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둑은 1895년 7월에 두어졌다.
그시절 일본바둑계에는
본인방(本人坊),정상(井上),안정(安井),임(林) 등 4대 종가가 있었다.
이들 4대종가에서는 문하에 영재기사들을 길러내어
기사최고의 지위인 명인(바둑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기사 면허장발행권등 많은 특권을 누렸으며
국가로부터 녹(祿)을 받았음)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당시 명인위는 본인방 장화(本人坊丈和)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정상인석(井上因碩)八단이 가장 강력한 도전세력이었는데
井上因碩은 丈和를 名人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권력자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수제자인 적성인철(赤星因徹)七단과 丈和名人의 대국을 주선했다.
이 판에서 본인방 丈和가 승리하면 그의 明人位는 공고히 굳어지겠지만 만약 赤星因徹이 이기는 날이면 丈和는 강제로 은퇴당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한판승부는 本因坊家와 井上家의 흥망이 걸린 피비린네 나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이 바둑을 둘 당시 본인방 장화는 54세, 적성인철은 26세였다.
장화는 신주(信州)태생,
소년시절 식료품상을 경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동경에 왔다가
거상(巨商)의 소개로 본인방가문에 입문했으며 16세에 초단이 되었으나 그후 바둑수업을 중단했다가 21세때 다시 바둑공부를 시작하여
40세가 넘어서야 본인방가의 주인이 되고 명인자리에 오른 대기만성(大器晩成)의 기사이다.
그는 철저한 싸움바둑이며 완력이 막강하여 전투실력13단이라고 후세 사람들은 말한다.
너무나 유명한 일본의 바둑고서 좌은담총(坐隱談叢)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본인방 장화는 인철과의 대국에서 중단을 하게되자
홀로 방에 들어앉아 바둑판을 대하고 수읽기에 골몰했다.
식구들은 식사때가 되면 죽을 쑤어 그의 곁에 두고 나오면서도 말한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화는 일심불란,
사색에 잠기다가 한밤중에 이르러 묘수를 발견하고는
[옳지] 하며 일어나더니 갑자기
"큰일났다, 거기 누구 좀 오너라"고 고함을 치는것이었다.
장화는 바둑에 심취되어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쌌던 모양이다.
정상인석八단은 장화명인을 타도하려는 중대한 이 시합에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수제자 인철을 내보낸것은
인철의 실력이 자신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으며
또한 제자 인철이 장화를 이겼을경우
자신의 명예가 더욱 높이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인철은246수에서 패국을 선언했다.
그는 돌을 거두고 서글픈 표정으로 옆자리에 있는
스승 井上因碩八段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돌연 피를 토하고 바둑 옆에 쓰러졌다.
그는 폐결핵 환자로서 체력이 쇠약한데다가 찌는듯한
삼복더위속에서 1주일에 걸친 무리한 대국으로 인해
기진맥진해 버린것이었다.
적성인철七단은 井上家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아무런 효험없이 그로부터 얼마후 2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바둑은 본인방가와 정상가의 영고성쇠(榮枯盛衰)가 걸린
처절한 싸움이었던만큼 여러가지 뒷 얘기가 정해오는데
좌은담총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적혀있다.
[대국기간중 장화의 아내는 천초관음보살에 치성을 드렸고,
정상가에서는 남몰래 절에가서 불공을 올렸다.
그때 대국모임에 참석했던 임원미(林元美)八단이 귀향길에
어떤 절에 들려서 스님에게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인철의 죽은 이야기를 했더니
스님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장화의 기량은 부처의 힘으로도 움직이기 어렵다.
정상가들이 부동명왕(不動明王)에 불공을 올린 반동으로
인철이 죽은 것이다"고 대답했다.
첫댓글 전투실력 13단......그럼 이창호 9단은 끝내기실력 13단이라고 부르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