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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단순히 음악만을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를 들려주는 사람이거든.
작가들이 써주는 대로 읽기만 하는 건 개인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나는 나중에 여러 나라를 6개월씩 살아보고 싶어. 터키같이 내가 흥미있는 나라들은 1년씩말야.
그렇게 진짜 살아봐야 그 나라 문화를 알 수 있잖아.
무언가를 한다면, 열정을 가지고 끝까지 좇아가도록 했으면 좋겠어.
-성시완 선생님 인터뷰 中-
수십년의 DJ노하우를 가지고 계신 만큼 가장 궁금한 질문이 선생님께서 이번에 어떻게 진행을 하실까 하는 점인데요 이번 “서울 문화의 밤”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고 싶으신가요?
글쎄, 뭐로 하는 게 좋을까. ‘아날로그 음악’? 이거 좋은데! 아날로그 위주로 진행해야하니깐 LP판을 위주로 틀고, CD도 조금은 틀어야겠다. 1/3은 월드뮤직으로, 또 1/3은 아트락으로, 나머지 1/3은 사람들에게 조금 낯선 음악을 준비해야겠어. 1부는 감동적인 음악으로, 2부는 센 음악으로 틀어야지.
어렸을 적 음반수집이야기부터 월드뮤직, 아트락, 프로그래시브락 등 음악장르 이야기랑, 음악에 담긴 이야기, 그러니까 스토리텔링 위주로 진행하는 게 좋겠다. 아무튼 이건 더 고민해보고.
성시완 선생님의 기사 자료를 읽어보았더니, 음악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하신 부분이 많으시던데, 어렸을 때 여러 나라의 음악을 듣기 위해 펜팔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펜팔을 하게 되신 건지, 그리고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면?
우리 어렸을 때는 ‘통신’ 이런 게 전혀 발달하지 못했을 때야. 외국으로 전화 연결 자체가 힘들었고, 비쌌어. 전화를 연결하더라도 일 분 지날 때마다 띠띠거리면서 경고음도 들리고 그랬어. 너무너무 비쌌으니깐. 내가 80년대 초반에 영국에 있는 사람하고 전화를 했는데, 그때 당시 돈으로 전화비가 백 만원정도 들었어. 지금으로 치면 한 천 만원 정도지.
그때에는 보통 문방구 앞이나 종로, 광화문의 학원가에 가면 미국, 독일, 스웨덴, 스위스, 오스트라아... 등 여라나라 친구들의 펜팔 상자가 놓여 있었어. 그러면 그 상자 중에서 자기가 마음에 드는 편지를 고르면 되는 거였지. 나는 굉장히 욕심이 많아서 미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웨덴 등 여러 나라의 펜팔친구를 만들었어.
내가 초등학생 때, 특히 요들을 좋아했어. 잘 부르기도 했어 스위스 알펜 요들이라든지 오스트리아 요들을 좋아했는데, 내가 좋아했던 요들러가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오스트리아 여학생이랑 펜팔을 했지. 그리고 까리나 브리스트라는 스웨덴 여학생이랑도 하고. 미국에 캐롤 스미스라는 여학생이랑도 펜팔을 했어. 나는 까리나 브리스트라는 여학생이랑 가장 친했어
내가 중학생 때는 AFKN을 많이 들었어. 그 방송이 미국의 최신 곡들을 가장 신속하게 틀어주고, 밤새도록 음악을 틀어주었거든. 하여튼 그 AFKN에 울프맨잭쇼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 어우~하면서 늑대소리가 중간 중간 나오고. 그 울프맨잭쇼처럼 진행하고 했었어
그때 당시 내가 아프리카 음악에 빠져있어서 아프리카 음악들을 모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까리나한테 보내곤 했어 그아이도 자기가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보내주곤 했는데 그 친구가 보내준 음악을 듣고 내가 반한 곡이 있었어. MAGNUS UGGLA라는 스웨덴 뮤지션의 음악이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조용필 정도의 가수라고 할 수 있지. 실험적인 음악을 만들곤 했어. 하나의 곡 안에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들이 다 들어있었어. 어떤곡은 29분 30초짜리 곡이었는데 내가 라디오 방송에서도 자주 틀기도 했어
아무튼 그 스웨덴 펜팔 친구와는 고등학생 때까지 연락하며 지냈고, 음반교류를 가장 많이 했던 친구야. 그 친구로 인해 내가 컬렉터로서의 인생을 걷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어. 펜팔이 나의 운명을 바꿨지.
그러면 스웨덴 친구에게 보낸 카세트테이프가 성시완 선생님의 첫 녹음테이프인가요?
녹음에 대한 일화도 들려주세요.
내가 녹음을 시작한건 중학교 1학년 때부터야. 큰 누님이 첫 월급을 거의 다 털어서 녹음기를 선물해 주셨어. 아직도 기억하지. 그 때가 1월 9일이었어. 1월 9일은 내게 무척 특별한 의미가 있어. 스테레오 녹음을 처음한 날이기도 하면서, 회사 창립도 이날이야. 그래서 이날을 ‘뮤직데이(음악의 날)’이라 불러.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친구들이나 담임선생님들에게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선물하곤 했어. 선물한 테이프만 해도 천개가 넘어. 한번은 중학교 1학년 때, 일기를 영어로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시는 좀 유별난 영어선생님이 있었어. 일기를 손으로 쓰는 게 싫어서 일기장 대신에 영어로 녹음한 테이프를 제출 했지. 아마 선생님도 참 황당해하셨지.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그걸 듣지 못하셨을 것 같아. 그때에는 카세트테이프 재생하는 기계 자체도 드물 때였거든.
DJ로 활동하던 당시에 생소한 음악들을 소개하시기 위해 DJ당시 여러 나라의 사전을 사서
직접 공부하셨다고도 들었는데 어떤 식으로 해석을 들려주셨는지 궁금해요
우리나라에 통행금지라는 게 있었어. 그 때에는 라디오 방송도 새벽 1시까지밖에 안했어. 그러다가 통행금지가 해제될 무렵 방송국에서 야간에 일하는 근로자들, 수험생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위해 방송시간을 한 시간만 더 늘려 달라고 정부에다가 건의를 했지. 그 프로그램을 시작하려면 뭔가 이슈가 필요하니까, 대학생 디제이 컨테스트를 해서 수상자를 디제이로 투입하겠다고 내걸었어. 결국 내가 1회 대학생 디제이 컨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새벽 1시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어
당시에 담당 PD분이 ‘음악이 흐르는 밤에’를 포함해서 프로그램을 3개나 더 맡고 있었고, 대학원도 다니고 있어서 무척 바쁘셨어. 그러다가 내가 방송하는 것을 보고나셔서 나한테 맡겨도 되겠다고 판단하셨는지, 방송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예 나한테 프로그램을 맡겼어. 온전히 프로그램이 넘어간 순간부터 선곡을 확 바꾸었어. 온갖 노래를 다 틀었어. 나중에는 '단세포 같은 제작진들에 의한 공포스런 음악.', ‘음악이 너무 무서워.’, ‘음악인지 전혀 아무것도 모르겠음.’ 이런 평가까지 나왔어.(웃음)
‘음악이 흐르는 밤에’ 전에 편성된 프로그램이 잔잔한 음악을 틀어주면서 사람들을 재워주는 역할을 했는데, 그게 끝나니깐 갑자기 별별 이상한 노래들이 나오니깐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어. 그리거 원래 취지는 야간 근로자와 수험생들을 위한 세미클래식 방송이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어 사람이 놀라서 막 끄고 그랬데, 얼마나 좋아 전기 절약도 되고(웃음). 아무튼 뭐라고 그래봤자 나는 잘리면 다시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잘릴 것에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음악을 틀었지.
첫 월급을 타고는 한국외대 근처에 있는 천막으로 된 간이서점에 갔어. 가서 각 나라의 언어사전을 닥치는 대로 다 샀어. 아랍어, 히브리어, 아프리카어…. 집에 와서 각 언어를 하루에 15분씩 하자고 계획했지. 2주 동안하고 아 이건 아니다하고 접었어. 어쨌든, 소개할 때 발음이나 기본적인 것은 알아야 하니깐, 언어 공부를 했지. 근데, 원래 내가 약간의 언어 감각이 있는 것 같아. 아들 녀석도 90년생인데 4개 국어를 할 줄 알거든(웃음).
(PD님)성시완씨가 오랫동안 좋은 인상 받는 것은 작가가 써주는 대본을 그대로 읽는 다른 디제이들과 달리 자신이 언어 사전을 찾아가면서까지 해석해서 들려주려고 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냥 작가가 적어준 대본을 읽고 선곡해준 음악을 트는 것은 디제이라 할 수 없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단순히 음악만을 들려주기 보다는 그 음악에 얽힌 스토리를 들려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나는 음악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어. 각 언어뿐만이 아니라, 가사의 의미를 통해 철학적이고 포괄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어. 나는 각 나라의 음악을 소개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에 걸 맞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언어를 알아야 문화를 이야기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언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
희귀음반 콜렉터로서도 아주 유명하신데요, 어렸을 적부터 음반을 모아오셨다고 들었는데, ‘나는 원하는 음반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봤다.’까지 한일이 있으신가요?
오, 그건 너무 많지. 음, 형(PD님)이 캐나다에 사니깐 캐나다 이야기를 해줄게.
디트로이트에 유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 거기는 다인종이 모여 사는 곳이라, 거리마다 각 나라의 문화색이 뚜렷한 가게들이 다양하게 있었어. 거기에 가면, 전 세계 음악이 다 있는 거야. 각국의 음악을 다 만나볼 수 있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어서 자주 갔어. 어느 날 마스코트가 까만 고양이인 토론토의 한 레코드 샵을 지나가는데, 거기 희귀음반이 전시되어 있는 거야. 그게 150불이었는데, 나한텐 20불밖에 없어서 살수 없었어 눈물을 머금고 디트로이트로 돌아갔지, 너무 아쉬운 마음에 그 음반을 사러 왕복9시간 거리를 다시 갔어. 그런데 가니깐 팔리고 없는 거야. 그래도 나중에 사긴 샀어.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거는 그만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야.
무언가를 한다면, 열정을 가지고 끝까지 좇아가도록 했으면 좋겠어.
어떻게 보면, 나는 운이 좋은 사람 같기도 해. 스웨덴에 스테판이라고 유명한 컬렉터와의 이야기를 해줄게.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자신의 컬렉션을 특별히 나한테만 보여주겠다고 초대를 한 적이 있었어. 판들 중에서 하나를 딱 꺼내면서, 이게 아이슬란드 음반인데 초희귀 음반이기 때문에 아마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걸 거라고 얘기하는 거야. 와, 정말 열 받았지. 거기를 확 나와서 여행사를 찾아가 아이슬란드에 갔어. 그 곳에 조나단이라는 컬렉터 친구와 같이 판가게를 돌아 다녔는데도 스테판이 보여준 그 음반을 찾을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다가 그 친구가 자기가 자주 가는 벼룩시장이 있다면서 데려갔는데, 바로 거기에 그 음반을 누군가 딱 들고 있는 거야. 조나단도 40년간 이 벼룩시장을 다녔지만, 저 음반이 나온 건 처음 본다면서 놀라더라고. 이렇게 운 좋게 얻은 일화가 많았지.
여러 이유 때문에 수년 전 소장앨범을 처분하셔야 했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시회를 시작하시면서 보여줄 수 없게 된 앨범들이 아쉬워 현재는 전시회를 위해 하지 않고 계시다고도 들었구요. 당시 소장 앨범을 처분하실 때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앨범과 또 처분 대상이 되었던 음반의 기준이 궁금합니다.
나는 막 다뤄요, 모을 때 까지만 좋아. 다른 콜렉터들은 음반 모서리라도 닳을 까봐 애지중지 다루는데, 나는 막 던져. 걔네들은 이해를 못해. 나는 얼마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듣는 게 좋은 것이라서 그런것 같아, 새로운 걸 구해도 일주일이면 다른 것에 흥미가 생기거든. 그래서 다 처분해도 된다고 생각했어. 아들 밥 값 보내줘야 했으니까. 가족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
검은 혹성이라고 캐나다에 가게가 있었는데,
거길 통해서 음반수집가들이 원하는 앨범 리스트를 받아 원하는 대로 제공했어.
그렇게 처분하고 있는데, 미술관에서 연락이 왔어.(희귀음반 전시회를 하시게 되면서 처분은 그만 두셨다)
성시완 선생님 하면 역시 아트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는데요,
(모르는 이들을 위해) 아트록의 매력에 대해 쉽고 간단하게 설명해 주실수 있을까요?
록이라고 하는 게 너무너무 맘에 안들어. 롹이라고 해야 해.
영국 아트스쿨에서 시작된 건데 학교에서 순수 예술하던 학생들이 학교 앞에 재즈 카페, 펍 같은 것들이 들어서자 자연스레 그 음악과 자신이 전공하던 음악을 융합한 데서 시작되었어. 다시 말해 음악과 순수예술(미학적 요소)을 접합시켜서 하다가 장르가 탄생한거지.
간단히 말하면 미학적인 의미에서의 롹.
우리나라에서 아트록이 재부흥하기 위해선 어떤 점이 가장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도 말씀해주세요.
방송에서 아트롹을 틀어야지!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아트록 프로그램을 방영 한 게 우리나라밖에 없어. MBC에서 프로그램을 성시완이라는 디제이에게 맡긴 것이 실수였지. PD도 바빠서 내가 하는 프로그램을 전적으로 맡겨버린 탓도 있고.
당시에는 정보에 목말라 있었어. 어느 정도였냐면 내가 최상일 씨와 아트롹에 대한 쪼그만 책자 만들어서 보급 천권을 나눠주면, 사람들이 줄을 쭉 서있었어. 당시에는 데모 이런 게 많았거든. 그래서 전경들이 뭐냐고 오해하기도 하고 그랬지.
또한 한국에는 그런 좋은 뮤지션이 없는 것이 문제야. 현재는 아트롹 이라는 장르 자체가 없어져서 사장길에 접어 들었어. 장르에 대한 개념이 달라져야 될 것이라 생각해. 아트롹의 한 장르가 대중화(팝페라처럼)되면서 점점 그 개념 희박해졌어.
60~70년대 당시에는 순수예술을 했다가 롹으로 전향해서 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부흥을 시킨 거지. 예를 들면 르네상스 애니하슬러라는 여자분이 70년대초 성악창법으로 롹음악에 노래를 했거든. 그게 팝페라의 시초가 되었지
최근 “성시완의 월드뮤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셨는데, 복귀 하시게 된 계기를 들려주세요.
(PD님)MBC이후에 SBS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데, SBS에서 원하는 바와 성시완씨가 원하는 바가 어긋났어. 서로 자기고집이 있었거든. 그러면서 청취율도 떨어지고 성시완 선생님 본인이 여러가지로 고민을 하더니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다가 ‘그럼 관둘게요’해서 그만두면서 약 10년 정도 은둔생활을 했어. 처음에는 홍대 앞이 문화인들만 주로 오는 곳이었는데, 유흥가처럼 변하면서 자연스레 일종의 은둔생활을 했지. 방송이라는 것이 굉장히 트렌디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한번 은둔하면 다시 찾지 않아. 굉장히 빨리 잊혀지는 게 방송이야.
그러다가 본인이 눈을 뜬 게 공연기획 쪽이었어. 70년대 80년대 아트롹으로 전성기를 떨쳤던 사람들이 나이가 많아지면서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듣고자 하는 계획이었지, 하지만 기획으로 계속 미는데 잘 안 되고 있는 게 현실이야.
다시 디제이 해보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려고 했지만 이제 이트롹이나 프로그래시브는 7080년대 처럼 진보적인 음악이 아니었어 앞선 음악이 아닌 거지. 그래서 월드뮤직으로 방향을 바꿨어. 월드뮤직은 장르는 무궁무진하고, 아직 그 누구도 정의할 수 없는 분야야. ‘영국과 미국을 제외 한 제 3세계 음악’ 혹은 ‘각국의 민속음악에 바탕을 둔 음악’ 이라고도 하지.
그래서 우리는 성시완이 생각하는 월드뮤직을 들려주고자 했어. 처음엔 중구난방이었지. 그러다가 정리를 해서 들려주어야겠다 생각해서 고민을 많이 했어. 순서가 문제였지. 올림픽에 등장하는 순서대로 할까, 별별 생각을 다 하다가, 모든 음악의 시작이 아프리카음악이니까 아프리카부터 시작하자고 결정을 내렸지. 최근에 북서아프리카부터 시작해서 들려주고 있어.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살짝 들려주세요.
DJ는 단순히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를 들려주는 사람이거든. 작가들이 써주는 대로 읽기만 하는 건 개인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나는 나중에 여러 나라를 6개월씩 살아보고 싶어. 터키같이 내가 흥미있는 나라들은 1년씩 말야. 그렇게 진짜 살아봐야 그 나라 문화를 알 수 있잖아. DJ도 여건이 된다면 나라를 옮기더라도 그에 맞춰 계속해나가고 싶어.
아트롹의 대가들이 다들 돌아가시기 전에, 아직 공연하실 수 있을 때 내한 하게하는 것. 다시 말해 프로모터로서도 성장도 꾀하고 계신데, 자본적인 문제랑 엮여서 힘든 점이 많다 하신다.
오프너 분들과 성시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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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다정_오프너
편집 / 인턴 이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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