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 |
왕조 |
재위기간 |
승 계 |
주 요 역 사 |
중 국 상 황 |
비 고 |
1 |
태조 (왕건) |
918~943 |
건국 |
후삼국통일(918년 후고구려, 935년 신라, 936년 후백제멸망) |
발해(698~926) 요나라(거란족)(916~1125) |
918년 건국 |
2 |
혜종 |
943~945 |
왕건의子 |
나주오씨 소생 |
5대 10국 |
|
3 |
정종 |
945~949 |
〃 |
충주유씨 소생 |
| |
4 |
광종 |
949~975 |
왕건의4子 |
과거제도 도입, 노비안검법시행, 불교장려 |
송나라(960~1279) (5대 10국 통일) |
송나라 건국 |
5 |
경종 |
975~981 |
광종의子 |
전시과(토지제도)제정 |
|
|
6 |
성종 |
981~997 |
왕건의손자 |
서희장군 거란족 격퇴 |
|
|
7 |
목종 |
997~1009 |
경종의子 |
전시과(田柴科)개정, 과거시행법제정등 학문장려, 후손이 없슴, 강조에 의해폐위 |
|
|
8 |
현종 |
1009~1031 |
왕건의 손자 |
거란3차례 침입, 강감찬 장군 구주대첩(1018년) |
|
1018년 구주대첩 |
9 |
익종 |
1031~1034 |
현종의1子 |
천리장성 축성(압록강↔동해) |
|
|
10 |
정종 |
1034~1046 |
현종의2子 |
5역5천 과거응시 금지 |
|
|
11 |
문종 |
1046~1083 |
현종의3子 |
국가중앙통치체제완성, 대각국사 의천, 최충의 9재 활약 |
|
고려 황금기 |
12 |
순종 |
1083 |
문종의1子 |
재위 3개월만에 승하 |
|
|
13 |
선종 |
1083~1094 |
문종의2子 |
유.불교균형발전, 광역교역시행, 승과설치 |
|
|
14 |
헌종 |
1094~1095 |
선종의子 |
수렴청정 |
|
|
15 |
숙종 |
1095~1105 |
문종의3子 |
왕위찬탈, 윤관의 별무반설치 |
|
|
16 |
예종 |
1105~1122 |
숙종의子 |
윤관장군의 여진정벌(오연총), 국학의 칠재설치, 혜민국, 양현고설치 |
금나라(1115~1234) |
|
17 |
인종 |
1122~1146 |
예종의子 |
묘청의난 진압, 김부식 3국사기 집필 |
요나라(거란족)1125년 금나라에 의해 멸망 |
|
- 고려 후반기 왕조 -
대 |
왕조 |
재위기간 |
승 계 |
주 요 역 사 |
중 국 상 황 |
순흥안씨 내력 |
비 고 | ||
18 |
의종 |
1146~1170 |
인종의子 |
문신귀족세력 부패 독재, 무신정변으로 폐위 |
|
시조공(安子美)탄생 1170~1180경 |
1170년 무신정권개막 | ||
19 |
명종 |
1170~1197 |
예종의子 |
무신집권개막, 최충헌정변으로 폐위 |
|
|
| ||
20 |
신종 |
1197~1204 |
예종의子 |
만적의 난(1198) |
|
1파2세 안영유탄생 (1201) |
| ||
21 |
희종 |
1204~1211 |
신종의子 |
최충헌에의해 폐위당하여 강화도유배 |
몽고제국(1206~1271) |
|
| ||
22 |
강종 |
1211~1213 |
명종의子 |
최충헌에 의해 옹립 |
|
|
| ||
23 |
고종 |
1213~1259 |
강종의子 |
1232년 강화도 천도, 28년간 몽골에항쟁(7차례침략), 팔만대장경간행, 몽골에굴복 |
1234년 몽고족에게 금나라 패망 |
1파4세 안향탄생 (1243) |
최씨정권 몰락 | ||
24 |
원종 |
1259~1274 |
고종의子 |
무신정권폐막, 원나라시호 첫 임금 |
원나라건국(1271~1368) |
2파5세 안문개탄생(1273) |
원나라 부속국전락 | ||
25 |
충렬왕 |
1274~1308 |
원종의子 |
원나라 제국대장 공주와 결혼 부마국“忠”자 王으로 전락 |
1279년 원나라에 의해 송나라멸망 |
3파6세 안축(1282), 안보(1302)탄생, 안향별세(1306) |
| ||
대 |
왕조 |
재위기간 |
승 계 |
주 요 역 사 |
중 국 상 황 |
순흥안씨 내력 |
비 고 | ||
26 |
충선왕 |
1308~1313 |
충렬의子 |
재위(1298),복위(1308),정방폐지, 각염법제정, 원나라에서 전지로 국정처리 |
|
|
| ||
27 |
충숙왕 |
1313~1339 |
충선의2子 |
심양왕의 무고로 원나라 연경에서 5년억류(1321~1325), 원나라 세금삭감, 궁녀선발 중지 |
|
안문개 왕과함께 억류 및 별세(1388), 안축 원나라 제과급제 (1324) 7세조 안종원탄생(1324) |
| ||
28 |
충혜왕 |
1339~1344 |
충숙의子 |
재위1330~1332 복위 1339~1344 황음광폭, 심양왕반란제압, 원나라에 불모로 억류되어 승하 |
|
|
| ||
29 |
충목왕 |
1344~1348 |
충혜의子 |
8세즉위 모친 덕녕공주 섭정, 녹관전(祿科田)반환, 정치도감(整治都監) 전제도감(賑済都監)설치 |
|
종원 문과급제(1342) 8세조 안경공탄생 (1347) 안보 원나라제과급제(1345) |
| ||
30 |
충정왕 |
1348~1351 |
충혜서외子 |
외척세도, 왜구출몰 |
|
안축별세(1348) |
| ||
31 |
공민왕 |
1351~1374 |
충숙의2子 |
쌍성총관부폐지, 영토회복, 몽골풍연호 관직폐지, 기철일파 숙청, 신돈독재, 홍건적, 왜구침입 최영장군 제주진압(1374) |
명나라(1368~1644)의해 원나라멸망(1368) |
안보별세(1357) 9세조 안순탄생(1371) |
명나라 건국 | ||
32 |
우왕 |
1374~1388 |
공민의子 |
강화도에서 이성계에게 사사 됨 |
|
8세조 경공 문과급제(1376) |
| ||
33 |
창왕 |
1388~1389 |
무왕의子 |
9세즉위,강화도에서 부왕과함께 적통부정으로 이성계에게 사사 됨 |
|
|
| ||
34 |
공양왕 |
1389~1392 |
신종의 7대손 |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후 옹립 친원파:정몽주, 친명파:이성계 대립 475년만에 고려멸망 |
|
7세조 종원 판삼사사(判三司事) 제수(1390) 8세조 경공(1391) 좌부대언발탁(1392) |
|
- 무신정권의 집권내력(1170~1270) -
순서 |
집권자 |
시작 |
완료 |
집권기간 |
왕 |
비 고 |
1대 |
이의방 |
1170 |
1174 |
4 |
명종 |
18대의종 폐위 |
2대 |
정종부 |
1174 |
1179 |
5 |
〃 |
명종(1170~1197) |
3대 |
경대승 |
1179 |
1183 |
4 |
〃 |
|
4대 |
이의민 |
1183 |
1196 |
13 |
〃 |
|
5대 |
최충헌 |
1196 |
1219 |
23 |
명종~고종 |
19대명종, 신종, 희종, 강종, 23대고종 칭기즈칸이 몽골제국 건국(1206~1271) |
6대 |
최 우 |
1219 |
1249 |
30 |
고종 |
최충헌아들, 1234년 몽골제국에 의해 금나라 멸망 |
7대 |
최 항 |
1249 |
1257 |
8 |
〃 |
최충헌손자, 고종(1213~1259) |
8대 |
최 의 |
1257 |
1258 |
1 |
〃 |
최충헌증손자 |
|
유 경 |
1258 |
1260 |
2 |
원종 |
무신정권기중 유일한 문인실권자 1259년 몽골에 굴복 |
9대 |
김 준 |
1258(1260) |
1268 |
10(8) |
〃 |
원종(1259~1274) : 원나라 시호 받은 첫군주 |
10대 |
임 연 |
1268 |
1270 |
2 |
〃 |
|
11대 |
임유무 |
1270 |
1270 |
1 |
〃 |
개경환도 반대로 삼별초가 무신정권 종말시킴 |
칭기즈칸 (成吉思汗 : 1167년경 탄생추정)의 활동시대와 동시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 고려 후반기 정세
1170년부터 무신정권이 집권한 이후 중국대륙에서는 송나라와 금나라가 양립하고 있었으며, 고려는 양국과 교류하게 된다.
그 후 최씨 무신정권(1196~1258)이 개막되어 정착되었을 무렵인 21대 희종(1204~1211)에 이르러 1206년 중국에서는 유목민 출신인 칭기즈칸(鐵木眞:아명 테무진)이 몽골제국(1206~1271)을 건국하고 대륙을 호령하게 되며, 마침내 1234년 금나라(여진족)를 멸망시키고 신흥제국의 위세가 등등하게 된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몽고의 팽창정세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정정이 불안하여 7차례에 걸쳐 몽고족의 침략을 자초하게 된다.
1232년 23대 고종(1213~1259)시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천도하며, 부처의 힘으로 몽고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간행하며 28년간이나 항쟁했지만 불가항력으로 1259년 몽고제국에게 굴복하고 말았으며, 62년이나 장기 집권했던 최씨 무신정권도 종말을 맞게 된다.
몽고에 인질로 잡혀갔던 태자 “전”이 24대 원종(1259~1274)으로 즉위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몽조제국의 시호를 받았으며 1260년 태자 심(충렬왕)을 몽골에 인질로 보냄으로써 국내 왕이 별세하여 계승할 때 까지 억류시킴이 상례화 되었다.
또한 1264년 몽고의 요구로 연경(북경)에 가서 원종이 알현함으로서 최초로 중국황제에게 친조한 왕이 되었으며 사실상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00여 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이 종료할 무렵, 승승장구하던 몽골제국은 국호를 1271년 원나라(1271~1368)로 바꾸고 세계정벌의 꿈을 키워갔다.
25대 충렬왕(1274~1308)은 원나라의 제국대장공주와 정략적인 혼인을 하게 됨에 따라 부마국이 되었으며, 이후 고려는 사실상 원나라의 정치적 복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때부터 고려임금의 호칭이 조(祖)나, 종(宗)이 아닌 원나라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뜻의 충(忠)자를 붙여 왕으로 불려 졌으며 짐이 과인으로, 폐하가 전하로, 태자가 세자 등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칭기즈칸과 그의 아들, 손자로 계승된 3대 황조에 걸쳐 파죽지세로 정벌의 야욕을 지속해온 원나라는 1297년 중국의 통일왕조인 송나라마저 멸망시킴으로써 중국대륙은 물론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일대를 정복하며 일류역사상 가장 넓은영토를 지닌 세계최대 강국의 위세를 떨침으로서 동·서양 무역이 성행하여 실크로드가 열렸고 찬란한 중국문화를 꽃피웠었다.
80여년동안 원나라의 복속국(服屬國)으로 치욕의 역사를 이어오다 31대 공민왕(1351~1374)에 이르러 원나라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하게 된다.
결국 세계를 호령했던 원나라도 1368년, 162여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고 한족이 세운 통일 왕조인 명나라(1368~1644)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이후 고려는 이성계가 신돈의 시녀인 반야에게서 출생했다며 32대 우왕(1374~1388)과 그의 아들 33대 창왕(1388~1389)을 살해하여 폐위시키고 추대한 34대 공양왕(1389~1392)을 끝으로 475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2. 신흥사대부 가문의 주역이신 고려사현의 행적분석
시조공께서 관향순흥에 터전을 마련하신 이후 70여년이 경과된 1243년에 문성공 안향선조께서 탄생 하신다.
문성공 선조를 시작으로 200여년의 순흥안씨 가문내력은 무신정권 100년과 세계최강 대국으로 부상했던 원나라의 역사와 맥락을 함께해왔다.
비록 원나라의 복속국이었던 고려후반기였지만 주자학의 태두이신 문성공을 필두로 문의공, 문정공, 문경공으로 계승된 고려사현의 눈부신 활약은 우리가문을 일약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의 명문가로 반석(盤石)위에 자리매김시켰다.
가. 문성공 안향(安珦) 1파4세(1243~1306)
시조공의 증손자이시고 안부의 아드님이신 문성공의 생애는 고려고종 30년부터 충렬왕 32년까지 64년간이다.
무신정권의 세계정세에 대한 오판으로 몽골의 침략이 빈번하던 시기에 탄생하셨으며 1260년(원종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하셨을 때는 몽골에게 굴복하고 최씨무신집권 체제가 폐막되었던 시대였다.
몽골의 7차례 침탈로 나라경제가 피폐하였고 정정이 불안하여 미신과 무속신앙(巫俗信仰)의 성행으로 민심이 흉흉한 시기였다.
몽골 지배하에 신흥관료 등용정책의 일환으로 등과하신 문성공께서는 뛰어난 문장실력을 인정받아 왕의 교지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국사에서 중요업무를 담당하면서 쾌속승진을 하시게 된다.
1278년(충렬왕2년)에 학문진흥과 교육을 담당하는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임명되면서 탁월한 유학적소양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인재양성에 전념하시면서 1288년에 상주판관으로 재임시 미신타파(迷信打破)에 앞장서신 기록이 전해진다.
1289년 유학진흥과 교육부문의 명예수장인 고려유학제거(儒學提擧)에 임명되어 충렬왕의 원나라 행차시 수행원으로서 주자학풍을 경험하시면서 1290년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한 원조이시며 태두이시다.
1298년 집현전 및 수문전 태학사에 임명되시어 학문진흥과 교육사업에 매진하셨으며 특히 1299년에는 국가의 학문부흥을 위해 개인의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였고, 1303년 한국교육사에 찬란히 빛나는 장학기금(육영재단)의 일종인 국학의 섬학전(贍學錢)을 설립 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그 이식(利息)으로 학교를 운영하게 하여 교육진흥에 이바지 하였다.
또한 유학의 학풍을 정립시키고 기품이 높아지자 1304년에는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 중서문하성의 최고책임자, 문하시중에 해당)으로 승진하셨다.
1306년 향년 64세로 별세하셨으며 묘소는 북한 땅인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대덕산 기슭에 영면하고 계신다.
공께서는 교육지도자로서 국가학문부흥에 헌신하신 겨레의 등불이요 영원한 스승이시다.
공의 초명(가명)은 유(裕)이며 호는 회헌(晦軒)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에 배향되었고 영정은 현존 회화(繪畵) 가운데 가장 오래 보존되어 국보 111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3월 밀레니엄시리즈 기념우표 발행시 영정사진, 친필서간, 소수서원등이 자랑스럽게 인용등재 된바있다.
※ 주자학(朱子學)
성리학(性理學)이라고도 하며 남송(南宋)의 주자가 집성 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학문이다.
이(理 : 정신적인세계)와 기(氣 : 물질적인세계)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의 생성과 구조, 인간심성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자세 등을 사색을 통해 형이상학적이고 실천철학적인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儒學思想)을 수립한 학문이다.
그 내용은 태극설, 이기설, 심성론, 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된다.
이학문을 계승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백이정, 이제현, 이색 및 우탁, 권근등이 있으며 우리가문의 고려사현(문성공, 문의공, 문정공, 문경공)께서도 주자학의 도입 및 발전에 앞장서셨다.
이학풍은 고려말에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주창했던 정도전에게 전파되어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조선왕조가 건국된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자기완성과 사회적 실천을 목표로 삼았던 성리학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창한 퇴계이황과 이기일원론을 주창한 율곡이이에 의해 조선시대 성리학의 토착화가 구축되었으며 영·정조시대에 이르러 찬란한 유교문화의 꽃을 만개하게 된다.
나. 문의공 안문개(安文凱) 2파5세(1273~1338년)
시조공의 고손자이시고 문성공 안향의 재종질(7촌)이며, 문의공의 생애는 고려원종 14년부터 충숙왕 8년까지 65년간이다.
몽골제국의 위세가 팽창하며 국호를 원나라로 바꾸고 통일왕조인 송나라마저 멸망시키고 세계최강국으로 군림하던 시기였으며 고려는 복속국으로 원나라의 간섭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에 생존 하셨다.
문성공보다 30세 연하이고 1306년(충렬왕32년)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셨으며, 그해 문성공께서 별세하셨다.
1321년 좌대언으로 재직시 심양왕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충숙왕을 원나라에 무고함에 따라 5년동안 충숙왕과 함께 억류되었으며 왕을 위한 경비(經費)를 국내에서 염출(捻出)하여 조달하다가 심양왕에 의해 원나라 종정부(宗正府)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때 한민족의 영토인 한반도를 원나라에 편입시켜 고려를 없애고 정동성(正東省)을 설치하려는 입성본국론(立省本國論)에 의해 고려의 주권이 풍전등화에 처했었다.
그러나 공의 간곡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반대상소가 원나라 황제를 감동시켜 왕과 함께 귀국한 뒤에 첨의참리(參議參里 : 정이품)가 되었고 1327년에는 억류시의 충절을 바친 공으로 1등공신에 오르셨다.
1330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 하셨으며, 이후 예문관대제학, 우문관대제학, 삼중대광 좌정승을 거쳐 문하시중에 두차례 오르시고 흥령부원군에 봉해 지셨다.
공의 초명은 균(鈞)이고 호는 질재(質齋)이시다.
1338년 66세 일기로 별세하셨으며 묘소는 황해도 평산에 장사하였다 하나 실전되었다.
공은 사람을 보는 식견이 탁월하셨으며 학덕이 높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숭앙(崇仰) 받으셨던 대유신(大儒臣)이셨고 천성적인 자태가 웅장하고 위대 하셨을 뿐만 아니라 후학양성에 진력하시어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다. 문정공 안축(安軸) 3파6세(1282~1348년)
문성공과 재종질(7촌)이고 문의공과 4종(8촌)지간이며 안석의 차남이시다.
문정공의 생애는 충렬왕 8년부터 충목왕 5년 까지 67년간이다.
이 시대는 중국역사상 최대의 영토보유와 동서문화까지 석권했던 원나라의 황금기였으나 고려는 복속국으로 전락되어 내정간섭이 극에 달했었다.
공의 부친이신 안석 선조께서는 1282년 과거시험에서 십운시로 장원급제 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관향에서 삼형제 훈육에 전념한 결과 모두 과거에 급제하며 명성을 드높였으므로 네분(碩, 軸, 輔, 輯)께서 음용하던 우물을 사현정(四賢井)이라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299년(충렬왕25)에 성균시 합격 후 진사시까지 합격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 : 정8품)으로 관직에 계시다가 1307년 충렬왕33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규정(司憲糾正 : 사헌부, 종6품) 및 단양부주부(종6품)를 역임하였다.
1324년(충숙왕11년) 43세에 원나라 연경에서 천자가 친히 치룬 제과에 급제하여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임명 되었으나 충숙왕이 억류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부임하지 않으셨다.
원나라 제과에서 제삼갑(第三甲)인 칠인의 우두머리로 급제하였으며, 그 당시 원나라가 사실상 세계를 제패했던 시대였으므로 천하의 장원급제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심양왕의 왕위찬탈을 위한 무고로 1321년부터 충숙왕이 안문개 선조등과 원나라에 억류되어 곤욕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임금이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곤욕을 당하고 임금이 곤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법”이라는 충숙왕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특히 구촌숙이신 문의공에게 한시를 통해 “태산과 북두같은 대유신(大유臣)”이라고 추앙 하셨다.
그 후 성균관 악정을 제수 받으셨다가 다시 우사헌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하셨다.
1330년(충혜왕 원년)에 학문과 덕망이 인정되어 외직인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파견 되었을때 민정을 잘 다스렸으며 관동지방을 기행하시면서 관동별곡과 함께 고려시대의 귀중한 국문학 장르인 경기체가의 효시(嚆矢)가 되셨다.
이작품은 조선시대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보다 250년이 앞선 걸작이다.
내직인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 전법판사(典法判事)를 거쳐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이어 검교평리(檢校評理)로 있다가 1343년(충혜왕 4년), 노모봉양을 위해 상주목사를 자청하여 효심의 지극함을 실천하셨다.
고려왕실에서는 주색에 몰두하며 황음광폭(荒淫狂暴)으로 일관한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모로 억류되어 승하하고 1344년 8세에 즉위한 충목왕이 모친인 덕녕공주가 섭정하게 된다.
그 당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및 정당문학에 오르셨고 1345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거쳐 우문관대제학, 삼중대광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 正一品 兼職)로 재임시 민지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이제현등과 개찬하였고 충렬, 충선, 충숙왕의 실록을 편찬 하였다.
1347년 66세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 에 제수되어 충목왕 4년동안 주요업적인 보흥고(寶興庫), 내승(內乘), 응방(鷹坊)등을 철폐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서연(書筵)을 열었으며 권신들이 독점하였던 녹과전(祿科田)을 본래의 소유자에게 환원 시켰다.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각도(道)에 양전(量田 : 토지측량 및 세금부과 대상파악)을 실시하였고 3조실록(三朝實錄) 편찬 및 진제도감(賑濟都監)을 설치하여 기민(飢民)을 구제 하는등 선정의 주역으로 재직하셨다.
1348년(충목왕) 이르러 흥령군에 봉해지고 개부(開府 : 정1품)품계에 오르신 후 7월, 67세를 일기로 별세 하셨다.
장지는 북한 땅인 경기도 장안군 진서면 대덕산 두솔암에 영면하고 계신다.
공의 선대는 대대로 순흥의 재향지주였으나 공에 이르러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성리학을바탕으로 신유학의 기념을 지닌 신흥사대부 출신으로서 성리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이제현, 이색, 이곡등과 학문교류를 통해 가세를 반석위에 정립시키셨다.
이곡의 묘지명에 “마음가짐이 공정하고 가정을 다스림에 근검하였다. 말을 잘하였지만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말을 꾸미지 않았으며 관재직시 근면하였다. 선한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그를 기리는 일이 많았고 악을 보면 피하고 근접하지 않았기에 원망이 적었다. 스스로 “근재(謹齋)라 지었으니 그 뜻을 알만 하리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스스로도 “네번의 사사(士師)가 되어 무릇 백성 가운데 억울하게 노예된 자는 반드시 다스려 양민으로 삼았다”라고 술회하였다.
공의저서는 1364년(공민왕 13년) 사위 정양생이 관동와주를 간행하였고 1445년(세종27년) 현손 안숭선이 문집을 간행했으며 1544년(중종39년), 소수서원에 추향(秋享)되셨다.
공의 유적비(遺蹟碑)는 강원도 존무사 재직시 울진을 배경으로 많은 글을 남긴 행적을 기리기 위해 “고려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흥령부원군 근재안축선생 문정공부군 유적비(高麗三重大匡 都僉議贊成事 興寧府院君 謹齋安軸先生 文貞公府君 遺蹟碑)”가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1991년 10월 건립되어 있고, 2009년 7월 “안축선생의 시비”가 속초영랑호반에 세워져 있다.
※ 경기체가(景幾體歌)
고려중엽이후 사대부들이 애창한 시가(詩歌)로서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 라고도 한다.
한문을 사용하되 고유의 전통을 살려서(부분적으로 이두표기를 사용하기도 함) 이루어진 새로운 형식의 시가이다.
고려후기 무신들과 권문세족에 억눌려있던 신진사대부 계층이 창작한 한문문장으로 이들은 새왕조를 개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조선전기의 훈구파로 이어진다.
○ 고려후기 : 무신들이나 권문세족에 압제되어 배제되었던 문신계층, 신진사대부들은 유흥적 고답적(高踏的)인 초야생활의 모습을 술회했다.
○ 조선후기 : 새롭게 개창된 왕조를 지도하는 귀족계층으로 조선왕조 건국을 찬양하고 새로운 정치를 펼쳐나가겠다는 기개를 표현한 작품이 많다. 경기체가는 세종조에 편찬된 “악장”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조선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가 점점 쇠락하여 조선 중종대 즈음 등장하는 가사문학과 그 세를 달리한다.
무인정권 시대의 고종때 제유(諸儒:다수 유학자)의 작품인 “한림별곡(翰林別曲)”이 시초이다. 여기에는 최씨무인정권 밑에서 새로이 정치적으로 등장하는 사대부들의 의기에 찬 생활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그 뒤 안축의 관동별곡(關東別曲)등 사대부 출신의 득의연(得意然)한 풍모가 잘 풍겨나는 작품이 나타나게 되었다.
현존작품으로는 “한림별곡”, “죽계별곡”, “관동별곡”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것으로 권근의 상대별곡(霜臺別曲),변계량의 화산별곡(華山別曲) 정극인의 불우헌곡(不憂軒曲), 작자미상의 오륜가(五倫歌), 유림가(儒林歌), 연형제곡(宴兄弟曲), 김구의 화전별곡(花田別曲), 천호문의 독락곡(獨樂曲)등이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에는 한글을 약간 섞어짓기도 하였으나 그 이전에는 한학자들이 순전히 한문으로 지었다.
따라서 일반대중과는 유리된 일종의 기형적인 문학이라는 평도 있다.
청산별곡(靑山別曲)의 “가시리” 등 고려의 속요(俗謠)와 대조를 이루며, 속요는 일반대중 가운데서 발달하여 구전되었기 때문에 작자미상이나, 경기체가는 한학자라는 특수층이 한자만으로 지었기 때문에 작가가 알려져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경기체가는 경치를 나열 서술하는 것이 특징인 반면 속요는 “사랑의 노래”가 흔하며 육감적이고 노골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 경기체가와 속요는 형태상 특질(음수율, 음보율, 구수율, 전후양절구분, 수련의중첩)이 일치함으로써 두가지를 통틀어 “고려별곡” 이라고도 한다.
라. 문경공 안보(安輔) 3파 6세(1302~1357)
안석(安碩) 삼남이시고 문정공 안축선조의 20년 아래 아우이시다.
공의 생애는 충렬왕 28년부터 공민왕 6년까지 56년이다.
이 시대는 하늘을 찌르던 원나라의 기세가 꺽이기 시작하여 조정곳곳에 부정부패가 난무하였고, 고려임금들이 수차례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서 억류당하곤 했으며, 영토도 함경도 일원이 원나라에 합병되었던 시기였다.
공민왕에 이르러 원나라를 배척하고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했으며, 함경남도 일원의 영토 회복 및 몽골풍 연호, 관제를 폐지하는 등 자주적인 국가로 개혁이 시작되던 때이다.
부친이 일찍 작고하시자 안축선조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셨고, 학문의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시며 1320년(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여 광주사록(廣州司錄 : 정8품)으로 관직에 입문하셨다.
이후 춘추관수찬(春秋館修撰 : 정6품)을 거쳐 편수관(編修官 : 종4품)을 역임 하였다.
1325년 안축의 아들인 조카 안종원(安宗源)이 탄생하였고 1342년 종원께서 문과에 급제하여 권전교감(權典校勘)으로 관직에 임용되셨다.
1345년(충목왕즉위) 원나라제과에 안축선조께서 장원급제이후 20여년 만에 천하제일의 과거에 합격하셨다.
형제지간에 원나라 제과에 연이어 급제한 가문은 희귀했으며 우리문중의 천재성을 만천하에 드높인 쾌거였다.
요양행중서성조마(療陽行中書省照磨)겸 승발가각고(承發架閣庫)의 벼슬을 제수받고 부임하시어 훌륭히 직무에 임하셨다.
그 후 노모봉양을 위해 귀국하셨으며, 이는 1343년 안축선조께서 노모를 위해 상주목사를 자청하여 부임하셨던 가문의 효행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귀국 후 양광도 안렴사(按廉使 : 충청도 관찰사로 개명) 및 교주도 안렴사(강원도 관찰사로 개명)를 역임 후 우대언(右代言 : 우승지로 개명, 정삼품)겸 집의(執意)를 제수 받으셨다.
충목왕(1344~1348)재위시 역사에 기록된 선정(녹과전반환, 정치도감, 진제도감설치등)을 주도하시던 안축선조와 함께 조정에서 형제지간 및 종원조카와 3분께서 관직에서 활약하셨다.
1347년 안축의 손자이신 8세조 안경공(安景恭)이 탄생하셨고 1348년 안축선조께서 별세하셨다.
충정왕(1348~1351)재위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 후 공민왕(1351~1374)이 즉위하면서 중용되어 1352년 밀직제학(密直提學)겸, 감찰대부(監察大夫), 제조전선사(提調典選事)를 제수 받으셨다.
1355년 정당문학(政堂文學 : 종2품)에 오르시어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재신(宰臣)으로서 국정에 직접관여 하셨다.
그러나 효심이 깊으시어 순흥에 계신 노모봉양을 간청하여 동경유수(東京留守 : 경주지역)로 재임하시면서 순흥을 왕래하시다 1357년 56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목은 이색의 묘지에서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셨으며 사후 집 한 채와 후손이 없어 부인 최씨께서 친정으로 귀가할 수밖에 없었음을 애석해 하셨다.
형제의 후손 중에 양자를 입적하려하셨으나 모두 한명의 조카밖에 없어 대를 잊지 못하였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읽기를 즐기셨으며 평소 “내가 아들이 없으니 문하생(門下生)이 내 아들이다” 하시며 후학지도에 열과 성을 다하셨다.
문하생으로 이보검, 우현보, 정습인, 이집등 명현들을 배출시키셨고 문경공(文敬公) 시호(諡号)를 받으시고문정공과 함께 소수서원에 배향 되셨다.
3. 맺음말
고려 역사는 태조왕건에 의해 건국된 후 초창기 정지기간을 거쳐 친송배요(親宋排遼)정책에 따라 요나라(거란족)의 침입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서희장군의 거란족격퇴와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1018)에 힘입어 고구려의 옛 영토를 상당부분 회복하고 자주적인 국가로서 100여 년 간 태평성대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그후 18대 의종조에 이르러 부패한 문신세력의 독재정권이 무신정변을 유발시킴에 따라 100년간 무신정권(1170~1270년)이 집권하게 되며 그 시대에 순흥안씨의 시조공께서 탄생(1170~1180년경)하시어 관향 순흥에서 호족장으로 세거하셨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을 건국하고 세력이 기세등등했으나, 국내 무신정권의 외교적 정세오판으로 인해 28년간 강화도로 천도하며 7차례 침공에 항쟁하다가 1259년 몽골제국에 굴복함에 따라 110년간이나 원나라의 복속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역사는 인접국인 중국의 영향이 컸으며, 외교의 중요성이 나라와 가문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크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시대에 우리문중에서는 문성공 안향(文成公 安向)선조께서 1290년 주자학을 최초 도입하였고 육영사업에 헌신하심에 따라 겨레의 스승으로 우뚝 서셨다.
이어 30년 연하이신 문의공 안문개(文懿公 安文凱)선조로 학풍이 이어졌고 입성본국론을 저지시키는 수훈을 세우셨다.
또한 문정공 안축(文貞公 安軸)선조에 이르러 눈부신 학문의 발전을 꽃피우시며 경기체가의 효시로서 국문학사에 길이 빛날 작품을 남기셨다.
문정공의 아우이신 문경공 안보(文敬公 安輔)선조께서는 안축선조에 이어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심에 따라 가문의 천재성을 만천하에 알리게 했으며 청렴결백한 품성과 효행은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이 되셨다.
우리문중의 고려사현(高麗四賢)선조께서는 심오한 학문적 소양과 애국충정으로 고위관료를 역임하심에 따라 지방호족에서 중앙의 신흥사대부 명문가로 문중을 반석위에 올려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 길이 빛날 위인이시다.
오늘날의 세계는 첨단과학문명의 발달로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정신문화 창달의 필요성이 절실히 제기되고 있은바, 삼가 우리문중을 세우신 시조공 안자미(安子美)와 사현선조(문성공 안향(文成公 安向), 문의공 안문개(文懿公 安文凱), 문정공 안축(文貞公 安軸), 문경공 안보(文敬公 安輔))의 삶을 본받아 명문가의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발전시켜 나감이 후손된 도리이며 의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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