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태종실록]
3. 태종의 가족들
태종은 총 12명의 부인과 2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정비 원경왕후 민씨가 4남 4녀를, 효빈
김씨 1남, 신빈 신씨 3남 6녀, 선빈 안씨 1남, 의빈 권씨 1녀, 소빈 노씨가 1녀를 두었다. 또한
숙의 최씨가 1남을, 안씨 1남 2녀, 최씨 1남, 김씨 1녀, 이씨 1녀, 다른 후궁이 1녀를 두었다.
< 제3대 태종 가계도 >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방원, 정안대군)은, 1367년에 태어나 1422년에 세상을 떴다. 재위
기간은 1400년 11월부터 1418년 8월까지로 17년 10개월간이다. 아래에 태종의 가계도를 약술한다.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의 제3대 왕이 되었으며, 부인 12명에게서
12남 17녀의 자녀를 두었다.
원경왕후 민씨에게서 4남 4녀를 두었는데, 양녕대군, 효령대군,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충녕대군), 성녕대군,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가 그들이다.
효빈 김씨에게서 1남 경녕군을 두었으며, 신빈 신씨에게서 성녕군, 온녕군, 근녕군, 정신옹주,
정정옹주, 숙정옹주, 숙녕옹주, 숙경옹주, 숙근옹주 등 3남 6녀를 두었다.
또한 선빈 안씨에게서 1남 익녕군을, 의빈 권씨에게서 1녀 정혜옹주를, 소빈 노씨에게서 1녀 숙혜옹주를,
숙의 최씨에게서 1남 희령군을 두었으며,
안씨에게서 혜령군, 소숙옹주, 경신옹주 등 1남 2녀를,
최씨에게서 1남 후령군을,
김씨에게서 1녀 숙안옹주를,
이씨에게서 1녀 숙순옹주를,
다른 후궁에게서 1녀 소선옹주를 두었다.
원경왕후 민씨(1365-1420)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82년(우왕 8년)에 방원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그녀는 1400년 2월에 방원이 세제에 책봉되자 세제빈으로 정빈에 봉해졌으며, 이 해 11월에
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태종보다 두 살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398년 8월, 그녀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함께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정보 덕분에 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왕자의 난 10일 전에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를 혁파하고 그들의 군장비를 모두 불태울 때, 그녀는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거사
직전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어 선수를 치도록 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불화는 우선 궁녀 문제에서
출발하여 태종의 후궁 간택 문제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왕비의 동생
민무구 형제 사건으로 불화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태종은 외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나갔고, 민씨는 이에
노골적인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 되자
그녀는 그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민씨는 4남 4녀를 낳았으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자들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그녀의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묘와 함께 쌍을 이루며 현재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남아 있다.
태종의 아들은 총 12명으로 정비 소생 4명, 후궁 소생 8명이 있었다.
정비 소생은 장남 양녕을 비롯해서 효령, 충녕, 성녕 등이었고, 후궁 소생으로는 효빈
김씨의 경녕, 신빈 신씨의 성녕, 온녕, 근녕 형제들과 선빈 안씨의 익녕, 숙의 최씨의 희령,
안씨의 혜령, 최씨의 후령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양녕, 효령, 충녕 등 정비 소생의 아들은 왕위 계승과 관련한 일화들을 남겨
후대 사람들에게도 익히 잘 알려져 있으며, 넷째인 성녕은 태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14세 때
홍역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빈 신씨의 첫 번째 소생의 이름을 성녕으로 한 것은
아마 홍역으로 죽은 넷째 아들에 대한 태종의 사랑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에 태종의 아들 중 대표적인 인물인 양녕과 효령의 삶을 약술한다. 충녕은 세종 편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양녕대군(1394-1462)
1394년(태조 3년)에 태어난 양녕은 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 자는 후백, 부인은
광주 김씨 한로의 딸 김씨였다.
양녕은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고, 사냥이나 풍류를 좋아해 자주 태종의 화를
돋우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그가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말도 있으나 정확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동생 충녕이 왕이 된 이후에도 감찰 대상이 되긴 했으나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세종과는 지극히 우애가 깊어서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된 바가 있었지만 세종에게 한 번도
처벌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천명을 누리다가 1462년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강정이다.
효령대군(1396-1486)
효령은 1396년(태조 5년) 태종 이방원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보, 자는 선숙이었다.
부인은 정역의 딸 예성부부인으로 그녀와 슬하에 6남 1녀,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효령은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한때 자신이 세자 자리를 넘겨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동생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1407년(태종
8년)에 효령군에 봉해졌고 1412년에 효령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이후 출가한 뒤에는 불도에
전념하여 1435년 회암사 중수를 건의하였으며,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활동하기도 했다.
1465년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고, 그 해 '원각경'을 수교하기도 했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섯 왕의 연고존친으로서 극진한
존경과 대우를 받았으나,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유생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왕들의 보호 아래 꾸준히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시호는 정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