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외봉의(필봉)추억
박준채
말뫼산은 행정구역상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위치한 조그만 높이의 산으로 정상을 말뫼봉이라하며 현재 문헌상 필봉으로 되어 있으며 좌측으로 연동마을 뒤쪽으로 남송마을 우측으로 비석동 호천리 안동리로 이어지는 산이며 농촌사람들의 땔감을 공급해주고 주로 평동리와 고도리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휴식처 같은 곳이다
잠깐 해남군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조선시대 김서구 현감이 해남으로 부임하였는데 텃세가 심해 김서구 현감이 금강산에 올라 해남의 지형을 살펴보게 되는 데 텃세가 심한 이유가 좌청룡인 우슬재 우청용인 아침재 붓모양인 말뫼봉 때문에 해남에 인물이 많이 나오고 텃세가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에 김서구는 관솔들을 시켜 이 세 곳에 대해 각각 석자세치씩(약 1미터) 깎아내리는 대공사를 단행하였다함(이상은 해남신문 기자의 기사를 인용하였음)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 나이 16세에 겪었던 이야기이다
해남군 해남읍 평동리에서 태어나 태를 묻었으며 지금은 평동리를 떠나 터미널 부근에서 살고 있지만 그 당시 해남읍 평동리 일부와 평남리는 거의 논밭이었으며 지금의 읍사무소를 기준으로 동백아파트 모두가 허허벌판이었다
해남읍 평동리 우리 집에서 탱자나무 집을 지나면 들길이 나오고 큰 주름나무가 있는데 옛날 농사 지은 사람 땔감 하러 다닌 사람이면 이곳에서 쉬었다가는 쉼터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고
샛돌을 지나면 온댕이 냇가가 있고 여름이면 냇가에서 붕어도 잡고 자라 장어도 잡았던 기억이나고 벌거벗고 목욕도 하였으며 우리 논에 진흙이 있어 방학숙제로 탱크도 만들고 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냇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말뫼봉 올라가는 길이 나오고 늦가을이면 똘에서 삽으로 땅을 파면 미꾸라지가 대여섯마리씩 나와 바케스로 절반 가까이 잡았던 곳이다
1967년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눈이 많이 내린 다음날 우리 또래 아이들이 7~8명이 모여 토끼를 잡는다고 말뫼봉으로 향했고 최정상인 말뫼봉까지 올라가 솔가지를 엉덩이에 깔고 내려오기를 반복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눈썰매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비석동에 모인 우리는 추위가 엄습해오고 잡으려던 토끼는 못 잡고 공기총과 화약을 가지고 간 우리들은 화약을 여러 겹 뭉쳐서 돌로 내리치니 불이 붙어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서 불을 붙이자 불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면서 어린 우리들은 불을 끄다가 당황하기 시작하면서 우왕좌왕 하다가 누구할 것 없이 뿔뿔히 헤어져 도망을 가기 시작했고 나 역시 집으로 왔다
그다음날 나는 북일 외갓집에 가서 일주일 정도 있다 왔더니 친구가 와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는데 산불이 나서 마을 사람들이 불을 끄고 소방차까지 동원됐다고 하면서 신나게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때 그 산은 같이 있었던 친구와 동생의 선산이었으며 묘가 5~6섯봉 타서 묘지에 불이 나면 짚을 썰어 묘를 덮어주는 옛날 풍습이 있었으며 그렇게 처리를 했다고 한다
산불을 냈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겠지만 미성년자이고 거기에 있던 친구와 동생의 선산이었기에 유치장 신세를 면한 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이지만 55년이 지나고난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도 하나의 추억이요 잊지 못할 얘깃거리가 될 것 같다
그때 같이 있었던 친구와 동생들 만나면 그 얘기를 하면서 추억에 잠기며 웃으면서 박장대소 하곤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두 동생과 미국에서 사는 동생 서울 광주에서 사는 친구와 해남에서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는 친구와 내가 살고 있다
친구와 동생들 잘들 있지 보고 싶고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