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쓰느냐고 묻는다면
1. 주제 설정, 그리고 멋진 술 한잔
글감 즉 소재가 곧 창작이라는 통념이 수필계에 만연하고 있다. 수필을 '잡문'과 동일시하는데서 나온 그릇된 발상이다. 소재가 작품이 되려면 시나 소설처럼 반드시 그 글감에서 주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란 관문을 거쳐야 한다. 주제는 글이 될 수 있지만 소재만으로는 글이 될 수 없음은 주제가 정해진 한가지 요리라면 소재는 그걸 만들기 위한 단순한 자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재료를 갖고서도 요리사에 따라 어떤 요리를 만들 것인가가 다르듯이 같은 소재라도 작가마다 그 주제 설정은 달라진다. 바로 작가의 고유권한이다.
우희춘의 <바다 적막>을 예로 들어보자. "깊게 사귀었던 관계도 아니고 더더구나 사랑을 나눴던 상대도 아닌 여자를 만나기 위하여 나는 마산행 밤기차를 탔다." 인연이라고는 "그녀의 숙부(K시인)와 내가 가까운 탓에 몇 번 인사를 나눴고 그녀가 마산에 요양을 가는(던이 맞겠지) 날 친구와 함께 만나 점심을 먹고 내 딴엔 위로의 표시로 4호짜리 소품 한 점"(이 대목에서는 어떤 그림이었는지 독자들은 궁금해진다)을 준 것 정도다. 그 고마움의 인사로 그녀가 엽서를 가끔 보내다가 가을 바다를 보러 오래서 그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녀의 숙부와 함께 가서 저녁, 가을 밤바다 산책, 그리고 "스무 날 만에 폐를 앓던 처녀 선영은 죽었"고, 그녀는 "한줌 재가 되어 마산 앞 바다에 뿌려"졌다는 게 이 작품의 개요다.
작가가 실재로 겪었던 사건을 서정적으로 응축시킨 소재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려면 작가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따라 어떤 주제로 접근할 것인가를 정해서 완전히 재편해야 될 것이다. 그녀의 가련한 인생, 폐병의 공포, 마산의 가을 바다, 젊음과 죽음, 화장 등등 얼마든지 작가의 입맛대로 이 소재는 일품 요리로 바뀔 수 있다.
주제에 따라 소재의 처리방법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그녀의 못 다한 한을 그리려면 다른 걸 줄이고 그녀의 재능과 미모와 꿈을 부각시켜야 할 것이며, 마산 가을바다에 초점을 맞추려면 그녀는 그냥 배경으로만 등장할 것이며, 폐병에 주안점을 두려면 마산 결핵요양소를 단연 화두의 중심에 세워야 할 터이다.
'있는 그대로'가 곧 수필은 아니다. 반드시 주제에 따라 작가의 솜씨대로 요리되어야 예술이 된다는 사실을 요즘 한국수필은 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조리 과정에서 작가적 상상력과 교양은 솜씨 역할을 한다. 여기에다 풍요한 감성은 효모(酵母)역을 담당하여 잘 익은 포도주가 되어 일품요리 옆에 한 잔의 술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만든다.
멋진 수필, 바로 일품 요리에 한 잔 술이 함께 하는 풍경이다. 아무리 요리가 일품이래도 술이 없고서야 각시 없는 신랑일 것이며, 거꾸로 어떤 명주(名酒)라도 일품 안주가 없대서야 신랑 없는 각시 아니겠는가. (1) 멋진 소재 - (2) 주제 찾기 - (3) 작가적 상상력과 교양, (4) 서정성에 바탕한, (5) 형상화, 이게 수필창작의 근간이다.
왜 품격 있는 월평 자리에서 이런 초보적인 이야길 너절대느냐고 타박한다면 그만큼 오늘의 한국수필은 (2)(3)(4) 단계가 생략되어 버린 기형아 같다는 안타까움에서라고 하소연하겠다.
고동훈의 <가화만사성>, 장한일의 <색과 영육의 조화>, 김순( )의 <인정(人情)과 인정(仁政)> 등을 읽으면서 주제의식 단계만 거치면 더 훌륭한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느꼈다. 글도 인생과 같아서 아무데나 기웃거릴 게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혹은 주어진) 운명과 어떻게 간계 설정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이치다. 그 운명을 피하고 들찔레처럼 있는 그대로를 작품화할 수는 없을 터이다. 굳이 따지고 든다면 들찔레처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 또한 하나의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여기에 합당한 작법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주제가 설정되었다고 바로 멋진 글이 나오는 건 아니다. 이왕 주제를 정했으면 거기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김경희의 <때로는 교양 없는 사람이 좋다>는 이미 제목이 주제의식을 담고 있어 구태여 주제 찾기 운운할 여지도 없이 주제의식으로 철철 넘쳐난다. 그러나 "늦은 봄 실비 내리는 밤"에 찾아간 순대국집 주인을 보면서 연상하는, "서양화를 전공한" 주인과, "음악을 공부한 주방장이 그의 부인"인 "가끔씩 다니는 대폿집" 풍경은 어딘지 어긋난다. 순대국집이 주제에 걸맞다면 대폿집은 아무래도 그 반대편인 것 같은데, 작가는 이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거나 둘 다 좋아하는 눈치니 독자는 당혹스러워진다.
성형수술 풍조를 그린 권홍기의 <눈썹과 눈썹 사이>도 같은 지적이 가능한 작품으로, 그런 세태에 대한 비판과 수용이 엇갈린다. 작가의 기교일 수도 있지만 단일주제- 단일소재가 창작비법 제1조인 수필에서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윤상복의 <저울은 필요 없는 걸까>는 타던 차를 아들에게 넘겨주자 며느리가 10만원 더 싸다는 이유로 보험을 딴 데서 하려는 데서 생긴 사단을 다룬 글이다. "20여 년에 걸친 아버지 지기(知己)와의 정분"을 몇 푼 돈으로 말소시키려는 세대에 대하여 그런 "저울을 아직은 가지지 못한" 작가의 소회다. 그런데 어쩐 이유에선지 며느리가 생각을 바꿔 버렸다는 싱거운 결론(당연히 그 이유를 밝혀줘야할 듯)인데,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그런 지기 사이라면 왜 상대편은 10만원이나 더 받아야 할까 라는 시점(視點)의 이동 혹은 작가적 통찰력의 확대가 필요하진 않을까.
문학자이란 인정세태에 대한 냉철한 관찰자이자 비판적인 안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문기자나 형사처럼 취재해서 화가처럼 서정적으로 써야한다는 게 내 수필작법의 제1조이다.
2. 세상 욕하기와 나의 세계관 수립
한국수필만큼 사회와 역사의 무풍지대는 드물다. 왜 이럴까. 그게 마치 수필의 본령인 듯 착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전문가인양 일갈하는 솜씨가 칼 같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뭐든 다 아는 듯이 나서는 한국인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면 지나칠까. 강조하고 싶은 건 수필이 결코 역사와 사회의 격랑에서 격리된 온실이 아니란 사실이다. 슬쩍 지나치는 한 두 문장 속에 묻어나는 작가의 현실의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김용언의 <오해>는 교양과 작가적 역량이 잘 어우러진 글이다.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동인들이 처단 당하는 현장에서 안질을 앓던 한 인사가 마침 불어온 찬바람으로 눈물을 흘렸는데, 그게 동조자로 낙인 찍혀 목숨을 잃었다는 일화를 서두로 한 이 글은 품격이 있다. 그러나 "김영삼이나 김대중보다 그의 가신이나 졸개들인 국회의원 나부랭이들...."하는 대목에 이르면 멈칫해진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에서 전개되고 있는 대결과 증오와 멸시의 정치의식의 한 단면이 드러난 듯하다. 정치적 안목과 식견과 지지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묘미만이라도 구현하면 얼마나 수필문학 자체가 돋보일 수 있을까.
비슷한 느낌을 정옥순의 <이제 바꿔야지>에서도 갖게된다. "어느 재벌 총수의 자살, 또한 한 고을의 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라는 대목에 이르면 작가의 정치의식이 선명히 비춰진다. 어째서 이 수필가의 시선에는 그간 엄청나게 산화해간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란 지극히 소박한 질문이 나올 법 하지 않는가.
정정숙의 <퇴임자의 슬기>는 정치 현장을 일차적인 소재로 다룬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객관적인 역사적 안목과 재기와 건전성이 돋보이는 글이다. 이왕이면 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원로급들의 추태를 망라해서 비판했으면 더욱 빛날 것이다.
김충환의 <뱀>은 몽골과 한국의 국제 사회적 상황, 약소국의 비애를 뱀에 비유해서 다루면서도 사생활을 곁들여 수필적 묘미를 살리고 있다.
문학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의식은 날카로울수록 좋다. 하현옥이 <그대 있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는 한 어려운 청년이 퀴즈 프로에 나가 정답을 잘 맞춰 나가는 프로를 보면서 찬사를 보내는 내용인데, 작가는 이런 정도의 심정적. 감정적인 사회의식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불우한 청년을 보노라면 그 소재에서 왜 사회가 저런 젊은이에게 배움의 기회를 줄 수 없을가란 주제의식으로 잠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남점성의 <빨래틀>은 이런 한계를 벗어난 현실의식의 수필로 자리매김 된다. 세탁기란 일어식 표기를 빨래틀이란 우리말로 표현하는 이 작가의 주체의식은 언어를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친일 세력('조선 왜놈')의 폐해까지를 거론한다는 점에서 그 투철한 추궁정신을 읽을 수 있다.
역사와 사회문제를 다룬 글이 무조건 좋다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이든 슬쩍 지나는 대목에서조차도 그 작가의 세계관은 스며 있으며, 그런 뜻에서 수필가란 모름지기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지녀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3. 삶 속에서의 터득
결국 문학은 내 심장 속의 유토피아 찾기며 수필도 돌고 돌아 종내에는 나의 삶 속에서의 자연 귀의로 회귀한다.
일찍이 노자는, '사람의 법은 땅에 있고(人法地), 땅의 법은 하늘에 있으며(地法天), 하늘의 법은 도에 있고(天法道), 도의 법은 자연에 있다(道法自然)'고 했다. 그렇다면 부자연스러운 도가 어디에 있으랴.
신용일 <청학은 어디 가고>
여기서 자연은 존재론으로서의 묘사나 서술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차원으로 승화된다. 서정숙의 <파리와의 전쟁>이나, 구귀남의 <원숭이와 용이 만날 때>의 처지가 바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는 듯 하다. 시골에서 파리에 길들여지는 것이나, 궁합이고 뭐고 살다 보면 비슷해지는 인생살이가 따지고 보면 다 자연스런 생의 철학의 한 단면이 아니겠는가.
홍세표의 <왜 울어야 하나?>는 슬픔과 기쁨을 통한 삶의 의미를 유머를 섞어 접근한다. 유명인의 말을 너무 많이 인용한 게 거슬리지만 나름대로의 삶을 터득한 경지가 보인다는 뜻에서 이 계열에 넣을 수 있겠다.
유머는 우리 수필문학이 당면한 가장 아쉬운 결핍요소의 하나다. 익살과 해학은 원레 우리 민족성의 뛰어난 특징의 하나였건만 근대 식민지 시대 이후 그런 여유가 사라진 채 각박한 세태 속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런 취지에서 보면 김녹희의 <창고 주인>은 잔잔한 사생활의 한 단면을 그리면서도 익살기를 살려내는 기교가 유난히 돋보인다. 미국 여행 중 선물용 비타민을 잔뜩 사오다가 세관에 걸려 비아그라는 없습니까고 질문을 당하는 대목은 그 황당함과 풍자가 잘 어우러진다. 제목의 '창고'란 실은 아담한 서재였으나 워낙 남에게 줄 선물을 챙기다가 창고처럼 변했다는 전말은 그야말로 익살기 넘친다.
김규순의 <작은 거목>은 죽어가는 느티나무 분재를 화원에다 맡겨 살려내는 전말을 가벼운 익살기를 섞어 쓴 글로 작가의 예사롭지 않는 솜씨가 잘 나타나있다.
이런 자연 사랑의 정서가 장순월의 <돌보지 않는 꽃>에 이르면 자연과 예술이 하나로 회귀하는 접점에 이르게 된다. "묵란을 치는 사람으로 화분의 난초는 가꾸지 않는다"는 감동적인 서두로 장식되는 이 글은 좀 더 사색의 다양성을 발휘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으나 멋진 구절이 영혼의 허기를 보완해주기도 한다.
덕으로써 권세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욕심이 없어 청초하고 투명하리라. 묵으로 치는 난초는 30년 동안 팔목을 놀려도 비어있는 곳곳마다 한 송이 한 잎을 채우기 어려운데 자연이 가져다주는 혜택으로 잎과 줄기가 어울리고 꽃은 제자리에 알맞게 피워낸다.
장순월 <돌보지 않는 꽃>
이쯤에서는 예술 창작의 비경(秘境)까지 살짝 언급해도 좋을 법한데 작가는 겸허하게 난의 의미 천착에 몰두하고 있다. 동양화풍이다.
손귀례의 <산달래> 역시 비슷한 항렬에 속하는데 들꽃다운 야성미가 더 가미되었으면 싶은데, 그건 이월순의 <엄마, 고구마밭에 쉬했어요>에서 물씬 풍겨준다.
왜 쓰느냐고 물으면 작가의 입장에서 분명히 할 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요즘 작가들은 어물어물한다. 마치 순수문학은 그게 희미해야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 문학교육은 뭔가 한참 잘못되어 있다. 바로 애매성의 문학, 모호와 몽롱의 문학이 본격문학인양 으시대는 풍조가 사라져야만 좋은 수필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