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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에서 하룻밤 (천장암 홈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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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법어 스크랩 [경허집] (行狀) 取隱和尙行狀 (취은화상 행장)
천장암 추천 0 조회 55 12.08.23 08:5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取隱和尙行狀 (취은화상 행장)



 내가 호서에 묻혀서 그렁저렁 게으르게 지낸지 어언 20여년이었다.

 취은화상의 도덕의 향기가 나부낌은 멀리서 들었지만 남북이 멀고 멀어 친히 찾아뵈옵고 마음의 때를 씻지 못하였는데 화상께서 암연히 입적하셨으니 그 한(恨)됨이 특히 깊었다.

 

 광무 4년 겨울에 구름처럼 한가로이 놀고 싶은 뜻이 있어서 조계산 송광사를 지나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눈보라가 심하고 찬 바람이 매서웠다.

 선창에 묵고 있노라니 자응(慈應) 금명(金明) 자성(慈城) 삼형제가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사(先師) 취은화상께서는 생존시에 출세간의 도업이 비록 옛조사와 견줄 수는 없어도 근세에 보기 드문 분이니 선사의 고행(高行)을 법을 이은 제자가 마땅히 행장을 지어서 뒤에 전함이 옳음이거늘 이제까지 하지 못한 것은 기회가 없었음인데 마침 큰스님께서는 문장이 유명하시고 선지(禪旨)가 깊으신 어른이시니 여기에 오신 기회에 바라건대 큰스님의 한 말씀을 빌려서 우리 선사의 유적을 빛나게 하여 주소서. 이러한즉 다만 우리 선사의 행업이 없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문도들도 또한 유감이 없을 것이오니 청컨대 큰스님의 문필을 아끼지 마소서." 하거늘 내가 재삼 사양하자 그 청이 더욱 간절하여 삼가 그 문도들의 기록한 바를 상고하니 화상의 휘는 민욱(旻旭)이요 법호는 취은(取恩)이며 속성은 최씨니 해주후인이다.

 가경(嘉慶) 20년 을해 경상도 봉화땅에 살기 시작하다가 집 짓고 살기는 그 이듬해 9월이었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영리하며 노숙한 풍모가 엿보였다.

 14세에 홀연히 티끌세상을 벗어날 뜻이 있어서 태백산 각화사 진주(秦珠)장로에게 귀의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세상 인연을 따라 꼭두각시놀음을 한지도 또한 몇해가 흘렀으니 어찌 일찌기 보리의 도법이 세간을 여의지 않은 줄 깨달았겠는가.

 나이 40에 이르러 초은(超隱)장로를 태백산 미륵암에서 찾아 뵙고 옷깃을 여미고 법을 물으니 정안(正眼)을 결택하여 사자(師資)의 도가 서로 계합하여 모시기 10여년에 현묘하고 깊은 경지를 얻었어도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알 수가 없었다.

 

 그 뒤 68세 되던 계미년에 반야봉 아래 용수굴에 살기 10년을 흙덩이처럼 앉아 지내니 온갖 생각이 찬 재처럼 식었고 도의 지혜는 성성해서 홀연히 돈오한 곳이 있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안다" 한 것이 이것이다.

 청허선사(淸虛禪師)가 이르기를 "차리리 천겁을 생사에 윤회할지언정 모든 성현의 해탈을 사모하지 않음이 선가의 눈이요 남의 시비를 보지 않음이 선가의 발이라(寧可千劫輪廻生死不慕諸聖解脫禪家之眼也不見人之是非禪家之足也)" 하였으니 화상이 발심하여 기어이 돈오하였으니 깨닫고 난 뒤의 생애가 저 한조각 굳센 돌 같은 즉 선가의 안목은 거의 갖춤이라 청황으로 호사스런 치장이나 거문고의 풍악에 귀먹고 눈이 멀지 않았으니 시비가 저절로 끊어졌음이라 선가의 발이 가히 십분이나 두루 원만히 갖추어진 셈이다.

 대개 북으로는 묘향산에 들어가고 남으로는 두류산에 들어가 노니 반평생의 행리처(行履處)가 한가로운 구름이나 들학과 같았으며 또한 소탈하여 스스로 높일 줄 모르니 그 속의 거룩한 인품을 모르고 정중히 대하지 않다가 지혜있는 이는 뒤에 가서 사의 인품을 알아본다.

 

 79세 되던 갑오년 봄에 동리산 미타암에 주석(住錫)하며 선회(禪會)를 설치하여 현풍(玄風)을 떨치니 탁월한 행리는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4년 뒤 정유년 마지막 보낼 곳을 가리어 명적난야(明寂蘭若)에 편안히 지낸지 3년 되던 기해년 정월 초이레날 가벼운 병세를 보이더니 14일날 신시에 입멸(入滅)하였다.

 슬프다! 형상있는 것은 반드시 공으로 돌아가는 것은 세상에서 면할 수 없는 일이다. 도인이 입적하는 것인들 어쩔 수 있으리오. 온 산중과 마을사람들이 애통해 마지 않았다.

 

 돌아가실 무렵에 어떠하였는가 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단정히 앉기를 보통 때와 같이 하였다. 그 때에 원주 혜운(慧雲)상좌가 묻기를 "화상께서 이제 열반에 들고자 하시니 사산(四山 : 地水火風)이 서로 핍박하리니 그 정혜(定慧)의 일념이 굳게 엉켜 매(昧)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니 화상께서 목침을 일으켜 세우더니 암연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구지화상(俱指和尙)의 손가락을 일으켜 세운 것이 마침내 부질없는 일로 돌리지 말라. 너른 하늘이 춥고 더움에 타는 것도 후려치고 꽁꽁 어는 것도 쳤는데 이것도 또한 문밖의 소식이다.

 화상께서 목침 한 개를 세움은 능히 죽이고 능히 살리며 비춤도 있고 씀도 있는 소식이라 암주(庵主)가 조주(趙州)를 대함이니 옛날에만 그런 아름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니로다.

 그날 밤 삼경에 한 줄기 서광이 허공에 가로질러 뻗혀서 무지개 같았으며 화장을 한 뒤 닷새가 지나도록 그 빛이 더욱 밝았으며 오색이 영롱하게 흩어졌다 합해졌다 하기를 수없이 하였으며 상서로운 구름이 모여들어 이상한 모양으로 찬란하게 장엄하니 원근의 승속이 우러러 찬탄하기를 옛날의 도인이 열반할 때와 같다고 하였다.

 

 화상은 가경(嘉慶) 21년 병자에 탄생하여 대한(大韓) 광무(光武) 3년 기해에 입멸하니 세수가 84요 14세에 출가하여 계를 받았으니 법랍이 71세다. 화상은 법을 초은 의유(超隱義宥)에게 이었고 초은은 연월 이준(淵月以俊)에게 이었다.

 부휴(浮休)는 벽암(碧菴)에게 전하고 벽암은 취징(翠徵)에게 전하고 취징은 백암(柏菴)에게 전하고 백암은 무용(無用)에게 전하고 무용은 영해(影海)에게 전하고 영해는 풍암(楓巖)에게 전하고 풍암은 벽담(碧潭)에게 전하고 벽담은 영월(詠月)에게 전하고 영월은 낙파(樂坡)에게 전하고 낙파는 연월(淵月)에게 전하니 화상은 부휴의 12대손이요 저 태고(太古)의 17세손이다.

 

 부처님의 교화가 점점 쇠잔하여 정법안장(正法眼藏)이 땅에 묻혔는데 화상이 능히 정혜를 오로지 닦아서 무너진 기강을 크게 정돈하니 이 세상에 가위 불가운데서 피어난 연꽃이라 하겠으니 말로서 어찌 다 칭찬하리오.

 나는 쓸모없는 존재로서 세상에 쓰일 데 없어 부처님 교화에 폐단이 되어 백가지 잘못이 함께 일어나니 도덕으로도 능히 건지지 못하거늘 문장으로 어떻게 구제하겠는가. 이 때문에 또한 분개하여 문묵(文墨)을 놓아버린지 10여년이 되었다. 하물며 더위와 추위를 지내면서 문사(文辭)도 쇠락하였고 문장과 귀절에도 용심을 하지 않았는데 화상께서 출세하여 도업이 탁월하여 그 제자 자응 금명 자성 삼형제의 간청이 이러하므로 억지로 사양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지었다.

 이제서야 대략 이렇게 서술하여 놓았으니 전날의 친견치 못한 한을 만에 하나라도 풀림을 이르노라.


 

大韓 光武 四年 庚子 臘月 下澣

湖西歸 釋鏡虛 惺牛 焚香 謹書

于曹溪山 松廣寺 遮眼堂


대한 광무 4년 경자  섣달 하순에

호서로 돌아가는 석경허는 조계산 송광사

자안당에서 분향하고 삼가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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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8.27 23:29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 14.09.04 17:03

    _()()()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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