젖을 빨고 있는 돌궐인의 조상 설화가 새겨진 비석, 앞에는 태양, 뒤에는 달이 새겨진 사슴돌, 18살 처녀의 뼈로 만든 악기가 특히 유명하였다.
중심 절에는 몽골인들의 풍습, 전통 생활도구, 무기류, 말안장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특히 우리의 전통 결혼식의 풍습이 남아있는 족두리, 연지곤지 등은 문화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었다. 두번째 절에는 종교와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사원은 1937년 스탈린의 숙청 때 박물관으로 사용되어져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11시.
민속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타이하르 촐로를 보기 위하여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름길도 있는데 공사 중이서 통행이 금지되었다. 어제 해가 넘어가던 그 언덕에 올라 체체를렉을 둘러보았다. 서, 북,동쪽에는 게르가 많다. 언덕을 넘어가자 왼쪽 강변에는 나무가 있고 오른쪽에는 숲이 보였다. 1시간 정도 지나자 나무가 있는 산지가 끝나고 초원이 펼쳐졌다. 감자농장도 보였다.
12시 30분.
이흐 타미르강 또는 허이트 타미르강 부근에서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솟아올랐다. 신기루인가. 정신없이 초원을 달려오다가 강건너 바위산과 겹쳐진 타이하르 촐로를 구별하지 못한 의아함 때문일 것이다.
타이하르 촐로는 초원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덩어리였다. 위대한 바타르나 영웅이 타이하르 촐로 꼭대기에서 바위를 던져 거대한 뱀을 죽인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였다.
포르간은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고 멈추었다. 바위 꼭대기에는 오보가 있었다. 바위에는 붉은 글씨가 많이 쓰여져 있었다. 전설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기원일 것이다. 들판에는 양떼가 가득하였다.
말탄 아이들이 아이락과 머루같은 것을 팔려고 왔다. 그 열매는 보라색인데 맛이 시큼하였다. 그 열매는 그냥 먹을 수도 있고 발효시켜 쥬스처럼 먹기도 한다고 하였다.
아이락을 한잔 하였다. 위대한 바타르나 영웅이 거대한 뱀을 죽이는 기분으로 아이락을 쭈욱 들이켰다.
나무로 숲을 이룬 타미르강이 바로 옆으로 흘렀다. 강물은 차고 깨끗하였다. 주변에는 여행자 숙소가 있었고 나무그늘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도 많았다.
하르허린으로 가려면 체체를렉으로 다시 가야 되었다. 돌아갈 때 보이는 산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산의 북쪽 면에는 침엽수림이 우거져 있었고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 면에는 나무가 없었다.
2시 10분.
체체를렉으로 다시 돌아왔다. 엥케는 펑크난 타이어를 교체하였다. 보츠와 컵라면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재래시장 구경도 하면서 쉬다가 4시에 출발하였다. 미터기는 18,612km를 가리켰다.
5시 10분
돌무지무덤에 도착하였다. 중앙에 큰 돌무지무덤이 있었고 주변에 다섯 줄 정도 딸린 무덤이 있었다. 발굴한 흔적으로 돌무지무덤의 중앙부가 함몰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화산활동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현무암이 많았다. 현무암을 이용하여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다. 특히 동남쪽, 서남쪽에 딸린 무덤이 많았다.
5시 50분
샤르골린 다와에 도착하였다. 오브에서 차를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고 멈추었다. 말탄 아이들이 아이락을 팔려고 왔다. 촐롱이 맛을 보았다. 아침에 가져온 아이락이 햇빛에 많이 노출되어 맛이 상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먹으면 틀림없이 설사를 한단다. 좋은 아이락은 걸죽하고 달고 시큼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쉽지만 참을 수 밖에…
서부에 있는 오브스 아이막에서 트럭에 생활도구를 싣고 울란바타르로 이사를 가는 일행을 만났다.
이르쿠츠크에서 울란바타르로 국제열차를 타고올 때 보았던 모스크바에 가서 물건을 사다가 판다는 가족들, 말을 탄 아이들이 아이락을 파는 것, 오브스에서 울란바타르로 이사를 가는 모습 등은 현재 몽골 평원에 부는 변화의 바람인 것이다.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강력한 변화의 바람인 것이다.
오후 7시 30분
하르허린에 도착하였다. 오르콘강이 흐르는 곳에 있는 체덴발 공산당 서기장이 사용하던 휴양소 부근의 게르를 예약했었다. 외국인 3,000투그릭, 내국인 2,500투그릭이었다. 침대가 놓여있는 게르였다. 체덴발 서기장이 사용하던 별장을 개조한 여행자 숙소에 비하면 굉장히 싼 것이다.
숙소를 관리하는 곳에서 설거지와 밥을 해주어 편했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손수건과 스타킹을 선물로 주었다.
저녁을 먹고 배구공을 빌려 축구를 하였다.
이름붙여 초원의 축구, 1인당 1,000투그리를 내기로 걸었다. 배구공을 빌려준 여자아이에게 노트와 볼펜과 초콜렛을 선물로 주었다.
그 여자아이는 가족과 함께 놀러왔다고 하였다. 우리의 학제로 보면 그 여자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에 해당되었다. 영어를 아주 잘하였는데 매일 왕복 100리를 말을 타고 학교에 간다고 하였다. 노트를 모으는 것이 취미라고 하였다. 한국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고 하였으며 새벽 2시가 넘도록 돌아가지 않고 이것저것 물어오는 것이었다. 부모가 나와서 데려갔는데 마지못해 발길을 돌리는 것이었다.
왜 그들은 외국어를 잘하는가. 글자가 없는 사람들의 기억력은 비상한 것이다. 암기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뿌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촐롱이 1996년에 답사하였던 유적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도 그것에 한 부분일 것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자기들의 족보를 40대-50대까지 막힘없이 외우는 것도 같은 원리일 것이다.
8월 3일 7시
구름이 낮게 낀 맑은 날이었다.
오르콘강에서 머리를 감았다. 어제 밤에는 날파리가 너무 많아서 강물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아침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1235년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 우구데이(오고타이)가 하르허린을 세계물류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성을 쌓았다. 그 때는 세계경제가 은본위 중심이었다. 쿠빌라이칸이 베이징으로 세계물류의 중심지를 이동하기 전까지 20년 동안 번영을 누렸던 곳이었다. 동서 2-3km, 남북 4-5km의 거대한 성을 쌓았다. 네 개의 성문을 통해서 몽골인, 사신, 군인, 장사꾼이 서로 다른 문으로 드나들었다. 그 후 명의 침입과 내분으로 여러차례 불에 타 폐허로 남게 되었다.
성 입구에는 길이 2m, 높이 1m나 되는 거대한 돌거북이 옛날의 영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성은 1949년 몽골과 소련이 합동으로 지표면을 발굴하였다고 하였다. 현재 궁전 중심지를 독일이 발굴하고 있었으므로 접근이 금지되었다.
몽골이 쌓은 성은 통치자가 거주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포로로 붙잡혀온 사람들이 살았고 물건이 유통되는 물류기지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외적을 방어하는 역할은 더욱 아니다.
돌거북 주변에 상인들이 몰려와서 옛날 물건을 팔고 있었다. 옛날 돈, 코담배통, 향로, 티벳불교 불상 등인데 비싼 것을 사려면 반출증을 꼭 챙겨야 출국할 때 낭패를 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반출증은 에르덴 조 사원에서 써준다고 하였다.
에르덴 조 사원의 입장료는 무료인데 절의 내부를 보려면 1인당 3,000투그릭을 내야한다. 물론 사진과 비디오 촬영은 별도의 돈을 내야한다.
올해 10학년을 졸업하고 9월에 몽골 국립종합대 일어과 입학 예정이라는 인드라라는 안내원이 안내를 맡았다. 인드라는 친절하고 성의껏 안내하고 설명해 주었다.
이 사원은 몽골 최초의 티벳불교 사원으로 칭기스칸의 29대손 브타이칸이 1596년 세웠다. 폐허가 된 궁전터의 석재를 이용하여 사원을 건립하였다. 사원을 건립할 때의 심정은 선조들이 세계물류의 중심지로 삼았던 영화를 재현하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었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지었다.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탑이 있는데 99개가 둘레에 있었고 9개가 사원 안에 있었다.
건물이 모두 62개 였는데 외적의 침략으로 불에 타서 18개만 남았다. 스탈린시대에는 3개의 절만 남기고 파괴되었다. 승려들은 죽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당하였다. 하지만 많은 수의 동상, 전통 탈 탕카는 보존되었다. 이것들은 가까운 산에 묻었거나 주민들의 게르에 숨겨졌기 때문에 보존되어졌다. 1944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1965년 박물관이 되었다.
18살 처녀의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도 있었다. 1대 복드한인 자나바자르의 초상도 있었다. 황금불탑이 남북으로 2개가 가로놓여 있었다.
서사에는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내는 나이든 삼불이 있는데 흙으로 만든 다음 금으로 도금을 하였다. 벽화에는 8가지 성물이 표현되어 있었다.
중사에는 가운데 모셔진 불상이 부처의 젊은 시절 모습이고 해와 달, 앞에는 부처를 지키는 남녀 수호신, 뒤에는 부처의 사상을 관장하는 부처의 제자 8명이 새겨져 있다. 좌측에는 극락세계를, 우측에는 건강, 행복을 나타내는 부처가 있었다.
동사에는 가운데 모셔진 불상은 부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다. 좌측에는 평화, 우측에는 황교의 수장을 나타내는 부처가 있있다.
아요시의 상은 금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큰 눈을 통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관찰한다고 하였다.
황금탑에서는 11시에 경전을 읽겠다고 소라나팔로 알렸다. 참이라는 불교음악을 할 때 쓰는 탈과 복장도 있있다. 안에서는 노란 복장의 승려들이 경전을 돌려보며 읽고 있었다.
사원 북동쪽에는 행복과 번영의 광장으로 불리는 곳에 거대한 게르 터가 있었다. 높이가 15m, 지름이 45m, 8개의 기둥을 설치하였던 구멍이 있었다. 브타이칸이 겨울철에 돌아와 사용한 게르라 하였다. 300명이 모일 정도로 광대한 규모를 자랑하였다.
에르덴 조 사원에 대하여 성심껏 설명을 해준 인드라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손수건을 선물하였다. 뜻밖에도 한국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하였다.
11시 40분.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류를 가득 채우고 울란바타르를 향해 출발하였다. 1L에 345투그릭이었다. 미터기는 18,738km를 가리켰다. 1시간 10분 정도 지나서 엘슨 타사르 하이에 도착하였다. 식당 안에는 탁자가 4개 있고 가운데는 포켓볼을 칠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벽에는 나무판에 그린 큰 그림이 3점 걸려 있고 일본 달력이 8월에 정지되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날은 식탁이 많았고 포켓볼대가 밖에 있었다. 주문을 많이 받아서 물건이 없어 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점심으로 수태차와 보츠를 주문하였다. 보츠 한 개는 80투그릭이었으며, 1인당 3-4개 정도 먹으면 되었다. 디스담배를 800투그릭에 사고 큰 카스맥주도 1000투그릭에 사먹었다.
2시
울란바토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아스팔트길인데 많이 파여 있었고 공사구간이 많아 차라리 초원으로 달리는 게 편했다.
3시 50분
두루미 2마리를 보았다. 빗방울이 한두방울 떨어졌다. 농사를 짓기 위해 트랙터로 초원을 갈아엎고 있었다. 미터기는 18,888km에서 정지되었다.
5시 20분.
룽솜의 토올강변에서 아이락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강변에는 쉬는 사람들이 많았다. 룽(용) 언덕은 용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하며 대개 여기오면 울란바타르에 다왔다고 하는 안도감에서 쉬고 간다는 것이었다. 강가에는 말들이 물을 먹기 위해 강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타르박을 팔기도 하였다. 30분 쉬고 출발하였다.
50분 정도 울란바토르 쪽으로 가자 제법 큰 밀밭이 보였다.
밀밭 너머 산에는 야생말 타히가 살고 있다고 하였다. 타히는 20세기에 멸종되었다. 독일과 스위스에 가있던 종자를 다시 들여왔는데 다행히 적응을 잘 하고 있다고 하였다.
엥케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 그 바람에 사람들이 한 쪽으로 쏠렸다. 외국인이 타서 시비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는 차에서 내려 경찰관한테 갔다 왔다. 음주단속 중이란다. 룽솜의 강변에서 그가 한사코 아이락을 사양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7시 50분
드디어 울란바토르 톨게이트에 들어왔다. 통행료 500투그릭을 냈다. 미터기에 19,082km가 표시되었다.
4박 5일 동안 1,406km의 대장정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서서히 대장정의 막이 내리듯 포르간도 천천히 울란바타르로 빨려들어갔다.
30분 정도 시내로 들어가자 고려반점이 보였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와서 내일의 일정을 토의하였다. 토의 결과는 테렐지관광을 포기하고 쉬면서 쇼핑을 하기로 하였다.
8월 4일.
날씨가 흐렸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반팔티를 입고 활동하였다가는 감기걸리기에 안성맞춤인 날씨였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테렐지를 포기하기로 한 결정이 아무래도 잘한 것 같았다.
쇼핑을 나갈 시간인데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초원지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비는 줄기차게 내린다. 사람들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다녔다.
쇼핑을 끝내고 비가 그치기를 고대하며 이태준 애국지사 공원으로 갔다.
대암(大岩) 이태준(李泰俊) 선생은 1883년 11월 21일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1907년 세브란스의학교(현 연세대 의대)에 입학하여 1911년 제2회로 졸업하였다. 김필순, 주현칙과 함께 안창호 선생이 만든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독립활동을 하였다. 세브란스 인턴 근무 중 1912년 중국 남경으로 망명하여 기독회의원에서 의사로 일하다 처사촌이 된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1914년 몽골 후레로 가서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설하였다. 특히 화류병 퇴치에 앞장섰다. 몽골 최후의 황제 주치의가 되었고 황제의 임질을 고쳤다고도 한다. 1919년 몽골 최고의 훈장인 에르데닌오치르를 받았다. 1921년 2월 러시아 백군에 의해 피살되어 38세의 일기로 마감하였다. 묘지는 성산인 비그르(트?)산에 있다고 전한다. 1980년 한국정부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태준 공원을 관람하고 나오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개었다. 비온 뒤라 햇빛은 강렬하였다.
간단사원을 관람하려고 발길을 돌렸다.
19세기 중엽에 건축된 이 사원은 현재 몽골에서 가장 큰 사원이며 과거 공산정권 하에서 유일하게 종교활동을 보장받았던 곳이다. 1937년 이 사원도 숙청대상이었으나 외국인의 관광시설로 만들기로 하여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입구에는 돌사자가 두개 있었다. 이곳이 사찰임을 나타내는 철주도 보였다. 광장에는 수많은 비둘기가 있으며 비둘기 먹이를 파는 아이들도 있었다.
20톤 규모의 위풍당당한 미그지드 장라이식 불상은 높이 26m를 자랑하였다. 몽골의 모든 이들이 돈을 모아 만들었다고 하였다.
8월 5일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짐을 정리하며 휴식을 취했다.
울란바타르 보얀트오하 공항의 이상 기류로 인하여 대한항공이 이륙하지 못했다고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내일이면 돌아갈 수 있겠지…
8월 6일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었다. 새떼가 소리를 지르며 하늘로 비상하였다. 처음 울란바타르에 왔던 날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여자들의 복장이 어느새 긴옷으로 변해 있었다.
오늘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했다고 하였다.
오후 1시 30분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을 것이었다.
오던 날처럼 고학년 학생들이 야영활동을 끝내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 버스는 다시 새로운 학생들을 태우고 갈 것이었다. 버스 4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은 학생들로 활기에 넘쳤다.
또 올 수 있을까? 울란바타르여 안녕!
첫댓글 "이렇게 좋은 자료를 여행가기 전에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되네요.
여하튼 고마워요~~~
아이락몽골 카페의 몽골여행기에 있던 자료입니다.
김경진님 께서는 몽골 여행의 선구자 이신것 같습니다
좋은자료들을 참으로 많이 갖구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몽골여행의 모든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좋은 여행기 감사합니다.
몽골여행 준비 중에 올려 주신 몽골 관련 자료들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자료를 우리 카페에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