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상의 의지만 있으면 향상은 계속된다"
어린시절 골목대장이었던 내가 바둑을 배운것은 초등학교3~4학년 때로 기억이 된다.
하루는 작은 아버지가 한참 천방지축으로 뛰어노는 나를 불러 "네가 성격이 좀 차분해질 필요가 있으니 바둑을 배워봐라"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본적인 규칙을 배우고 바둑을 알게 되었다.그러나 나에게 어린시절 바둑은 노는 것 이상으로 큰 매력을 주지못했다.
당시 나는 골목대장이었고,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를 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온 동네의 구슬과 딱지는 우리집에 다 모여있을 정도라고 할까??? 아뭏튼 나는 개구장이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기원이라는 곳에 갔다.원장이 10급 정도 되는 할아버지를 내 상대로 붙여 주었다.그래서 그 할아버지에 9점을 놓고 바둑을 두었는데,전판이 몰사하다시피 대패를 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승부욕이 강했던 나는 패배를 인정할수 없었다.그때부터 바둑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정확히 1년 후에는 그 할아버지를 거꾸로 9점을 접고 이겼다.
그 후로 얼마 안가 1급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둑을 향한 나의 긴 여정은 시작이 되었다. 그시절 이용호 7단과 서로의 집을 오가며 바둑공부를 했다.
눈치가 보일만하면 서로 집을 바꾸어 가며 바둑공부를 했다.그렇게 공부한 보람이 있었던지,72년 입단대회에서 운좋게 본선에 오르기도 했다.
물론 별로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지금은 프로9단이 된 서능욱, 백성호 등이 당시의 맴버였고 그들과 승부를 겨루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80년대 초까지 입단대회를 빼고는 바둑대회에 거의 참가를 하지 않았다.그 이유는 바둑대회 입상보다는 실력향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한가지 이유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채,이른바 언더그라운드에서 내기바둑을 두기 위해서였다. 내기바둑은 단순히 승부욕에 의한 것이나,큰 돈을 벌어보겠다는 것보다는 그저 생계를 위한 수단의 일부였다.
나는 결혼을 상당히 일찍 한편으로 어린 나이에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는데,당시 바둑계는 상당히 어려웠던 시절로 순수하게 바둑으로만 생계를 꾸려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바둑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원의 사범을 하는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몇 해동안 전국을 돌며 7단과 팀을 이루기도 했는데,당시 승부바둑에서는 거의 진 적이 없을 정도로 승률이 좋았다.
그러던중 83년 아마10강전에서 우승을 하게 되었다.최초의 전국대회 우승이었고,이때부터 전국적으로 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이 내기바둑으로선 한창 물이 올라있었던 나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84년 "KBS 바둑큰잔치"에서우승을 차지했다.그때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지금은 프로가 된 김준영씨였다.
우승자에게는 승용차를 상품으로 주었는데,나는 이때받은 승용차를 가지고 여러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한 이틀 술만 마시니 차 바퀴 두개가 없어졌고,그것이 다시 일주일 가량 계속되자 차체의 반이 없어졌다.4백50만원하던 맵시나 승용차를 3백30만원에 팔아 술을 마셨다.
집으로 돌아오니 20여만원이 남아 있었다. 내가 입단의 관문을 뚫을 수 있었던 결정적 찬스는 84년이었다.
이 입단대회를 대비하기 위해 나는 김철중,오규철,차수권,유경남,유병모 등과 절에서 합숙훈련을 하기도 했다.
84년 입단대회에서 나는 초반 7연승으로 입단이 유력시 되었으나 이후에 심리적 부담감으로 흔들리며 3패를 당했고,이용호,박영찬등과 3자동률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다.
이때 유창혁9단이 10승1패의 성적으로 입단을 했고,동률 재대국을 벌인 결과 박영찬이 역시 입단의 관문을 통과했다. 이 때에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바둑에 대한 원망도 생겨날 정도였다.그리고 이듬해 당시 마지막 일반인 입단대회에로 알려진 85년 입단대회에서 다시 본선에 올랐으나 역시 입단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때의 뼈아픈 실패로 입단에 대한 의욕이 꺽이고 바둑공부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처음으로 입단대회에 나온 이창호9단(당시의연구생)과 대국할 기회를 가졌고 내가 반집승을 거두었다.
비록 아마추어 때였지만 이창호를 상대로 반집을 이겼으니 다소 자랑할만한 경력이라 할수 있다.그 후 아마10강전 입상으로 프로.아마 대항전에 선발되어
다시 이창호9단과 두어 볼 기회가 있었다.정선의 치수로 대국을 했는데 당시 이창호 9단은 아직 신인이었던 차,내심 자신이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국에 들어가자 나는 현저한 실력차를 실감하면서 완패를 당했다.
30년 바둑 외길 인생을 살아온 나는 바둑과 함께 즐거운 추억도 많이 만들었다.
마음이 맞는 여러 강자들과 각종 지방대회를 원정다니기도 했는데 대회에서 입상하면 그 상금을 여행경비로 충당하곤 했다.
당시 같이 다녔던 멤버들은 김종수,이관철,김진환,박성균,김동섭,안재성,유병모 등으로 지금은 프로가 됐거나 아마강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또 신당동 일신기원에서 바둑을 처음 배우던 시기에 당시 아마추어였던 김희중 사범에게 넉 점을 놓고 패한 기억도 있다.
나보다 고수였던 이용호7단도 두점을 놓고 패했는데 우물안 개구리였던 우리는 김희중사범의 높은 기량에 바둑의 깊이를 실감하기도 했다.
90년대로 넘어가며 분당에서 기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이때부터는 대회를 거의 참가하지 못했다.그러던 중 작년에는 특별 케이스로 초청을 받아 지송배에 참가,3위를 입상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기보를 소개하면 84년 KBS바둑 큰잔치의 결승 기보이다.당시 아마추어인 김준영(현프로3단)과 둔 바둑인데,
지금생각해도 잘 둔 내용이었던 것같다.바둑큰잔치는 상당한 속기대회여서 깊은 수읽기를 할 시간이 없었는데,마지막에 대마를 잡으러가는 수순을 초읽기에 몰리면서도 정확하게 수를 읽었던것으로 기억된다.
내 바둑의 기풍에 대해서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힘바둑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론과 실리를 중시하는 편이다.
대신 발이 빠른 편은 못 된다.주변에서는 일본의 요다9단과도 비슷한 기풍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하지만 그건 좀 심한 비유이고,그냥 견실한 실리위주의 기풍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을 운영하면서부터는 승부에 다소 멀어지기도 했지만,요즘에는 다소 시간이 여유가 있는 편이라 바둑에 할애하는 시간이 꽤 많아졌다.
주변에 있는 김원 도장의 연구생들과 스파링을 가지기도 하고,B-TV초점국 퍼레이드를 진행하는 후배 박창규와 초점국 기보를 검토하기도 한다.
바둑 실력의 향상은 꼭 나이와 반비례하는 것은 아니다.물론 상당한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바둑에 대한 의지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바둑이 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실력 향상은 계속되리라 믿는다......
=위의 글은 2000년 바둑361에 기재된 아마강자파일 에서 퍼온 글입니다.
현재 2003년 강영일 아마7단은 분당에서 한국기원 분당지부를 운영하시고 계시며,
아마 바둑계의 발전을 위해 많은 힘(?)을 바라며.....
= 다음은 강영일아마7단의 프로필입니다..
1954년 서울 출생이시며,제7회 전국아마10강전우승(83)을 시작으로 제12회KBS바둑큰잔치우승(84),제16회 전국유단자대회우승(86), 제12회 전국아마10강전 우승(88),제13회 전국아마10강전우승(89), 탐라배3위(2001),학초배우승(2001)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