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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고향을 찾아서 8
-신동문, 그의 표류의 끝은!
-신동문 편
“하루 종일 수없이 비행기를 날리고 몇 차례인가 풍선을 띄웠으나 인간이라는 나는 끝내 외로웠고 지탱할 수 없이 푸르른 하늘 밑에서 당황했다.” 하늘도 푸른데 무엇이 그를 그토록 지탱할 수 없게 하여 평생을 섬 아닌 섬, 물길이 갈라놓은 고립된 산 밑 외딴 농막에서 홀로 지내게 했을까.
시인 신동문(1927년~1993년), 그는 시인, 언론인, 출판인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작 기간은 안타깝게도 10여년에 불과하다. 그는 1956년 등단(“풍선기” 조선일보신춘문예)이후 겨우 10여년 남짓 활동하고 1967년 “내 노동으로” 발표를 끝으로 시작활동을 접는다. 이후 신구문화사와 계간지 <<창작과 비평>>, 경향신문 등에서 출판인, 언론인으로 일하며 번역서와 수필 등을 발표하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않는다. 1975년 긴급조치 때 백낙청 씨가 유학을 가며 맡긴 ‘월남전’기사로 인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고는 더 이상 글을 발표하지 않는다. 그는 작품 활동을 접음과 동시에 충북 단양 오지로 내려간다. 따라서 등단 초기 활발했던 활동에 비해 그의 활동 기간은 통틀어 20여년, 짧은 여정으로 그의 작가로서의 존재는 오늘날 안타깝게도 잊혀져간 이름이거나 젊은 독자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사실이다.
<좌로부터 박영수,박인식,도종환>
이번 10월호엔 신동문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가보자는 박인식 팀장의 제안에 필자는 “네? 신동문요?” 라고 연신 물음표를 달았다. 그의 시 “아, 神話같이 다비데군”과 “내 노동으로” 등 부연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그래!”라고 그제야 그의 정체가 어렴풋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취재팀은 살아생전 신동문과 가깝게 지냈다는 그의 지인들을 수소문해 먼저 청주로 간다. 가을빛이 눈부신 아침 취재일행은 서울을 출발하여 중간 중간 뽀얀 안개를 가르기도 하며 청주 예술의 전당에 도착했다. 예술의 전당 별관 ‘2008 문화의 달 행사추진위원회’ 사무실에서 박영수(위원장, 전 충북대교수, 수필가)님이 일행을 맞는다. 10월, 문화의 달 행사로 ‘충북 근.현대 작고 예술인 특별전’이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때마침 그 지역 출신인 도종환 시인도 행사준비로 먼저 와 박영수위원장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고, 사무실 분위기가 매우 분주해 보인다. 이 행사에 충북지역 작고시인으로서 오장환, 권태응, 정지용 등과 함께 신동문 시인도 포함돼 있다.
1927년 7월20일 충북 청원군에서 김재한과 김대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신동문, 그의 원래 이름은 ‘건호’다. ‘동문’이란 이름은 그가 폐질환으로 충북 도립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매일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니 죽어 병원을 나가는 사람은 모두 동쪽 문을 통해서 나가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이름을 ‘동문’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시인은 ‘시구문’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얘긴데 그것만 봐도 범인은 아닌 듯싶다.
<청주 가경동 시비>
그는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 때 어머니와 함께 청원을 떠나 청주시 석교동 52번지로 이사를 나온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그는 결석이 잦아 초등과정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다. 하지만 서울로 상경해 휘문고보 수학 중 극비로 일본의 항공병학교에 유학한다. 19세 땐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하지만 등록금이 없어 입학을 포기하고 현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곧 국가대표 수영선수로 발탁되어 런던올림픽에 참가하려던 차에 무리한 연습으로 늑막염에 걸려 출전을 포기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청년기를 폐질환으로 인해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23세 때 맞은 6.25전쟁, 그는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3년을 복무하는데 다행히 여기서 얻은 수확이 바로 그의 등단작이 된 연작시 “풍선기”다.
초원처럼 넓은 비행장에 선 채 아침부터 기진맥진한다. 하루 종일 수없이 비행기를 날리고 몇 차례인가 풍선을 하늘로 띄웠으나 인간이라는 나는 끝내 외로웠고 지탱할 수 없이 푸르른 하늘 밑에서 당황했다. 그래도 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하여 신열(身熱)을 위생(衛生)하며 끝내 기다리던, 그러나 귀처(歸處)란 애초부터 알 수 없던 풍선들 대신에 머언 산령 위로 떠가는 솜덩이 같은 구름 쪽만을 지킨다.
-풍선기1호 전문
“풍선기”는 총 20여 편에 이른 연작시로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등단을 하고, 그해 “제3포복” 3편과 함께 묶어 <<풍선과 제3포복>>이라는 제목으로 충북문화사에서 첫 시집을 출간한다.
흔히들 시인의 문학성을 논할 때 그 시인이 활동했던 동인 그룹의 유파를 예로 들면서 ‘청록파다. 생명파다. 시문학파다.’ 아니면 ‘서정시다. 참여시다.’ 라고 계열을 가르면서 시의 유형을 정의하기도 하는데 신동문의 시는 어느 유파에 속한다고 가름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의 시에서 주목되는 점은 시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세계관이다. 신동문은 일제강점기엔 청소년기를, 청년기에는 6,25와 연이은 정치적 혼란, 1960년 4.19와 5.16쿠데타 등을 거치며 시작활동을 한다. 따라서 그의 시(50여 편)에서 그는 전쟁이 빚어내는 참혹함을 고백하고 ‘제3포복’의 자세로 당면한 현실의 억압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그린다. 군인으로 직접 전쟁을 체험하고 그를 전면적으로 소재로 한 그의 시는 사실감이 한층 더해져 독자로 하여금 동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생전의 신동문시인-우측>
한편 4.19 당시 현장을 지켜보며 쓴 “아! 神話같이 다비데群들”은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노래한, 그의 대표적 시로써 단연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서울도/ 해 솟는 곳/ 동쪽에서부터/ 이어서 서 남 북/ 거리거리 길마다/ 손아귀에/ 돌 벽돌알 부릅쥔 채/ 떼지어 나온 젊은 대열/ 아! 神話같이/ 나타난 다비데群들// 혼자서만/ 야망 태우는/ 목동이 아니었다./ 열씩/ 백씩/ 천씩 만씩/ 어깨 맞잡고/ 팔장 맞끼고/ 공동의 희망을/ 태양처럼 불태우는/ 아! 새로운 神話 같은/ 젊은 다비데群들// 고리아테 아닌/ 巨人/ 殺人專制 바리케이드/ 그 간악한 조직의 교두보/ 무차별 총구 앞에/ 빈 몸에 맨주먹/ 돌알로써 대결하는/ 아! 神話같이/ 기이한 다비데群들// 빗살 치는/ 총알 총알/ 총알 총알 총알 앞에/ 돌 돌/ 돌 돌 돌/ 주먹 맨주먹 주먹을/ 피비린 정오의/ 鋪道에 포복하며/ 아! 神話같이/ 육박하는 다비데群들// 제마다의/ 가슴/ 젊은 염통을/ 전제의 방패삼아/ 貫革으로 내밀며/ 쓰러지고/ 한 발씩 다가가는/ 아! 神話같이/ 용맹한 다비데群들//
-아! 神話같이 다비데群들 중에서
그는 시위 현장에서 젊은 혈기들을 만나 분열의 혼란정국 속에서도 희망을 엿본다. 시인은 그들의 올곧은 양심, 정의와 용맹을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다윗(다비데)과 골리앗(고리아테)에 비유하며 막강한 권력에 대항하는 소시민들의 극복의지,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던 갈증과 욕망, 자아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도 잠시뿐 혼란은 계속되고 시인은 다시 절망감에 빠진다. 그는 이번엔 “비닐우산”이라는 시를 통해 독재 권력의 남용을 풍자적으로 비판한다.
비닐우산,/ 받고는 다녀도/ 바람이 불면/ 이내 뒤집힌다./ 대통령도/ 베트남의 대통령./ (중략) //비닐우산,/ 잘도 째지지만/ 어깨가 젖는다./ 믿을 수가 없다./ 대통령도/ 브라질 대통령.// 비닐우산,/ 흔하기도 하지만/ 날마다 갈아도/ 또 생긴다./ 대통령도/ 시리아 대통령.// 비닐우산,/ 아깝지도 않지만/ 잠깐 빌려 쓰곤/ 아무나 줘버린다./ 대통령도/ 알젠틴 대통령.
-비닐우산 중에
우산을 써도 ‘어깨가 젖는’ 무력함, 이러한 그의 불의에 대한 비판의식은 그의 시작활동을 오래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음직하다. 그리하여 1967년 “내 노동으로”를 끝으로 시작활동을 접고 이후론 신작시를 발표하지 않는다.
내 勞動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내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내 勞動으로 전문
그는 일상에서 언제나 약자 편에 서서 대변했다. 하지만 혼란과 부정의 시대 상황 속에서 표류하는 삶을 산다. 1975년 긴급조치 때 백낙청이 유학을 가면서 맡기고 간 월남전 기사(이영희 씀)로 인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온 이후 그는 작품을 더 이상 발표하지 않는다. 그리곤 아예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남한강 섶 산비탈에 농막을 짓고 정착하며 농사를 짓는다.
<청주 무심천>
박영수님은 시인(신동문)을 이렇게 회상한다. “ (신동문)선생은 우리 청주고교 문학서클(푸른문 문학동호회)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당시 선생은 폐질환으로 인해 도립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우리는 병실을 찾아가 선생께 문학 지도를 받기도 했지요. 저도 몇 차례 시를 써가지고 가서 보여드렸으나 선생은 이렇다 저렇다 말씀이 없으시더라고요. 처음엔 영문을 모르고 자꾸 써가지고 갔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빨리 포기하라!’는 뜻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시를 포기하고 대신 수필을 쓰게 됐지요. 선생은 이곳 청주의 무심천을 하염없이 걷곤 하셨어요. 까치재 쪽을 바라보면서요. 선생에겐 첫사랑이 있었는데 6.25 때 다리가 끊긴 한강을 도강하여 찾아갔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결혼은 다른 사람과 했어요. 결혼을 늦게 했기 때문에 미망인이 제 집사람과 동기지요. 지금은 서울 화곡동에서 혼자 살고 계시지요.” 박영수님은 시인이 빵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이 멋있어 보여 한때 자신도 그를 흉내 내어 빵모자를 쓰고 다니기도 했는데 시인은 못됐다며 멋쩍게 웃는다.
박영수 님의 안내로 청주시 가경동에 있는 시비를 찾아간다. 마침 유치원생들이 그곳 공원으로 소풍을 나와 시인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 천진스럽게 시비에 올라타기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며 재잘재잘 정신이 없다. 시비에는 그의 등단작인 “풍선기 1호”가 수록 되어있다.
취재일행은 제천경찰서 앞에서 홍석하(시인, 전 초등교사)님을 만나 단양으로 간다. 단양까지 가는 동안 홍석하 시인은 첫 만남인데도 서글서글 농담을 건넨다. 단양의 호수 주변 소금정 공원에 1998년 5월에 세운 신동문의 첫 시비(“내 노동으로” 수록)가 있다.
일행은 사인암으로 가 신기선(시인, 전 성신여대출강)님을 만나 시인(신동문)이 1975부터 1993년 작고할 때까지 살았다는 애곡리 농막으로 간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던가. 신기선 시인은 신동문을 좋아해 함께 이곳으로 따라 내려와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도 이곳에 남아 그와의 옛 추억을 보듬으며 살고 있다. 신동문은 이곳 애곡리, 섬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침술을 배워 지역 주민들을 치료해주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그를 ‘신바이처’라 불렀다고 한다. 그의 침 시술을 받은 사람이 무려 1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치료비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무료시술을 받은 사람이 너무 미안해하면 그는 “정 미안하면 농장 일이나 두어 시간 거들다 가시오.” 라고 했단다. 침술막과 농막은 약 30m 정도 떨어져 있다. 침술막은 그런대로 반듯한 농촌한옥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는 침술만 거기서 펼쳤을 뿐 그의 보금자리는 끝까지 단 칸(방1 부엌1) 농막이었다고 한다.
<애곡리 침술막에서_좌로부터 홍석하, 필자, 신기선, 박인식>
이곳 침술원은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내려와 시술을 받고 요양을 하고 갔다고 한다. 신기선 시인은 김인, 조남철, 김수영 등 당시 바둑계 명인들의 이름을 대며 그들이 신동문에게 치료를 받고 요양을 했으며, 신동문도 꽤 바둑을 즐겼다고 전한다.
흙벽돌로 지은, 지금은 다 허물어져가는 농막 앞에 옛날 술병들이 허옇게 세월을 바래며 뒹굴고 있다. 신기선, 홍석하 시인은 흙고물에 뒹구는 술병을 일으켜 세우며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는데….” 라며 말끝을 흐린다. 신기선 시인은 “그래도 어찌 생각하면 그 사람(신동문)이 명줄이 긴 사람입니다. 한번은 그가 단양의 어느 절 옆에서 잠을 자는데 벼락이 쳤답니다. 그런데 그 벼락이 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비켜서 떨어졌대요. 그래도 갈 사람은 가네요.” 라고 씁쓸한 웃음을 짓다. 그는 단양으로 자신을 불러놓고 먼저 간 친구가 조금은 서운하기도 할 테지만 이곳 애곡리가 신동문의 문학을 기리는 문학산실의 터로 조성되길 바라는 눈치였다. 신동문의 시신은 그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남한강에, 그리고 그가 살던 농막 주변에 뿌려졌다.
신동문 그는 1950년대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오며 시인으로 언론인으로 좌절의 시대를 눈감지 못하고 표류하다 끝내 단양 오지로 내려가 외딴 농막에서 홀로 지내다 1993년9월 추석을 얼마 앞두고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의 시신은 여의도 성모병원에 기증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1956년 간행한 <<풍선과 제3포복>>있으며 유고집으로 2004년에 발간한 시 전집<<내 노동으로>>와 산문집<<행동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있다.
바쁘신 일정에도 취재에 도움을 주신 박영수 수필가님, 홍석하, 신기선 시인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취재팀: 기획: 박인식
사진: 정동희
글 : 유영숙
첫댓글 아이 논술고사장에 들여 보내놓고 가지고 간 심상지를 훑었읍니다. 잘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고생한 아이와 어머니 좋은 결과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