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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시절
시인 최마루의 괴발개발의 메아리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70년대 중반 즈음
저는 중국집하면 짜장면밖에 몰랐습니다
우동이나 짬뽕은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 우연히 알았지요
그러고 보니 짜장면조차 귀하던 시절인만큼 당시에는 뭐든 귀하지 않은 게
없었네요
학생용 승차권이 몇 십원이었고 까까머리와 검은색 모자와 교복들이 아른거립니다
겨울에는 석가탄이 위안이 되었고 난로위의 양은 도시락이 당시는 유일하게도
추억의 먹거리였습니다
집에서 연탄불을 갈때도 매캐한 내음으로 힘겨웠지만 불을 피울 때 나무는 연기가 심해
여간 곤혹스러운 존재가 아니었지요
그나마 번개탄이 있어 위로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는 중고생들은 똑같은 기차표신발 동네 어른들은 말표고무신
아! 그땐 버스 안내양 누나들이 차체를 퉁퉁 치면서 오라이 오라이라고 외쳐댔지요
아저씨나 할아버지나 버스안에서 담배를 엄청 피워도 나무라는 사람조차 없었구요
자전거도 귀한 시절이었고 세발로 굴러 가는 트럭이 대세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더구나 외지로 조금만 벗어나면 술도가가 있었고 차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미개발지역이나 논과 밭들이 엄청 많았구요
10원짜리와 100원짜리가 상당히 가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먼 산들도 잘 보였습니다
하늘도 청명했고 사계절은 매우 뚜렷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면 감성이 풍부한 작가들은 생각이 많았을 시기라 사료됩니다
물품이 다소 귀해서 외제품은 연필 하나라도
모두 신기했던 시절이었고 누가 외국이라도 나가면
대단히 출세한 것으로 인식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즈음처럼 자유로이 외국으로 여행간다는 건 매우 어려운 시국이었지요
그러니 누구네 아들이 유학을 한다면 그이의 인생은 탄탄대로라고 모두들
부러워했으며 사법고시 합격이나 박사가 나오면 동네 돼지가 처형 당하는
날이었습니다
필자는 이러한 모습들을 어린 눈동자에 세심하게 크로키하여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을 생각나는 대로 서술해보는 것입니다
아!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사투리로 쪽대라해서 국자에다가 설탕과 소다를 넣고 연탄불위에서 녹이면
그 향긋한 내음은 작은 콧구멍에도 작살이었지요
허나 그도 잠시 국자를 새까맣게 태워버려 어머니께 심하게 꾸중 듣던 기억도 있고
겨울에는 굵은 철사로 만든 썰매를 만들어 골목이나 하수구 빙판에서 놀았는데
이거 정말 신났었지요
당시 제가 초등 3학년 즈음이어서 썰매 젖는 챙을 만들지 못해 연탄 부지깽이를
부러트려 신나게 놀다가 동네 엿장수 아저씨에게 꿀엿과 바꾸어 먹었습니다
이거 아직까지 칠순인 어머니도 모릅니다
어머니는 부지갱이를 도둑 맞은 걸로 알고 있었으니 제가 난생 처음으로
도둑놈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쨌든 당시는 가급적이면 자급자족이었고 안되면 되게 하라는 공수부대의 명언을
본능적으로 어릴 때부터 이미 터득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썰매도 대충 쓱 본 후 제가 만들었고
아버지를 닮아 손재주가 있어서인지 동네 친구 몇 명도 제가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례로는 사탕 몇알과 구슬과 닦지등이었지요
재료는 나무와 굵은 철사 그리고 망치 톱 못이 모두였으니까요
당시 사계절은 뚜렸했었고 겨울은 혹독하게도 추었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지독했지요
당시에 겨울이 되면 누구나 월동준비들을 했는데 저희도 생활형편에 맞추어
많은 연탄과 백포기 정도의 김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겨울에는 그저 김치종류의 반찬으로 김치국 김치조림 김치전 김치볶음 동치미등등
김치라면 아주 지겨웠지요
사실 동치미는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간간히 다른 반찬으로 식사를 했지만 제 기억은 온통 벌건 김치뿐입니다
어쩌다 무우청 말린 시래기로 어머니표 된장찌개라도 멀겋게 끓여주시면
꿀맛처럼 달게 먹었지요
그러나 다음해 2.3월달이 지나도 뒷뜰에 몇 개의 독에 신김치가 철옹성같이 버티고
있어서 그놈이 곰팡이가 필 때까지 모두 먹어야했습니다
달이 지날 때마다 그놈은 별희한한 맛으로 나의 미각을 죽여주더군요
어린 나이라 식초같은 맛에다가 질긴 섬유질에 아주 주눅이 들고 말았습니다
소시지라는 게 있었는데 부모님이 더럽게도 안사주니 귀하긴 귀한 음식이었나
봅니다
하기야 바나나를 초등학교 4학년때 소풍가서 친구 녀석이 숨어서
하나 까먹는 걸 보고 과자 한봉지로 1센티미터와 바꾸어 먹었으니까요
첫맛이 물컹한 게 상했다는 느낌이 강할 정도로 실망 그 자체였고
지금은 아주 흔한 바나나지만 영원히 저의 식량이 아니라고 손사레를 칩니다
얼마후 잘사는 녀석집으로 놀러 갔다가 우연히 한 개를 얻어먹어 보았는데
역시 비위가 상해서 뺃아 버린적이 있었습니다
그걸 다른 급우가 보고 촌놈이라고 놀려 죽도록 싸우기도 했습니다
커피도 비슷한 시기에 고종사촌 누나가 당시 큰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할 때
우연히 맛을 보았는데 그 맛이란 게 달고 쓰고 어찌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 컵을 먹고 나니 화가 나더군요
이미 한국 사람이다 보니 10살의 나이에 신토불이 입맛을 가져 평소 시식했던
음식외에는 흥성대원군처럼 정체불명의 묘한 음식은 거부하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그러나 당시 누구나 살림살이란 게 고만고만했으며 신기한 건 분명 신기한 거였으며
영양실조로 얼굴에 버짐이 비듬처럼 붙어 있던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양말도 기워신고 웬만한 건 고쳐 쓰고 그러나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필자의 집도 그렇게 유복한 집도 아니었지만 가끔은 어려운 이웃들이 연탄이나
쌀 김치등이 부족해서 어머니께 빌려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머니께서도 빌려 준다기보다 받을 생각조차 않으시더군요
참! 갑자기 생각이 하나 났습니다
필자의 어머니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가끔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와 밥을 먹인다거나
특히 노숙하는 여성들은 잠도 재워주고 먹을거리를 퍼주다시피 하더라구요
물론 약간 이해는 되었지만
그 덕분에 가족들이 이를 옮아 고생도 했고 돈도 드문 드문 잃어버렸지요
그래도 웃고 마는 어머니가 싫지는 않았는데 이상한 욕은 정말 잘했습니다
그리곤 마무리는 늘 그저 업이다 라고 해버리십니다
시간이 얼마 흐른 후 어느 날
아랫방에 비쩍 마른 아버지와 할아버지 제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세 명 살았고
어머니라는 여자는 팥쥐 어미보다 지독한 계모였습니다
그 계모는 매일 술이었고 아이들을 무지하게 잡았지요
특히 추운 겨울이면 아이들을 날마다 차례 차례 알몸으로 벗겨놓고 바가지하나 쥐어
바깥으로 쫒아내는 엄청난 죄를 짓더군요
어머니와 나는 자주 그런 현장을 목격하고 만류해도
그 미친년은 정말이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고 또 보고 싶습니다
다시 그 집으로 이야기를 옮깁니다
그 집에 제삿날인데도 불구하고 우연히 라면을 제사상에 올리는 걸 보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습니다
늦은 저녁 멀리서 바라보니 퉁퉁 불은 라면을 형제들이 나누어 먹는 걸 보고
눈물이 나더군요
어머니도 제 마음을 아셨는지 웃으시면서 밥과 김치들을 넉넉하게 챙겨주시더군요
그래서 그날 밤을 편안하게 잤습니다
어느 때는 동네 어떤 친구는 가게에서 외상으로 새끼줄에 연탄 한장을 매달고
집으로 가는 것을 보니 어린마음에도 무척이나 딱했었고 쌀가게 앞에는 봉지쌀을
사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인심이 후한 쌀가게는 성시를 이루었지만 비록 한 되박이지만 밀대로
싹 밀고 담아주면 괜히 욕을 얻어 먹었지요
가난한 이들은 배불리 먹는다는 것보다 목숨 연명할 정도로 먹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에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 당시에는 많았으니까요
당시는 유난히도 가난이 시련의 병을 주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걸
너무 어릴 때부터 지켜보았습니다
그 몇 푼의 돈 때문에 병원에 가지않고 병을 키우다가 돌아가셨던 불쌍한 사람들
그 눈물이 아직까지 비가 되어 내 눈에 흐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대한민국에 배고픈 귀한 국민들이었습니다
그땐 교통사고보다 유난히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해마다 겨울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아침 라디오 뉴스로 흘러 나왔습니다
특히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방직공장에 근무하며
주경야독하던 지인누나도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가슴이 너무나 아프고 충격적이어서 그 슬픔은 청년이 되어서도
문득 떠올라 많이도 괴로워했었지요
그러나 그 연탄 원료를 캐내시던 광부들이 70년대만 해도 가끔씩 강원도 탄광에 매몰된
사건들로 나는 어릴 때부터 무척 가슴을 많이 아파해야했습니다
어린 나이었지만 사는 게 참으로 지독하고 고약하다는 것을 그렇게 눈치채기
시작했고 늘 가슴언저리에 아픔의 자욱이 저를 심하도록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자! 눈물나는 이야기는 잠시 접고
더러운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어볼까요
그러니까 하얀 구더기가 스물거리는 푸세식 변소를 아시나요
시골에서처럼 존재하는 그야말로 공포의 화장실은 아니지만 변두리 도시지역 변소도
나름 지독한 냄새와 쪼그려 앉은 자세로 일을 보는 게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재수 없던 초등학교 5학년쯤 되던 날 덩어리가 풍덩하는 순간 똥물이
내 얼굴과 엉덩이를 타고 바지에 왕창 묻었을 때 정말 엿같은 기분
그때 똥물이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씹던지 아! 더러워죽겠습니다
휴지도 신문지나 공책들을 대충 비벼 닦았지만 그래도 냄새는 풍기지 않았지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당시 선진국에 이민등의 경험이나 유학파나 상류층 사람들
도시권 지역에서 좀 살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거리가 먼 얘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재미로 읽지는 말아주세요
또 이런 일도 있었지요
아무 때나 찾아오는 단골 엿장수아저씨는 외모도 벙거지 모자를 쓰고 뭣했지만
북소리를 내거나 가위질을 멋들어지게 했습니다
동네아이들은 모두 엿가락에 푹 빠져 아저씨가 방문하는 날을 위해 고물들을 정성껏
모아놓고 엿과 바꾸어 먹었지만 그마저 준비 못한 친구들은 먹는 모습만 줄기차게
바라보다가 한숨으로 마무리하곤 했지요
당시 고물은 정말 갖가지였습니다
찌그러진 남비나 놋그릇 쇠종류는 대환영이었고 소뼈나 막거리통 술병 비닐등
그야말로 종류도 매우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동네아이들이 쇠젓가락을 줘도 엿은 한가닥 철근토막을 줘도 한가닥
니미럴 쇠덩이를 줘도 한가닥 완전 아저씨 지맘대로입니다
그러다 동네에서 좀 예쁜 아줌마나 누나가 남비 뚜껑을 손바닥만한 거 줬는데
엿을 솥뚜껑만 하게 듬뿍 잘라주며 엉큼하게 미소 짓던 엿장수 개새소새끼
내가 여자라도 아저씨 생긴 것 봐서는 영 아니올시다 였습니다
그때부터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느꼈고 학연이나 지연이 얼마나 불쾌한 것
인지를 또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또 10원에 여름을 달래주던 하드란 것이 있었는데 조그만한 통에 그것도
소부랄처럼 생긴 얼음 주머니를 들어내고 꺼내어 먹습니다
지금처럼 마트나 대형매점에 있는 우월한 냉장고는 당연 없었지요
5원짜리 붉은 색 얼음하드도 있었습니다
10원에 두개였는데 바로 아래 여동생과 나누어 먹고 난 후 서로 얼굴을 보면
주둥이가 빨갛게 변했지요
물론 불량식품같은 건 크게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요즘 중국산보다 허접했습니다
저는 아버지 심부름도 잘하는 아이였던지라 나름의 일상들이 꽤 기억납니다
담배도 청자와 백자 각각 150원 환희100원등 곰방대에 넣어 피우는 최저가 50원짜리
희연과 공초가 없는 새마을 50원 그외 한산도등 고급담배들이 몇 가지 더 있었습니다
만약 외국산 담배를 피우면 경을 치던 때라 어쩌다 선물이라도 받은 사람들은
몰래 숨어서 피곤했지요
그리고 요즘 퍼머한 할머니들과는 달리 당시 할머니들은 모조리 머리를 뒤로 묶고는
정갈하게 기운 비녀가 일품이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시골 친인척집에 가면 갓을 쓰고 곰방대에 담배를 멋지게
피우시는 할아버지들을 가끔씩 뵌 적도 있었지요
아! 어린나이에 뵈어도 단단한 지조와 그 품위가 아주 우월했습니다
백발에 길게 늘어트린 하얀 수염이 환상적이었고
바람에 소롯이 날리는 하얀 도포가 죽여 주었습니다
친인척 할아버지들은 진정 한 마리 학이었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예법은 절하는 방법 하나라도 정말이지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제사상에 놋쇠 그릇과 놋수저들이 새삼 기억이 나고
이후 60년 후반 무렵 월남전에 참전한 고종사촌형님이 이웃에 살고 계셔서
가끔 놀러라도 오시면 군담설화에 또 뿅갔습니다
말이 형님이지 어머니와도 나이가 비슷해서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래도 정말 친구같은 분이셨고 제가 힘들게 군생활 당시 그분의 말씀이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입담이 너무 좋으셨고 월남전 사진까지 보여주며 배트콩을 혼자 다 때려잡아
무공훈장 받았다는 얘기는 백번 들어도 신났지요
얼굴도 잘생겼고 성격이 끝내주는 해병대 출신으로 팔뚝과 장딴지는 정말 엄청났지요
형님의 군담으로 당시 나신찬 주연 전우라는 드라마에 푹 빠져들게 했고
영화로는 이소룡의 쌍절곤을 보다가 제대로 흥분되어 다듬이 방망이로 내 머리통이
수박처럼 커진 적도 있었답니다
그래도 당시는 못살아도 사과 한쪽이라도 이웃과 정겹게 나누어 먹던 시절이었고
그땐 인정이 너도 나도 정말 훈훈했지요
그러면서 손자가 대가리가 깨지면 할머니들은 귀여운 손주를 안고 된장을 꾸욱
눌러주시는 무지의 센스까지 있었습니다
초등생 어느 겨울이던가 수도사고로 갑자기 동네에 물이 끊기어 며칠간을 물차로
급수를 받았고 줄을 길게 서서 물통을 나른 적도 있었습니다
세수조차 못할 지경이었으니 당시 사람들의 물싸움이 대단하더군요
평소 마을에서 대단히 얌전한 아주머니라 생각했는데 화끈한 성격이 그때 나오더군요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는 어쩌다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너무 이기적인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웃음이 새어나옵니다
참 그렇군요
맞아요 군시절 아주 위급할 때 저런 선후배 녀석들의 이중인격을 자주 보곤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처음부터 사람들을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어떠한 상황에 따라
카멜리온처럼 변하는 인간의 더러운 특성을 일찌기 보았기 때문이지요
아니라고 부정하시는 고운 분들도 계시니 한 말씀 올립니다만
사기 및 비슷한 경험으로 멋지게 한번 당해보시면 저의 말에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요즘따라 이러한 일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 너무나 안타까울뿐입니다
당시에 또 하나의 복병이 있었지요
저녁이면 백열전등이 가끔은 정전도 되었지요
유비무환으로 저는 초와 성냥을 바로 찾을 수 있는 곳에 항상 준비해두었습니다
저희 집은 한옥이었는데 저녁만 되면 천정에 쥐들이 뛰어다녀 어린 내 가슴을
무척 놀래키기도 했었지요
제가 유년시절부터 경험이 많아서인지 오늘 짧은 글은 아닌 것 같군요
생각나는 대로 마구 마구 그려 보겠습니다
70년대 야간 민방위 훈련은 어릴 때라 좀 재미있었습니다
당시는 야간에 적의 비행기가 넘어오면 불빛 있는 곳에 도시가 노출되어 공격의
위험이 있으니 무조건 등화관재를 해야만 했습니다
호응하지 않으면 입담이 걸죽한 아저씨들과 경찰관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대문도
차고 야단이 납니다
우리 형제는 그날만 되면 신명나게 술래를 했지요
그리고 당시는 야간통행이 제한되어 밤 12시 이후는 무조건 잡힙니다
방범대원 아저씨들이 곤봉을 차고 다니시며 자정이 되면 간혹 호루라기 소리가
났었습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후다닥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언제는 아버지도 술을 거나하게 취하시어 집앞 대문에서 걸렸는데 어머니의 호소로
사선을 넘은 적도 있었습니다
요즈음처럼 한잔 마시고 평온하게 데이트하며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답니다
정말이지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피부로 깨닫는 시기였습니다
더구나 요즘같은 세상이면 야단날 일이지만
대학생 형님들 장발머리도 풍기단속에 걸려 사정없이 밀리고 누나들의 예쁜 다리도
함부로 보이면 야단이 났지요
그 속에서도 형들과 누나들은 통기타의 향수와 젊음을 불태우려는 열정 그리고
유식함의 대명사인 영자신문을 폼나게 들고 외국시를 읊조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입니다
모두 뭣한 시대에 지금의 5~60대 형님 누님들은 나름대로 고생하신 희생양들이십니다
저 역시 지방 대도시에 살면서도 놀이라고 해봤자 남자 애들은 여러 종류의 구슬치기
또 여러 종류의 딱지치기 종이딱지치기 고무딱지치기등도 있었고 돌치기 술래잡기
오징어놀이 제기차기 여자애들은 고무줄 놀이등등이 있었지요
참! 병따가리를 모아 딱지처럼 치기도 했지만 따까리 중간에 두개의 구멍을 못으로 내고
실을 양쪽 엄지손각락에 끼워 흔들어서 빙빙 돌리기도 했었네요
놀이라곤 특별하다기 보다 그저 시간마다 즐겁고 재미있던 게 놀이였으니 뭐 특별난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장난감이래 봤자 제가 당시 가지고 놀던 걸 생각해보면 요즘 중국산보다 못했으니까요
구슬은 5개에 10원을 했는데 구슬 안에 다섯 가지 색깔이 있는 구슬 한 개와
투명구슬 10개와 바꾸기도 했지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동네 쌀집가게 큰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당시는 온순하고 너무나 착했던 저에게 피같은 구슬 7개를 빌려 놓고 아직까지
갚질 않고 있습니다
이자까지 계산해 보니 축구공만한 거 받아도 모자랄 판에 법에는 고소가 불가피하다네요
어쨌거나 제가 성격을 조금 바꾼다는 게 그만 장난끼로 돌변하여 고무줄 끊는 재미로
수많은 여학생들에게 많은 미움을 받았지요
제가 운동장에 나타나면 인기가 많아서인지 수십 명의 여학생들은 아주 긴장해버렸습니다
그중에 주근깨투성이던 못생긴 여학생이 몇몇이 있었는데
못난이 삼녀중에 제일 뚱뚱한 여학생이 나만 보면 꼬집고 도망을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저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못생긴 여자는 절대로 용서할 수는 없더군요
이래 저래 시간은 흘러 명절 때가 되면 저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은 동네 형들은
나무에 우산대를 자르고 나무조각에 끼워서 화약과 납알을 넣고 촛농으로 밀봉한 뒤
합판등에 쏘아대며 그 위력을 서로 자랑했었지요
저는 11살 정도여서 당시 50원을 주고 장난감 권총을 사서 화약과 함께 소리만
펑펑 내는 것으로 만족했었습니다
이유라야 일단은 만들기가 힘들었고 재료 구하기도 만만치않았습니다
화약놀이 장난감은 종류가 몇 가지 있었는데 몇 해가 지나니 콩알탄과 폭음탄정도가
나왔었지요
그러나 그 재미가 수월찮게 쏠쏠했었지요
그런데 동네에 유난히도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화약놀이로 재미있게 놀라치면 무섭게 화를 내면서 매몰차게 욕을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결심을 했지요
저녁이 다다르자 동네 화약이나 화약총을 가진 친구를 죄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곤 그 할아버지 집 대문에다 한꺼번에 쏘고 도망가고 또 쏘고 도망가고 이러기를
한시간여 반복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대단히 화가 났고 이놈의 명절을 없애야 된다며 심한 욕설을 하시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대단히 죄송하지만 당시 제가 철이 너무 없었고 여러가지 이유로
밤새 즐겁게 놀지를 못했습니다
초등 5학년 즈음 되자 취미로는 우표수집이 대세였고 새벽 4시경에 한 시간을
걸어 우체국을 가면 그야말로 한 백여 미터 정도가 줄을 이었고 그나마 매진이
되면 말짱 도루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사리 모은 우표를 제가 군복무 하던 중 여동생이 몰래 펜팔인가
뭐를 한답시고 아주 귀한 것만 귀신같이 골라 없애버렸다는데 일순간 매우 허무하던군요
과자 역시 10원하던 라면땅 20원하던 자야 뭐 왕사탕 50원하던 비스켓 수준이었고
가게라봐야 정말 한두평 남짓 초라했지요
더구나 전화기 없는 집이 많았으며 전화라도 한번 할라치면 마을 가게 앞에
겨우 공중전화 하나로 그나마 통화를 할 수 있었지요
당시 시골 외삼촌댁에는 전화기통을 옆에서 돌려 교환원을 부르고 상대의 전화번호를
불러주면 연결되는 방식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엄청나게 부러운 시절이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방학 때 외삼촌댁에 놀러가서 장난친다고 중국집에다 짜장면 백그릇을 시켰는데
사장님이 너 누구네 집에 놀러온 녀석 맞지 하시기에 기겁을 하고 오들 오들 떨기도 했지요
당시에는 이념의 시대였고 우리나라 어느 지역이나 공중전화에 붙은 표어를 보면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이란 사상 교육도 학교에서 매일을 집중적으로
받았지요
저는 당시에 북한사람들이 홍색인종인 줄 알았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물자절약 차원으로 학교에서 공책 껍질에도 글을 썼고 여백도
남기지 않고 채웠으며 점심시간에는 선생님께서 보리와 혼합한 도시락을
검사하기도 했습니다
하루 한끼 식사에 밀가루 음식으로 칼국수나 수제비등을 장려했으며 늘어나는 인구에
둘만 낳아 잘 기르자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만 나아 잘 기르자며 공익광고에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 역시 전훈의 112수사본부와 최불암의 수사반장 나신찬의 전우 ?의 배달의 기수
외화로는 타잔 등이었고 TV에 연애인들 상품으로는 양말세트 설탕 쌀 등이었는데
어느 날 보니 냉장고 세탁기 자동차까지 선물로 주는 걸 보고 우리나라가
그동안 많이 변했음을 느꼈지요
하기야 아버지를 따라 어쩌다 시내에 나가보면 차들의 모양이 점차 세련되더군요
당시 뉴스도 흑백사진이 한 장 한 장 넘어가면서 아나운서가 설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북에서 보낸 문세광이가 육영수여사를 저격하던 때를 전후로
공비들은 자주 출몰했으며 어선 납북등으로 심심찮게 남한을 괴롭혔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땅굴도 파대고 여하간 위쪽 놈들이 참으로 더럽게도 놀더군요
이후로도 그놈들의 적잖은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지요
갑자기 또 다른 생각으로 넘어갑니다만 아마 칼라 TV도 1981년도 가을쯤인가
처음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TV도 나름 귀해서 저는 초등 1 ~ 2학년 때 70년 초 중반 무렵 얼마간의
동전을 주고 가게에서 동네아이들과 여러 프로를 꽤 많이 보았지요
그러다보니
국민의 대다수가 아마 라디오로 기쁨과 슬픔들을 모두 함께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나마 저의 집에 라디오는 있었기에 밤10시경 전설따라 삼천리라는 라디오 프로를
매일마다 기를 쓰고 경청했으니까요
어릴 때 라디오안에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줄 알았답니다
그러던 차 얼마 후 어머니가 쌈짓돈을 모아 14인치 TV를 마련해주시어 편하게 식사하면서
TV를 시청하는 호사도 누렸지요
갑자기 TV가 생기자 동네에서 인기가 급상승하게 되었지요
간간히 구슬과 닦지 먹을거리 등의 뇌물이 제법 들어오더군요
한두 살 아래나 위의 친한 친구들이 TV시청을 하고 싶다고 넌지시 마음을 전해주더군요
그러면 제일 좋은 자리에 배치하여 시청케하는 엄청난 파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 일로 몇 년간은 마을에서 힘 좀 쓰는 유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둘씩 TV가 생기자 믿었던 참모가 한순간 배신하는 아픔을 느끼고
삶에 비애와 작금의 정치적인 현실을 바로 깨우쳤습니다
이유야 어떻던 원리는 똑 같으니 말입니다
지금이야 아주 웃기는 얘기이지만 당시로는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그게 사람사는 세상의 인심이고 인간사에 살아가면서 모든 기초의 원리가 됨을
학습없이 바로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70년대 후반 텔렌트 조경환씨가 선생님분으로 호랑이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습니다
기억이 대충나지만 로보트 태권브이 마징가제트 미래소년 코난 똘이장군 말광량이 삐삐 등
어린이 영화도 인기폭발이었지요
또한 어른들에게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이름 모를 수많은 가수들이 현란한 음악성을
위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닌 대한민국 대표 20여명의 가수들의 분위기 있는 노래로
국민들의 애환을 녹여주었지요
모두 생각나지 않지만 얼추 생각나는 가수라면 앞서 유명한 이미자 최희준씨부터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윤복희 남진 나훈아 조용필 혜은이 윤수일 남궁옥분 나미 장덕
김범룡 이용 이은하 인순이 양희은 전영록 배철수와 구창모의 송골매 최헌 윤시내
김수희씨 등이었지요
그 다음으로 이선희 민혜경 박남정 강수지 정수라 방미 주현미 이문세씨 등이었구요
당시는 댄스곡보다는 점잖으면서 심금을 울리는 철학이 깊은 노래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 기억으로는 90년대초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그룹이 가요의 흐름을
완전 뒤집어 놓았지요
기억나는 배우와 텔렌트로는 신성일과 엄앵란 김자옥 정윤희 원미경 김혜자 최불암
김영란 이미숙 임동진 조경환 전원주 사미자 김수미 이영하씨 등이었으며 생각나는
개그맨으로는 이삼룡 이기동 구봉서 남철과 남성남 곽규석 송해 남보원 배연정 전유성씨
등이었습니다
특히 저는 이기동씨의 인민군 분으로 연기할 때를 제일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이러한 연애들의 울고 웃는 프로에 저 역시도 국민들과 어울려 흘러가는 추억들과 함께
즐거워했던 기억들이 아스라합니다
이야기를 다시 앞으로 당겨서 풀어봅니다
1941년에 일본천황의 칙령으로 황국신민의 학교라는 뜻인 국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어
당시까지는 지금의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로 불렀습니다
황국신민에 국자와 민자를 넣어 국민학교라 불렀으니 역사적으로 민족의 슬픈
이야기중에 하나임을 절대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제가 70년대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 가정 형편란을 조사하는데 아직까지 기억이
납니다
이십 여개의 집안 물품중에 저는 체크한 것이 몇 개 되질 않아 멋쩍었고 친구들
사정이 궁금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아예 하얀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지금이야 졸렬하겠지만 내용을 보면 라디오 시계 TV 자전거 밥솥 전축 선풍기
아주 고가인 피아노 냉장고 승용차등이었고 요즘처럼 흔해 빠진 세탁기나 식기세척기
전자렌지 전기청소기 가습기등은 당시 없어서 그런 글자는 없었던 거로 생각합니다
특히 시계는 제 기억으로 괘종시계뿐이었고 밤만 되면 뎅뎅뎅 거리던 그 소리의
음침함이 무서웠습니다
잘사는 친구 집에 놀러라도 가면 특이한 전자제품들과 유별난 식기들이 보이면
엄청난 부자처럼 느껴졌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지금이야 고물 취급하던 것이 아주 귀한 대접을 받았던 시절이였지요
당시 가구하나라도 변변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세상을 모르는 아주 어린 나이에 저는 심한 상처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었지요
육성회비 매달 삼백원 국방비라 해서 백원 그리고 적금이라 해서 개인형편상
맞게 매달 학교에 납부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마저 제 날짜에 못내는 친구들이
한 학급에 6~70명중에 무려 20%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뭐 학원같은 건 거의 없었고 초등학교 입학 당시 선생님이 유치원에 다녔던 학생
손들어 보라니 육십여 명중에 한명이 손을 들기에 그게 뭔지 조차를 몰랐습니다
나중에 4학년쯤 되어보니 그 녀석이 꽤나 사는 집 아들이었습니다
가정교사가 둘이나 붙어있고 아버지는 자주 대의원선거에 출마하더군요
저는 여느 친구들처럼 여덟 살 될 때까지 동네에서 강아지와 놀고 개미와 놀고
메뚜기와 놀고 잠자리 쫒다가 넘어지고 초등생 1학년 1학기 여름방학때 한글을
자연스레 깨우친 거로 압니다
더불어 숫자도 백까지 쓰고 구구단도 암기하고 자연도 배우고 실과도 배우고
사회도 깨우쳤지요
그러나 우선은 수려한 자연을 운명적으로 접했고 사람답게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 단호하게 교육받은 거로 압니다
특히 손님이 방문했을 때 어떠한 이유라도 돈 이야기를 말 것이며 조용해야하며
어른들이 이야기할시 중간에 끼어들지 말라는 추상같은 명이 있었지요
일상에 모든 것은 어머니의 통제에 따랐고 조금만 비켜가면 단호하게
그대로 얻어 터졌습니다
따라서 저는 뛰어난 성적표보다 살아오면서 체험한 현장학습과 심하게 고뇌하면서
인생을 많이 해부하며 고민해온 것들이 더욱 멋지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상기되어
아마도 저만의 문학배경의 사상으로 성장해온 것 같습니다
육이오 전쟁이야기를 일학년 때 노처녀 선생님께서 한 시간을 열강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명강의였습니다
분명 남침이었고 공산주의는 지구상에 전멸시켜야 된다는 것을 복숭아만한 머리통에
선생님께서는 열꽃으로 피워주셨지요
그때 훌륭한 군인이 되기로 다짐했지만 군생활도 해보니 그렇게 녹록하지도 않습디다
군복이야 폼나도 직업군인 그거 아무나 못해요
여자들은 모르지만 지금도 남자중에 가장 멋진 남자들만이 무장이 되어
최전선 산골에 모두 박혀 있습니다
군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현재 반세기를 남북이 대치된 상황인지라 행정 간호 취사 무전 무선통신 문서정리 군악 간호등등
여성들도 지원부대로 충분히 과업을 수행할 수 있으며 남성은 전장터에 집중할 수 있는
군비체계가 실질적으로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처럼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어디 전쟁터에 여자라고 어린이라고 노인이라고 총알이 비켜가는 것도 아니고 남성들도
입대를 못하면 현실적으로 군복무중인 자들에게 군비 충당에 대한 배상을 옛날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에 중요직에 앉는 자는 군필 여부에 따라 그 자리를 조정해야하며 공직에 나서려는 자는
군시절에 배운 조국관과 사명감을 재평가를 해야만 합니다
남성라도 어떠한 이유였던 군복무를 피한 자는 여성이하로 대우해야합니다
여성들도 앓는 소리는 그만하는 게 좋습니다
그대들이 사랑하는 애인이나 오빠나 동생들이 입대하는데 대신 나선 자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한편에 지각이 있는 여군이나 여성경찰들이 각자의 맡은 자리에서 얼마나 일처리에
능숙하신지 아세요
오히려 남자들보다 임무수행이 원활하고도 그 수완이 뛰어납니다
남자들도 솔직히 복무하기 싫어서 빠지려는데 이러한 여성들은 그럼 슈퍼우먼입니까
아니면 여자이길 포기한 사람들입니까
여성들이여! 신체조건이 맞지 않다는둥 여러 이유들이 상식으로 통하는 세상인가요
그러니까 성차별없이 군입대하여 기쁘게 보직을 받아 각자가 맞게 수행을 한다면 가산점으로
싸우지도 않고 얼마나 공평한가요
분명 50년대 이후 군법을 개정했어야 했는데 이제 먹고 살만하니 혹 생긴다고
벌써 몇 년 전부터 우리끼리 이게 뭡니까
남성과 여성의 관계란 서로들 사랑하기 바쁜 사이들 아닌가요
나의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남동생입니다
또 할머니 할아버지고 내 딸 내 아들입니다
모두가 북에 공산당 신을 믿는 거지새끼들 때문입니다
세계가 보고 있어요 쪽도 팔립니다
북에 있는 거지새끼들 때문에 우리 집안만 시끄러운 게 너무나 너무나 싫습니다
무슨 남성이 여성이 이런 이야기조차 필요 없는 건데 말이지요
모두 싫으면 통일되면 그만이겠지만 통일된 그때도 대한민국 남자라면 하는 이따위 말은 마세요
다시 말하면 으례히 대한민국 여자라면 점점 인구가 준다는데 인구정책에 최선을 다하여
정상화 시키는 노력들을 하세요
세계에도 잘 없는 여성부도 있는데 복지차원도 그렇고 군복무 문제는 외면하고
국민들이 모르는 것 같아도 다 알고 있지만 지금 먹고 사는 문제 더 급급해서 아니 정치적인
소모가 귀찮아서 그냥 침묵하고 있는 겁니다
언제부터 여행이 자유롭고 사방이 더욱 세계화가 되니 눈에 보이지 않는 간첩들도 많은 것 같아요
거지새끼들이 어느 집이 인심이 좋고 먹을 것이 많은가 염탐질하는 것처럼 이런거나 이간질하고
정보 캐내고 무슨일만 생기면 지랄발광캐하려고 생지랄을 떨지요
개새소새끼들이 대한민국이 아주 만만하고 쉬워 보였나 봅니다
외부에 남성들이 열심히 군복무하는데 내부에 이런 간첩들 색출하는 건 여성들 몫이 아닌가요
더불어 그자들을 잡는데 군복무 기피한 남성들이 공헌을 한다면
공훈에 알맞게 훈장을 주어 복무와 동일하게 포상을 줘야겠죠
사실 그래요
누군 입대하고 누군 슬그머니 빠지고 군복무자의 생명을 어디 하늘에서 3년간 더 준답니까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들 완장 채워줬으니 좀 똑바로 해보세요
하기야 정치인들 절반이 총도 만지질 못하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절대 아니올시다 입니다
나는 전원책 변호사님의 말씀 하나 하나 옳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집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작가로서의 기반이 된 것은 오로지 어머니의 헌신적인 가르침과
아버지의 지독한 괴롭힘이 동반되어진 결과물이라 사료됩니다
책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유별나게 많이 챙겨주셔서 형편상 최대한 놓치지 않았고
무조건 외우다시피 하였습니다
일반 책뿐만 아니라 위인전기집부터 백과사전과 세계지도 그리고 다방면의 책들을
가까이 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어머니의 조용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나마 그 시절 먹거리중에 최상이었던 라면도 삼양라면과 쇠고기라면 두 종류로
당시 한 봉지 50원이었고 몇 해가 지나자 해피소고기라면등 몇 가지가 슬슬 나오더군요
그것도 라면만 먹었으면 좋은데 항상 어머니가 끓여주실 때는 국수와 함께 먹었다는 거지요
그 무언가 부족하고도 묘한 맛은 엿같았지만 어린 녀석이 밥투정한다고 할까 싶어
안 넘어가는 면을 억지로 삼켰습니다
병콜라 1리터 짜리는 80년대 초쯤 나왔는데 450원정도 했을겁니다
아마 70년대 후반만 해도 많지도 않던 음료는 모두 병이었고 70년대 중반 50원하던
사이다는 종이에 붉은 사과 그림의 작은 병을 가끔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캔종류는 80대들어 슬슬 나왔고 그게 얼마나 신기하던지 캔을 함부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친구는 뚜껑을 따내고 연필꽂이로 사용하기도 했지요
먹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육고기문제인데요
회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문어가 뭔지도 몰랐고 뱀장어는 더더욱 몰랐고 오징어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당시 제가 살고 있던 주위환경이 다른 곳에 비하면 열악한 편이었을 거라 판단합니다
왜냐면 요즘처럼 특별히 신통방통한 기억들이 거의 없으니까요
사실 필자는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저희 집 같은 경우는 어머니가
소고기국은 한두 달에 한번 정도로 챙겨주시어 별미로 잘 먹곤 했습니다
주위 친구들은 그 조차도 못 먹던 애들이 많았으니까요
컵라면도 없던 시절이고 정수기처럼 물 한잔 금새 따뜻하게 끓일 도구도 없었으니
지금 생활 형편은 어마 어마하게 바뀌었다 이 말이지요
그나마 저희 집은 도심지라 연탄불이었고 가까운 시골은 대체로 산림자원들뿐이었습니다
방학때 시골 큰집으로 놀러가 보면 침엽수림인 소나무에 떨어지는 낙엽이랄까
사투리로 깔비라 그러죠
그런 것들을 깔구리로 빡빡 끌어 모아 포대기에 콱콱 쑤셔 넣습니다
그리고 솔방울등 부러진 나무들을 한아듬 묶어 사촌형제들과 손수레에 이고 지고
밀고 오면 각자 분업화되어 각자 위치로 갑니다
작은형은 군불을 때고 누나는 토끼풀 먹이고 바로 아래 동생은 돼지먹이주고
그 아래 동생은 닭 모이주고 당시 소죽은 큰형이 담당이었는데 옆에서 나는
조용히 타오르는 불들과 그 향기를 느꼈습니다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에 불을 피우며 큰형은 소박한 얘기를 많이 해줬지요
어린나이였지만 형의 이야기중에 마지막 각오는 아궁이에 불꽃과 같았습니다
그와중에 형제들은 자신들이 맡은 일들을 처리한 후 거치른 저녁을 먹는데
나는 사촌들을 보면서 더욱 힘들게 살고 있음을 뼈저리게 보았습니다
방안에 변변한 가구조차 없었고 벽 사이에 대나무 하나만 달랑 걸쳐놓고
그 위로 옷들을 걸쳐두는 정도였습니다
지금이야 사촌형제들이 장성하여 대도시보다 멋지게 집을 지어 큰어머니가 여생을
보내고 계시지만 과거의 기억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아니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잊을 수 있는 기억이 있고 없는 기억이란 게 있겠지요
분명한 것은 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정말 궁핍한 가난은 죄와 연결되며
죄가 되는 것이 요즘 따라 새삼 부정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아니라 단정하신다면 그러면 부자가 죄인입니까
저의 짧은 생각에는 가난한 것도 분명 죄이기에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떠한 모욕과 아픔도 참아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적을 위하야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요
물론 더럽고 추악하게 버는 돈은 절대로 아니라는 걸 말씀드립니다
자! 그러면 이런 뭐같은 논리적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 두고
다시 그때를 회상합니다
당시로는 재산중에 서열 2위정도 되는 카메라 이거 하나 목에 메달면 대단한
거였습니다
오죽하면 수학여행다 소풍이다 해서 사진사들이 한몫 챙겼겠어요
카메라는 전교생중에 아마 예닐곱대 정도가 있었고 요즘 핸드폰보다 정히 못했습니다
스테레오 카세트 한대로 고고춤을 추며 신나게 놀던 친구 녀석들이 생각납니다
아마 지금 스마트폰이 당시 존재했다면 기술력이 뛰어난 우리나라가 세계 1위의
수출국으로 조국에 막대한 자산을 축척하게 했을겁니다
갑자기 우울한 사건하나가 제 머리에서 뭉턱 뛰쳐나옵니다
제가 아홉 살 되던 겨울
잊지 못할 기억이 여지껏 저의 가슴을 후벼내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저와 동갑내기였던 무용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녀석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의 할머니와 아버님은 건강이 좋지 않으셨고 어머니가 행상을 해서
2남 3녀를 키우셨는데 친구가 서열상 3번째였지요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와서 함께 식사라도 할라치면 밥을 얼마나 빨리 먹던지
제가 두어 숟갈 먹는 상태에 이미 다 먹고도 더 먹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둔탁하게도 나는 그걸 전혀 몰랐는데 노점을 하시는 어머니가 파장을 하고
집에 돌아오시면 국수 한 뭉태기로 국물을 잔뜩 부어 8명이 끼니를 때운다고
들어버렸습니다
그 이후 어머니는 자주 그 친구와 식사를 하게 하더군요
비록 아홉 살이었지만 벌써 어른같은 친구였기에 아직도 기억이 나지만
그해 겨울방학 어느 날 동네 연못에서 썰매를 타다가 얼음이 깨어지면서
물에 여동생이 빠져버렸답니다
동생을 구하러 뛰어들다가 당시 한꺼번에 너댓명이 사망해버렸지요
그일 이후로 나는 어머니의 집중적인 관심속에 물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였지요
사십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직 그 친구의 얼굴이 흑백사진처럼 맴돕니다
아무런 사고없이 그와 같이 성장하였다면 고생하신 부모님께 효도하고
지금쯤 잘 살고 있을 텐데 말이지요
갑자기 마음이 뭉턱하게 아프다가 주루룩 눈물이 납니다
우울한 이야기로 심정을 사납게 해서 죄송하여
저의 철없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열한살 즈음 술을 너무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사러 갔다가 가게주인이 물을 붓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주인장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저에게 사탕하나를 쥐어주며 죽을 때까지 못 본 걸로
해달라던 약속을 당하곤 혼자 거룩한 비밀을 가진양 그 달콤한 사탕의 유혹에
양심을 팔았던 기억도 납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의 술심부름을 자주 하다가 주전자 꼭지를 우유처럼 많이도 빨았습니다
시큼털털한 맛에 실망도 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어른들은 무엇 때문에 왜 이런 걸 먹을까였지만 몇 달이 지나자 나름대로
주량이 늘어버려 사건이 결국에야 터져버렸지요
그래서 열한살짜리가 머리를 쓴다는 게 지금의 수량조절이 가능한 수도가 아니라
마중물을 부어야 나오는 원시적 시스템의 펌프식 수도이다 보니 물이 왈칵하고
쏟아져 들어가는 바람에 양이 많아져버렸지요
모 막걸리공장 어느 사장님이 아버지의 험한 욕설을 그 술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받아야했습니다
당연히 아버지의 추상같은 호령에 다른집으로 주전자를 들고 2차로 심부름을 했는데
뒤에 아래 여동생이 헐떡이며 따라오더군요
예상이 좋지 않았습니다
소주로 바꾸어 오랍니다
아버지가 소주를 드시는 날에는 가족들이 밤에 잠을 다 잤다고 보아도 무방했으니까요
모두가 제 불찰이었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술을 먹지 않겠다고 열한살 때 다짐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특히 막걸리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근데 술맛이 싱겁다보니 아버지의 화를 엄청 돋군셈이지요
설마 4학년짜리 초등생의 짓이라고는 상상도 못하셨을 겁니다
만약 아셨다면 제가 살아남아서 여기에 글로도 남기지 못했을겁니다
그 이후론 저도 그 일에 깨끗이 손을 씻었지만 당시 탁주 한 되박이 100원이었습니다
동네 길목에 아버지가 자주 들러시는 술집에 보면 빨간 글자로 왕대포 한잔 50원이라
쓰여 있던 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둥근 테이블 중간에 연탄불위로 돼지찌게가 끓고 밤이 흔들리도록 젓가락을
두드리며 낙동강을 외치던 아버지와 친구분들 오늘따라 오히려 그때가 그립습니다
그리고 시장에 과일이라도 사면 인심이 좋아 한 바구니 잔뜩 담아 놓고 얼마씩이었는데
요즈음은 사과 한개 얼마 참외나 배한개도 가격이 있으니 참으로 많이 변했지 뭡니까
참! 그땐 100원짜리가 세종대왕으로 녹색이었고 500원짜리가 이순신장군 청색으로
두 화폐가 종이 돈으로 용통되었지요
100원짜리는 동전도 쓰였구요
일원 오원짜리도 전기세 납부시에 요긴하게 이용되었습니다
10,000원 짜리는 지금의 수표 10만원권 이상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영화 한 프로가 500원 정도 했었고 뽀뽀콘이 100원 이었으며 1000원 정도면
꽤 큰 돈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제 주머니에 천원짜리가 들어오는 건 명절뿐이었지요
당연히 어머니께 세금으로 전체를 압수당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께 여쭙고 싶은 건 매년마다 저와 동생들이 친인척들께 수금한 그 돈으로
무얼 하셨는지 궁금하지만 분명한 건 어려운 가정생활비로 보탠 걸 우리형제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뭐 콩나물도 바가지를 들고가서 50원 100원 어치 먹던 시절인데 지금보다
많이 줬습니다
어묵도 크기가 지금의 두배로 비스듬히 반을 잘라서 꼬챙이 끼워 물오뎅으로
팔았지요
일회용 청색 우산은 4~50원이었는데 정말 한번 사용하고 나면 재활용이 어려웠지만
살대가 대나무인지라 어묵 꼬챙이로 가게에서 많이 활용했습니다
당시는 초등생을 국민학생이라 했고 중학교부터는 교복착용과 함께
1부 2부라는 머리카락 길이를 규정해놓고 소위 이발기구로 밀어 버렸지요
필자가 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수업중에 학생과장 선생님이 갑자기 들어와
차례대로 돌아가며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손등을 너머 오면 이발기구로
머리중앙을 사정없이 밀어버렸습니다
저도 한번 밀려 보았는데 예전 왜놈들의 머리 스타일인지라 친구들과
서로 웃고 야단났지요
너무 부끄러워서 바로 이발소로 뛰어 갔습니다
이발소 앞에는 거야말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중학교 전체인원 2000여명중에 30%정도 밀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이일을 계기로 저는 머리카락을 제때 깎는 버릇이 생겼지요
수업중이었으나 이발소로 가는 학생들을 선생님조차 눈감아 주었습니다
교내 이발소에서 머리카락 미는데는 300원 400원 정도였고 몇 분채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면도는 일일이 정성껏 못해주니 대충 깎고는 머리에 비스듬히 스윽 발라 버리지요
그러면 이발이 끝나고 옆에 뚱뚱한 아주머니가 갈구리 같은 손으로 도토리 다루듯이
대가리를 빨래 비누로 대충 문질러주십니다
이놈 저놈이 쓰던 수건으로 닦고 나면 이발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나마 고등학생이 되면 3부이상의 스포츠머리형으로 소년티를 내게끔 해주었고
당시 선생님의 언행은 학교에서는 살아있는 법이었습니다
체벌수준은 평이했지만 가끔은 상식이 벗어나게 감정적인 양반들이 있어서
아직까지도 우리들의 기억에 남아있지만 몇몇 이들 때문에 교단 전체가 실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또 고등학생이 되면 의무적으로 교련 과목이 지정되어 기초군사교육을 일주일에
한 번씩 받았고 아무리 키가 작아도 교련복만 입고 있으면 덩치 큰 중학생들도
건드리지 않았지요
당시만 해도 왕따란 단어조차 없었고 오히려 반친구가 타반에게 불이익을 당하면
도와주려 했으며 당구장 출입 및 흡연이니 불온전한 연애등 학생으로서의
품위 손상시는 정학 무기정학 퇴학으로 그 규율이 아주 엄격했지요
특히 아침에 등교시 학교 정문에는 3학년 선도부 선배들의 날카로운 눈빛이 마치
독오른 독사들 같았습니다
이래저래 괴발개발의 내용이지만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교복자율화와 국민학생을
초등학생으로 호칭하는 게 단순한 일인지는 모르나 탄탄한 중진국 대열로 성장하기 위한
국민들의 소원이 가득했고 일제의 잔재를 스스로 탈피하기 위한 노력도 일부 포함된
결과라 생각합니다
여튼 학창시절 국사교육을 철저하게 받다보니 왜놈의 왜자만 들어도 속이 불편하고
불쾌지수가 계속 올라갑니다
제가 이 더러운 원숭이들 때문에 바나나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약간 씁쓸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간 부모님의 노력으로 저는 굶지는 않았으나 당시 친구들 중에 굶는 애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때 모급우가 점심시간만 되면 자리를 비워 따라가 보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단숨에 수도꼭지를 빨고 있는 것을 보고 울고 싶었습니다
가끔 부모님은 그러셨죠
우리가 어릴 때는 너나없이 산에 소나무껍질과 송진 그리고 먹을 수 있는 모든
풀들 그리고 보리개떡이란 걸 먹었으며 대변보기가 정말 힘들었다고 자주 말씀 하시더군요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는 일본놈들이 공출이라는 명목하에 우리 백성의 식량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합니다
식량만 가져갔습니까
무기 만든다고 놋쇠의 식기류부터 우리의 아름다운 누나 10만여명과 전쟁터로 내몰린
수많은 형님들 그리고 우리의 조국인 대한의 영혼마저 유린했지요
제 생각에는
그분들의 가슴깊은 원한이 열도의 주위에 무서운 해일과 파도가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서럽게도 탕문화가 발전된 것도 민족의 슬픈 역사속에서 이루어진 음식이랍니다
제대로 된 고기는 거의 쪽바리 동네로 가져가고 내장이나 머리 꼬리등만 남았으니
기아에 허덕이는 우리 국민들이 이거라도 배불리 먹어야겠기에 물을 부어 서로의
민생고를 해결하였던 게지요
지금이야 식품영양학적으로 보면 영양가면에서 우수하다고 하나 돈이 있을 때
배고픈 거와 무일푼일 때 배고픈 거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만약 반찬 투정이나 식사시에 밥을 남기면 부모님께 가차없이
얻어터졌지요
아무리 어린나이였지만 많이도 햇갈렸고 생각이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지인들 역시 누구나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밥을 남긴다거나 반찬 투정시에 제 또래의 선후배들의 입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얻어 터졌다였습니다
참 먹고 사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지요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후대에 자손들이 힘들게 산답니다
지금 지축 흔들리고 물폭탄 맞고 자연 재해 그거 이유있는 메시지입니다
궁금하면 옆 동네 한번 보세요
화난다고 똑같이 화를 내면 동방예의지국이라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절대로 잊지 않고 있으며 그 기억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또렷해질 것입니다
그럼 이제 두 번째 슬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당시 부모가 없으면 넝마주이라 해서 망태기를 둘러메고
또래 10대 소년들이 집게를 들고 다니며 부랑자처럼 돌아다녔지요
지금의 노숙자같은 생활이었습니다
지금과 다른건 그들만의 집단에 무리를 지어다니며 갖가지 고물들을 주워서
독립을 한다는 것이지요
소문에 의하면 심한 구타와 굶주림등 부모님이 없으니 그야말로 사람이 사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곳의 이방인들이었지요
제 생각에는 그분들 중에도 어렵게 독학으로 공부해서 사회에 우수한 인재들로 곳곳에서
활동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더불어 너무나 감사할 일이고 그 지옥같은 생활에서도 꽃처럼 살아온 그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올리고 싶습니다
묘한 세상이고 불행한 시대였으며 당시는 너무나 사연이 많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마 지금은 부유한 시대지만 과거의 전철을 밣고 있을 누군가가 아직도 우리나라에
분명 많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만 답답합니다
모쪼록 합리적인 정책이 바탕이 되어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은
엎어버리고 복지차원에서 다각도로 연구하여 어려운 이웃들에게 성실하게 희망적으로
이행하였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
정치인들의 말로만하는 복지말고 실질적이고 현명한 복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경기도에 민들레국수집의 서영남 수사님의 헌신하는 인품을 최마루는
진심으로 존경하지요
언제 기회가 닿으면 저도 그와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제가 오늘따라 지난 추억에 목이 무척 많이도 말랐나봅니다
계속 생각이나니 말이지요
70년대 당시 교육 상태는 재정상 문제도 있었겠지만 제가 다니던 지방 대도시의
초등학교 한 학급 인원이 족히 육칠십명은 되었고 학반 수는 이미 십여반을
훌쩍 넘어버렸으니 학생수가 너무 많아서 저 역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는 수업을
몇 년씩 받기도 했습니다
학교 점심은 개인용 도시락 지참인데 반찬은 거의 김치나 멸치볶음 마른오징어볶음
어묵정도 계란 반찬은 상급이었으며 조림이나 육고기 반찬은 한명정도 있을까 였는데
만약 있었다면 그 친구는 아마도 맨밥을 먹어야했습니다
재학시절 고기반찬을 가져온 친구를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당시는 고물장수도 많아서 무엇이든 아끼고 고치고 갈고 붙이고 그렇게 살아왔지만
지금 불과 몇십년 만에 세상은 과거의 몇 백년보다 그 이상으로 빠르게 성장
변모해가고 있습니다
곧 빛의 속도로 빨라지면 그때는 은하철도 999의 내용처럼 삶의 내용이 더욱 발전될까요
아니면 과거의 향수에 집착하는 삶을 소원할까요
황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의를 아직도 저는 명석하게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글쎄요 지금 이삼십대 친구들은 아마도 모를 겁니다
아니 점점 모른다고 보아야하겠지요
인생사 발전되고 소멸되고 생성되어지는 게 수십년 사이지만 셀 수조차 없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컴퓨터란 것도 제가 군에를 제대하고도 한참 이후에 슬슬 보았으며
더구나 널리 보급되어 진지가 불과 한 이십년채 아니 되지요
고등학교시절 선생님께서 2극진공관 TV를 보려면 한두시간 기다려야 볼 수 있다며
웃으셨는데 지금 컴퓨터도 더욱 지능화 미인화 되어가고 성능은 최상을 달리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공업이란 과목이 있었는데 당시에 컴퓨터를 그림으로만 보았고
대학에서 교양과정에 이론수업정도의 자료들로 학습했지요
그런데 컴퓨터가 이정도로 생활에 깊이 빠질 줄은 미쳐 몰랐다는 것이지요
저는 책을 좋아해서 아주 어릴 때부터 많이 읽어 왔습니다만
컴퓨터가 전 국민들 가정으로 보유하게 되면 엄청나게 변화되는 상황들을 예시한 것을
고등학교때 잠시 가설로 보았는데 현실적으로 하나 하나 그 예견이 모두
들어맞는다는 겁니다
실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네요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컴퓨터가 사람을 지배하는 공상과학을 보면서
그에 따르는 파장은 앞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더불어 자연환경 보호운동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지금 서술이 다소 포괄적이지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 사료되며
우리 모두의 과제로 안고 신중히 해결되어야 할 사안인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한 세기가 지난 일이라지만 가까운 과거만 들추어 보아도
연세 높은 어른들께는 일제의 치욕속에 지독한 가난과 갑작스레 터진 전쟁의 고통과
공산주의 이념과의 사투등으로 정말 지옥같은 고통의 힘든 시절을 거룩하게
지켜 오심을 저희 후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앞서 너무나 값진 깨우침을 주시었으니 후대를 위하여 저희가 더욱 바르고
섬세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인간의 존엄성을 되살릴 것이며 제가 태어났던
육십년대를 시작으로 칠십년 팔십년대를 거쳐 이천년대 그 이상을 시인 최마루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제대로 된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생각들을 가감없이 기록해 보는
정도이오니 부디 널리 이해바랍니다
저의 마지막 바램은 이글을 이어 대한국의 지조있는 차세대 문사가 다음 시대의 기록을
세세히 그려서 영원히 계승하여 보존토록하는 게 원입니다
물론 저와 달리 살아온 삶
또 다른 생각들과 울고 웃는 인생사를 소설처럼 가지신 분이라면
누구나 모두 환영합니다
더불어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우리의 어르신들께
늘 다복하시고 건안하시고 평온하시길 엎드려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대한 조국의 어르신들
감사 또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고맙습니다
지금은 고맙습니다 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음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대한민국 시인 文名 최마루 배상
2011년 추석 전날
☆ 글쓴이 소개☆
*대한민국 시인 文名 최마루님의 글입니다.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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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e33281004@nate.com
cho33281004@yahoo.co.kr
*여러분의 즐거운 감상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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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와 경험이 비슷하군요
지난 일들이 많이 떠오르네요
잠시나마 옛 추억을 회상케 하는글이었습니다
심심한 하루
그저 예전의 추억 하나 둘
그리움과 미소로 남아있어
몇자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