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은 우리나라 유일의 국립극장이 1950년 4월에 설립될 때 그 유일한 전속 단체로 창단되어 현재까지 50년의 역사를 가진 극단이다. 그러나 국립극장 창립 당시에는 명칭이 ‘신협’이었다. 국립극장의 전속단체로 출범한 이 ‘신협’은 6.25동란 중에는 국립극장과 관계없이 민간극단으로 공연활동을 펼쳤고, 서울로 국립극장이 환도한 후에는 잠시 전속극단으로 합류했다가 다시 탈퇴하여 민간극단의 길을 독자적으로 걸었다. 대구 국립극장 시절엔 전속 극단이 조직되지 않아 공백기를 갖기도 했고, 또 ‘신협’ ‘민극’이란 이름의 두 개의 전속극단이 조직되어 활동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국립극단은 여러 변화를 거치면서 50년의 역사를 축적해 왔는데, 이는 한국 연극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국립극단 50년사는 한국 현대극의 역사를 형성하는 대표적 극단으로서 국립 연극단체의 위상과 역할을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예술정책과 예술단체의 상관성 및 예술정책의 성공 여부를 고찰하는 자료와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립극단의 창단 50주년을 맞이한 현 시점에서 국립극단의 이념과 활동을 고찰하고 한국연극사에서의 역할과 위상 및 공과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국립극단에 대한 연구로는, 유민영 교수와 연출가 이진순이 국립극장 30년사(창립부터 1980년까지)를 실증적으로 개관하면서 국립극단을 함께 다룬 글, 유민영, ꡔ한국극장사ꡕ, 한길사, 1982.
이진순, 「현대연극사-국립극단을 중심으로」, ꡔ국립극장 30년ꡕ, 중앙국립극장, 1980.
그리고 주로 국립극단의 레퍼토리를 주제와 유형별로 간략하게 개관한 김문환 교수의 글 김문환, 「국립극장의 이념과 정책방향」, ꡔ문화입국론ꡕ, 느티나무, 1989.
김문환, 「레퍼토리로 본 국립극단의 공연들-1986~2000년을 중심으로」, ꡔ한국연극ꡕ, 2000.4.
등이 선구적이지만, 국립극단의 50년간의 역사와 활동에 대한 총체적 연구는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국립극단의 50년 역사는 창단 배경과 활동, 및 전용 무대에 따라 5개의 시기 구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1) 제1기: 국립극장 창립과 전속극단 ‘신협’ 시대 (2) 제2기: 환도한 국립극장과 ‘국립극단’ 시대 (3) 제3기: 두 개의 전속극단 ‘신협’과 ‘민극’ 시대 (4) 제4기: 명동 국립극장의 ‘국립극단’ 시대 (5) 제5기: 장충동 국립극장의 ‘국립극단’ 시대.
본고에서는 국립극단 50년의 역사와 활동을 자료에 의거, 실증적으로 개관하고자 하나, 50년의 장구한 활동을 이 글에서 모두 포괄하기엔 너무 방대하므로, 전속극단 ‘신협‘의 창단부터 명동 국립극장시대까지의 국립극단까지의 활동을 살펴보는 것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장충동 국립극장시대의 국립극단사 및 국립극단의 연극사적 역할과 위상 및 앞으로 국립극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 전망은 후속 논문에서 다루고자 한다. 따라서 본고는 국립극단사를 개관하면서 국립극단의 창단배경, 공연활동, 극단 운영 시스템 및 연극사에 미친 공과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2. 제1기: ‘신협’ 시대(1950.4~1950.6)
(가) 창단 이념
국립극단은 국립극장의 창립과 함께 국립극장의 유일한 전속단체로 창단되었기 때문에, 먼저 국립극장의 설립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립극장 설치는 연극인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에 의해 해방 직후부터 구체적으로 논의되다가 정부 수립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948년 12월에 국립극장 설치령이 공포되었다. 건물로는 태평로의 구 부민관 (지금의 시의회 건물)을 사용하기로 하고 1949년 10월 21일, 국립극장 운영위원회에서 초대 극장장으로 유치진을 선출하였다. 서항석, 「나와 국립극장」, ꡔ극장예술ꡕ, 1979년 5월호. 28면.
그리고 1950년 4월 30일에 연극 <원술랑>으로 역사적인 개관 공연을 가졌다. 문교부 산하에 설립된 국립극장 설치령 제1조는 “민족예술의 발전과 연극문화의 향상을 도모하여 국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기 위하여 국립극장을 설치한다” 이진순, 「현대연극사-국립극단을 중심으로」, ꡔ국립극장 30년ꡕ, 중앙국립극장, 1980. 295면.
고 하여, 국립극장의 설립목적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연극예술의 향상을 목표로 설립된 국립극장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전속극단 설립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또 국립극장의 설립목표가 ‘연극문화의 향상’이라는 것은 곧 국립극장의 활동이 연극 중심이라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연극계의 중추 인사인 유치진을 초대 극장장으로 임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립극장 설치이념은 연극문화의 향상이 절대 명제였던 1950년의 상황에는 적절하다 할지 몰라도, 신극 90여년의 역사를 통해 상당한 연극적 역량을 축적한 오늘날에도 이 이념이 그대로 고수되고 있는 것은 한 나라의 국립극장의 이념치고는 너무 소박하고 특성이 없는 듯 보인다. 김문환이 지적하고 있는 바처럼 일본의 국립극장의 설치목적은 “주로 일본의 고대 전통적 예능의 공연, 전승자의 양성, 조사, 연구 등을 도모하고, 그 보존 및 진흥을 도모하여 문화의 향상에 기여한다”는 것이고, 영국 국립극장의 활동 목적은 고전, 창작, 전세계의 소홀시된 드라마 등 전통과 현대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공연하며, 이 레퍼토리들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김문환, 「국립극장의 이념과 정책방향」, 앞의 책, 357~58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일본처럼 전통 계승에 치중하지도, 영국처럼 전통과 현대의 구별보다는 최고수준을 지향한다는 특성화를 뚜렷이 세워놓지 않았기 때문에 국립극단 50년의 공연활동이 어떤 뚜렷한 특성과 개성을 갖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국립극단은 ‘민족예술의 수립과 창조’로 이념을 세우고 창작극 위주의 공연활동과 창작극 진흥, 민족주의적이고 민족적 정서를 그린 작품들을 공연해왔던 것이다.
(나) 전속극단 ‘신협’ 조직
유치진 극장장은 먼저 극장 보수에 착수하는 한편 전속단체 조직에 나섰다. 그는 국립극장에 신극협의회(약칭, 신협)라는 기구를 두고 극장을 운영하되, 전속 배우를 두지 않고 전속극단 두 개를 둔다는 것과, 두 극단이 격월로 신작 1편씩을 2주일씩 공연함으로써 연중 무휴 공연체제로 만든다는 방침을 세웠다. 전속배우제가 아닌 전속극단제를 채택한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전속배우제를 채택할 경우 국립극장의 배우는 그 신분이 국립극장의 관리, 곧 공무원이 되는데 당시 극장 관계 공무원의 봉급(당시 7천원 전후)으로는 관록있는 배우를 영입하기엔 부족한 금액이었다. 두번째로 전속배우가 공무원 신분이 되면 관료화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유치진은 전속단체를 급조하기보다는 당시 활동중인 민족진영의 예술적 수준이 높은 연극단체를 선정하기로 하고, 극협(극예술협회)을 영입했다. 또, 연중무휴 공연을 구상하고 있었던지라, 두 단체를 전속으로 두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래서 1950년 1월 19일 국립극장 직속 협의기구로서 ‘신극협의회’를 만들고 그 산하에 신협과 극협 두 전속단체를 두기로 한 것이다. 유치진, ꡔ유치진전집 9-자서전ꡕ, 서울예대출판부, 1993. 203~205면.
‘신극협의회’란 국립극장의 공연 임무를 극단 성격으로 대행하기 위해 발족된 실무기구인데, 그 약칭 ‘신협’이 ‘극협’을 영입하여 조직한 전속극단의 명칭이 된 것이다. 김동원, 「국립극단 창단 무렵」, 국립극단 제186회 공연 <태>(2000.4.1~9) 팜플렛.
그러니까 유치진은 먼저 극단 극예술협회의 멤버들을 끌어들여 신협이란 이름으로 전속극단을 발족시키고, 나중에 또 하나의 전속극단 극협을 발족시켜 이 두 개의 전속단체가 격월로 신작 한 편씩을 공연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협이 3회 공연을 준비하던 중에 6.25전란을 만나 국립극장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고, 피난지 대구에서 국립극장장이 서항석으로 교체됨으로써 구상하고 있었던 또하나의 전속단체 ‘극협’의 결성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신극협의회는 간사장에 극작가 이광래(李光來), 그리고 예술국과 지방국을 두고 그 밑에 극작분과․연기분과․연출분과․무대분과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 핵심은 연기분과로서 극협의 멤버였던 이해랑, 김동원, 박상익, 주선태, 오사량, 박제행, 박경주, 최삼, 전두영, 송재로, 이화삼, 고설봉, 장훈 등 남자배우와 김선영, 유계선, 유해초, 백성희, 황정순 등 여배우가 주축이 되었으며, 연기분과 과장으로 윤방일이 임명되었다. 이들 구성원은 극협 멤버들이 대부분이고 동양극장 계열의 연기자들이 일부 섞여 있었다. 따라서 이 ‘신협’은 모태인 극협이 구성원이나 활동 이념에 있어 극예술연구회와 동경학생예술좌의 맥을 잇는 극단이므로 신극사의 정통 맥을 잇는 극단이라 평가된다. 유민영, 「국립극단 50년을 돌아보며」, ꡔ한국연극ꡕ, 2000년 4월호. 17면.
(다) 개관공연 <원술랑>과 2회 공연 <뇌우>
“민족예술의 수립과 창조” 유치진, <원술랑> 팜플렛, ꡔ유치진전집 9-자서전ꡕ에서 재인용.
란 목표를 내세우며 화려하게 발족한 전속단체 신협은 곧바로 개관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국립극장의 설립의의를 구현하는 레퍼토리 선정에 고심한 끝에유치진의 사극 <원술랑>을 선정했다. 왜냐하면 민족예술 수립과 창조라는 국립극단의 이념에 역사극 장르가 적절했고, 내용면에서도 당나라의 침략에 맞서 신라를 지킨 영웅 원술랑의 이야기가 곧 해방 직후 외세의 위협 앞에서 나라를 지키고 민족정기를 앙양하고자 한 시대적 사명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원술랑>(5막 7장)은 연출에 허석과 이화삼, 그리고 배역으로는 원술에 김동원, 진달래에 김선영, 김유신에 박경주, 지소 부인(김유신의 아내)에 황정순, 담릉에 주선태, 문무왕에 이해랑, 공주에 백성희 등 최고의 배우들이 맡았다. 4월 30일부터 일주일간 공연했는데 1800여 석의 극장이 일주일 공연에 5만 명 이상의 관중을 동원하는 사상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유치진, 앞 책, 206면.
창립공연 <원술랑>에 이어 제2회 공연으로 중국의 가정비극 <뇌우>(曹愚 작, 유치진 연출)를 올렸다(6.6~6.15). 인생의 단면들을 진실하게 그려 보여준 정통 리얼리즘극 <뇌우>도 창립공연을 능가할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누려서, 1주일 더 연장공연을 가졌다. 매회 평균 4천여명, 17일 공연에 무려 7만 5천명 관람으로, 당시로서는 한국연극사상 최고의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 숫자는 당시 40여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의 6분의 1 정도가 관람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며, 이 연극을 보지 않으면 문화인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할 만큼 지식층의 호응을 받은 것도 한국연극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김동원, 「국립극단 창단 무렵-<원술랑>과 <뇌우> 공연」, 국립극단 제186회 공연 <태> 팜플렛.
이처럼 최고의 배우들과 스탭 및 탄탄한 재정적 지원으로 무장한 신협이 악극과 신파극 등 대중극이 범람하던 당시 연극계에서, 정통 현대극의 역사를 쌓아가려던 출발점은 매우 순조로웠다. 그러나 3회 공연을 준비하려던 차에 불행하게도 6.25전쟁이 발발했던 것이다. 국립극장의 전속극단으로 창단된지 불과 두 달도 채 못 채운 시점이었다. 결국 신협은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전쟁 중 기능이 마비된 국립극장과는 별도로 피난지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공연활동을 함으로써 민간 연극단체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3. 제2기: 환도한 국립극장의 ‘국립극단’ 시대 (1957.6~1959.5)
(가) 국립극장의 대구 시절과 전속극단의 공백기(1953.2~1957.5)
6.25동란으로 운영이 마비된 국립극장은 2년이 지나도록 정상화되지 못했다. 유치진은 1951년부터 임시 수도 부산에서 국립극장 재건운동을 추진하였고 국립극장 건물로 대구 문화극장을 후보로 내세우기까지 했으나, 문교부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자 극장장 직을 물러나고 말았다. 서항석, 「나와 국립극장(2)」, ꡔ극장예술ꡕ, 1979년 6월호. 25면.
그러나 국립극장 문제는 1952년에 재론되기 시작하여 개정법률안이 5월에 국회와 국무회의를 통과하였고, 대구 문화극장을 국립극장 건물로 사용하기로 하고, 서항석이 제2대 국립극장장으로 취임하였다.
서항석 극장장은 국립극장 재개관의 날을 1953년 2월 13일로 정하고, 재개관 기념공연으로 <야화>(윤백남 원작, 하유상 각색, 박진 연출)를 무대에 올렸다. 서항석은 개관 공연 프로그램에 “초창기의 선배 윤백남선생의 극본에 낭만극기의 토월회 동인 원우전선생의 장치를 청하고 보니, 여기서 신극수립기의 극연의 동인인 내가 연출을 담당하는 것이 국립극장의 재발족에 다소의 사적 의의를 부여하는 상 싶기도 하다” 서항석, 「나와 국립극장(2)」, 26면.
라면서 신파-토월회-극연의 3대의 통합이라는 사적 의의를 자찬했으나, 실제로는 상업극의 레퍼토리를 재개관 공연작으로 선정했다는 점과, 흥행극단처럼 구정(舊正) 날짜에 맞추느라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졸속으로 막을 올렸다는 점 때문에 신랄한 비판 한노단, 「신극과 상업극-국립극장 재출발에 際하여」, ꡔ서울신문ꡕ, 1953.3.22.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국립극장은 재개관하면서 전속극단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야화> 공연은 전 연극계의 유능한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제작했다. 이미 민간극단이 되어 공연활동을 하고 있던 신협을 다시 전속극단으로 끌어오지 않은 것은, 신협의 실질적 주도자인 유치진과 서항석 극장장의 반목 때문이었다.
국립극장의 대구 피난시절은 전속극단이 없었기 때문에 <야화> 공연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체 공연은 갖지 못했고 대관 위주로 운영했다. 창조 주체인 전속극단이 없기 때문에 국립극장은 단순히 극장건물로서의 역할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족예술 수립과 창조’라는 설립이념을 구현하지 못하는 국립극장의 무기력화는 결국 국회에서 ‘국립극장 폐지론’을 들고 나오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서항석의 회고에 따르면, 어떤 인사가 국립극장 건물 (구 문화극장)을 가로채어 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대구 출신 자유당 의원을 설득하여 국립극장 폐지론을 주창하게 했다고 한다. 이에 서항석은 국회에 출석하여, ‘국립극장 폐지’는 국립극장이 그 설치 목적을 다 달성했거나 혹은 도저히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거론될 수 있다며, 제도나 사람이 미비하면 그것을 보완할 일이지, 폐지하는 것은 국민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는 논지를 펴서 폐지론을 봉쇄하였다고 한다.
서항석, 「나와 국립극장(4)」, ꡔ극장예술ꡕ, 1979.8. 30면.
(나) 국립극장의 환도와 ‘국립극단’ 발족
1953년 휴전과 함께 정부가 환도한 후에도 국립극장은 국립극장으로 사용할 만한 적당한 건물을 서울에서 구하지 못한 때문에 그대로 대구에 남아 있었다. 국립극장이 개관 이후 사용하던 구 부민관 건물(현 시의회 건물)은 국회가 폭격맞은 것을 개수하여 사용하고 있었고, 명동의 시공관(일제시대 명치좌, 해방직후 국제극장, 현 대한투자금융 건물)은 서울시가 ‘시공관(市公館)’으로 계속 사용하면서 양보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새로 건물을 지을 형편도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항석이 자신이 최고위원으로 있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를 움직여 1957년 1월 5일에 정부 요로에 국립극장 환도 촉진 건의문을 제출하자, 한때 국회에서 국립극장 폐지론까지 나와 곤욕을 치른 바 있던 문교 당국은 적극적으로 환도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난제였던 극장 문제는 시공관 건물을 서울시와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해결하여, 드디어 1957년 6월 1일, 국립극장은 서울로 환도하여 시공관 건물에 둥지를 틀고 개관하게 된 것이다.
환도한 국립극장은 대구 시절과는 달리, 자체 공연을 많이 제작해서 국립극장 원래의 목적인 ‘민족예술의 수립과 창조’에 주력하기로 방향을 정하고, 전속극단을 조직하기 위해 과거 전속극단이었던 신협과 교섭을 벌였다. 민간극단이 된 신협은 그때까지 50회의 공연을 해왔으나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던 터라 핵심단원 전원이 전속극단에 복귀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신협 단원과 극계의 원로 변기종과 정애란, 진랑 등을 참여시켜 비로소 ‘국립극단’이라는 명칭의 전속극단이 새롭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단원은 변기종, 이해랑, 김동원, 박성대, 최남현, 장민호, 주선태, 강계식, 박상익, 박암, 장일호, 백성희, 김경애, 문정숙 등으로, 당대 최고의 배우들로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명실공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극단의 면모를 갖추었다.
(다) 공연활동
중앙국립극장 및 국립극단은 대구 시절의 기획실을 확대하여 서항석, 박진, 이무영, 김정환, 이해랑, 이원경, 김진수, 이진순 등으로 구성된 기획위원회에서 극단의 공연기획과 사업계획을 자문받았다. 이 기획위원회는 자체 공연의 기획에도 관여할 뿐 아니라 국립극단 이외의 극단에서 우수한 공연기획을 가지고 국립극장에서의 공연을 교섭해 올 때 자문을 하고, 여기서 통과되면 이를 국립극장 ‘지정공연’으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운영하였다.
국립극단은 중앙국립극장 환도기념 제1회 공연으로 <신앙과 고향>(카알 쇠인헤르 작 서항석 역, 홍해성 연출)을 공연 (1957.7.12~20)했다. 이어서 제2회 공연으로 코프만․하아트 합작 오화섭 역 이진순 연출의 <태풍경보>(원제: <와싱톤 여기서 주무시다>)를 올렸고(57.9.15~19), 제2회 공연의 2부 공연으로 <발착점에 선 사람들>(이무영 작, 이광래 연출, 57.9.20~26)을 공연했다. 당시 2회 공연을 1부, 2부로 나누었던 것은, <발착점에 선 사람들>을 연극애호가인 사업가 최완규가 제작자가 되어 지방공연까지 기획했으므로 특별공연 형식으로 한 번 더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극장장 서항석은 매달 2편 공연과 창작극 위주의 공연 방침이라는 의욕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매달 2편 공연 중 적어도 1편만은 창작극을 공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립극단이 처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보다도 관객이 적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달마다 가지는 공연에 있어 두 개의 희곡 중에 하나는 꼭 창작극을 하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또 결의이지만 이 점은 劇壇과 文壇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서야 비로서 가능한 일이요 차제에 유능한 신인들의 진출 또한 기대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중략)
다음에 이번 공연에는 그런 일이 없이지이다고 빌고 싶은 일이 있다. 환도한 국립극장이 이 나라의 우수한 연기진을 포섭하여 첫 공연을 가진다 하면 문화니 예술이니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인사들은 대개 들여다보기라도 할 줄 믿었던 것이 날마다 객석을 살펴볼 적마다 적막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못 서글픈 일이었다. 그뿐인가 초대석을 차지한 관객들은 대개는 초대받은 본인이 아니었다. 이러고보니 이 나라의 연극은 관객다운 관객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고 만다. 이것은 민족예술의 발전과 연극문화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국립극장의 커다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서항석, 「제2회 공연에 際하여」, 제2회 공연 팜플렛.
한편, 이 시기 국립극단의 공연은 공연내용이나 기획의 품격이 ‘국립’다운 수준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태풍경보>도, 작품 내용이나 풍자희극이라는 스타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제목으로 변경을 하는 등 흥행극단같은 발상을 보였고, <발착점에 선 사람들>도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제작한 것이어서 국립극단의 격을 떨어트렸기 때문이었다. 김규대, 「국립극장의 환도」, ꡔ경향신문ꡕ, 1957.12.24.
창작극 위주의 공연을 표방한 국립극단은 제5회 공연(환도후 3회 공연)으로 <인생차압>(오영진 작 이해랑 연출)을 올렸고(57.10.30~11.5), 제6회 공연으로는 국립극장 제1회 희곡 모집에 입선한 <딸들은 자유연애를 구가하다>(하유상 작, 박진 연출, 57.11.28~12.5)를 공연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관객 동원은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전통의 신협이 국립극단으로 흡수되면서 오히려 신협의 고정 관객마저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신랄한 비판도 있었다.
무엇 때문에 50회 이상의 공연기록을 가진 ‘신협’이란 극단의 이름을 국립극장으로 바꾸어서 그렇지 않아도 기계예술의 침해를 받고 날로 위축되어가는 극단과 관객과의 거리를 더 멀리하여 놓았는지?
두 극단의 ‘멤버’는 동일한 사람들이 있으나 관객이 그 명칭에서 받는 인상에는 말할 수 없는 큰 차가 있었다.
좋은 예로 국립극단의 관객은 전의 ‘신협’의 관객의 절반이 되지를 못하였다. 의상 장치 소도구에 풍부한 돈을 먹이고 또 전과 동일한 ‘멤버’가 근 20일에 걸친 장기연습을 하여 가진 공연이 푼돈을 모아 자립으로 공연을 하던 때보다도 관객이 떨어지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해랑, 「객석은 언제나 한산-1957년의 반성」, ꡔ동아일보ꡕ, 1957.12.29.
(밑줄, 필자)
신협의 주도적 멤버였던 이해랑은 국립극단이 “우리나라 유일의 신극단체인 극단 신협의 이름”을 말살했다고까지 맹비난을 퍼부는데, 물론 이러한 비난은 재정난에 빠진 신협이 자의로 전속단체로 들어온 것이므로 감정적인 비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랑이 대변하는 신협계 단원들의 국립극단에 대한 거부감은 얼마 후 신협계 단원들의 탈퇴와 ‘신협 재건’으로 나타난다. 어쨌든, 신협 공연때보다 ‘국립’이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관객이 감소한 사실을 볼 때, 관객이 국립극단에 대해 이상한 거부감이나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국립극단은 과거 신협의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또는 신협의 고정관객을 끌어오기 위해 ‘구 신협’이란 표현을 써서 선전함으로써 스스로 국립극단다운 체모를 깎기도 했다.
(라) 신협계 단원들의 탈퇴
환도 후 새롭게 발족한 국립극단이 활동을 재개한지 7개월만에 심각한 위기가 위기가 닥쳐왔다. 국립극단의 신협 멤버들의 탈퇴사건 때문이었다. 신협계 단원들이 제7회 공연 <야화>(1958.2.22~28)를 전후해서 대거 이탈하고, 1958년 7월 31일에 총회를 열어 회장에 유치진, 운영위원장 이해랑, 운영위원 김동원, 최남현, 강계식 등으로 진용을 짜고 민간극단 신협으로 재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9월에는 ‘신협 재건공연’ (제51회)으로 <한강은 흐른다>(유치진 작, 이해랑 연출)를 시공관에서 공연했다. 유민영, ꡔ한국극장사ꡕ, 한길사, 1982. 135면.
이 신협 탈퇴사건은 유치진과 서항석의 해묵은 감정대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제시대 극연 멤버로서 함께 신극운동의 기수였던 두 연극인의 반목은 국립극장장이 유치진에서 서항석으로 바뀐 다음, 유치진이 이끄는 신협이 국립극장 대구 재개관 당시 전속단체로 재계약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서항석과 극단 신협의 반목과 감정대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다 환도한 국립극장이 신협을 전속극단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반목이 해소되는 듯 싶더니, 이진순, 「현대연극사」, 307면.
소위 ‘왜 싸워?’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은 유치진이 ꡔ자유문학ꡕ지에 발표한 <왜 싸워?>라는 희곡이 전국대학생극 경연대회의 극본으로 채택된 후, 극연(劇硏) 동인이었던 김광섭 등이 일제시대에 공연된 친일극 <대추나무>의 개작이라는 주장을 제기함으로써 벌어진 유명한 문단 논쟁사건을 말한다. 유치진이 별개의 창작이라고 맞서자, 결국 문총에서는 문총의 최고위원이자 <대추나무>(현대극장)의 연출자였던 서항석에게 개작인지 창작인지의 판가름을 맡겼다. 서항석은 그 사건의 전말과, 신협계 단원들의 탈퇴와 관련된 저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왜 싸워?>는 <대추나무>라 하기에는 다른 데가 많고 <대추나무>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같은 데가 많다고 하였다. (중략) 결국 <왜 싸워?>와 <대추나무>는 별개의 창작이 아니라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그리하여 학생극경연대회 대본으로의 채택이 취소되었다.
싸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치진씨 자신은 다시는 일언반구의 해명도 항의도 없었지만, 유치진씨의 영향하에서 자라온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나 이에 항변하는 성명서를 내는 등 부산하게 움직이며 떠들어댔다. (중략) 그러자 그들의 나에 대한 화살은 내가 재직하여 있은 국립극장으로 방향이 돌려져, 국립극장의 운영에 대하여 취모멱자(吹毛覓疵)․침소봉대(針小棒大) 식으로 과장 고발하는 언설이 그들 각 개인의 이름으로 여러 신문에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중략) 하여튼 <왜 싸워?> 파동이 국립극장에 미친 영향은 컸었다. 국립극단의 핵심을 이룬 신협계 단원의 동요가 있은 것도 그 때문이었고, 심지어 국회에서 국정감사를 나와, 자못 까다롭게 캐어 묻고 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항석, 「나와 국립극장(6)」, 29~30면.
그런데, 국립극단에서 탈퇴해 나간 신협도 국립극장과의 대립문제라든지 일부 멤버들이 영화배우로 전향하는 등 결속력이 약화되어 뚜렷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본 궤도에 오른 영화 제작계-1958년의 연예계 회고」, ꡔ한국일보ꡕ, 1958.12.21.
재기 공연 <한강은 흐른다>도 관객 동원에 실패함으로써 재기를 증명하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신협계 단원들이 빠져나간 국립극단도 존속이 어려울 정도로 약체가 되었다.
만일 국립극장과 ‘신협’이 연극적 내지 예술적 견해 사고의 대립으로 둘로 갈라졌다면 그것은 우리나라 연극의 발전을 위해서 크게 환영할 사실이겠는데, 그렇지가 않고 솔직히 말해서 감정의 대립으로 분리된 것인 만큼 그 결과는 최소한도 ‘국립극단’의 약체화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동시에 ‘신협’ 자체도 독립함으로써 단채행동을 계속 유지했었으면 모르되 1회 공연으로 중단상태인 채, 올해를 넘기게 되고 보니, 이는 연극 전반적인 면으로 보아서 서로가 다 손실이 컸지 이득은 아무 것도 없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현실로서는 하나의 직업극단이 연극행동을 계속하기엔 운영면에 있어서 거의 절대에 가까울 만큼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즉 경제적으로 밸런스가 맞지를 않는다. 이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남음은 지난번 추석의 ‘신협’의 <한강은 흐른다> 공연에 동원된 관객의 수로써 알 수 있다. ꡔ동아일보ꡕ, 1958.12.17.
이원경의 이상과 같은 논평처럼, 예술적 견해나 사고의 대립이 아닌, 감정 대립으로 국립극단과 신협이 갈라지고, 이로 인해 두 극단 모두가 약체가 되는 똑같은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마) 국립극단의 해체
신협계 단원들이 빠져나간 후에도 국립극단은 여전히 공연을 계속하였다. 이미 약체가 된 극단이란 이미지를 탈피할 순 없었지만, 연기자의 부족은 객원 출연으로 메꾸었다. 그래서 신협계 단원들의 탈퇴 직후 가진 제8회 공연 <우물>의 경우, “연습기간이 짧았다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연기자들이 비교적 째인 앙상블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연출자들의 노력의 보람인 것 같다.” 「황무지의 비극-국립극단 제8회 공연을 보고」, ꡔ서울신문ꡕ, 1958.3.24.
는 비교적 호평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이 시기 국립극단의 공연은 주로 연기의 미숙, 프롬프터의 사용, 신인 창작극의 경우 드라마투르기의 미숙 등의 비판을 받으면서 관중의 외면을 받았다. 예컨대 한국 초연인 <시라노 드 벨쥬락>(에드몽 로스땅 작, 이진순 연출, 제10회 공연)의 경우, “총무대연습 같은 무리와 함께 무성의한 진행이 저지른 初日의 미스는 두고두고 기억되어져야 할 것” 「<씨라노 드 벨쥬락>-국립극단 6월 공연 연극평」, ꡔ한국일보ꡕ, 1958.6.30.
이라거나 ‘시와 품위가 결핍된’ 공연으로, “공연의 최종일까지 대사를 외우지 못하여 무대위에서 웃음보가 터지도록 된다면 이는 국립극단의 긍지와 체면을 위해서도 연습을 철저히 하는 편이 시민을 위한 친절이라 믿는다.” 차범석, 「시와 품위의 결핍-<씨라노 드 벨쥬락>을 보고」, ꡔ조선일보ꡕ, 1968.7.9.
는 혹평을 받았다.
1958년 6월에 공연한 신인발굴작 <인생일식>(강문수 작, 박 진 연출)도, “어디까지나 현실에 입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역시 소설 쓰는 작가를 주역으로 했다든가 연기에 있어서 지나친 오바액숀으로 극의 긴장도나 진실도가 허구적인 탈로 자꾸 뒤바뀌어지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다.” 「두 개의 스테지-제작극회 <불모지>, 국립극단 <인생일식>」, ꡔ조선일보ꡕ, 1958.7. 29.
는 혹평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1959년 들어 공연한 <젊은 세대의 백서>(하유상 작, 박 진 연출)는 백성희, 박성대, 옥경희 등 연기자들의 열연은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극적 구성력의 박약과 유형적 성격 설정, 신파극을 연상시키는 안이한 결말 「산만한 무대-국립극단 <젊은 세대의 백서>」, ꡔ조선일보ꡕ, 1959.1.15.
등 희곡의 결함이 실패의 원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와 같이 국립극단의 연극은 작품성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연기자들의 미숙한 연기와 안이한 공연 자세로 인한 공연수준의 하락으로 관중의 외면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50년대 후반에 몰아닥친 영화 붐의 여파로, 연극에는 관객이 몰리지 않는 불황이 겹쳐져 매우 심각한 적자에 허덕였다. 그러자 수지가 맞지 않는 국립극단 운영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고, 급기야는 제14회 공연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박동화 작, 박진 연출; 59.4.9~13)가 막을 내린 직후 국립극장 운영위원회에서는 국립극단 해체론을 들고 나와 결국 1959년 5월에는 해산되고 말았다.
운영의 불합리로 계속 부진상태에 있던 국립극장은 마침내 궁극에 다달아 지난 5월말 문교부에서 열린 ‘국립극장운영위원회’에서는 국립극장에 전속된 ‘극단’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그에 대치될 방법을 오는 8월말까지 각 운영위원들이 연구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중략) 현재 국립극장은 재작년 개관이래 연간 8천여만환의 국고보조를 받아가면서도 국립극장 본래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리 민족예술의 진흥에 별다른 이바지를 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립극장 전속극단’의 존재는 국내의 유능한 극예술단체의 정상적인 발전에 적지 않은 지장을 가져오고 있다는 결론을 얻어 전기한 조치가 내려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날 알려진 바에 의하면 ‘국립극장 전속극단’을 폐지하는 대신 그에 소요되는 예산을 국내의 유수한 공연단체에 ‘공연비 보조금’ 형식으로 지급하는 동시 보조를 받은 공연단체는 보조금에 대한 적당한 보상을 한다는 안이 나오고도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국립극장 전속극단을 폐지」, ꡔ동아일보ꡕ, 1959.6.9.
이와같이 국립극단 폐지론이 나온 배경은 국립극단이 연간 8천여만환의 국고보조금을 받으면서도 다른 민간극단보다 공연의 질이 우수하지 않아 민족예술의 진흥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므로, 차라리 국립극단을 해체하고 그 돈을 다른 유수한 공연단체에 보조금으로 지급하여 민간극단들을 육성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다는 발상에서였다. 그러나 이 방안은 분명 맹점을 가지고 있었다. 국립극장의 대구 피난시절, 전속극단 없이 운영하자 국립극장은 대관위주로만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국립극장이 설립이념인 민족예술창조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단순한 극장건물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므로 국립극장 폐지론으로 비등된 바 있었음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국립극장 운영위원회가 국립극단을 폐지할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지자, 언론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국립극단을 폐지한다는 것은 민족예술 수립을 위해 무대예술의 보호육성이란 목표로 창설된 국립극장의 존재의의와 모순된다는 비판을 펼쳤다.
민족예술의 일환으로서 무대예술의 보호육성을 목적하여 창설된 국립극장은 연극전통이 얕은 후진국가로서 비교적 선진적 제도이었는데 흥행수지의 군형에 좌우하여 전속극단의 존폐를 결정한다는 것부터 퇴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중략) 물론 그간의 국립극단의 레퍼토리나 공연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며 국립극단 멤버의 약화, 레퍼토리의 선정, 연출, 연기 문제 등 내용적인 면에서 쇄신되어야 할 문제 또한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운영위원회에서는 국립극단을 해체시키는 대신 민간단체와의 제휴 공연을 구상하고 있다고 하나 공통적으로 흥행이 가장 어려운 연극공연은 어차피 어렵게 될 것이고 우선 동인체를 구성하고 1년에 2~3회 공연을 하고 있는 ‘신협’ 이외에 민간연극단체는 존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인 바, 무대예술의 기간이라고 할 연극무대는 결국 수지균형이 맞을 날까지는 마련되지 못해야 한다는 모순이 드러나고 있다. 「국립극단은 어디로」, ꡔ동아일보ꡕ, 1959.6.12.
이처럼 국립극단의 해체가 결국 무대를 지키고 있는 소수의 연기자들마저 영화판에 흡수되게 만들 것이고, 연극이란 무대예술의 특성상 수지균형을 맞추기 힘든 연극의 마지막 등불을 꺼버리는 일이 될 것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던 것이다.
(바) 국립극단 강화책
문화계 인사들이나 언론은 꾸준히 국립극단의 폐지가 가져올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국립극단은 상업극단이 아니므로 영리 여부를 떠나 진흥책을 강구하여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를테면 극작가 차범석은 매우 설득력있게 국립극단 해체론의 모순을 지적하고 나서 국립극단 강화책에 대한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신협계 단원들이 탈퇴한 후 극단원들을 보충도 하지 않고 별다른 강화책도 없이 방치하다가 국립극장운영위원회에서 해산시켜 버린 국립극단은 반드시 존속되어야 하며 육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지금까지도 국립극단의 부진과 빈곤에 대해서는 뜻있는 연극인과 시민들은 한결같이 불만을 털어놓았었고 과단성있는 운영방침을 희구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문화적 풍토에서 국립극단을 폐지하거나 해산시키라는 진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국립극단은 해산을 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국립극단은 문자 그대로 국민의 세금에 의해서 국민을 위해 있는 예술적 집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러 연극인들이 지적해온 바와 같이 어떤 개인의 소유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신문보도에 의할 것 같으면 이번에 해산을 시킨 당국의 의견은 극단의 실적이 없고 매회마다 막대한 손실을 내왔으며 현존하는 인적 구성은 다른 극단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중략)
해산이라는 가혹한 방법이 내리기 전에 왜 국립극장 자체가 기동성과 과단성을 발휘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중략) 국립극장을 운영하기 위해서 운영위원회가 있고 국립극단을 위해 기획위원회가 있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분들이 해산을 하자는 데 합의를 보았는지 안타까운 생각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와 같은 문화적 후진성을 지닌 풍토내에서 모처럼 얻어진 국립극단이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를 육성시키고 훈련을 시켜서 결실을 보게 해야 할 터인데 2년도 못가서 해산을 해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허망하고 아쉬운 사실이라 하겠다.
국산영화의 호경기에 휩쓸려 우리 극계는 거의 마비상태에 빠졌었고 직업극단으로서는 「신협」과 「국립극단」만이 마치 최후의 요새처럼 사수해왔었는데 그것마저 없어진데 대한 연극인의 아쉬움은 너무나 상식적이면서도 서글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차범석, 「새로운 연극활동을-혁신적인 국립극단의 재조직」, ꡔ조선일보ꡕ, 1959.6.17.
차범석은 이어서, 국립극장운영위원회에서 국립극단 해체론이 나오게 된 것은, 원래 수지타산을 맞추기 힘든 극단운영을 경제논리만 가지고 재단한 것이며, 연극계 출신의 위원이 극소수여서 연극계의 여론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지적했다. 또, 국립극단의 존재는 우리나라의 민족예술 수립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므로 해체할 것이 아니라 혁신적인 재조직을 통해 강화된 국립극단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로 국립극장의 사명은 수지면을 떠나서 민족연극을 개발하는 일이므로, 연극의 창의성 개발과 관객계발에 노력해야 한다는 점, 둘째로 우수한 단원의 확보, 작품료나 연출료 등의 현실화로 연극 제작경비를 올려 공연의 질적 수준을 높일 것, 셋째로 민족연극의 수립이란 목표를 위해 배타주의에 사로잡힌 근시안적인 기획과 안이한 행사주의를 버리고 실력본위로 엄선한 연극인으로 강력한 극단을 재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차범석, 앞 글.
이렇게 문화계에서 국립극단의 폐지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퍼붓자, 국립극장 운영위원회는 국립극단 폐지 방침을 일단 유보하고 국립극단 운영 문제를 다시 협의하기 시작했다. 이때 거론된 방안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인기있는 영화배우들을 흡수하여 대중에게 인기있는 연기진으로 강화하여 국립극단을 개편하자는 안이었고, 다른 한가지는 국립극단을 완전 해체하고 민간 직업극단과 제휴공연하자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안도 각각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배우들을 끌어와 극단을 구성하면 관객동원은 성공하겠지만 연극이 상업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국립극단을 해체하고 민간극단과의 제휴공연만 가지면 결국 민족예술의 수립과 창조란 국립극장의 원래 창설 목표가 유명무실해진다는 점이었다. 「성하의 연극계」, ꡔ동아일보ꡕ, 1959.8.5.
어떤 경우에도 국립극장의 설립목표를 무력화시키는 안을 채택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립극단 강화책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 것이다. 2개의 전속극단을 두되, 하나는 재건 ‘신협’을 그 명칭, 그 진용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는 현재의 국립극단에 유능한 연기자를 포섭함으로써 강화시키고 이름은 다른 전속극단으로 하자는 새로운 방안이 마련된 것이었다.
1959년 10월 30일 열린 운영위원회에서 이 안이 통과되고, 유민영, ꡔ한국극장사ꡕ, 138면.
마침 재정난으로 허덕이고 있던 신협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제 국립극단은 2개의 전속극단 체제로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사) 이 시기 국립극단의 공과(功過)
이 시기 국립극단의 공과로는 두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특이한 것은 같은 사안이 장점인 동시에 단점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첫째 연간 5, 6편 공연편수가 입증하는 국립극단의 활발한 공연활동, 둘째 활발한 창작극 발굴을 들 수 있다.
국립극단은 환도한 국립극장의 전속단체로 재창단된 후 두 개의 전속극단 체제로 재편성되기까지, 즉 1957년부터 59년까지 매년 5~6편의 공연을 가졌고, 매 공연의 공연일수는 보통 5, 6일 정도였다. 이는 서항석 극장장이 처음에 의욕적으로 제시했던 것처럼 매달 2편 공연이란 목표는 지키지 못했지만, 2달에 1편 정도의 공연횟수를 가졌다는 것은 국립극단 50년을 통털어 가장 부지런한 공연횟수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공연횟수 못지 않게 두드러진 역작용은 공연수준의 하락이었다. 당시 공연평들을 보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수준, 연기의 미숙, 대사도 채 외우지 못한 불성실한 연습, 프롬프터의 사용 등이 흔히 지적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는 창작극 발굴이 매우 의욕적으로 이루어졌다. 국립극단은 현상희곡공모제도를 통해 신인작가를 발굴하고, 또 다른 신문사의 당선작이나 신인작가의 작품들을 초연함으로써 창작극 진흥에 주력했다. 이 시기에 공연된 총 13편의 공연 중, 창작극이 모두 10편에 달하는데, 이중 현상공모작 공연이 <딸들은 자유연애를 구가하다>(하유상 작, 박 진 연출) <우물>(김홍곤 작, 이진순 연출), <가족>(이용찬 작, 이원경 연출), <인생일식>(강문수 작, 박 진 연출)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박동화 작, 박진 연출) 등 5편으로, 반을 차지한다.
국립극장과 국립극단은 1957년부터 희곡현상공모를 시작했다. 제1회 희곡 현상공모에 하유상의 <딸들은 자유연애를 구가하다>와 이용찬의 <가족>이 뽑혔다. 「국립극장 제1회 현상희곡 입선자」, ꡔ동아일보ꡕ, 1957.10.29.
이 시기 국립극단이 발굴한 신인 작품 중 가장 큰 수확으로 평가받은 것은 <가족>(이원경 연출, 장종선 미술)으로서, “종래의 드라마투르기를 벗어나서 새로운 수법으로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이룩한 것으로” 미국의 현대극이 자주 실험하고 있는 바와 같은 조명에 의한 장면전환, 플래시백 수법에다가 현대감각을 담아 문학성을 고도로 살린 작품 「새로운 형식의 연극」, ꡔ동아일보ꡕ, 1958.4.25.
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국립극장과 국립극단이 오늘날까지 시행하고 있는 희곡현상공모제도는 그동안 하유상, 이용찬, 윤조병, 오태석, 정하연 등 많은 우수한 극작가를 발굴해냄으로써 우리 연극계에서 신인작가 발굴의 대표적 통로인 동시에 우리 창작극의 저변을 넓힌 기획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기획 때문에 최상의 공연수준을 표방해야 할 국립극단의 공연은 마치 신인들의 워크숍 공연같은 인상으로 관객에게 굳어지고 관객이 외면하는 부정적 결과가 초래되기도 했던 것이다.
4. 제3기: ‘신협’과 ‘민극’ 시대 (1959.10~1961.12)
(가) 두 극단의 조직
자칫 해체되고 말 뻔 하였던 국립극단은 오히려 1959년 10월에 2개의 전속극단으로 재조직되었다. 다시 국립극장의 전속극단이 된 신협은 이해랑 단장 체제로, 세 번째로 친정에 복귀한 셈이 되었다. 또하나의 극단은 ‘민극(民劇)’으로서, 원래 남아있던 국립극단원과 극계의 유능한 연기자를 받아들여 진용을 재정비하고 박진 단장체제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이로써 국립극장 창설 때부터 2개의 전속극단(신협과 극협)을 두려던 숙원이 이루어진 셈이 되어 도약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국립극장 창설 당시 구상되었으나 불발로 그치고 만 2개의 전속극단제를 다시 채택한 새로운 출발은 연극계의 많은 기대를 모았다. 전 국립극단의 유수 멤버들을 계속 잔류시키고 재야 연극계에서도 유능한 베테랑을 초치하는 한편 청신한 신인들도 픽업하여 강력한 멤버 편성을 한다는 점, 특히 종전과는 달리 극단측에 레퍼터리 선정과 멤버 편성에 자율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운영 시스템을 구상했기 때문이었다. 「새로 편제(編制)될 국립극장 전속극단」, ꡔ동아일보ꡕ, 1959.10.7.
두 전속극단의 구성원을 보면 신협은 이해랑 단장을 비롯하여 김동원, 김진규, 박암, 이예춘, 주선태, 최남현, 고선애, 도금봉, 문정숙, 석금성, 최은희, 황정순 등이고, 민극은 박진 단장에 김승호, 박노식, 서월영, 장동휘, 최무룡, 허장강, 노경희, 복혜숙, 이민자, 윤인자, 전옥, 주증녀, 조미령 등 연극계, 영화계, 방송계의 스타급이 거의 망라된 것이었다. 유민영, 「국립극단 50년을 돌아보며」, 18면.
이렇게 국립극장의 새로운 전속극단 ‘민극’과 ‘신협’ 속에 모이게 된 연극인들은 두 극단의 단장인 박진 이해랑 양씨의 명의로 다시 영화계와 기타 각 분야에 흩어진 연극인들에게 “모든 연극인들은 침체에 빠진 우리 연극계를 부흥소생케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연극인의 개인 대 개인, 국립극장 대 신협 등 종래의 소격(疏隔)을 일소하고 이 대열에 참가하기를 바란다”라는 호소문과 함께 입단 승락서를 돌렸고 그 뒤 이러한 취지에 호응하는 연극인들이 거의 백명에 가까워 드디어 12월 초순 전 연극인의 합동 공연이라고 볼 수 있는 ‘민극’과 ‘신협’의 합동공연을 갖기에 이르른 것이다. 「활기 띠울 연극계」, ꡔ조선일보ꡕ, 1959.11.18.
연극․영화․방송계를 망라한 당대의 최고 연기자들이 국립극장 산하에 집결하게 된 것은 국립극장의 전속극단이 2개의 단체로 거듭나면서 영화계 등 각 분야에 흩어진 연극인들에게 연극을 함께 살리자는 호소문과 입단 승락서를 보낸 노력이 맺은 결실이었다.
(나) 공연활동
신협과 민극 두 전속극단 체제로 출범한 후 첫 공연은 합동 공연으로 <대수양>(김동인 원작, 이광래 각색, 박진 연출)을 무대에 올렸다(1959.12.8~13). 그간의 연극의 침체를 연극계의 단합된 모습으로 부흥시킨다는 취지로, 출연진은 신협과 민극의 단원 외에도 영화계, 악극계 연기자까지 망라한 70여명이었다. 이 공연의 특색은 리얼한 장치 대신 반 상징적 장치의 회전무대로 신속한 장면 전환을 한 것과,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의식세계에서 갈등하는 표상 등을 구체적 행동으로 그려낸 점이었으나, 충분치 못한 연습기간과 신극, 악극, 신파극 연기가 혼합되어 연기자들끼리 호흡이 맞지 않아 결국 조야하고 밀도없는 공연에 그치고 말았다. 이진순, 「현대연극사」, 310~311면.
그러나 연극의 매력을 풍겨준 공연이고, 예술적인 성과는 미흡했으나 전에 없이 많은 관객 동원에 성공함으로써 잃어버린 관객을 찾으려는 목적은 달성”했다는 호의적인 평을 받았다. 「풍겨준 연극의 매력-두 국립극단의 <대수양>」, ꡔ조선일보ꡕ, 1959.12.19.
신협과 민극은 5.16군사혁명 후 국립극장이 문교부 산하에서 공보부로 이관되고, 1개의 극단으로 재조직되는 1961년 말까지 2년여 동안 모두 11편을 공연했다.
신협은 번역극 3편, 즉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테네시 윌리엄스 작, 이해랑 연출), <안네 프랑크 일기>(이해랑 연출) <죄와 벌>(박동근 연출)과 창작극 1편 <미풍>(하유상 작, 이해랑 연출)을 공연했다.
민극은 창작극만 3편을 공연했는데, <여인천하>(박종화 원작, 차범석 각색, 이진순 연출) <분노의 계절>(이종기 작, 이진순 연출), 공모 당선작<마을의 봉팔이>(이석청 작, 박진 연출)를 공연하였다.
이와 같이 신협은 주로 묵직한 번역극을 공연했고, 민극은 창작극을 주로 공연했던 것이다.
두 극단의 합동공연으로는 <대수양> <빌헬름 텔>(쉴러 작, 서항석 역, 연출), 반공극 <여당원>(鐵吾 작, 서항석 각색, 이진순 연출) <태양을 향하여>(차범석 작, 이광래 연출)의 4편이 무대에 올려졌다.
두 극단은 두세달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공연을 가졌고, 따라서 두 전속단체의 부지런한 공연으로 1960년 한 해에만 총 6회의 공연을 가짐으로써 한국연극을 2개의 국립극단이 이끌고 가는 듯한 형국이었다. 실제로 1960년대 들어 동인제 극단들이 등장하기까지는 국립극단의 독주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공연평들을 보면, 공연성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신협의 공연들이 비교적 호평을 받은 반면 민극의 공연들은 작품성이 미흡한 극본과 앙상블이 떨어지는 연기진과 과장된 연출과 연기, 대중에의 영합, 프롬프터를 사용하는 안이한 연극자세 등에서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면, <분노의 계절>은 ‘무감동한 무대’라는, 다음과 같은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극적인 구축력이 약한 각본과 함께 대중에의 영합만을 노린 과장된 연출은 부분적으로 관객을 웃길 뿐 변변한 주제의 제시도 그렇다고 원작자가 노렸다는 뚜렷한 인간상 하나 浮彫 못한 채 희극도 비극도 아닌 산만한 무대를 보여줄 뿐이다.
한편 각기 과장된 연기를 보이는 「앙상블」없는 연기진에선 白星姬가 견실한 연기를 보이고 있고 신인 金仁泰는 연기의 폭은 좁은 대로 好演인 편인데 항상 좋은 무대를 디자인하던 張鍾善의 장치는 입체감 없는 안이한 것이었다.
4월혁명을 소재로 한 연극을 상연한다는 명목상의 의의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개막한지 5일이나 지나도 「푸롬푸터」의 소리가 객석에 들리는 안이한 연극에의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 국립극단으로서의 권위를 지키는 길이 아닐는지…… 「무감동한 무대-국립극단의 <분노의 계절>」, ꡔ조선일보ꡕ, 1960.9.29.
그런가 하면, 두 극단의 합동공연도 주로 신극을 해온 신협의 연기진과 대중극, 영화, 방송 연기자로 구성된 민극의 서로 성향이 다른 연기자들의 연기스타일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실패했던 것이다. <대수양>의 경우, “사극이 지녀야 하는 품격이라든지 <앙상블>에서 오는 통일된 감명을 주지는 못했”으며, “각자의 연기의 질의 차이가 심했던 연기진” 「풍겨준 연극의 매력-두 국립극단의 <대수양>」, ꡔ조선일보ꡕ, 1959.12.19.
의 문제를 지적받았다. 4월 혁명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 선정한 번역극 <빌헬름 텔>은 총 출연인원이 100명이 넘는 군중극인데, 군중씬을 무난하게 처리했다는 평 이근삼, 「무리한 군중극의 처리」, ꡔ한국일보ꡕ, 1960.6.12.
도 받았으나, 출연진의 서로 이질적인 연기 스타일의 부조화로 공허한 인상을 주었다는 다음과 같은 혹평을 받기도 했다.
이 연극에선 성격이 제대로 浮彫된 등장인물은 한 사람도 없다. 다만 다수의 등장인물이 형성하는 통속적인 스펙타클이 있을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또 주제가 관객에게 공감을 줄 것이면서도 이 연극이 공허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인간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연기진에선 각기 질이 다른 연기가 극의 흐름에 융화됨이 없이 산만하고 범용한 성과만을 거두었는데 가장 두드러지게 거슬리는 연기자는 申英均이고 비교적 맡은 역에 충실한 것은 張民虎였다. 「연기진의 불균형-두 국립극단의 <빌헬름 텔> 공연」, ꡔ조선일보ꡕ, 1960.6.15.
이처럼 당시 공연평들로 미루어 보면, 연극, 영화, 방송 등 전 연예계 스타들이 한국연극 중흥이란 깃발 아래 국립극단에 집결하였으나, 이질적인 연기 스타일을 가진 연기자들이 모여 있어서, 그동안 민간극단으로 활동하면서 오랜 연극 공연의 전통을 쌓은 신협의 공연 외에는 민극 공연이나 합동공연은 그 예술적 성과가 매우 부실했음을 알 수 있다.
(다) 극단 운영 시스템
신협과 민극, 2개의 전속극단제로 새출발하는 국립극단의 새로워진 운영 시스템 중 가장 큰 특징은 예전의 국립극장의 관료적 태도를 지양하고 극단이 자주적이고 예술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극단측에 최대한의 자율권을 부여한다는 점이었다. 생활비에 미치지 못하는 출연료의 개선, 단원 뿐이 아닌 재야 연극인 캐스팅, 관료적 분위기 탈피, 레퍼토리 선정에 있어서의 자율성 확보 등이 보장된 것으로 거론되었다.
이번에 새출발하는 국립극단이 종전과 다른 점은 레퍼터리 선택과 멤버 편성을 전속극단장 책임 아래 전속극단 운영에 자율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전속극단의 예술활동 의욕을 북돋아줌으로써 흥행성과에도 일명(一名)을 거두어 보리라는 의도가 큰 주안점이며 출연료의 개선과 신극인들의 자주성을 미끼로 재야의 유능한 연기인들도 포섭할 것을 꾀하고 있다. 실상 이러한 동기가 나오게 된 것은 종전의 전속극단이 국립극장이라는 관료 분위기 속에서 그 자주성과 예술적인 창조활동이 억눌려 원만한 진행을 보지 못한 결함을 노정하였던 것이다. 그 가장 큰 폐단은 전속극단의 호흡과 맞지 않는 레퍼토리의 강요로써 나타났던 것이다. 「새로 편제(編制)될 국립극장 전속극단」, ꡔ동아일보ꡕ, 1959.10.7.
그러나, 실제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예술적 창조성을 고취하는 자율적인 분위기나 제도적 뒷받침은 실제로 마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술 전문가가 아닌 일반 행정 공무원이 극장장으로 임명되고 자주 교체되는데다 상급기관인 국립극장 운영 자체가 관료체제로 움직이고 실무를 맡은 공무원들이 국립극단을 우리나라 최고수준의 극단으로 육성하려는 예술 행정 마인드가 없이 ‘관립’ 기관 정도로만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신협과 민극의 두 전속극단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1960년은 4.19혁명이 일어난 해였고, 혁명의 여파로 연극계에도 커다란 변혁의 바람이 불었다. 4. 19혁명 두 달 후인 6월 22일에 ‘연극협의회’가 “연극인의 권익옹호와 연극 쇄신을 위하여 단합 결성” 「‘연극협의회’ 첫 공연-이용찬 작 <피는 밤에도 자지 않는다>」, ꡔ동아일보ꡕ, 1960.10.12.
되었고, 10월에는 4.19를 소재로 한 <피는 밤에도 자지 않는다>(이용찬 작, 박용구 연출)를 창립기념으로 공연했다. 이 연극협의회는 4. 19후의 사회 문화적 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국립극단만이 혁신과 개선의 자세가 부족하다며 국립극장 운영의 문제점을 표면화시켰다. 아울러 국립극장 두 전속극단의 일부 연기자들이 영화 출연에 바빠 공연 연습에 소홀한 점과 매너리즘에 빠진 연기를 비판하면서, 이런 집단에만 국가의 공연비 혜택을 주는 것은 모순이라며 자신들도 받아야겠다고 주장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이진순, 「현대연극사」, 311면.
이처럼 국립극단의 일부 연기자들이 안일하고 연습에 소홀하다는 비판을 받은 것은, 간부 몇명만 월급을 받았을 뿐, 단원들은 무보수로 공연 때마다 출연료를 받는 게 고작인 운영시스템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고정급여 대신, 공연에 따라 출연계약을 맺고 출연료를 받기 때문에 전속단원이라기보다는 프리 랜서 같은 관계였다. 따라서 그들은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영화출연에 더 신경을 썼고 연극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속 두 단체가 활기를 못 찾은 가장 큰 원인은 대부분의 극단원들이 무보수여서 공연에 열의가 없었다는 점과, 법령에 의한 전속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연을 가질 때마다 극장장이 두 극단 대표와 수의계약을 맺는 식의 불안정한 운영시스템 때문이었다. 유민영, 「국립극단 50년을 돌아보며」, 18면.
4월 혁명 이후 사회 각계에서는 혁명적인 변혁이 일어났으나 국립극장만은 구태의연한 관료적 운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자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평론가 오화섭은 국립극장의 문제점이 바로 공연비 이외의 지출이 더 많은 관료적 운영에 있다고 지적하고, 앞으로 모든 비용을 공연비와 전속극단원 대우에 중점적으로 배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프로듀서 시스템의 도입, 전속극단원의 고정 멤버제 및 급여제를 제안했다. 오화섭, 「국립극단은 이렇게 운영되어야 한다」, ꡔ경향신문ꡕ, 1960.8.15.
극작가 차범석도 두 개의 전속극단이 있음에도 예술적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는 국립극단의 운영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국립극단 강화책을 제시하였다. 첫째 전용극장의 확보, 둘째연극에만 전념하는 역량있는 무대배우의 확보, 셋째 창작위원회 설치를 통한 레퍼토리의 계획적 선정과 사전집필제 확립, 선정의 체계화 및 집필계약제, 넷째 보수 규정의 현실화 차범석, 「강화돼야 할 국립극장」, ꡔ조선일보ꡕ, 1960.11.8.
등 차범석이 제시한 방안은 국립극단을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정곡을 찌른 방안이었으나, 당시 우리나라 실정으로서는 금방 실현되기 힘든 이상론이었다.
(라) 신협과 민극 시기의 공과
국립극단이 두 전속단체 체제로 재출범할 때 처음엔 연극의 르네상스가 올 것처럼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출범 때의 자율적 운영과 고정급여 지급이라는 약속과는 달리 여전히 관료적 운영과 출연료 지급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공연수준은 그다지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먼저 공연 수준이 하락한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이질적 연기 스타일을 가진 연기자들의 집합체라는 점, 둘째 전속단원에게 고정급여 아닌 출연료 지급으로 인해 연극에 대한 열의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점, 셋째 프롬프터의 사용 등을 들 수 있다. 예컨대 4.19혁명을 그린 창작극 <분노의 계절>은 과장된 연기와 앙상블 없는 연기진, 프롬프터를 고용한 안이한 연극자세 등 때문에 국립극단으로서의 권위를 지키지 못한다 「무감동한 무대-국립극단의 <분노의 계절>」, ꡔ조선일보ꡕ, 1960.9.29.
는 혹평을 받았던 것이다.
신협과 민극은 구성원의 연기 스타일이 달라서, 정통 신극을 해온 신협이 주로 번역극을 공연하고 민극이 창작극 중심으로 공연하는 역할분담을 했다. 물론 백성희, 김동원, 장민호 등의 주연급 배우들은 신협이나 민극 공연을 막론하고 등장인물 성격에 따라 캐스팅되어 출연했다. 그런데, 연극 부흥의 화려한 기치를 내세운 대규모의 합동공연의 경우는, 정통 신극을 주로 해왔던 신협의 연기진과 상업극단, 악극, 영화계 등에서 활약해온 배우들이 많이 흡수된 민극의 연기진의 연기 스타일이 각각 달라 오히려 공연의 질이 더 떨어진 결과로 나타났다. 또 여전히 프롬프터를 고용하여 연습을 철저히 하지 않고 막을 올리는 안이한 연극태도를 보이는 폐습을 그대로 유지한 것도, 관객에게 ‘국립’극단의 이미지를 매우 좋지 않게 인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두 번째로, 운영시스템의 불합리를 살펴보면, 처음 출범 때의 약속과는 달리 단원들에게 고정급여가 아닌 출연료만을 지급했기 때문에 단원들이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영화 출연에 더 신경을 쓰는 등 연극에 대한 열의가 부족했다는 점, 그리고 극단 운영이 여전히 관료적이며 레퍼터리 선정 등에 자율성이 주어지지 않아서, 이를테면 국책 홍보 작품을 공연하는 사례로 나타났던 것이다. 예컨대 5.16군사혁명 직후엔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 「혁명공약」, <여당원>(1961.6.19~24) 공연 팜플렛.
로 삼는 군사혁명정부의 혁명공약에 따라 반공극 <女黨員>을 공연했는데, 이러한 “시국적인 편승”이 오히려 “한국연극의 본질적인 빈곤상” 이원경, 「1961년의 백서-연극」, ꡔ동아일보ꡕ, 1961.12.11.
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한국극예술연구 제12집
5. 제4기: 명동 국립극장의 ‘국립극단’ 시대 (1962.1~1973.7)
(가) 국립극장의 공보부 이관과 국립극단의 재발족
5.16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부는 1961년 11월 정부조직법을 개정하여 예술행정 사무를 문교부에서 공보부로 이관하였다. 그리고 소극장 원각사를 설치(1958)하는 등 공연예술에 대한 안목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던 오재경씨가 문공부장관으로 임명됨에 따라 국립극장의 획기적인 변혁이 시작되었다. 1961년 11월 7일에 시민회관이 개관하여 서울시가 옮겨 나가자, 그동안 시공관에 곁방살이해왔던 국립극장은 비로소 시공관을 전용 건물로 사용하게 되었고, 따라서 시공관은 국립극장이란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전속단체를 확대 조직해 나가기 시작하여, 기존의 극단 외에 국극단과 오페라단, 무용단을 창단했다. 또 국립극장(극장장 김창구)은 12월 1일부터 약 1억환의 예산을 들여 낙후한 시공관 건물 보수에 들어가, 오케스트라 복스를 신설한 깊고 넓은 회전식 무대, 최신 자동식 조명시설의 ‘국립극장의 체모’를 갖춘 극장으로 개축했다. 김창구, 「나와 국립극장 (11)」, ꡔ극장예술ꡕ, 1980년 4월호. 36면.
그리고 이어서 12월 30일자로 공보부 훈령 제 3호로 국립극장 전속극단 운영규정이 공포되었다.
제6조 (겸직 제한) 단장, 부단장 및 단원은 극장장의 허가 없이 타 연예물에 출연하거나 관여할 수 없다.
제7조 (신분 보장) 단장, 부단장 및 단원은 국립극장 전속단 소속원으로서의 신분보장을 받는다.
제8조 (출연료) 단장, 부단장 및 단원에게는 정규 출연료(출연을 위한 연구 및 실습료)와 실지 출연료를 지급한다.
새로 신설된 운영규정의 특색은 이전의 전속극단의 문제점을 대폭 개선한 점으로, 단원들이 연극에 전념할 수 있도록 법적․경제적 토대를 마련한 개선 규정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법령에 의한 전속극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분 보장이나 겸직 제한, 정기 급여 등의 조항이 없었다. 유민영, ꡔ한국극장사ꡕ, 200~201면.
그래서 공연 때마다 극장장이 신협이나 민극 등 극단 대표와 수의계약을 맺어 공연을 했으므로 계약단체와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립극장은 얼마 안 있어 예산부족을 이유로, 단원들에게 출연사례비 정도를 지급하기 시작했는데, 물론 이는 생활비에 못 미치는 액수였다. 이전엔 “타 연예물에 출연하거나 관여할 수 없다”는 조항이 없었으므로, 단원들이 영화나 TV 등에 출연하여 생활비를 벌곤 했었다. 그러나, 극장 측은 이번에 새로 신설된 ‘외부출연’ 금지조항을 들어 단원 재계약시 해임하곤 하여 빈번하게 마찰을 빚곤 했던 것이다.
1962년 1월에는 신협과 민극을 해산하고 한 개의 전속극단 체제로 새롭게 재편성되어, 1월 17일에 중앙공보관의 문화 살롱에서 ‘국립극단’ 결단식(結團式)을 가졌다. 단장에 박진, 부단장에 이해랑, 그리고 단원으로는 신협과 민극의 단원들과 영화배우 및 소극장 운동을 하던 추석양, 최명수, 최성진, 한은진 등을 영입한 총 20명으로 구성되었다.
새로 개축된 국립극장은 객석 1080석을 800석으로 줄여 무대를 전보다 1/3을 더 넓혔으며, 작품료도 종전의 25만원에서 최고 50만원으로 인상하여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연기자를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양성하여, 좋은 연기자를 국립극단으로 끌어오기 위해 각 대학의 연극과나 연극반 졸업생들 중심의 대학원급 부설 신인양성소를 설치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새로 출범한 국립극단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단원의 보수 문제였다. 출연수당이 따로 있긴 하지만 고정 급여가 겨우 4만 5천원 내지 8만원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50년대말부터 급부상한 영화판에 어떻게 우수한 연극인력을 뺏기지 않고 확보할 것인가 하는 점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것이다. 앞 글.
(다) 공연활동
① 대중성 지향
새롭게 발족한 국립극단은 “민족예술의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번역극보다는 창작극을 상연” 「국립극단의 갈 길」, ꡔ조선일보ꡕ, 1962.2.7.
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또 단장 박진은 국립극단이 지향할 연극을 ‘아카데믹’한 것과 ‘포퓰러’한 것의 조화라고 천명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극단이니만큼 대중이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연극을 지향하겠다는 발상이 보인다. 학구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연극, 즉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연극을 하겠다는 것이다.
국립극단의 초대 단장으로 선출된 박진씨의 포부를 들으면 국립극단은 앞으로 “어디까지나 아카데밐한 점이 중심이 되겠지만 이 극단이 국립이니 만큼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국민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대중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아카데밐」한 것과 「포퓰러」한 것을 함께 살려서 나갈” 방침이라고 국립극단의 성격과 운영방침을 이렇게 천명하였다.
그리고 부산 대전 전주 대구 등지의 지방에도 순회공연을 가질 것이라고 하는데 특히 이밖의 여러 지방에 국민계몽도 맡아서 순연을 하리라 한다.
이와같이 국립극단이 중앙에서 「아카데밐」한 純藝術에만 머물지 않고 국민계몽의 과제까지도 맡아가지고 나가겠다고 하는데 과연 「아카데밐」한 것과 국민계몽과의 너무나도 무거운 과제를 얼마만큼이나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해낼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다. (밑줄, 필자) 앞 글.
여기서, 국립극단이 지향할 연극을, 순수예술과 대중성이 조화되고 동시에 ‘국민계몽’의 과제도 구현해나가겠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주목된다. 어떻게 보면 서로 상충되는 3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것인데, 실제 공연 작품들을 보면, 이 3가지 성격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레퍼토리 선정에 고심한 흔적도 보게 된다. 개관기념공연작을 밝고 경쾌한 희극 <젊음의 찬가>로 청탁했다든지, <결혼중매> <베니스의 상인> <여성만세> <울어도 부끄럽지 않다> 등 희극과 브로드웨이 상업극들을 선정했다는 점이 그것을 말해준다.
사실 ‘아카데믹’과 ‘포퓰러’가 조화된 연극 추구는 박진 단장만의 생각이 아니었고, 당시 국립극장장의 포부가 또한 그러했다. 1963년 11월에 취임한 윤길구 극장장은 취임하자마자 “이제까지 극도로 상실해버린 관객을 되찾고 관객이 많은 국립극장을 만들기 위하여 새로운 낭만주의운동”을 일으키겠다며, 국립극단의 연극을 ‘웃으며 즐겁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세미클라식’한 방향 「국립극단 개편」, ꡔ조선일보ꡕ, 1963.11.30.
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그는 65년도에도 관객과 더 가까워지고 즐길 수 있는 연극으로 명랑한 희극을 선정하였다며, 거듭 “예술지상주의를 지양하고 실제적인 체험예술을 위주로 하는 감명적인 예술활동으로서 국립극장 본연의 사명을 꾿꾿이 직혀가려” 윤길구, 「인사의 말」, 국립극단 제39회 공연 <여성만세>(하유상 작, 이해랑 연출, 65.1.1~7) 팜플렛.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60년대 중반 이후에 가면, 국립극단의 공연은 ‘국민계몽의 과제’를 짙게 드러내는 목적극이 많이 공연된다. 실제로 이 공연들은 목적극이지, 예술성이나 대중성을 조화시킨 작품은 아니어서 관객의 외면을 받았던 것이다.
② 개관기념공연-<젊음의 찬가>
근 반년동안의 수리를 마치고 현대식 극장으로 면모를 일신한 국립극장은 1962년 3월 21일에 개관식을 가지고 22일부터는 국립극단, 무용단, 오페라단, 국극단 등 4개 전속단체의 공연이 한달동안 펼쳐지는 개관 예술제를 마련했다. 마침 드라마 센터도 국립극장 개관식과 비슷한 날짜인 3월 27일을 개관식 날짜로 잡고 있어서, 한국연극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듯한 분위기였다.
국립극단은 개관기념공연으로 이용찬의 <젊음의 찬가>(박진 연출)를 공연(제26회, 4.5~10일)했다. 원래 결단식 무렵에는 버나드 쇼의 <세인트 죤>을 공연하기로 하고 준비 「국립극장 재편성 완료」, ꡔ조선일보ꡕ, 1962.1.18.
하다가 국립극단의 목표가 민족예술의 창조, 곧 창작극 진흥이므로 창작극으로 바꾼 것이었다. 또 이 개관공연의 레퍼토리가 바뀐 것처럼 연출이나 연기자도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연출도 원래 이해랑에게 부탁했는데, 이해랑이 고사하다가 결국 드라마센터의 극장장으로 가버렸고, 구 신협 계열의 김동원, 장민호 등도 드라마센터로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김창구, 「나와 국립극장 (11)」, ꡔ극장예술ꡕ, 1980.4. 37면.
<젊음의 찬가>는 작품이 “발랄한 생명력과 애틋한 인간형을 7장이라는 무대 안에 재치있게 사건을 엮어가면서 경쾌하고 세련된 대사를 통하여 생동하는 젊은이의 발랄한 생태”를 잘 그려냈고 여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났으나 조명과 음악이 극을 살리지 못한 점 등 문제는 있으나 개관기념공연으로선 손색없는 연극이라는 비교적 좋은 평 김진수, 「대사의 묘를 얻어-국립극단 공연 <젊음의 찬가>」, ꡔ한국일보ꡕ, 1962.4.9.
을 받았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연출과 배우의 빈곤을 여지없이 드러냈다는 상반된 평을 받기도 했는데, 특히 “무대에서 들려온 [프롬프터]의 소리가 입증하듯이 이번 공연은 국립극단의 전진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연출과 배우 빈곤-<젊음의 찬가> 평」, ꡔ대한일보ꡕ, 1962.4.11.
는 공연평으로 알 수 있듯, 국립극단은 재발족한 후에도 여전히 프롬프터를 쓰는 안이한 연극활동을 했던 것이다.
③ 프롬프터 추방
국립극단의 고질적인 프롬프터 사용의 폐습은 명동국립극장 시대에도 개선되지 않고 종종 공연평에서 지적되곤 했다. 개관기념공연 <젊음의 찬가>를 위시해서, 제28회 공연 <沈鐘>(하우프트만 작, 서항석 역, 연출, 62년) 공연평에서도, “아무리 급한 시일이라 할지라도 初日에 [푸롬푸터]가 숨어있는 배우처럼 열연(?)하는 악습은 국립극단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추방할 수 없을까. 이 작은 개혁이 우리 연극에는 더 필요하다” 차범석, 「詩 없는 劇詩-국립극단 <沈鍾>공연」, ꡔ동아일보ꡕ, 1962.11.24.
라는 비판이 보인다. 실로 연기자 중심으로 구성된 국립극단이, 완벽한 연습이나 대사 외우기를 하지 않고 프롬프터를 사용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그러나 1962년말, 국립극단은 <침종>에 이은 29회 공연으로 창작극 <산불> (차범석 작, 이진순 연출)을 공연하면서 비로소 무대에서 완전히 프롬프터를 추방하는 쇄신을 단행했다. 이 극은 “국립극단 공연 때마다 유령처럼 따라 다니던 프롬프터를 완전히 추방했다는 사실이 반가왔으며, 또한 착실한 연습도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이근삼, 「이 해의 가장 큰 수확-국립극단의 <산불> 공연」, ꡔ한국일보ꡕ, 1962.12.29.
라는 지적과 함께, “밀도 짙은 연출, 짜임새있고 공이 든 장치, 연습도가 역연히 보이는 훌륭한 연기진”으로 해서 “이 해의 가장 큰 수확”이란 호평을 받았다. 사실 이 해의 국립극단은 연출가 이해랑, 배우 김동원, 황정순, 장민호 등이 탈퇴하여 드라마센터로 감으로써 내세울 배우라곤 백성희와 신인 나옥주 정도일 뿐으로 약체 연기진이란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김순철, 김금지, 백수련 등 국립극단 양성소 출신의 신인들이 합류하여 철저한 연습과 열연으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관객 동원면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었다. 이진순, 「현대연극사」, 313~314면.
이처럼 국립극단의 공연 때마다 연극평에서 비판받곤 하던 ‘프롬푸터’를 무대에서 완전히 추방한 것은 실로 연출가 이진순의 공로였다.
④ 창작극 위주의 공연
새롭게 개축한 명동 국립극장시대의 국립극단은 개관공연을 창작극 <젊음의 찬가>로 시작한 이래, 73년 장충동 신축극장으로 옮겨갈 때까지의 11년 동안 여전히 신인작가 발굴과 창작극 위주의 공연에 주력했다. 이것은 그동안 가진 40회 공연 중 창작극이 32편이고 번역극이 8편밖에 되지 않은 사실에서 입증된다. 또 창작극 32편 중 신인들의 당선작이 12편을 차지했는데, 이는 창작극 총 공연편수의 1/3에 육박한다.
번역극은 <침종> <결혼중매>(손톤 와일더 작, 이기하 연출), <세인트 존> (버나드 쇼 작, 이진순 연출) <베니스의 상인>(셰익스피어 작, 이진순 연출), <울어도 부끄럽지 않다>(제임스 리 작, 오사량 연출) <삼자매>(체홉 작, 이해랑 연출), <사계절의 사나이>(로보트 볼트 작, 이기하 연출), <인조인간>(차페크 작, 이해랑 연출), 단 8편만이 공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번역극의 경우, 레퍼토리 선정의 일관성이 보이지 않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선정한 듯 보인다.
국립극단이 공연한 창작극들은 가장 호평을 받은 차범석의 <산불> 외에, 이용찬의 <젊음의 찬가> <푸른 명맥>(박진 연출), 하유상의 <아리나의 승천>(박진 연출) <여성만세>(오사량 연출) <꽃상여>(이진순 연출), 이근삼의 <욕망>(최현민 연출), 김은국의 <순교자>(김기팔 각색, 허규 연출), 신명순의 <이순신>(이진순 연출) <북간도>(안수길 원작, 이해랑 연출), 김자림의 <이민선>(전세권 연출), 노경식의 <달집> (임영웅 연출) 등이었다.
이 작품들 중 <달집>은 “단순한 토속적 비극에 그치지 않고 그 어려움과 슬픔을 딛고 일어나서 끈질기게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을 부각”시킨 작품으로 백성희의 열연이 돋보인 극이라는 좋은 평 「토속적 비극 이겨낸 의지 부각」, ꡔ중앙일보ꡕ, 1971.9.13.
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대체로 각색극들은 <순교자> 외에는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신명순의 각색극 <한산섬 달 밝은 밤에>(이은상 원작, 이해랑 연출) <북간도> 등은 대형 사극으로 공연되었으나, 드라마적 구성이 부족한 줄거리 설명식의 구조로 인해 실패한 것이다.
각색물의 시도는 어느 때보다 작품 선택에 있어 야심적이고 큰 규모의 것을 시도했다. 이러한 기획은 순수 창작극의 부진을 메워주는 의미에서 권장할 성질일 것일 뿐만 아니라 각색이 창작보다 못하다는 편견을 시정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다만 금년의 경우 반성해야 할 점은 대작 각색주의의 야심이 반드시 성과를 비례해서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장편소설을 극화할 때 거의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줄거리 중심의 설명식 각색은 무의미하다. 소설의 묘미가 그대로 드라머의 묘미가 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을 필자는 <북간도>에서 느꼈다. 여석기, 「밝아진 창작극의 앞날」, ꡔ중앙일보ꡕ, 1968.11.9.
⑤ 신인 발굴
창작극 위주의 공연을 표방한 명동 국립극장 시기에는 신인 발굴에도 주력하여 모두 11명의 신인작가를 배출하였다. 신인발굴작들은, 송일남의 <동물원 가족>(박진 연출, 62년), 박만규의 <해풍>(이진순 연출, 63년), 천승세의 <만선>(최현민 연출, 64년), 이재현의 <바꼬지>(이진순 연출, 65년), 김병원의 <그 길고 지루한 여름>(박진 연출, 66년), 전진호의 <밤과 같이 높은 벽>(허규 연출, 67년), 윤조병의 <이끼낀 고향에 돌아오다>(서항석 연출, 67년), 오태석의 <환절기>(임영웅 연출, 68년), 김용락의 <동트는 새벽에 서다>(허규 연출, 68년), 정하연의 <환상살인>(임영웅 연출, 69년), 이일웅의 <손달씨의 하루>(허규 연출, 70년), 이재현의 <포로들>(5.16민족상 희곡 당선작, 이기하 연출, 72년)이었다.
거의 1년에 1편 꼴로 국립극장 현상 공모 당선작 혹은 타기관 공모 당선작을 공연했는데, 낙선작이라도 소재가 특이하다든지 가능성이 있는 작품은 공연을 했다. 예컨대 <해풍>은 국립극장 현상공모 낙선작이지만 소재가 토속적이라 해서 공연하여, “토착적인 리얼리즘에 새로운 가능성” 「리얼리티의 추구-국립극단 <해풍>」, ꡔ조선일보ꡕ, 1963.9.17.
을 보여주었다는 호평을 받았고, 이색적 소재의 <그 길고 지루한 여름>도 역시 국립극장 공모 낙선 발굴작이었다. 이처럼 낙선작 중에서도 가능성있는 작품을 선정하여 공연할 정도로 국립극단의 신인 발굴과 창작극 캐내기에 대한 강한 의지는 매우 상찬할 만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국립극단을 통해 데뷔한 신인 극작가 천승세, 이재현, 윤조병, 오태석, 정하연 등은 증견 작가로 자라남으로써, 국립극단의 신인 캐내기 작업은 퍽 의미있는 공헌을 한 셈이었다.
신인 작품 중 <만선> <바꼬지>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 <환절기> <환상살인> <포로들> 등이 호평을 받았다.
<만선>은 그때까지 국립극장이 발굴한 공모 창작극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가난한 어부 곰치 일가의 바다에 대한 끈덕진 집념을 차분하게 잘 그”렸으나 관객이 들지 않아 객석은 한산한 ‘외로운 성공작’ 「외로운 성공작-국립극단의 <만선>」, ꡔ한국일보ꡕ, 1964.7.5.
이었다. 그런데, <만선> 공연과 관련하여, 여석기의 다음과 같은 평은 국립극단에 관객이 들지 않는 이유를 설득력있게 풀이하고 있어서 관심을 모은다.
「만선」의 경우는 관객이 통 모이지 않았는데 「무지개」는 정반대의 현상을 이루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단적으로 말하여 신협의 매력은 그 「스타․벨류」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다.
「스타․벨류」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소견은 오히려 앞으로의 한국연극이 좀더 「스타」를 육성하는 데 주력해야 된다는 것이고 배우의 매력 없이 관객이 왜 극장엘 오겠느냔 말이다. 지금 우리 연극은 솔직하게 말해서 통속적 「쇼」의 「코메디언」만한 또는 인기가수만한 인기배우가 없다. 그러니까 신협 공연에 나열되는, 대체로 영화에서 이름을 올린 [스타]들에게 대중이 몰려드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략)
국립극단의 배우들은 (비단 여기 뿐 아니라 대개의 한국연극배우들은) 좀더 「스타」적 존재가 되도록 애쓸 필요가 있고 「스타」가 모인 신협은 그들에게 국립극단 만큼이라도 꼼꼼하게 役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겠다. 여석기, 「7월의 연쇄공연이 남긴 뜻」, ꡔ한국일보ꡕ, 1964.7.28.
비슷한 시기에 막을 올린 신협의 <무지개>는 작품이나 연기력은 좋지 않았으나 영화계의 스타들, 즉 김승호, 황정순, 주선태, 김동훈, 김동원, 오현주, 김성원, 조미령, 방수일, 최남현, 박암 등의 호화배역으로 관객 동원에 성공했으나, 여석기, 「정석적이나 심심찮은 무대-신협 공연 <무지개>」, ꡔ조선일보ꡕ, 1964.7.15.
국립극단의 <만선>은 뛰어난 희곡에, 백성희․김성옥 등이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음에도 특히 ‘구포댁’으로 분한 백성희의 연기는 “어딘지 짙은 슬픔에 싸인 黑人 靈歌를 들려주는 것 같은 깊은 슬픔을 잘 표현해내고 있어 압권이다. 흑인영가가 역사 깊게 뿌리박은 흑인의 슬픔 속에서 우러나온 노래라면 백성희에게는 그런 흑인영가처럼 風浪과 고약한 船主라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두 개의 굴레 속에서 항상 가난해야 하는 어부의 깊은 슬픔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라는 인상적인 호평을 받았다.
「처참한 어부생활-국립극단 제37회 공연 <만선>」, ꡔ대한일보ꡕ, 1964.7.7.
관객을 끌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는 여석기의 지적대로, 국립극단이 뛰어난 연기진에도 불구하고 스타 이미지를 만들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었다.
국립극단의 발굴작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오태석의 <환절기>는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란 평을 받으면서 창작극의 앞날을 밝게 전망하게 하는 징표가 되었고, 국립극단의 신인 발굴능력은 연극계에 대한 커다란 공헌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한국연극에 주어진 중요한 숙제의 하나가 창작극의 진작과 새로운 극작가의 발견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신인작가의 대거 진출은 근년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중에서 작품 가지고 흠을 잡을 데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환절기> 뿐이다. 다른 작품들은 모두 어딘가 구성이 허약하거나 주제의 추구가 희미한데 비해 이 작품은 젊은 부부 사이의 애정의 위기를 심리의 좌표위에 설정하는 데 매우 적확하게 계산해놓고 있다. 그리고 대사가 싱싱하고 함축적이어서 어느 기성의 아류같은 인상도 주지 않는다. 여석기, 「밝아진 창작극의 앞날」, ꡔ중앙일보ꡕ, 1968.11.9.
⑥ 목적극 공연
국립극단은 1966년부터는 민족의식이나 반공, 애국심, 새마을정신 등 ‘국민계몽의 과제’가 선연히 드러나는 목적극 성격의 작품들, 즉 <이순신> <이끼낀 고향에 돌아오다> <북간도> <동트는 새벽에 서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원술랑> <신라인> <포로들> <송학정> 등을 공연했다. 이 작품들은 국책에 부응한 주제의식을 앞세우다 보니 살아있는 인물창조와 육화된 생활이 그려지지 않아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따라서 대중성은커녕 관객의 외면을 받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실제로 국립극단 50년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은 예술 창조의 자율성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었다. 관립 예술단체를 국책 홍보기관 정도로 인식하는 정부 당국의 문화예술정책 때문에 종종 정부 시책의 홍보용 연극을 공연하는 ‘정부의 시녀’ 같은 역할을 떠맡았고, 그 때문에 관객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후, 국립극단은 정부의 문화정책이나 국책을 홍보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떠맡았다. 김창구 극장장은 <송학정> 공연에 부쳐, 앞으로의 국립극단의 공연 방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박대통령각하의 10월 유신의 제창으로 새로운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이제 전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참여 속에 우리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한 유신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략) 작품 「송학정」은 5.16민족상 희곡부문 공모에서 「포로들」로 당선된 이재현씨의 역작으로, 지금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과거에 얽매인 마을사람들을 설득하여 유신과업에 앞장서는 시대에 알맞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국립극단은 레퍼터리 선정에서 언제나 창작극 위주로 한국연극 발전에 이바지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앞으로도 이 기본 방침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창구, 「뜻깊은 한해를 보내며」, <송학정> 팜플렛.
1960년대 말부터 <한산섬 달밝은 밤에>, <원술랑>, <신라인>(김경옥 작, 이진순 연출, 71년) 등 국난 극복의 위인 충무공이나 원술랑,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춘추와 김유신 같은 영웅을 그린 계몽사극으로 민족주의적 애국심을 고취하더니, 유신이 발포된 이후엔 국책에 발맞춰 <송학정>(이재현 작, 이기하 연출) 같은 본격적인 목적극인 새마을극을 공연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 극단 운영과 문제점
국립극장은 화려한 개관기념공연이 끝난 다음 바로 개장 휴업상태에 돌입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예산도 뒷받침되지 않은 채 주먹구구식으로 서둘러 전속단체들을 창단했기 때문이었다. 예산문제로 단원들의 고정보수를 지급하지 못하였고, 처음 계획과는 달리 각 산하단체들의 연간 공연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추석 앞두고 활발한 기획-국립극장의 하반기 계획」, ꡔ조선일보ꡕ, 1962.8.7.
오페라단, 무용단, 국극단 등 3개 단체의 단원들에겐 월정 보수도 지급하지 못했고, 4개의 전속단체 중 유일한 월급제인 국립극단에게도 예산부족으로 그마저 중단해야 할 처지기 되었고, 예산을 개관공연에 과용하여 예산 부족으로 결국 상반기 공연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하반기에 이르러서 국립극장은 새로운 예산의 뒷받침을 받아 본격적인 공연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국립극단의 명동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962년은 국립극장의 개축과 함께 드라마센터의 개관, 동인제 극단들의 활발한 공연으로 연극 부흥의 큰 기대를 모은 한 해였다. 그러나, 드라마센터는 곧 재정난으로 임시 휴관에 들어갔다. 어쨌든 1962년은 지금까지의 국립극단의 독주 시대가 지나가고 드라마센터를 비롯, 동인제 극단들의 대두로 다양한 연극 실험의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해였다. 이 해의 공연회수를 보면, 국립극단이 5회, 드라마센터 공연이 6회, 실험극 및 학생극 등이 20회에 달하여 도합 40회가 넘는 기록적인 공연회수를 가졌던 것이다. 「연극계, 풍성했던 한 해」, ꡔ조선일보ꡕ, 1962.12.13.
국립극단은 제33회 공연 <해풍> 공연을 마친 직후 체질 개선을 위해 기존의 극단을 해체하고, 11월 28일자로 중견 10명 내외로 새로이 극단을 재조직했다. 당시 신문보도들은 해체와 재조직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국립극단은 발족 당시 단원들에게 출연료와 함께 월급을 지급하였는데 어느새 월급은 없어지고 단원들 역시 딴 극단에 관계하는 등 전속 아닌 전속제를 실시하여 왔다. 새로 전속될 연기인은 종전과는 달리 1년 기한이 될 것이며 대우도 개선할 것이라 하는데 그 윤곽은 12월 중순에 있을 <중매장이>(손톤 와일더 원작, 오화섭 역, 이기하 연출) 공연에서 밝혀질 것 같다. 「국립극단 해산」, ꡔ한국일보ꡕ, 1963.11.29.
중앙방송국장으로부터 국립극장장에 갓 취임한 尹吉九씨는 과거의 국립극단이 정실관계에 얽혀서 국립연극의 권위와 예술성을 저하시켰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현대감각에 의한 연극의 조류를 조성시키기 위하여 해산조치를 단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해산과 동일자로 새로운 단원들의 의촉장을 발송하였다.
이번에 새로 위촉된 단원은 다음과 같다.
▲단장=박진(留) ▲단원=변기종(留) 최명수(〃) 최상현(新) 김동훈(〃) 김성옥(〃) 김인태(〃) 김순철(〃) 백성희(留) 나옥주(〃) 정애란(〃) 진랑(〃) 「국립극단 개편」, ꡔ조선일보ꡕ, 1963.11.30.
1963년 말에 새로 단행한 국립극단 개편의 특성은 젊은 연기자들을 주로 위촉해서 고루한 극단의 이미지를 쇄신하려고 한 점이었다. 젊은 연기자를 주축으로 개편된 국립극단이 역시 젊은 연출가 이기하의 연출로 공연한 희극 <결혼중매>는 “젊음이 약동하는 무대” 김정옥, 「젊음이 약동하는 무대-국립극장의 <결혼중매>」, ꡔ동아일보ꡕ, 1963.12.27.
혹은 “근래에 드물게 무대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준 이번 공연의 공은 지루하지 않게 극을 이끌어나간 연출(이기하)과 골고루 잘한 연기진과 그리고 거의 일품이라 할 수 있는 장치” 여석기, 「에누리없는 즐거운 무대-국립극단 공연 <결혼중매>」, ꡔ한국일보ꡕ, 1963. 12.26.
에 있다는 호평을 받았던 것이다.
국립극단은 대체로 2년에 1번씩 개편을 했다. 그래서, 1965년 2월 들어 국립극장은 또다시 4개의 전속단체 중 극단, 무용단, 국극단의 개편을 단행했다. 이번 개편으로 국립극단의 단원은 종전의 11명에서 13명으로 보강됐다. 2월 12일에 결단식을 가진 국립극단의 진용은 단장에 변기종, 부단장에 백성희, 단원으로 김인태, 이진수, 윤계영, 박근형, 강효실, 노경자, 김금지, 백수련, 여운계, 박수현, 김신자였다.
그러나, 1966년 초에는 국립극장의 전속단체들의 예술 활동은 국립극장이 내놓은 예산의 대폭 삭감으로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ꡔ동아일보ꡕ는 사설에서, 예술 지원에 철학과 의지가 없는 정치인과 국립극장 운영위원들을 비판하면서, “이런 판국에 대중흥행이나 해서 수지를 맞추라는 엉터리없는 사고방식은 도시 국립극장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두뇌들이 아닐 수 없고, 실질적으로 국립극장은 없어지라는 소리와 마찬가지다. 대중흥행이나 하는 국립극장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진순, 「현대연극사」, 316면.
라고 했다. 이런 여론 덕분에 추경예산에서 삭감분이 다시 복귀되었다. 그러나 예산 삭감 소동과 수지를 맞추라는 압력이 있었던 탓으로 국립극단의 66년 한 해 활동은 무척 부진한 편이었다. 한편, 1966년에는 극단 광장, 자유극장, 여인극장 등이 창단되어, 그야말로 연극계는 본격적인 동인제 극단의 활동시대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국립극단의 영향력이나 연극계의 대표적 위상도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966년 12월에는 국립극단도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개편과 쇄신방침을 밝혔고, 이에 맞추어 연극인들도 국립극단 운영의 문제점에 관해 의견을 개진했다. 가장 많이 거론한 문제점은, 월급제로 쇄신하여 단원의 생활 보장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국립극장에 바란다」, ꡔ서울신문ꡕ, 1966.12.13.
그외에도 한 신문은 국립극단의 문제점을 안이한 레퍼터리 선정이라고 꼬집으면서, “창작극을 물색하다가 기왕의 번역극을 택한다든가 하는 식의 임시변통” 「66년을 되돌아보며 다시 생각해 볼 일들-연극의 양과 질」, ꡔ동아일보ꡕ, 1966.12.20.
을 지적하기도 했다.
“오랜 침체와 의욕 상실 속에서 허기진 연극공연만을 정기행사처럼 거듭해오던” 「새해 막 올린 제작실-국립극단의 <三姉妹>」, ꡔ한국일보ꡕ, 1967.1.10.
국립극단은 66년 말 새롭게 개편을 했다. 단장 장민호를 비롯하여, 변기종 백성희 정애란 나옥주 김성옥 등 6명으로 진용이 짜여졌는데, 이들은 여전히 고정월급이 아닌 출연료를 받았다.
단장으로 취임한 장민호는 인터뷰에서, 전문 지식 없는 관리에 의해 기획되는 국립극단 운영에 대해 저항감을 토로하며, 모든 연극공연을 연기자들과 협의해서 하겠노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앞 글.
실제로 국립극장이 공보부로 이관된 62년부터 63년까지의 만 2년 동안 김창구, 이용상, 김득성, 김진영, 황기오, 윤길구 등 6명의 공무원이 극장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그후에도 6개월 혹은 1, 2년 간격으로 극장장 교체가 빈번해서 “마치 열차시간을 기다리는 대합실 같은 인상”을 주는 한 연극의 발전은 바랄 수 없다“ 차범석은 “국립극장은 예술가들에 의한 예술가를 위한 실질적인 문화 전당으로 육성시켜야 한다. 1년 동안에 세 사람의 극장장을 경질시켰고 그 직이 마치 열차시간을 기다리는 대합실 같은 인상을 주는 한 연극의 발전은 바랄 수 없다.”고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차범석, 「국립극장을 예술전당으로」, ꡔ서울신문ꡕ, 1963.5.16.
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사실, 빈번한 극장장 교체는 곧 정부의 예술정책과 국립극장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정부는 예술전문가를 극장장으로 임명하여 ‘민족예술 창조의 산실’로서의 국립극단을 세계적 수준으로 육성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이, 문화예술에 문외한인 관료들을 잠시 스쳐지나가는 자리라는 식으로 발령내는 관행을 이어왔던 것이다. 새로 부임한 극장장들은 공연방침을 새롭게 구상하곤 하여, 국립극단의 공연활동은 1년 혹은 그 이상의 사전 기획이 아닌 즉흥적 임시변통적 레퍼토리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것이 국립극단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1969년 2월에 열린 ‘제2회 연극인대회’에서 연극협회의 집계를 토대로 연극계의 상황을 밝힌 기록은 국립극단의 제작과 운영 실태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기사에 의하면, 대체로 한 극단이 한 공연에 들이는 제작비는 40 ~50만선인데, 국가 재정의 뒷받침을 받는 국립극단의 경우엔 1회 공연에 약 100만원 정도 투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작품, 연출, 연기 등에 사례라는 명목으로 약 절반이 지출되고 나머지 절반이 실질적인 제작비에 투입되므로 무대의 초라함을 면치 못하고, 연기자 사례도 주연급이 한번 공연에 약 35,000원 정도 받는다는 것이다. 40일 연습에 15회 공연의 대가가 이 정도이므로, 출연료라기보다는 ‘사례’라고 하는 게 적당하다는 것이다. 「한국예술의 영토-전환기의 劇壇」, ꡔ한국일보ꡕ, 1969.3.4.
이와 같이, 국가재정으로 운영되는 국립극단은 단원들에게 약간의 출연료를 지급한다는 점 외에는 제작비는 일반 극단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이처럼 제도적, 재정적 뒷받침이 탄탄하지 못하니 국립극단이란 이름에 걸맞는 수준높은 무대를 보여주긴 힘들었던 것이다.
국립극장은 1969년 중반부터는 대관 위주 운영방침으로 선회했다. 왜냐하면, 명동 국립극장을 매각하고 장충동에 새 극장이 지어지는 대로 이전을 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정부는 1967년도에 이미 장충동에 새 극장 착공에 들어가 71년 준공을 목표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명동 국립극장을 팔려고 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1970년 초까지 팔려고 내놓은 국립극장이 입찰에 계속 실패한데다 무대예술계의 반발이 거세자 당분간 매각하지 않기로 하고 부분적으로 개수를 하고 대관 위주로 운영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유민영, ꡔ한국극장사ꡕ, 174~175면.
국립극단은 1970년 들어, 신축 극장으로의 이전을 염두에 두고 전속단원을 대폭 보강했다. 단장 장민호를 위시해서, 백성희, 박암, 정애란, 변기종, 문정숙, 김성원, 최불암, 윤계영, 이치우, 민승원, 김금지, 김무영, 이신재, 지연주 등이었다.
또 이 해는 국립극장 설립 20주년이 되는 해인데, 당시 한 신문은 국립극장과 전속단체 운영의 문제점 및 국립극단의 공연이 부실한 이유로, 자체 공연보다는 대관에만 치중하는 국립극장 운영방침, 공연제작비 및 인건비의 심각한 예산 부족, 극장장을 비롯한 극장 관료들의 예술에 대한 몰이해를 꼽고 있다. 국립극장의 전체 예산이 한 전속단체의 공연비에도 부족한 액수인데다 거기서 인건비까지 지출하는 턱없는 제작비 부족 외에도,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고정급 지급이 결국 공연내용의 부실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예술에 소양 있는 인사에 의한 장기적 운영이 아닌, 극장장의 잦은 교체와 극장 경영 마인드나 예술 소양이 부족한 관료적 체제가 침체와 부실을 낳는 요인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국립극장 스무돌」, ꡔ동아일보ꡕ, 1970.4.4.
1972년에 들어서 국립극단은 1973년에 완공될 신축 국립극장의 개관에 대비한 단원 보강의 개편을 했다. 백성희 단장 체제로 일신하여, 명예단장 변기종, 단원에 장민호, 정애란, 강계식, 고설봉, 이기홍, 민승원, 신구, 손숙, 이진수, 권성덕의 진용이었다. 이 개편의 특성에 대해 김창구 극장장은 “연극을 지키려는 자세의 단원”으로 선정하였다고 했는데, 실제로 TV에 출연하는 단원들을 해임하고 “무대를 위해서만 연기”하는 연극인만을 단원으로 위촉한 것이었다. 또 전속 연출가를 두지 않았던 국립극단이 그동안 국립극단만의 색깔이 없었다는 비판을 수용, 연출가 이기하를 전속연출가로 선임했다. 그리고, “3월부터는 최창봉 중앙방송국장의 호의로 오랜 숙원이던 KBS-TV에 국립극단 아워” 김창구, 「1972년도 국립극장의 문을 열면서」, <환상여행> 팜플렛.
를 마련하는 시도를 해보기도 했으나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는 바로 국립극단이 영화나 텔리비전으로 연기자들이 이탈하고, 관객의 관심이 영상예술에 쏠리는 현상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는 방증인 것이다.
(라) 이 시기 국립극단의 공과
국립극단은 이 시기에, 창설 초기부터 꾸준히 행해오고 있는 장막극 현상공모를 통해 많은 신인작가들을 발굴했다. 그리고 이 제도는 연극계에서 거의 유일한 신인 극작가 등용문으로 자리잡았으며, 오태석, 윤조병, 이재현 등 훌륭한 극작가들을 발굴해냄으로써 창작극 진흥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신인 창작극 위주의 공연활동은 국립극단 연극이 작품성이 떨어지는, 마치 신인들의 워크숍 공연 같은 인상을 결과적으로 만들어냈다. 국립극단의 연극이라면 레퍼토리나 연출, 연기, 무대미술 등 모든 면에서 가장 품격있는 완성도를 담보해야 하는데, 창작극 발굴이라는 명분에만 매달린 결과 극본 자체가 미숙한 공연들을 양산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국립극단은 관객 동원을 목표로 대중극 쪽으로 방향을 선회해 상업극을 공연하기도 하는 국립답지 않은 혼선을 보이기도 했다. <만선>이나 <순교자> 같이 작품성이 뛰어난 공연을 해도 통 관객이 들지 않자 국립극단은 “전통적인 연극의 대중화” 「리허설 한창인 <여성만세>」, ꡔ대한일보ꡕ, 1964.12.28.
로 방향을 잡아, <여성만세> 같은 가벼운 희극이라든지, 배우가 꿈이었던 레스토랑 웨이터의 삶을 그린 브로드웨이 상업극 <울어도 부끄럽지 않다> 등을 공연했다. 그러나 여전히 관객은 적었고, 이런 지나친 대중화 경향에 대해 비판만 받는 결과를 자아내기도 했다. 즉 한마디로 국립극단은 뚜렷한 지향목표를 지니지 못하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젊은 연극’이니, ‘세미 클라식’이니 ‘웃으며 즐겁게’ 등의 목표를 만들어내어 공연하는 등, 엄격한 예술적 기준과 국립극단의 품격과 비전에 따른 레퍼터리 선정기준을 갖지 못하고 공연해왔던 것이다.
또 국가의 재정으로 운영하는 국립극단이면서도 정부의 문화정책이 협량하여, 정부시책에 따른 홍보용 연극에 동원하여 국립극단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관객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만든 점이다.
더욱이 극단의 관료적 운영, 민간극단과 별 차이없는 제작비, 생활비가 안되는 적은 보수 지급 등의 운영 실태 때문에, 국립극단이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으로 뿌리를 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1965년도에 나온 다음과 같은 평은 시사하는 바가 크며, 이는 명동국립극장 시대를 통털어 해당되는 문제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一國의 국립극단 단원이라면 모든 배우들의 동경의 대상이라야 할텐데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임시찬조출연 같은 인상을 벗어나지 못하니 누구의 책임일까? 한국의 현실이자 극계의 현실이 그렇다 하겠지만 좀더 창의성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숙제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레퍼터리 선정이 어떤 과정을 밟아 이루어지는지는 몰라도 국립극단의 사명이나 성격을 생각한다면 좀더 신중히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기획성의 발로가 아쉽다는 것이다. 차범석, 「<울어도 부끄럽지 않다> 레퍼터리 선정부터 재고를」, ꡔ서울신문ꡕ, 1965.4.8.
6.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2000년 4월로 창단 50주년을 맞은 국립극단은 그동안 명칭이 여러 번 바뀌기도 했고, 존폐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으나, 그래도 한국 현대연극의 대표적 위치를 지키며 많은 활동을 해왔다.
본고에서 대상으로 삼은, 창단부터 명동 국립극장 시기의 국립극단의 연극사적 역할과 의의 및 공과를 몇 가지 정리해 보면. 첫째로 창작극 위주의 공연활동과 신인발굴을 들 수 있다. 국립극단은 창단 이후 명동시대까지 23년 동안, 정기공연만 65회, 총 67편의 공연을 가졌다. 그런데 이중 창작극이 49편, 번역극이 18편으로, 창작극이 총 공연편수의 약 73%를 차지한다. 이로써 창작극 위주의 공연활동을 벌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창작극 49편 중 신인 발굴작이 18편에 이르는데, 이는 거의 1/3에 육박하는 숫자이다. 이와같이 국립극단은 1957년부터 현상희곡공모제도를 통해 신인작가를 발굴하고, 또 다른 신문사의 당선작이나 신인작가의 작품들을 초연하여 창작극 진흥에 주력했던 것이다. 국립극장과 국립극단이 오늘날까지 시행하고 있는 희곡현상공모제도는 그동안 하유상, 이용찬, 윤조병, 이재현, 오태석, 정하연 등 많은 우수한 극작가를 발굴해냄으로써 우리 연극계에서 신인작가 발굴의 대표적 통로인 동시에 우리 창작극의 저변을 넓힌 기획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기획 때문에 최상의 공연수준을 표방해야 할 국립극단의 공연은 마치 신인들의 워크숍 공연같은 인상으로 관객에게 굳어지고 관객이 외면하는 부정적 결과라는 아이러니가 유발되기도 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연기 측면을 살펴보면, 국립극단은 최고의 배우들로 구성된 연기자 중심의 극단답지 않게 프롬프터를 줄곧 사용하여 빈축을 샀으나, <산불>(1962년 12월 공연) 공연 때부터 연출자 이진순이 프롬프터를 완전히 추방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세번째로 국립극단의 운영을 살펴보면, 명목상의 급여제일 뿐, 출연료만을 지급했기 때문에 단원들이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영화 출연에 더 신경을 쓰는 등 연극에 대한 열의가 부족했다는 점, 관료적 극단 운영, 민간극단과 별 차이 없는 제작비, 레퍼터리 선정 등에 자율성이 주어지지 않아서, 반공극이나 새마을극 등 국책 홍보 작품을 공연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이처럼 자율성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레퍼토리 선정기준이나 사전기획제도, 확실한 지향목표 등 한나라의 국립극단으로서 필수불가결한 예술 창조 방향과 시스템을 정립하지 못햇으며, 빈번하게 바뀌는 공무원 극장장의 ‘한 건 주의’적인 방침이나 극단 내부의 즉흥적인 방침에 따라 충분한 연극적 역량을 발휘하지도, 국립에 합당한 최고수준의 공연성과를 축적하지 못했던 것이다.
네 번째로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는 극단이라, 민간극단과는 달리 적극적인 관객 유치 전략이나 공연작품 선정에 소홀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치게 관객 동원에 신경을 써서 ‘세미 클라식’ 혹은 대중극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등 국립극단의 격에 맞지 않은 대중성 지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단적으로 국립극단이 지향해야 할 엄격한 예술적 수준과 방향성과 비전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섯번째로는 정부의 국립극단에 대한 문화정책은 국립극단을 한국을 대표하는 극단으로 육성하는 플러스정책을 편 게 아니라 때문에 국책 홍보용 기관으로 이용하는 등 마이너스정책을 편 때문에 국립극단의 이미지가 실추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장충동 국립극장 시대는 이러한 단점을 개선하는 노력이 순차적으로 펼쳐진다. 급여제로의 전환, 공연수준을 높이기 위한 해외연극의 교류, 사전기획제도, 레퍼토리 선정기준의 확립, 사전집필제를 통한 우수 창작극 발굴, 창작극의 고정레퍼토리화 등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졌고, 극단의 자율성 강화 및 단장과 예술감독의 이원체제로 나아가는 변모를 보이게 된다. 앞으로, 장충동 국립극장시대의 국립극단에 대한 논의, 그리고 국립극단 50년간의 레퍼토리 연구는 후속 논문으로 미룬다.
참고 문헌
1. 기본자료
ꡔ조선일보ꡕ
ꡔ동아일보ꡕ
ꡔ한국일보ꡕ
ꡔ경향신문ꡕ
ꡔ서울신문ꡕ
ꡔ중앙일보ꡕ
ꡔ대한일보ꡕ
국립극단 공연 팜플렛
A Study on 'The National Drama Company'
-Focused on Their Establishment and Myong-dong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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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Sung-hee
The National Drama Company was the only arm of the National Theater that was established simultaneously with the theater, among its various accompaniments. The company which was established in April 1950 has been engaged in numerous performances for the last half a century. This study reviewed its activities for the period (from April 1950 to August 1973) until the National Theater moved from Myong-dong to Jangchung-dong.
The backgrounds and activities of the National Drama Company founded to promote the cause national art can be reviewed in five eras: (1) era of 'Shinheup(신협) from April 1950 to June 1957; (2) era of 'National Drama Company' from June 1957 to May 1959; (3) era of 'Shinheup(신협)' and 'Minggeuk(민극)‘ from October 1959 to December 1961; (4) era of Myong-dong 'National Drama Company' from January 1962 to July 1973; (5) era of Jangchung-dong 'National Drama Company' from August 1973 to present.
Until its Jangchung-dong era, the 'National Drama Company' had been engaged in the performances centered about Korean dramas for about 23 years, and particularly, endeavored to find new playwrights. The 49 Korean dramas accounted for about 73% of its total 67 dramas, which proves that the company had contributed greatly to development of nation's modern Korean drama art. On the other hand, it is a regret that the National Drama Company who were obliged to perform nation's highest-quality dramas had worked like an workshop for new playwrights or immature drama laboratory.
When the operation of the National Drama Company was reviewed, it was found that members of the company were paid regularly but intermittently and therefore, were not assured of their living cost. Moreover, there were found various problems such as bureaucratic management, poor budget and lower-quality performance thereof, impromptu selection of repertory.
Besides, the National Drama Company depended too much on the financial subsidies from the government, neglecting positive marketing or planning for audience, and in some cases, complied with the request from the government to produce propaganda dramas. Hence, the National Drama Company was little autonomous in its planning, much less representing nation's qualit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