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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섬’ 전남 소안도
작은 섬에 항일운동가 88명…20명 서훈
해방 후 보도연맹사건으로 276명 죽어
사람들은 ‘전남 완도’하면 가사문학의 보고인 보길도, 장보고의 근거지였던 청해진을 먼저 떠올린다. 또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청산도가 있다. 그러나 완도는 소안도가 있음으로 해서 그 이름값을 한다.
소안도는 행정구역으로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이다. 완도 화흥포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을 가는데, 보길도와 청산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일제치하 때 섬 주민 8000명 중에서 800명이 이른바 ‘불령선인’으로 감시를 받았다. 일제 36년 동안 섬 주민이 투옥된 기간을 추산하면 300년이 된다. 섬 주민들은 이웃이 감옥에 가면 그들을 생각하며 겨울에도 요를 깔지 않고 잤고, 손가락을 베어 투쟁의지를 다진 사람도 여럿이다. ‘해방의 섬’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곳이다.
송내호가 있었기에 소안항일투쟁 가능
이들의 항일투쟁은 좁은 섬에 머물지 않았다. 송내호(1895∼1928) 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청년 교육 노농 사상 비밀결사운동을 벌여 운동역량을 축적한 소안면 사람들은 상해임시정부, 중국, 일본 등지로 투쟁의 무대를 넓혀나갔다.
일제 당시 전국 13도 218개 군 중 가장 작은 완도군에서도 제일 작은 면인 소안면에서 20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27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의성 김씨 내앞(川前) 문중과 견줄 만하다. 내앞 문중이 경상도 안동을 근거지로 한 양반가문이라면, 소안면 사람들은 전라도 작은 섬에 기반을 둔 평민들이다.
송내호 정남국 김남두 김사홍 김통안 박흥곤 송기호 이각재 이정동 정석규 최형천 김경천 강정태 신준희(이상 1990년 독립유공자 서훈) 신만희 이갑준 박기숙 김홍기 백형기(1993년 서훈) 정창남(2005년 서훈)이 그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소안 항일운동기념관에는 소안도가 배출한 항일운동지도자 88명의 부조와 사진이 모셔져 있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분들은 부조를 만들어 놓았다. 88명은 일제하에서 민족주의 노선을 걷기도 했고,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하기도 했다. 일부 인물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다. 소안면 사람들은 이 분들이 식민통치 시절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에서는 모두 하나였다고 말한다.
사회주의 계열주도…1990년부터 재평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이 주도한 소안항일투쟁사가 제대로 평가받는데 해방 후 수십 년 세월이 필요했다. 소안에 대한 합당한 평가는 잃어버린 반쪽의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과정과 일치했다.
해방 후 이념대립에 휘말린 소안 사람들은 1989년 전까지는 감히 ‘항일’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 수많은 소안사람들이 연좌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안사람들은 독립유공자 김사홍 김경천의 후손인 김진택(2000년 사망)씨와 정병호(현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씨를 중심으로 선조들의 항일운동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벌였다.
소안항일투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89년 이후다. 1990년 소안면에 조그만 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졌다. 이 때 처음으로 송내호 등 14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1990년부터는 해마다 소안학교 설립일인 5월 16일이면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2001년에는 방대한 분량의 ‘완도군 항일운동’이 출간됐다. 2002년부터 도비와 군비 30억 원을 투입하는 성역화사업을 벌여 옛 소안학교 교사를 복원하고 그 옆에 항일운동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 앞 바다에 해상관광시설도 세울 계획이다. 기념관을 세울 때 면민들은 십시일반으로 1억4000만원을 모금했다. 섬 안에 있는 13개 노인정은 운영비에서 3만원씩을 내놓았다.
명예회복은 아직도 미완
소안면은 김 양식으로 연간 130억 원 소득을 올리며, 전복 양식도 해서 소득이 높다.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게 됐지만 소안 사람들에게는 쉽게 씻지 못하는 한이 남아 있다.
1950년 소안 사람 276명이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집단 처형됐다.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김장수 완도군의원은 “소안사람들은 해방 후 가족들이 왜 떼죽음을 당했는지 알고 싶어 한다”며 “국회에서 과거사진상규명법이 통과되면 유족회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소안사람들이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거 연루된 사연을 들어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독립유공자 김남두의 동생인 김남천(1924년생) 옹은 82살의 나이에도 해방 전후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김 옹은 “1929년 이후 소안에서 조직적인 항일운동은 사라지고 단지 야학을 통해 항일정신은 면면히 이어졌다”고 들려줬다. 1930년대 해남 강진 완도 등지에서 항일운동이 벌어질 때 소안도는 침묵을 지켰다고 했다.
해방 후 소안출신 청년 몇 명이 완도군 건국준비위원회와 그를 이은 인민위원회를 주도했다. 완도군 건국준비위원회는 나봉균이 위원장을 맡았다. 나봉균은 완도읍 출신으로 1928년 송내호가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죽자 그 유해를 고향으로 모셔온 사람이다.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소안면 출신 신광희가 조직을 주도했으며, 역시 소안출신인 위경량이 경찰서장을 맡았다.
당시 완도군 안에서는 소안출신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와 미군정의 힘을 업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립촉성위원회 계열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강제해산하자 신광희는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경량은 행방불명됐다. 같은 소안출신인 최평산에 대해 김남천 옹은 “부산으로 피신했다 1949년경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검거되어 직결처분됐다”고 기억했다.
1946년 이후 소안도는 침묵
신광희 위경량 최평산 등이 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1946년까지는 소안면에서도 미소공동위원회 결정을 지지하는 찬탁집회가 열렸기도 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1946년 남로당이 주도해 쌀공출을 반대한 이른바 ‘10월폭동’ 때 완도군은 조용했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소안도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옆 섬에서는 인공기를 게양한 대한민국 경찰선을 보고 인민군 만세를 부르다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지만, 소안도는 조용했다.
전쟁 1년 전인 1949년 6월 이승만 정부는 좌익 활동 전향자를 모아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다. 좌익으로 낙인찍힌 소안사람 여럿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집단 처형했다.
이 때 죽은 완도군 사람이 신고된 숫자만 1000명이다. 소안면은 276명으로 완도군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당시 바다에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연좌제가 서슬 퍼렇던 시절에 좁은 섬 전체가 연좌제 사슬에 묶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소안농협 조합장인 최종주(59)씨는 해방 직후 작은아버지가 수류탄을 던져 독립촉성회 계열의 선원단원 한 사람을 죽이는 바람에 이후 집안 어른 6명이 몰살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고아가 되어 외가에서 자란 최씨는 완도수산고를 다녔으나 “졸업해도 외항선을 못탈텐데 공부는 해서 무엇하냐”며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농협 조합장으로 자수성가 했지만 “집안 어른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한다.
김남천 옹의 아들인 소안수협 조합장인 김광선(51)씨는 “친일파를 지지기반으로 삼은 이승만 정권이 소안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소안사람들의 대체적 정서가 이렇다.
이들은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과거사진상규명법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국회에서 법만 제정되면 바로 완도군 유족회를 발족시키려고 한다.
모진 세월을 살아온 김남천 옹은 “험악한 역사를 살아왔는데 정치판이 또 어떻게 바뀔지 아나. 서두르지 말되, 진실은 반드시 밝혀야지”라고 말했다.
이웃이 감옥에 가면 요를 깔지 않고 잤다
그렇다면 소안도가 왜 이렇듯 항일운동이 가열차게 벌어졌는지, 그리고 일제 치하 그 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자.
소안도는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 목포 개항 이후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 일본 오사카와 인천을 항해하던 외항선도 가끔 풍랑을 만나면 소안도에 정박했다. 섬사람들은 일찍 외부세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섬에는 대단한 지주나 양반가문이 없어 신분갈등이 적었다. 1910년대부터 학교를 세우고 신교육을 받아 문맹자도 적었다.
소안사람들이 항일운동을 벌일 물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민족해방운동사에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소안도는 원래 궁방전이었으나 1905년 토지조사사업 때 사도세자의 5대손인 이기용 자작이 소유권을 가로챘다. 면민들은 13년 동안 법정투쟁을 벌여 1921년 마침내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이를 기념해서 면민들은 1만400원(현 화폐가치로 1억 원 상당)을 갹출해서 1923년 강습소 수준인 중화학원을 정식학교인 소안학교로 승격시킨다.
소안학교는 1927년 일제가 강제 폐쇄할 때까지 전신인 중화학원을 포함해 14년 동안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학교폐쇄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공립학교를 거부하고, 각 마을에 야학이나 서당을 세워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88살 된 할머니가 지금도 당시 야학에서 배운 ‘해방가’를 기억하고 있다.
소안학교 세워 수많은 인재 배출
소안도의 명성은 이 섬 비자리 출신인 송내호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각을 하던 송윤삼씨의 자제인 송내호는 1914년 서울 중앙학교를 졸업하고 19살에 귀향, 중화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때는 완도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1920년 4월 송내호는 정남국과 함께 소안에서 배달청년회를 조직했다. 100여명의 회원들로 조직된 배달청년회는 친일면장이나 일제경찰과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이른바 ‘불언동맹’을 맺어 실천했다.
1923년에는 회원 700명이 참가한 소안노농연합대성회를 조직했다. 노농회는 미신과 인습을 철폐하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족보와 신주, 제당을 불태우기도 했다. 소작지 이동을 조사하고, 악질지주에 대한 대항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김남천(82) 옹은 “항일지도자들이 마을대항 토론대회를 여는 등 이론교육을 많이 시켰다”고 증언했다. 토론주제가 ‘미신 타파’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같은 것이었다. ‘조혼 타파와 자유결혼’을 주제로 삼기도 했다.
이런 교육 덕분에 “다른 섬 사람들이 소안사람들은 까다롭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김 옹은 말했다.
1926년부터 사상적 색채 보이기 시작
1926년부터 소안면의 항일운동은 사상적 색채를 뚜렷하게 보인다. 그해 6월 결성된 살자회는 송내호 송기호 형제와 정남국 등 25명이 창립회원이었다. 이들은 사회과학 학습을 하고, 노농 청년 여성 소년운동을 지도해 나갔다.
송내호는 1927년 초 위경량 이수산 김성재 최평산 이평존 김홍기 김장안 주채도 이월송 김광재 김재수 등과 함께 비밀청년결사인 일심단을 조직했다. 일심단은 광동군사학교와 일본에 조직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송내호는 소안면에서 각종 대중단체와 비밀결사를 주도하며 하부기반을 탄탄히 다지는 한편 서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에 참여하여 본부 상무간사를 맡았다. 1928년 8월 배달청년회 사건으로 구속된 송내호는 그해 12월, 34살의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옥사했다.
송내호의 동생 송기호도 형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고, 그 후유증으로 폐결핵이 걸려 형 보다 몇 달 일찍(1928년 3월 5일) 29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송내호의 아들도 일찍 죽었으며 딸과 외손이 남아있다. 소안도 비자리 부둣가에 낡고 납작한 집이 한 채 서 있다. 송내호의 생가다. 몇 년 전까지는 낙향여인숙이 있었지만 지금은 폐업을 했다. 다만 바다를 한 눈에 내려다보는 언덕에 잘 단장된 송내호와 송기호의 가족무덤이 있어 다소 위안이 된다.
조선 중국 일본 동양3국으로 투쟁무대 확대
송내호 사후에도 소안도에는 그의 지도로 성장한 항일투쟁의 일꾼들이 다수 있었다. 이들은 일본이나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계속했고 1930년대 완도군 일대에서 적색농민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토대를 이루었다.
김남천 옹은 1930년대 고군면에서 항일운동을 한 이흥세씨가 소안학교 졸업생이라고 증언했다. 소안학교에는 완도는 물론 해남 강진 제주에서도 유학을 왔다고 한다.
‘완도군 항일운동’을 집필한 박찬승(한양대) 교수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벌어질 때도 초반부터 완도출신 학생들이 먼저 일본학생들을 공격했다”며 “광주학생운동이 일본인의 조선여학생 희롱에 항의하는 소극적 저항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송내호 다음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사람은 정남국(1897~1955) 선생이다. 소안도에서 청년 노농 사상운동을 벌이던 정남국은 1926년 말 일본으로 갔다. 당시 일본 오사카 일대에는 일자리를 찾아 나선 전남사람만 1만 여 명이 거주했다. 정남국은 이를 기반으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위원장을 맡아 노동운동을 지도했다.
정남국은 1927년 12월 서울청년회 구파가 주도한 ‘서울파 조선공산당’(일명 춘경원 공산당)에 참여했다. 제3차와 제4차 공산당 사이에 결성된 ‘서울파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지 못한 비운의 당이다.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던 정남국은 1928년 서울파 공산당 사건으로 일본에서 검거 되어 신의주로 압송됐다. 이 사건으로 투옥된 소안사람은 8명이다.
정남국은 출소 후에 일본에서 합법적 공간을 확보하며 재일 조선인 운동을 지도했다. 식민지 전 기간 동안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정남국은 해방 후 귀국해서 완도에서 2대 국회의원(민국당)을 지냈다. 그는 건국 이후 최초로 노동쟁의법을 발의했다.
“임정 중심으로 독립운동 해야”
송내호 정남국이 서울청년회 구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송내호가 서울파 조선공산당에서 검사위원을 맡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문헌자료는 없다.
서울청년회는 1920년대 화요회와 더불어 조선사상운동의 2대 지주였다. 서울청년회는 계급운동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으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한 운동그룹이다.
수년 전 타계한 일심단원 이월송씨는 생전에 “송내호는 평소 소안사람들에게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해나가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1928년 서울파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된 소안사람 8명 중에서 정남국 신준희 최형천 강정태 정창남 5명은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그러나 같은 사건에 연루됐으며 젊은층에 속했던 신광희 위경량 최평산 3명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에 참여하며 운명을 달리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