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강과 다뉴브 강의 낭만
제13화 나치의 도시 뉘른베르크 (Nurenberg)
-2016년 6월 24일-
아침 9시에 뉘른 베르크에 도착한 우리들은 스케쥴에 따라 9시 30분부터
시내관광에 나섰다
인구 50만 명의 중세도시 뉘른 베르크는 1040년 독일 황제 하인리히 3세가
황제의 성 카이저부르크 (Kaiserburg)를 지어면서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16세기 이후에는 황제의 성(카이져부르크), 영주의성(부르크 그라벤 부르크)
와 도시의 성(슈타트부르크)3개의 성으로 이루어 졌으며 히틀러가 가장
좋아한 도시로서 나치의 전당개회가 열렸으며 나치의 거점도시로 크게 발전
하였으나 2차대전 때에는 도시가 많이 파괴되었고 결국 나치 전범 재판이
이곳에서 열리게 되고 엄격한 전범 재판을 함으로써 인권의 고귀함과
전쟁의 무서움을 재 상기시켜 주었다는 이유로 유네스코로 부터 이 도시는
인권상을 수상하였다고 한다
우린 황제의 성인 카이저 부르크성으로 올라와 시내 전경을 보면서 관광을
시작하였다 1050년부터 1571년까지 모든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들이
정기적으로 이 성에서 며칠씩 머물다 간 곳으로 중세기 동안 비공식 수도의
역활로 황제들의 거처로 사용했으며 11세기 말에는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
1세때 크게 증축되었으며 웅장한 이중 예배당인 도펠카펠레(이층 예배당)도
그때 지었다고 한다
이 성은 2차 대전으로 많이 파괴되었으나 1950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고 한다
성 내부는 황제의 방과 예배당이 볼 만하고, 언덕 위에 지어진 성이어서
우물의 깊이가 60m에 달하며 우물의 깊이를 직접 볼 수가 있으며
둥근 모양의 감시탑은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이곳에서
뉘른베르크의 모습 전체를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알 4세는 1356년 뉘른부르크회의에 제후들을 불러
향후 로마제국의 황제는 7명의 선제후가 다수결에 의하여 로마황제를
선출하고 선출된 황제의 첫 제국회의를 뉘른베르크에서 열도록 하는
금인 칙서(Golden Bull)을 선포하여 명실상부하게 뉘른부르크는 비공식
수도로 불리게 되었고
프랑크 푸르트에서 황제를 선출하고 아헨에서 대관식을 가지며 뉘른부르크
에서 첫 제국회의가 열리므로 뉘른베르크의 위상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1440년부터 1490년까지 제위한 함스부르스가의 프리드리히 3세와
1493년부터 1519년까지 재위한 막스밀리안 1세가 이곳에 장기 체류한
마지막 황제 였으며 그의 후계자인 카알 5세 때에는 첫 제국회의를
이곳에서 하는 전통도 무시하였고
뉘른베르크는 종교개획을 찬성하자 구교도인 황제들과도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린 영주의 성을 내려오니 뒤러의 집이 보인다
1471년 이곳에서 태여난 르네상스 시대의 대 화가 뒤러(Albrecht Dürer)의
광장에는 뒤러가 직접 조각한 거대한 청동 토끼상이 보이며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독일이
자랑하는 독일 최고의 미술가이다. 이곳에서 뒤러는 금 세공자였던
아버지를 도와 세공일을 하면서 목판화를 배웠다하며 1498년 발표한
목판화집 묵시록은 이탈리아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512년에는 기도서인 개선문을 연작으로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의 궁정
화가로 발탁되기도 했으며1528년 뉘른베르크에서 영원히 잠들었다고 한다
뉘른베르크는 문화와 상업의 발달로 1500년대는 유럽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초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는 자신은 화공이 아니라 예술가이다
라며 최초로 자신의 그림에 서명을 남기는 화가가 되었으며 이테리 르네상스의
라파엘로도 극찬한 미술가로 알려젔다고 한다
성 제발두스 교회 (ST, sebalds church)
우린 구시청 쪽으로 내려오니 맞은편에 제발두스 교회가 보였다
1225년 공사를 시작하여 150년이나 걸려 완공한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 양식의 교회이다
내부에는 청동조각으로 장식되고 높이 4,71M의 고딕양식으로 1070년에
만든 죽은 성인 제발두스의 유골함이 중앙 예배당에 있으며 유해함 바닥에는
4마리의 돌고래와 12마리의 달팽이가 유해함을 지탱하고 있으며
12사도와 예언자들이 동상을 장식하고 있었다
1424년에 성인으로 추대된 제발두스 성인을 순래하기 위한 순래객들로
이 교회는 항상 분빈다고 한다
우린 구시청 건물을 지나 중앙광장으로 나왔다 그렇게 크지 않는 광장이지만
17세기부터 열린 독일에서도 제일 큰 크리스마스 시장이며 이곳에 천막 꽃시장이
있고 쇠너부르넨(Schoner Brunnen)이란 아름다운 분수가 서 있다
1385년부터 1396년에 완성한 하인리히 베하임(Heinrich Beheim)의
작품으로 진품은 게르만 박물관에 보관되어있으며 1912년 복제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3층 20M의 높은 탑은 7명의 신성 로마제국 선제후와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와 영주들의 조각상이 40여개 설치된 분수로 이름과 걸맞게 아름다운
분수인 것 같았다
원래 이 광정은 유대인 들이 거주 하든 게토이었으나 프라우엔 교회를
짓기 위하여 카롤 4세는 이곳을 강제 수용하고 성모 교회와 광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뉘른 베르크 성마리아 교회 (Cathedral of Our Lady)는 성모마리아
교회 또는 프라우엔 교회라고도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있던 왕궁 예배당을 1350년 카를 4세 때
다시 짓는 과정에서 홀 교회 구성과 입면 처리 양식의 특징이 나타났으며
중세 독일의 시청사나 대저택 같은 비 기독교 건물에서 많이 쓰이던
방식인데 이를 교회에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1358년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1509년 완성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탑이 있으며 또 이 시계탑은 12시 정각에 인형극이
펼쳐진다고 한다 시계탑에는 7명의 선제후가 로마 황제에게 존경의
절을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공연은 1358년 황제 카롤4세가 금인칙서(Golden Bull)를 반포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공연이라고 한다
입구에는 장미 모양의 아취형 천정에는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아름다운 조각상이 새겨저 있었고
제단 바로 앞에는 마리아 상의 조각은 없고 예수의 3단 성화가 받혀
있었다
출구쪽 천장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우린 프라우엔 교회를 나와 양쪽에 상점들로 가득찬 쾨히니 거리를 지나
가다가 길거리에 이상한 형태의 청동의 동상을 발견하고 자세히 관찰하였다
<1497년 세바스찬 부란트의 바보 배에 승선한 바보들>은 광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도록 당시 사회 문화 법률등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조각들로써
바보들이 탄배를 3,4M의 크기로 조각했으며 원작은 무려 100여명의
다른 바보들을 만들어 풍자 했다고 한다
그리고 패그니츠강에 걸쳐진 다리중앙에 박물관의 출입문이라는
조형물을 지나니 성 로렌츠 교회가 보인다
성 로랜츠 교회 옆에는 “미덕의 분수”라는 투켄트부르넨의 3단 분수대가
있었다 맨 위에는 눈을 가리고 저울과 칼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이 있고
아래는 나팔을 불고 있는 동상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미덕의 7여신들이
가슴을 열고 물을 뿜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성 로렌츠 교회도 1390년경에 완공한 고딕양식의 개신교로써 중앙의 장미
모양의 창에는 사물을 비추는 태양은 바깥 큰 원으로 나타내고
내면의 정숙함을 나타내는 달은 작은 창으로 표시하였으며 문 위의
조각들은 아담과 이브, 성 스테판과 성 로렌츠, 성모마리아와 예수등이
조각되어 있었다
교회 내부는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스테인드 글라스도 호화로운
색채를 나타내고 있었다
대제단 앞의 천정에는 목 조각가 바이트 슈토스(Viet Stoss)의 수태고지
조각상이 걸려 있는 모습은 하늘에서 예수님이 강령하시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수태고지’란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집에 찾아 왔을 때 마리아는
성서를 읽고 있었는데 천사는 그녀가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임을
알려 주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성령이
내려와서 예수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뉘른베르크는 종교개혁에 찬성한 도시이기에 성당 보다는 개신교의
교회가 많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우린 늦은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6시까지 선박으로 돌아가면서
나치의 고향을 찾아봤다
뉘른 베르크는 나치의 거점 도시였으며 1933년부터1938년 까지 나치의
전당대회가 열렸든 곳이기도 하다
1935년 9월 독일인의 혈통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법이
뉘른베르크에서 제정되어 유대인 학살의 근거를 만들었다고 한다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은 물론 유대인과의 어떠한 성적 접촉도 금지한다”
‘제3국에서 치러진 결혼이라도 무효이며 이를 어긴 경우 강제노역에 처한다“
“유대인은 독일국적을 박탈하며 국기를 게양할 수 없으며
독일인의 하인으로도 둘 수 없다”
합법적으로 유태인을 학살하였으나 패전후 1945년 10월11일 뉘른베르크의
정의의 법정에서 대학살을 자행한 독일인의 범죄를 처벌하는 판결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전볌 재판정의 모습
피고석 왼쪽부터 괴링.헤스.리벤트로프 카이텔등이 앉아 있다
뉘른베르크의 재판
재판장은 영국의 제프리 로런스 (Geffrey Lawrence) 경이 맡았으며
수석 검사는 미국의 로버트 잭슨(Robert Jackson) 대법관이 맡았다고 한다
법정 600호 현재도 법정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1급 전범 23명을 기소했으며 이들 중 2명은 구금 중 자살 또는 병으로
죽어 나머지 21명에 대하여 판결이 내려졌는데, 카롤 하우스호퍼,
헤르만 괴링등을 비롯한 13명에 대하여는 사형(이 중 헤르만 괴링은
10월15일 음독 자살, 카롤 하우스호퍼는 3월 사형 직전 할복),
독일 공군 총사령관 카이텔 국방군 원수 노동 선전부장 한스 프랑크 독일 총독
히틀러 비서 무기징역 군수장교 뉘우침 레더 해군 제독 한스 프리체 방송국장
루돌프 헤스등 3명은 종신형, 알베로토 슈페어등 3명은 징역형, 히얄 마르샤흐트를
비롯한 나머지 3명은 형이 면제되었다고 한다
전범재판이 인종과 상관없이 인권에 대한 존엄성을 지킨 곳으로 인정되어
2001년 뉘른베르크는 유네스코로 부터 인권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쿄 재판은
1946년 맥아드 장군의 명에 의하여 도쿄 전범 재판소가 발족되어 도죠
히데키외 23명의 1급 전법자가 기소되었으며 1946년 사망 정신 질환자를
빼고 25명에 대하여 전원 유죄를 선고 교수형 7명 종신형 16명 금고 2명의
가벼운 판결이 내려졌으며 “이로 히토” 천왕에 대하여는 무조건 항복
조건에 천왕의 죄는 묻지 않키로 하였기 때문에 단죄 할 수가 없었으며
사토 갠지와 도죠 히데키
사토 겐료등 종신형 전범자들은 감형을 받아 1956년 석방되어 정치활동을
재개 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가 전범인가?”라며 반성하는 단죄가 없어
독일의 전범과는 다르게 완전히 청산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한다
우린 늦게 까지 늬른베르크를 돌아보고 지정된 버스를타고 선박으로
돌아와 뉘른베르크 관광을 마쳤다
뉘른 베르크 이야기
10세기 이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들에게 사랑받은 뉘른베르크는 역사의 도시
문학의 도시로 발전된 중세도시로 일찍이 뉘른 베르크의 법이라는
유대인 학살의 법을 만들어 홀로코스트의 원조이며 히틀러가 사랑한 나치
전당대회의 거점 도시였으나 그후 뉘른 베르크의 법정에서는 독일 전범들의
단죄가 행해졌든 정의의 도시이다
또한 독일 르네상스를 이끈 알프레드 뒤러를 위시하여 오페라 뉘른베르크 명가수를
만든 바그너 뿐아니라 휴대용 시계를 세계 최초로 만든 장인 페터 헨라인(Peter Henlein )
등 많은 예술가들을 탄생했으며 1500년대는 유럽의 중심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부자는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철학에 따라 뉘른베르크는 부자였기 때문에 항상 보호
시스템을 만들어 성곽은 물론 지하 벙크를 만들어 감옥이나 아트 방크 물터널 핵 방크까지
만들어 져 있어 뉘른 베르크는 2차대전 후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벙크에 보관된 자료를
토대로 완전하게 복원할 수 있었던 중세도시이다
뉘른 베르크는 문헨 다음으로 바이에른주에서 두번재로 큰 상공업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