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 이어
나의 에스페란토 나라 여행기
< Mia vojaĝo en Esperanto-lando >
● 에스페란토를 접었다가 서울에서
에스페란토 입문 3년 차, 실제 셈하자면 언어학습 시간은 불과 1년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 학교졸업을 앞두고 진로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할 때인데, 에스페란토? 그러나 에스페란토와 영어 둘 다 잘하시는 나의 멘토 이종영 선생이 눈에 어른거렸다. 가사책임에, 진학준비 등으로 밤잠을 설쳐야 하는 와중에 건강에 적신호까지 맞게 되었다.
나는 교사직을 오래 영위하지 못하고, 생활 터전을 서울로 옮기면서 매우 바빴다. 서울에서의 첫 일터는 대한교원공제회였다. 은퇴 직장은 우리나라 최상위 손해보험사 –현대해상화재보험(주) - (前 東方海上火災保險(株))으로, 보험이라는 낯선 분야 적응에 바빠 에스페란토 계에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최초 팬팔과의 우편교류 만은 지속하였다. 오로지 그것이 끈이 된 셈이다.
● 보험에 대해 간략한 해설
본 제목과는 동떨어진 글귀지만 필자의 생활 터전이었으며, 요즈음 우리 생활에 가까이 와있는 보험에 대해 몇 자 글로 더듬어본다. --- 요즘 (자동차)보험 없는 집 없으니!!!
잘 아시겠지만 보험은 생명보험과 손해보험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보험의 원조인 영(국)어에서 보면 생명보험 : life insurance, / 손해보험 : non-insurance(非생명) - 약칭 해상화재보험 - 으로 일컸는다. 비전공분야라 입사 초기 몇 달간 직무능력제고에 매달렸다. 보험연수원 수강 (보험종사자를 위한 국책연수기관), 현장에서는 고맙게도 담당 부서장 (후일 일본지사장역임. 보험연수원 교수, 업계에 이름난 보험지식전문인) 께서 보험 서적을 한아름 주시면서 연구를 권했다 – 내게는 어디를 가나 도움을 주는 그런 분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분명 내게는 행운이다.
보험업은 재무부의 철저한 통제하의 제2금융권이며, 보험의 생성은 확률을 기초로 한다. 예를 들어 화재보험이라면 지역별, 건물구조별 및 형태별, 밀집도별 등등의 환경에 따라 발생하는 화재통계치를 보험료산출의 기초로 삼는다. 전국적으로 볼 때 빈번한 대형 화재로 이름난 곳 중 한 곳이 바로 우리 대구 서문시장 이었다. 걸핏하면 화재로 시장 전부가 화마로 생계터를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잃는 바람에 상인들은 크게 위협받게 된다.
그러나 보험에 가입해두면 화재 발생시 보험금(손해보상금)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되니, 서문시장 상인들은 기를 쓰고 보험가입에 매달린다. 서문시장은 화재다발지역이라 보험가입 억제지역이다. 그러니 일부는 서문시장 이외의 지역에서 보험에 가입하고는 점포를 서문시장내로 옮겨 보험을 유지하는 편법성(!) 사례도 보게 된다. 점포의 이동이고 즉 보험목적물의 이동이다. 이동이 되면 계약조건이 달라져 보험료재계산이 필요하다.
입사 후 필자가 처음 맡은 직무가 바로 이 보험변경 관련업무였다. 보험목적물(상가)의 주소지이동, 주변 사정, 업종 변경 등 원계약에서의 변경에 따라 발생하는 제반사항을 점검 새로운 계약이나 마찬가지 업무다.
서문시장의 경우 화재다발지역이라 보험료가 높다. 그리고 보험을 받아주지도 않지만, 서문시장밖에서 들어올 경우나 나갈 경우 보험료를 더 받거나 감액환급해줘야하는 고도의 산술업무다. 전국 발생건수를 한 창구에서 처리하다 보니, 대개 한두 달은 돼야 신청자에게 결과가 이첩되어왔는데, 필자가 수임한 후 3개월 후부터, 불과 3일 (접수1일, 업무처리1일, 결과 반송1일) 만에 요청 지소에 회송, 파격적인 신속처리로 일약 스타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업무처리를 위해 당시 국내에는 생산되지 않는 고성능 전자계산기(미분 적분까지도 계산 가능한)를 일본에서 수입하여 업무에 효률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지금은 컴퓨터처리로 신속 정확성은 물론 각 지역 점포에서도 처리 가능한 시스템 구축으로 굳이 본사창구에 집중할 필요가 없어졌다. 원시 업무 시절의 일화다.
● 학계 언론계 원로 에스페란티스토들과의 교류
--- 최봉열, 최덕신 님과
에스페란토에서 손을 떼다시피 했는데도 1970년 중반 어떤 경로로 알려졌는지, 필자가 대구지역에서 열열(?)한 에스페란티스토라며 다시 관계하게 된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 분은 당시 한국산업경제신문사 최봉열 부사장이었다. 그분은 후일 대한교육보험 대표이사로도 역임하신 호남인 거물 인사였다. 지연, 학연, 직연 어느 것 하나에도 연줄이 없는 그분과의 만남으로 다시 에스페란토 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이듯 나는 그렇게 해서 서울지역에서 다시 에스페란토 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손을 놓은 지 십수 년 만이다.
최봉열 선생은 소탈한 분이셨다. 나이 차에 상관없이 늘 친구처럼 대해주시고, 정·재계 호남인 주요 인사들과 만남이나, 야유회에도 동행했다. 내 직장은 명동, 그분의 직장은 가까운 퇴계로에 있어서 수시로 식사 만남도 하게 되었다. 당시 에스페란토 관계자들은 대부분 학자 및 재계출신으로 에스페란토 이념에 적극 동참, 운동 활성화를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분들임을 알게 되었다.
아래 : 최봉열회장님 어느 축하모임에서
최부회장의 주선으로 인현궁 길 건너 한국에스페란토협회 (Korea Esperanto-Asocio) 회장을 맡고 있던 최덕신 천도교 교령(首長) 실을 자주 방문하게 된다. 대구에서 조직되었던 학회와 서울에서 조직된 협회를 하나로 묶어, 최덕신 님이 맡게 된다. 교령 실 수운회관 16층, 매주 정기모임을 가졌다. 최덕신 회장을 비롯해 최봉열ㆍ신봉조 교수(이화학원이사장, 이화여고교장, 상명학원이사장 등 역임)ㆍ 양희석 교수ㆍ김교영 선생ㆍ석주선(한국복식사학자, 동덕여대 교수, 영남대 이학박사), 유봉영(조선일보 부사장) 등등 그외에 학계, 언론계 주요 인사들께서 협회 이사진으로 구성, 거의 매주 이사회 시작 전 에스페란토 독회를 필자가 진행을 맡게 되었는데, 사회적 명성높은 분들이라 조심스러웠다. 최봉열 당시 부회장이 주선해 주신 이런 행보가 아직도 나의 뇌리에서 가시지 않는다.
여기에서 최덕신 회장에 대해 잠시 돌아보자면: 그분은 군 장성 출신으로 한국동란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 서독대사, 외무부 장관 등의 화려한 경력자로, 공직에서 은퇴 후 민족종교 천도교 天道敎 교령으로 계셨다. 그분 재임 시 건립한 수운회관 교령실(16층)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오르내리는 강골이었고, 자그마한 체구에 괄괄한 성품, 카리스마가 넘치는 거인이었다.
여기에서 잠시 교령직 이후 그분의 행적을 살펴보자면 - 어느 날 오전 모임 중 전화를 받더니 불같이 고성을 지르고는 화가 극에 달했다. “내가 외무부 장관을 지낸 사람인데, 여권발급에 신원조회를 해야 한다고?” (당시는 단수여권제) 정부에 대해 격렬한 불만을 쏟아내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그 이후 정부와의 갈등 및 여러가지 사정으로 당신께서는 미국 망명에 이어 북한으로까지 넘어가게 된다, 부인과 함께.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 등 요직이력인데다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사로 북한 치하에서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 유공자 묘지에는 그분의 자리가 마련돼있다. 자녀들 일부는 당시 정부의 규제로 생활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는데, 불과 얼마전 아드님(차남) 한 분은 이북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북한에도 에스페란토가 들어갔다. 에스-조선어 사전도 발행했는데, 필자는 입수하지는 못했으나 현품을 본적은 있다. 최덕신님은 북한 망명이후에도 매년 세계 유명도시에서 개최되는 에스페란토인들의 모임 - 세계에스페란토대회(Universala Kongreso de Esperanto)에 참석하여 우리쪽 대회참석자들과 조우하기는 했으나, 먼 발치에서 수인사를 나누는 정도였 다고 한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공개리에 남북한인들의 접촉은 잘못 오해받을 일이 될수 있다ㅡ 정치이념에 묶여 마음놓고 만나지도 못하는 시대상을 보면서 인간의 갈등은 어디에도 언제이고 나타난다.
지금 북한의 에스페란토활동은 거의 감지되지않고있다. <사진중앙 : 최덕신씨>
● 가고파의 작가 시인 노산鷺山 이은상 선생과도
1960년대 중반 한국내 거점이었던 대구의 한국에스페란토학회(회장 홍형의 교수)의 기획으로 넓은 서울로 옮기게 되는데, 바로 가고파의 작가, 거장 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께 맡겨지게 된다. 대구에서 잔뼈가 굵은 김모씨를 실무총책으로하여 서울에서, 주로 각급 대학에서 엄청난 에스페란토인들을 확보함으로서 에스페란토 확산에 기폭제가 되었슴은 물론 조직확산에도 큰 디딤돌역이 된다. 현존 60~70 대 서울의 에스페란토인들 대부분들은 그때 시작한 분들이다.
- 노산을 모시고 서울 활동을 개시한 김씨는 우리학교 기초반 수료식에 고등학교 교모를 쓴채 축하인사로 참석, 사진에 남긴 인물로 - 나와는 잘 알고 있는 동지다. 후일 일본여성에스페란티스토와 결혼까지한다.
한번은 필자가 최봉열부회장을 동행해 노산 선생댁을 방문해 그분과의 조우를 하게 되어, 국내 문학계 거장을 직접 뵙게 되는 기회였다. 그러나 노산께서는 얼마 못돼 손을 놓게 되면서 실무자가 추진했던 조직마저 넘기게 되는데, 이를 최덕신회장이 기존 대구에서 올려보낸 학회와 묶은 협회를 맡게 된다. 이러한 조직내의 사정은 이 정도에서 마감한다.
왜 여기에 저명인사를 거명하는가하면, 그분들 저명인들은 에스페란토에 관심과 그 사상에 마음을 보내는 분들임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다음에 계속
첫댓글 친구야 교직에 손 놓고 대구에 온 직장이 은행인줄 알고 있었는데 보험회사었다고
야 .전공 교직을 그만 두고
낮설고 고도의 재경지식과 산술기능이 요하는 직종에 뛰어들어 남다른 두각을 나타낸점
에스페란토로 국내학자는 물론 세계인.과 친구하고 그리고 제2금융권의 유력지인과의 생활 흔적을 보고 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네.
자네와 동기동창이란게 자랑스러워 댓글로 남기네
과찬의 말씀,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댁내 무안을 비네.
나의 친구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그간의 족적을 올려줘서 고마우이.
학창시절 나 역시 에스페란토반에서 활동한 한 사람이었는데 계속 이어온 끈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에스페란토로 인해 풍성한 삶을 누린 서되반님과의 인연으로
나 역시 카페지기가 되어 네티즌과의 교류로 바쁘게 살고 있다우. ㅎㅎㅎ
기억하남요? 에스페란토씨^^
인생이 실면서 하고싶은것도 많지만 그많은것들 중 내 숨결이 닿는게 한계가있는거, 살아숨쉬는 우리학교출신들이 한분도 보이지읺아 본 보고서를 시작했다오. 그러데도 그런시람도 있구나ㅡ 해줘요
새해 복많이받으시고 우리카페 지켜줘요
@서되반 이낙기 아날로그 세대탓인가 봅니다.
나 역시 동기회에서 낙기님이 날 카페만들라고 하지 않았다면 네티즌하고는 멀었을 겁니다.
60세때 부터 남도창으로 자원봉사를 하다가 양양산골로 오는 바람에 눈물을 삼키며 창을 접고 네티즌으로 활동한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 가려면 잘 한 것 같습니다.
@김능자 唱을! 명석한 재주의 소유자 바람새님께서 창을 ? ㅡ 과연 남다른 도전이었다오. 양양 짓푸른 바닷바람소리에 창소리를 섞을때 만들어질 소리의 환상, 상상이 되네요. 본디 창을 수련할때는 폭포앞에서 괴성으로 목을 단련한다던데, 바다소리에 단련도 ㆍ ㆍㆍ 상싱이 되는데 ㅡ
낙기 성!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땅위에서 엉금엉금 길때 성은 하늘에서 신선들과 함께 펼펄 날았네 그랴! 대단한 노력이고 성실이었다고 생각되네. 남은 날들도 그렇게 이어져 가길 기원하요. ㅎㅎㅎ 부산넘
부산아제 새해복많이 받으시고 ㅡ
부산에도 에스페란토를 접하는 분들이 다소있다오. 다늙어가니 시답잖은 발자취라도 내보일 카페의 존재에 감사한다오. 인터넷이라서 그런지 이 글을 어떤 엣인이 읽어보고 내게 연락보내는 이들도 있어 조심스럽게 이어가야지한다네
좀더 쓰려하는데 지켜봐주시게나
클릭수가 너무 높잖아요.??
'에스페란토가 뭐야' 하고 기웃거리나 봐요.ㅋㄷㅋ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