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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
제목: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누가복음3:22절 하번절)
2017년 1월 31일
<오늘주신 말씀>
"인류의 구원 메시지를 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누가복음3:21~38절)
(세례를 받으시다)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의 족보)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 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 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 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 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 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 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 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 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o(o
제목: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누가복음3:22절 하번절)
오늘 본문은
이제 세례 요한의 임무가 끝나고 예수님이 무대에 오르실 때가 되었습니다
30여 년을 평범한 인간으로 사신 예수님은 이제 세례와 함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합니다
3년의 공생애를 위해 30년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아버지가 정하신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먼저 21~22절까지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다 기록의 말씀입니다
(세례를 받으시다)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늘이 열리며”에 해당하는 "아네오크쎄나이 톤 우리논”에서 “아네오 크쎄나이”는 “열다’라는 뜻의 동사 “아노이고”의 수동태로, “열리다”라는 뜻 입니다
목적격인 “톤 우리논”이 주어 역할을 해서 “하늘이 열리다”라는 뜻이 됩니다
즉 하늘을 여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이 암시됩니다
이러한 표현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직간접적인 계시가 등장 합니다
요한복음 1:51절이나 사도행전 7:56절이 이에 해당 합니다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비둘기 같은 형체로”에 해당하는 “소마티코 에이데이 호스 페리스텐란”에 “소마티코”의 원형 “소마티코스”는 “육체적인”, “물질적인”이라는 뜻이고 “에이데이”의 원형 “에이도스”는 “형태” 라는 뜻 입니다
누가는 성령께서 “비둘기”(“페리스테란’)와 같이 실제적으로 “육적인 형태를 띠고” 예수 위에 내려오신 모습을 묘사 합니다
“하늘로부터”에 해당하는 “엑스 우라누”에서 “하늘”에 해당하는 “아라누’의 원형은 단수 형태의 “우라노스”입니다
누가는 “하늘”을 언급할 때 단수 형태를 선호 합니다
이와 달리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이 복수 형태로 등장 합니다
아마 하늘이 몇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 유대인의 사고를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뜻하는데, 아마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그 소리는 들렸을 것 입니다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이 단어는 “사랑하는” 이라는 뜻 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마3:17절), 그리고 “유일한”(20:13절)이라는 의미 입니다
누가는 “너는 내 사랑하는(내가 특별히 선택한, 나의 유일한) 아들” 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예수님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로 묘사 합니다
“기뻐하노라”에 해당하는 “유도케사”에서 “기뻐하노라”에 해당하는 “유도케사”의 원형 동사 “유도케오”는 주체의 결단과 승인을 내포하는 단어 입니다
즉 이 단어에는 하나님이 구속 계획 속에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승인 한다는 함축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것 입니다
저자는 21~22절까지 말씀에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성령의 임재를 비둘기 같은 형체”(22절)라고 묘사합니다
마태복음 3:16절과 마가복음 1:10절에도 이와 비슷한 서술이 있지만, 누가는 “형체”(“에이도스”) 라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 명사를 사용 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단지 내적인 깨달음이나 신비로운 체험을 상징하는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객관적 사실이며 가시적인 현상 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22절)는 이사야 42:1절 “내 사랑하는 종”이라는 말씀의 울림을 담고 있습니다
또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원어를 직역하면 “네 안에 내가 기쁨을 누린다, 22절)는 주의 종을 노래하는 이사야 49:3절, “내가 네 안에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와 문장 구조가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 23절 상반절 말씀은
사역의 시작과 나이 기록의 말씀입니다
(예수의 족보)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예수께서~시작하실 때에”에 해당하는 “아무토스 엔 예수스 아르코메노스”에서 “아르코”가 능동태로 사용된면 ‘다스리다”를 의미하지만, 중간태로 사용되면 “시작하다”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중간태로 사용되어 예수님이 가르치기 시작하셨음을 묘사 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수세 사건과 하늘이 열리는 사건 이후에 공생애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저자는 23절 상반절에서
개역 개정은 예수님이 시작하신 일을 “가르치심” 이라 번역하고, 다른 역본들은 이를 “활동”, “사역’, “전도”, “기쁨 소식을 전하기” 등으로 옮겼지만 실상 원문에서는 “시작하다”에 호응하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문장에는 보통 헬라어 문자에 잘 쓰이지 않은 인칭 대명사의 강조형(“아우토스”)과 분사의 부가형이 있습니다
이런 문법적인 요소를 충분히 고려할 때 “예수 그분 자신이 시작이 되던 때에”라는 번역이 가능 합니다
종합하면 그분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3:1절에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지 열 다섯 해”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것이 정확히 몇 년인가에 관해서는 다소의 논란이 있지만 대개 AD 26~28년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헤롯 대왕의 사망(BC 4년) 1~2년 전이라고 보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의 나이를 31~34세가량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23절 하반절~ 38절까지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의 계보 기록의 말씀입니다
24.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얀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훔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 “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는 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 “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 “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 “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 “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 “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 “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 “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에서 “투 쎄우”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내려오는 반면, 누가는 예수님을 기점으로 거슬러 올라지면서 족보를 기록 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담이 아니라 “하나님”(쎄오스”) 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 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을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중요한 존재로 부각 시킵니다
저자는 23절 하반절 ~ 38절까지 말씀에서
누가복음의 계보는 몇 가지 특이점을 잦습니다
첫째,
계보의 위치가 특이합니다
마태복음처럼 계보는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중간이 아니라,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 맨 앞에 놓입니다
그럼에도 누가가 여기에 계보를 배치한 이유는 세례 기사와의 연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즉 하늘에서 들려온 “너는 내 아들이라”는 선언을 확증하기 위해서였을 것 입니다
둘째,
이 계보는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식 대신 “누구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식으로 구성 되었습니다
전자는 생물학적 출생을 좀 더 강하게 표현하고, 후자는 입양이나 계대혼 등 법적인 계승까지 포괄할 수 있는 형식입니다
셋째,
이 계보는 조상에서 후손으로 진행하지 않고 후손에서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넷째,
계보의 범위가 확장 되다 보니 언급되는 인물의 수도 늘어납니다
마태복음에는 14대가 3번 이어지면서 42대가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부터 아담까지 77대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유대적 세계관에서 중요한 숫자인 7과 12의 곱, 즉 84를 상징합니다
누가의 계보가 11번째 주(week)까지 포괄해 예수님 이후로 12번째 주, 즉 종말적 시기가 시작하는 셈이라고 해석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본문에서 이 해석을 지지할 만한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다섯째,
마태와 누가의 두 계보에서 아브라함 이후로는 동일한 기간인데, 그 중에서 왕조 시대 이전의 다윗까지 조상들은 대체로 일치 하지만 다윗 이후 왕조 시대의 명단은 두 계보가 완전히 다릅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중 솔로몬을 누가는 나단을 따라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다윗의 후손이었던 왕들 전체가 계보에서 사라져 다윗 왕권의 참된 계승자가 예수님이심을 부각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섯번째,
누가의 계보에는 여성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계보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계보라는 설명이 초대 교회에서부터 자주 제시 되었습니다
불가능한 설명은 아니지만 그것을 확증할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계보의 의미와 마태복음 계보와 차이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수세 이어 나오는 광야에서의 시험(4:1~13절)과 함께 공생애를 사역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에 해당 합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사건에서 우리는 세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세례를 통해 예수님은 구원 받아야 할 대상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훌로 세례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로 세례를 받으시고”(21절)라는 서술은 세례 받고자 길게 늘어선 줄 어딘가에 예수님이 서 계셨음을 뜻 합니다
둘째,
비록 겉으로 드러난 사건으로서는 백성과 함께 세례 받으셨지만 그것이 예수님께 미친 실절적 효력에 있어서는 백성들이 누린 것과 같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사역을 소개 하면서 누가는 그가 베푸는 세례의 본질을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3절)라고 규정 했습니다
셋째,
이 세례 받으심의 순종은 앞으로 있을 더 큰 세례의 순종을 예고 합니다
하지만 물 세례 그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함께 받은 사람들의 구원과 만민의 구원을 위해 두 번째 세례인 십자가의 죽음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야 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도 주시는
말씀의 은혜는 22절 말씀 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누가복음3:22절 하번절)
"믿음의 계보 믿음의 족보를 만들어 나눔이 있는 삶을 사십시요"
생물학적인 족보가 아닌 영적 믿음의 나눔을 함께 하시는 분이 사실 믿음의 계보요 족보가 아니겠습니까
함께 나누며 울며 기도하고 선한 섬김을 이어가는 귀하신 분들이 믿음의 영적 동료요 족보가 아니겠습니까
특히나 내가 전도한 분들과 함께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면서 엮어 나가는 멋진 믿음의 계보를 만들어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 간의 우정은 서로에게 끌리는 성격이나 취향을 바탕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은혜의 체험과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순종과 믿음을 공유함으로써 생성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이 내 믿음의 가정으로 그 계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Jeong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