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부근의 록클라이밍②
도봉산연봉
조장빈·이강승(譯) / 근대등반사팀
도봉산 최고봉은 자운봉(740m)이고 주능선은 회룡사 계곡 분수령에서 남으로 길게 이어져 주봉인 신선대를 거쳐 우이암에 이른다. 이 구간 중, 대체로 649봉에서 신선대 구간을 포대능선이라 하며, 한국전쟁 후 능선 위에 군사시설이 설치되어 유래한 명칭이라 한다. 고찰이 자리한 산을, ‘寶陀洛迦山’에서 유래한 포태산(胞胎山)이라 했듯이 ‘포태산 능선’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도봉산의 주봉은 신선대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근대 측량기술로 도봉산의 최고 높이가 자운봉임을 알게 되기 전에, 신선대를 풍수지리적인 주봉으로 여겨 주봉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처음 일제강점기 토지조사국에서 측량을 할 때, 당시엔 무명봉인 716봉에 지적삼각점을 설치하고 이 높이를 도봉산의 주봉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포대능선은 서울근교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에게 암릉 등산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인기코스로, 근대등반 초기에도 대표적인 등산코스였다. 1930년 전후, 하이커들은 암릉을 오르내리며 자운봉·만장봉·선인봉에서 암벽등반을 하기 시작한 클라이머들의 생소한 모습에서 자극받아 1930년대 중반 암벽등반 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임무는 〈록클라이밍 경성부근(ロツク·クライミング -京城 附近-)〉(1931. 5)에서 “도봉산은 경원선 창동역의 동북방에 위치하며 12개 봉우리로 이어져 있다. 그 중 가장 높은 것이 자운봉이다. 최고로 높은 봉우리인 것이 확실하지만, 도봉산 중에서 클라이밍이 가장 쉬운 봉우리로 여성들도 등정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초심자 혹은 여류등산가에게 안성맞춤이라 하겠다.”라며 포대능선 12개의 봉우리를 언급하였고 자운봉은 북한산 보현봉과 함께 암벽등반 초심자들의 등반 대상지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1932년 11월에 경성일보 알카우회(アルカウ會)의 도봉산 등산에 초청인사로 참여하여 100여명의 회원 중 30명과 자운봉 등반을 한 바가 있어, 이즈음 자운암 등반이 하이커들에게도 등산 대상으로 자리한 듯하다.
박순만은 《사람과 산》(1995. 6월호) 인터뷰에서, 1933~34년경 암벽등반을 시작했고 2년쯤 지나 사람이 늘기 시작해서 주말이면 도봉산 일대에 15명 정도가 등반을 했는데, 그 중 몇 명의 한인 클라이머가 있었지만, 대개 천축사 위로해서 의정부 쪽으로 걷는 등반을 많이 했다고 전한다.
임무와 함께 자운봉 정상에 오른 30여명의 알카우회원, 京城日報(1932.11.16.)
초기 포대능선이 코스에 대해 〈京城日報〉(1935.5.28)의 경일산악회(京日山の會) 기사로 그 길을 가보자. 이 기사에 신선대는 “J(716m)”로 표기하였고 최고봉은 자운봉으로 기록하고 있다.
도봉연봉 〈京城日報〉(1935.5.28)
이제 정상 종주에 대해 얘기하자면, B피크는 정상을 오르지 않고 상단을 돌아서 C피크에 오른다. D, E를 종주해서 F봉은 올라도 좋고, 중턱을 돌아 G피크에 이어 H피크를 오른 후 I피크의 팔부 능선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이 중 A, B의 안부와 B, C의 안부는 모두 망월사에 이르는 루트가 있고 D, E 사이도 거의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종주코스는 경성근교에서는 볼 수 없는 통쾌한 코스로, 북면은 완만한 능선이지만 남면인 경원선 쪽으로는 600미터 이상의 연봉이 깎아지른 듯이 우뚝 솟아올라 수락산, 불암산이 내려다보인다.
태고적, 이 일대는 연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이후에 단단한 화강암층 관입이 있었고 그것이 수만 년의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받아 부드러운 화강암은 깎이어 모래가 되고 비에 쓸려내려 철원, 복계 방면에 걸쳐 평야를 만들고 단단한 관입암은 지조 견고하게 자세를 가다듬어 늠름하게 오늘의 기이한 승경을 남겼다. 이는 추가령지구대라고 이름붙인 경원선 일대의 특수한 지형이다. 천주라고 여겨지는 이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가 올라앉은 이러한 경관은 경성 근교의 바위산에는 많이 보인다. 바위는 떨어질 듯해도 흔들리지도 않아 바위를 올려놓은 신의 작품에 경외감을 느낀다. (중략)
“도봉산의 일반적인 루트 견취도(見取圖)”의 포대능선 부분
도봉산 종주로는 피크에서 피크로 이어지는데, 처음 산을 찾아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곤란한 부분이 두 곳이 있다. 상기 B 피크와 이어진 피크의 내리막 구간이다. 비와 짙은 안개가 낀 날에 젊고 연약해 보이는 여성이 "이걸 어떡해"하며 자일로 하강을 하지만 “그래도 멋져, 정말 산에 올랐구나”하고 등산의 재미를 느낀다. 하지만 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B와 l는 숲을 뚫고 피크 중턱 둘레로 루트를 잡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바닥에 이 I 피크와 J피크 사이의 V자 상황을 무리해서 내려가도 다음 J피크에서는 록클라이밍의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결국은 급경사의 계곡을 100미터쯤 내려가 중간 지점의 루트로 나와 J피크 북쪽 능선자락의 계곡을 올라 J피크로 나온다.
이 종주로는 여름은 녹음이 짙어 가고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나무에 마음이 시원하다. 길이 아닌듯한 구간이 있기 때문에 잘 살피고 언제든지 안부로 나갈 수 있도록 유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J봉과 K봉 사이에 생긴 평평한 안부에 나오면 도봉산의 주봉 J피크(716여m)는 대략 사오십 미터 쯤 능선을 올라 경치가 뛰어난 곳에서 옆으로 간다.
“이거 참, 큰일이네, 륙색을 내리는 것도 힘겨울 정도로 배가 고파”라고 말하는 것은 망월사에서 J봉까지 대략 1시간 반 정도 소요되기 때문이다. 건강한 서생이 모이면 한 시간이면 됩니다. 건강한 일반인들이라면 역에서 여기까지 3시간이면 여유롭지만, 허약한 동반자가 있으면 3시간 반은 걸릴듯하다. 처음에는 망월사에서 함께 11시에 넘겨 나왔기 때문에 이때 이미 시계는 12시가 넘고 배가 너무 고파서 알코올에 불을 붙이기를 기다리다 못해 우선 사과를 한입 먹었다. 어쨌든 '배고파서는 안 돼요…'라는 경구가 있듯이 배고프면 매우 피곤해진다. 그래서 억지로 J봉으로 올라가지 않고 산중턱의 D, E봉 근처에서 '여기서 점심을'라고 해도 좋다. 자, 식사 후에는 "여기 경치는 어때?"라고 힘찬 목소리가 나온다. 정말 훌륭하다. 고생하여 숨을 헐떡이며 올라온 보답은 단 1분간의 조망에도 느낄 정도로 호화로운 경관이다. 오른쪽 정면에 우뚝 선 것은 최고봉 자운봉 아래로 수백 미터 삭립절벽! 경원선을 장난감 기차가 달리고 가도를 활활 타오르는 목탄차가 기어 다니고 발밑에 고산식물이 드문드문 꽃을 피웠다. 산의 북쪽 여름을 뒤덮어 가리고 있는 밀림의 아름다움, 발약한 사람에게 '어서 오세요'라고 눈을 마주치면 '올라오길 잘했어'라고 응답하다.
2시에 천축사를 향해 바로 출발, 대에서 천축사로 가는 루트는 K피크의 아래쪽이다. 자운봉을 향해서 왼쪽으로 돌면 조금 위험한 느낌이 들지만 괜찮다. 기어올라 자운봉 안부로 나온다. 조심스레 보면,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뚜렷해서 바로 루트를 발견할 수 있다. 왼쪽은 절벽이지만 안심하고 K봉의 왼쪽 아래로 계속 5분 정도 가면된다. 이 자운봉(770여m)의 암모(岩帽) 위는 자일이 없으면 위험하며, 이곳부터는 만장봉(750m) 선인봉(700m)과 합쳐 세 봉우리가 죽순처럼 나란히 늘어섰다. 이 서쪽 아래로 내려가면 선인봉 아래로 나온다. 여기서 왼쪽 송림 속으로 루트를 잡는다. 조금 왼쪽으로 지나갔나? 라고 생각할 때쯤에 탁 트인 초원이 있고 쉬고 싶지만 참고 오른쪽 밭쪽으로 내려서면 천축사 마당에 이른다.
북한산 백운대 결단암 슬랩을 오르던 나뭇꾼과 선비를 뒤이어 1920년경에는 ‘알피니즘’을 인식한 일본 유학생들이 등산화를 신고 오르고 도봉산 연봉에서 암릉을 즐겼다. 임무와 아처에 의해 우리나라 초기 암벽등반이 시작되기까지 그리고 1930대 중반, 인왕산 자락의 클라이머들이 본격적인 한인클라이머 시대를 열기까지, 백운대 등정과 도봉산 연봉의 암릉을 즐기던 긴 등산 행렬이 이어져 왔고 지금도 이 길을 걷다 클라이밍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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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道峰山望月寺誌》(1934)에 포대능선 지명 관련 기록은 없고, 월간 <산>(1971. 12월호)에 전 한국산악회 장재헌 부회장이 “1938~1939년 정월 道峯山 胞胎山에 올랐을 때, 멀리서...”라며, 일제강점기 조선산악회 창립회원인 이이야마 다츠오(飯山達雄)를 만난 기억을 얘기하는 도중에 도봉산 능선을 “胞胎山”이라 언급하고 있다.
2. 카카오맵에는 “도봉산(신선대 726m)”이라 표기하고 있다.
3. 손경석의 산의 높이와 이름의 정립이 등반사 정립에 정확성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결국 《한국등산사》에서 김정태의 집선봉 초등 코스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였다. 이는 등반에 대해 객관적인 사료가 없는 상황에 기인한 것이지만, 김정태 자의적인 지명 변경에 따른 혼란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4. 경성일보는 초기 등산문화 정착에 언론사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1927년부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서울근교 위주의 산과 역사유적을 대상으로 모집 산행을 하였다.
5. 기사에 “운장각(雲莊閣)을 왼쪽에 두고 약 10여 정(丁)을 오르면, 건물터가 남아 있다, 도봉산통 임무군의 설명에 의하면 조선시대 임금이 천축사에 참배할 때의 숙사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고 하여 임무가 도봉산 전문가로서의 사회적 인식이 있었고 역사에도 해박했던 듯하다.
6. 박순만 조선산악회원으로 경성전기 하마노(濱野) 파티와 함께 등반하였다. 1937년 북한산 동남면 우측을 개척등반을 하였고 김정태와는 1936년 9월 13일 만장봉에서 첫 만남이 있었다.
7. 백운대 정상부 철책이 시작되는 좌측 슬랩을 말한다. 필자는 이곳을 “遊山”과 “근대등반”이 교차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얘기하고자 한다.
8. 1920년 김상용 일행(시인, 전 한국산악회 이사)이 이곳을 올라 대(臺)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였다. 김상용은 당시 문단에서 “몽블랑의 왕자”라 칭할 정도의 산악인으로 알려졌으나 암벽등반을 하지는 않았고 김상용이 리딩하던 산행 패턴으로 보아 파트너였던 황욱 선생도 암벽등반을 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황욱 선생의 활발한 등산강연 활동 및 1935년 서울스키클럽(처음엔 산악회) 창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김교신 선생에 이어 양정고보의 등산활동을 이끌어 우리나라 등반사의 한 맥을 잇는 양정고보산악부의 설립에 지대한 역할과 배경이 되었음은 기록해야할 중요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