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읽는 기쁨] <13> 제2편 제1장 비로자나불 ②
만다라회 기획, 박희택 집필
법열 속에 회당대종사의 <자성법신> 법문을 독송하고 독송하노라면 <광명진언>의 심의(深意)와 직통함을 직관하게 된다. 자성법신과 광명진언은 공히 법신 비로자나불의 체상용(體相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미묘하고 행복한 체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온 우주에 충만하신 진리본체 법신불께 귀명하옵나니, 연꽃 속의 여의보주와 같이 광명으로 일시에 전환하여, 원을 성취하게 하옵소서!”
광명진언의 ‘온 우주에 충만하신 진리본체 법신불께 귀명하옵나니’는 법신불의 체대를, ‘연꽃 속의 여의보주와 같이 광명으로 일시에 전환하여’는 법신불의 상대를, ‘원을 성취하게 하옵소서!’는 법신불의 용대를 함의한다. 다만 자성법신이 법신불을 인식하고 수행하는 데에 초점이 있다면, 광명진언은 법신불께 청원하고 기도하는 데에 초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자성법신 | 광명진언 | 삼대 |
비로자나부처님은 시방삼세 하나이라. |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온 우주에 충만하신 진리본체 법신불께 귀명하옵나니, | 체 |
온 우주에 충만하여 없는 곳이 없으므로, |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연꽃 속의 여의보주와 같이 광명으로 일시에 전환하여, | 상 |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 | 훔! 원을 성취하게 하옵소서! | 용 |
인식의 힘은 크다. 인식을 여법하게 한다면 곧 실천으로 이어지는 까닭에 참된 인식은 인식이자 실천이기도 하다. 니체가 이 점을 잘 보여 주었다. “이 세계는 그대들의 이성, 그대들의 심상(心像), 그대들의 의지, 그대들의 사랑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그러면 그대들은 그대들의 행복에 도달하게 되리라(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2부 제2장)!” 새로운 세계와 행복 또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 위에서 도달할 수 있음을 언설한 것이며, 이는 니체가 말한 ‘관점의 전환(Perspektiven umzustellen)’과 직결된다고 할 것이다. 참된 인식은 참된 수행(실천)과 벗하게 된다.
진리본체를 향한 청원(서원)과 기도는 자력이자 타력이기도 하다. 진리본체에서는 자력과 타력이 합일된다. 왜냐하면 진리본체는 온 우주에 충만하여 계시기에 자타가 분리되지 않은 일체이다. 「금강경」 일합이상분의 ‘한 덩어리로 뭉쳐진 것(一合相)’도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법신이 자성이고 자성이 법신인 것이다. 내(자성)가 법신불께 청원하고 기도를 올린다면 이것은 곧 법신이 법신에게 올리는 것과 진배가 없기 때문이다. 대종사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성(내)이 법신임을 안다면 대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실행론 2-1-1-다, 제12회 참조).
이렇게 논구해 보면 자성법신의 참된 인식과 수행, 광명진언의 참된 청원과 기도는 초점이 다른 것도 아니라 할 것이다. 자성법신의 말씀을 공경하여 독송하는 것과 광명진언을 지성으로 염송하는 것은 동일 맥락의 신행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법신 비로자나불의 본심진언인 육자진언과 광명진언은 어떤 관계인지 묻게 된다. 대종사께서는 “금강진언 세워 두고 다른 태장 잡진언을 염송하지 못함같이, 육자진언 세워 두고 다른 염송 못할지라(실행론 3-9-2)”라 하신 바 있다.
이 말씀은 종지(宗旨)를 굳건히 세우는 데에 지남(指南)이 되는 바이기에, 진각신행 공동체에서는 마땅한 관행금계(觀行禁戒)로 삼아야 한다. 다만 학술적으로는 29자 광명진언의 축약이 6자의 육자진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광명진언의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는 육자진언의 ‘옴’으로, 광명진언의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는 육자진언의 ‘마니 반메’로, 광명진언의 ‘훔!’은 육자진언의 ‘훔!’으로 축약된다.
한 가지 표기가 다른데, 광명진언의 ‘파드마(padma, 반마, 연꽃)’가 육자진언에서는 처소격 ‘파드메(padme, 반메, 연꽃에서)’로 표현되어 있는 점만 다르지만, 그 대의를 새김에 큰 차이는 없다고 하겠다. 그렇다. 광명진언과 육자진언은 마치 파드마와 파드메의 차이에 지나지 않으며, 육자진언은 광명진언의 에센스인 것이다.
육자진언 | 광명진언 | 삼대 |
옴, 법신불께 귀명하옵나니, |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온 우주에 충만하신 진리본체 법신불께 귀명하옵나니, | 체 |
마니 반메, 연꽃 속의 여의보주와 같이, |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를타야, 연꽃 속의 여의보주와 같이 광명으로 일시에 전환하여, | 상 |
훔! 원을 성취하게 하옵소서! | 훔! 원을 성취하게 하옵소서! | 용 |
그렇다면 또한 육자진언은 다시 축약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이다. 육자진언의 축약은 ‘옴’ 일자 진언이다. 모든 진언의 어머니 진언 바로 그 옴이다. 이 옴에서 대불정능엄신주(능엄경), 신묘장구대다라니(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주본 ; 천수경), 불정존승다라니(불정존승다라니경) 등이 확장된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확장된 것을 말하자면 일자진언 옴 –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 – 이십구자진언 광명진언이라 할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옴을 염송하는 싯다르타를 이렇게 묘파하고 있다. “자신의 영혼을 어떤 특정한 소리에 묶어두거나 자신의 자아와 더불어 그 어떤 특정한 소리에 몰입하지 않고 모든 소리들을 듣고, 전체·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말이었다(헤세, 「싯다르타」, 제11장 옴).”
전체이고 단일성이고 완성인 소리 옴의 1차 확장이 육자진언이고, 2차 확장이 광명진언이라고 할 수 있다. ‘옴 = 진리본체 법신불에 귀명하옵니다’는 이 한 마디 진언이 모든 수행과 기도의 출발이고 귀결임을 기억할 것이다. 참으로 진실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