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역쟁이 우씨
개울가에 얼기설기 지어 진 허름한 집이 토역쟁이 우씨 집이었다.
그 땐 생기는 대로 생산을 하였던지라 그 집도 5남매와 부부가 좁은 집에서 북대기며 살았다.
우씨는 술고래였다.
일년 365일 거의 취해 있다시피 했는데 술버릇 또한 고약해서 술만 마셨다 하면 마누라는 물론이고 자식들한테까지 손찌검을 해댔다.
해서 그 집에선 거의 매일 밤이면 우씨의 쌍욕섞인 고함소리와 아이들 울음소리가 개울을 따라 흐르며 온동네로 퍼져나갔다.
첨엔 동네사람들이 말리기도 했지만 그짓도 한 두번이지 나중엔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그렇게 싸우고 지지고 볶으면서 애는 줄줄이 생산해 낸 것도 아이러니다.
술먹고 식구들 패는 거 빼면 우씨는 훌륭한 기술자였다.
토역쟁이 우씨는 근방에서 가장 뛰어난 흙 다루는 기술자였는데 아무리 옹색해 보이는 집도 우씨의 손길이 스치면 금세 말끔한 집으로 바뀌곤 했다.
반면 우씨 자신의 집은 부엌이라곤 바람벽도 없이 수수깡으로 얼기설기 엮어놓기만 하여 한데나 마찬가지라 밖에서도 구차한 살림살이가 다 보였다.
사람들이 속담까지 꺼내어 놀리곤 했다.
중이 제머리 못 깎는다고ᆢ
우씨네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국민학교도 채 마치기 전에 도시의 공장으로 가고 내 또래이던 큰딸도 일찌감치 서울 어딘가 남의 집으로 보내졌다.
내 또래라지만 우리랑 통 어울리질 않았던 큰딸은 이름조차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지랑이가 꼬물꼬물 피어올라 온 들판이 봄 몸살을 앓기 시작하던 어느 날,
꼭 그 어느 날이 문제다.
동무들과 따뜻한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데 우다다닥 우다다닥~
천지가 울리듯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사람살리라는 고함소리가 들려 힘들게 따 논 땅을 포기하고 소리가 난 쪽으로 가보니 건너말에서 장정 서넛이 리어카에 사람을 싣고 막 달려오고 있었다.
리어카가 우씨네 집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후 도로 사람을 싣고 나와서는 다시 건너말로 끌고 갔다.
뭔일인가 하고 눈을 반짝이며 깨금발을 해가며 다가가려는데 어른들이 화를 내며 애들을 막 쫒았다.
"늬들은 가~!!!
늬들 볼 게 아녀. 가! 얼릉~"
말투며 표정이 하 무섭기도 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더 있으면 안되겠구나 싶어 우리끼리 양지쪽에 모여 있다가 집으로 왔다.
며칠 후 밝혀진 사실은 우씨 마누라가 건너말에 있는 친정에 가서 약을 먹었는데 그걸 친정 동생들이 리어카에 싣고 온 것을 우씨가 객사한 마누라 집에 안들여 놓는다고 내치는 바람에 다시 친정으로 데려 간 것이었다.
가난하기는 친정도 마찬가지라 장례도 변변히 못치르고 가마니에 둘둘 말려 지게어 얹혀 뒷산 어딘가에 묻힌 우씨 마누라,
엄마는 늘 그이가 불쌍타고 했다.
나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니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복스럽고 눈매가 고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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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 친정나들이를 갔는데 뜻밖에 우씨네 큰딸을 버스에서 만났다.
작은 사우가 떡 좋아한다고 엄마가 불려놓은 쌀을 들고 시내로 쌀을 빻으러 가는 버스안에서 왠지 고단한 얼굴의 그녀를 보곤 아는 체를 하니 그제야 나를 알아보는데 썩 달가운 표정이 아니었음에도 주책에 가까운 나의 오지랖은 누가 보면 아주 친한 친구를 만나 무척 반가운 듯 부산을 떨었다. 실제로 나는 반가웠는데ᆢ
아, 그애 이름이 생각났다.
그러나 밝히진 않겠다.
- 야~ 나 지금 떡하러 가니까 이따 저녁에 우리 집으로 떡먹으러 와~-
-............-
배시시 웃고만 있는 그애한테 꼭 오라고 한번 더 다짐을 주곤 방앗간 앞에서 내렸다.
물론 그애는 오지 않았다.
올 리가 없잖은가?
아주 친한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말처럼 떡 먹으러 오랬다고 냉큼 오겠는가?
내가 좀 더 생각이 있고 철이 들었었다면 떡을 들고 그애 집으로 갔어야 했던 것을ᆢㅉㅉㅉ
저녁에 떡을 먹으며 그 얘기를 하니 엄마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내친김에 엄마께 물었다.
걔네 엄마는 왜 농약을 먹었냐고ᆢ
그러자 엄마가 깜짝 놀라신다.
니가 그건 우트게 아냐고ᆢ
엄마, 나 그거 다 기억 나~
건너말에서 니아까루 실어 오구 또 실어 가구 그랬잖어.
엄만 내가 어릴 때 일이라 모르는 줄 아신 것 같다.
담배 한대를 피고 난 엄마가 얘기를 시작했다.
즌쟁통에는 미국늠덜이 웃짝에서 온 늠들보다 더 무섭구 못됐었어. 길에서구 어디구 기냥 여자만 눈에 띠면 몹쓸 짓을 해댔거덩~
그 땐 논이구 밭이구 일해다가 그늠덜이 지내간다구 소식이 뜨면 여자들은 해던 일 죄 팽개치구는 집으루 도망을 갔어.
그눔들이 그래두 집에 까정은 안쳐들어온 게 그나마 다행이여~
아침에 논에 일해러 갈 땐 일부러 얼굴에 숯검댕이두 묻히구 머리두 안빗구 엉클해 보이게 해구 댕겼댄다 휘유~~~!
그래다가 어느 날 밭에서 김매다가 그늠덜 온다는 연락을 못받구는 그만 00 엄마가 몹쓸 짓을 당했자너~
그래니 그 소식을 듣구는 냄편이 제정신이겠니? 그렇게두 마누라 이뻐해구 애끼던 남자가 술만 취해며는 맨날 패대더라.
그 당시엔 여자 탓만 하던 시절이라 그렇게 두드려 맞으면서두 참구 참았는데 다 큰 새끼들 앞에서 그늠덜 꺼가 그렇게 좋더냐? 어쨌더냐~ 온갖 모욕을 주니 새끼들 땜에 참구 살었는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게여. 새끼들 앞에서 얼마나 챙피해구 죽을 지경이었겠니?
친정에 가서 울구불구 넋두리해구 하소연 해다가 그만 죽는 게 낫다구 이제 막 꼬물꼬물 세살짜리 딸, 머리맡에 두구 농약을 마신게여.
자기 의사완 아무 상관없이 당한 일,
점령군 땅의 백성으로서 누구에게도 따지지도 못하고 오히려 쉬쉬~ 하며 지내야 하는 게 어디 쉬웠으랴?
뼈를 깎아내고 심장이 두쪽이 나는 일이었으니 남자로선 오직 술만이 위로가 되었을테고 매질속에는 이 바보야~ 남들 다 피하는데 너는 어찌 피하지 못했느냐?
밭 한고랑 더 매서 그만큼 품삯을 받는 일이 그리 중하더냐?
결국엔 자기가 풍족하게 벌어다 주지못해 밭매는 품을 나가게 한 자신에 대한 매질이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해석이었을까?
엄마는 그니랑 친했다고 하셨다.
친했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가고 없어지니 한동안 마음의 상처가 컸노라고ᆢ
그니가 살아있을 때는 겨울이면 아버지 몰래 보리쌀 말이며 때로는 쌀도 조금씩 갖다주었다는 엄만 집에 품이 필요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씨네 큰아들을 품을 주어 시켰다.
늦 봄, 큰산에 나물하러 온동네 사람들이 갈 때도 늘 밥을 넉넉히 싸가셔서 점심시간이면 빙빙 도는 그 집 큰아들을 불러다 같이 먹이곤 하셨다.
살아생전 친했던 그니에 대한 엄마의 의리는 남자들 못지않았다.
내 바로 위 오빠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막내아들 장가간다고 준비하는 음식의 규모가 꽤 컸다.
엄만 잔치에 필요한 생선을 그 집 둘째아들이 점원으로 있던 어물가게에서 일체 다 구매하셨는데 문제는 그 어물전이 집에서 가까운 원주시장이 아닌 버스타고 한참 가야하는 횡성장이었음에랴~~
나중에 그 집은 우씨의 죽음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이가 드나보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자꾸 어릴 때 일이 생각난다.
젊은이는 미래의 일로 잠 못들고
늙은이는 과거의 일로 잠 못들고ᆢ
할 수만 있다면ᆢ 아니 죽어서라도 내 영혼만은 고향의 들과 언덕, 산골짜기 골짜기 마다 쌓인 추억을 찾아 훨훨~ 날고 싶다.
🐌
토역쟁이는 직업의 일종인데 말하자면 흙을 다루는 사람을 뜻합니다.
미장이라고도 하지요.
미장이라는 호칭전에 순우리말로 불렸던 이름입니다.
옛날엔 집도 거의 다 흙벽이라 나무로 만든 도구로 벽에 흙을 발라 깔끔하게 해놓곤 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