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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
문학의 역할: 공지영과 장정일
조영일
프롤레타리아독재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인가?
소비사회의 거부인가, 생산의 증대인가? 단두대인가, 사형제도의 폐지인가?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좌익인사를 좌익인사답게 만드는 것은
이런저런 이론이 아니라 어떤 이론이라도 대장정1)이라 불리는
키치 속에 통합하는 능력이다.
― 밀란 쿤데라
1. 문학혐오증과 논픽션찬양 : 지식인 장정일의 탄생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희곡작가(그러나 지금은 교양전도사이자 독설서평가로 더욱 유명한) 장정일은 몇 년 전부터 논픽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갑자기 논픽션을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이를 강조하는 것은 그의 문학적 경향을 보았을 때, 의외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우선’ 그가 강조하는 논픽션이 가진 의의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참고로 오늘 우리는 이것은 공지영의 『도가니』와 관련지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기로 하지요.
글쓰기의 가짓수는 무척 많고, 교양이란 굉장히 폭이 넓은 세계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글쓰기 하면 곧바로 시나 소설을 떠올리고, 그걸 읽는 게 교양의 다인 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양한 글쓰기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장르의 문학이 글쓰기의 피라미드 가장 높은 꼭대기에 좌정하고 있으면서 그 외의 글쓰기를 억압하는 사회, 고작 시집이나 소설 몇 권을 읽는 것으로 교양인 행세가 가능한 나라는 가망이 없다.
비비케이(BBK) 같은 사건이 터졌을 때 제대로 된 사회에서라면, 거의 반년 안에 스무 권이 넘는 논픽션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종이 100만부나 팔리고 그게 시중의 화제가 되고 칼럼에 오르내리는 사회가 『엄마를 부탁해』 같은 소설이 100만부나 팔리는 사회보다 훨씬 바람직할 수도 있다.
소설 『도가니』도 그렇다. 청각장애자 학교에서 일어났던 성폭력 사건을 유명 작가가 논픽션으로 썼다면, 사회적 파급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영향으로 진실이 발본되고 미비한 법들이 고쳐질 확률도 높았으나, 문학이 너무 강한 사회는 온갖 사회적 의제와 다양한 글감을 문학이란 대롱으로 탈수해 버린다.2)
장정일의 논픽션에 대한 강조가 자못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픽션(문학)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이루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는 문학중심주의적 글쓰기를 비판함으로써 논픽션의 중요성을 치켜세우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이유에서 문학적 글쓰기(픽션, 소설)를 비판하는 것일까요? 하나하나 따져보도록 하지요.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문자행위)와 교양의 관계입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글쓰기와 교양은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즉 문자행위(읽기와 쓰기)를 통해서 비로소 교양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교양은 다양한 글쓰기방식으로 담겨지는데, 한국에서는 그것이 문학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라 상대적으로 다른 형태의 글쓰기들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나 소설(문학)만 읽어도 ‘교양인 행세가 가능한 현실’으로 나타나는데, 그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며, 이런 나라에는 가망이 없다고 개탄합니다.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시, 소설만 읽는 사람은 교양인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교양인 행세를 할 수 없는 나라야말로 정상적인 나라다. 제대로 된 교양인들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달리 말해, 어떤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하면, 6개월 내에 20권이 넘는 논픽션이 출간되어야 ‘제대로 된 사회’인데(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정상적인 나라에게 살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엄마를 부탁해』와 같은 책만 밀리언셀러가 되는 한국은 가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그는 왜 논픽션이 부재하는 사회(=픽션‘문학’만 잘 팔리는 사회)를 비판하는 것일까요? 아니 바꿔 말해 논픽션이 많이 출간되고 널리 읽히는 사회가 어떤 측면에서 제대로 된 사회라는 의미일까요?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도가니』를 들어 서술하고 있는 부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장정일은 공지영이 인화학교 사건을 논픽션으로 썼다면 사회적 파급력이 상당했을 텐데, 소설로 쓰는 바람에 그렇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 말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글이 씌어진 시기가 『도가니』가 출간되고 3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라는 것입니다. 의외로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 『도가니』는 적어도 출판계에서는 실패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이는 책이 팔리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인터넷 연재 때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출간된 후에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성공작이라고 불려야 마땅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자가 공지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문제가 조금 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수백만부를 팔아치운 공지영이 쓴 작품으로서는 ‘상대적으로’ 판매가 신통치 않았던 것입니다. 1쇄도 소화하기 힘든 오늘날의 문학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작가에서 1∼2만부는 성공의 증거일 수 있겠지만, 어떤 작가들에게는 10∼20만부도 실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가니』는 왜 공지영의 이전 작품만큼 큰 반향을 얻지 못한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서는 많은 이들이 ‘널리 읽히기 어려운 소재’을 지목했습니다. 확실히 학교에서 자행된 장애청소년들에 대한 지속적인 성폭행이 베스트셀러의 글감으로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가 ‘공지영’이기 때문에 만에 하나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런 『도가니』에 대한 장정일의 언급에는 크게 두 가지 맥락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스타급 작가의 작품으로서는 저조한 판매실적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들어 그가 자주 펼치고 있는 ‘논픽션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못 명확합니다. 공지영은 『도가니』를 소설이 아닌 논픽션으로 썼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을 텐데, ‘문학이 지배적인 한국’의 작가답게 사회적 의제를 문학화(문학이라는 대롱으로 탈수)시킴으로써 그 가능성을 스스로 닫았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서 제일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점입니다. 『도가니』가 논픽션으로 씌어졌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단 하나의 근거로 제시된 ‘사회적 영향력’이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도가니』가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결론은 도대체 어떻게 도출된 것일까요? 다소 막연한 질문 같지만, 의외로 명확한 답변이 가능합니다. 책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이란 오직 하나, 널리 읽힘으로써 입니다. 그런데 널리 읽히는지 안 읽히는지는 판매부수로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장정일이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 가능할 것입니다.
『도가니』가 스타작가가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판매실적이 신통치 않은 것은 그녀가 사회적 의제를 ‘소설로’ 썼기 때문이다. 만약 논픽션으로 썼다면, 그것은 많이 팔렸을 것이고(널리 읽혔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살펴보면, 장정일의 진단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요. 그의 충고처럼 공지영이 『도가니』를 논픽션으로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지금과 같은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단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리어 논픽션이 아닌 소설로 씌어졌기 때문에 사회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장정일이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한국문학, 그리고 논픽션에 대한 그의 생각 자체에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하나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먼저 ‘사회적 영향력’과 관련하여.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장정일은 논픽션의 중요성을 ‘사회적 영향력’과 관련시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존재하는 묘한 이분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학은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없지만, 논픽션은 그렇지 않다”은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그는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해 왔습니다. 그런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는 영화감독 김기덕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장정일: 김기덕 감독이 선택한 영화는 세상의 급소를 치기 위한 흉기로는 너무 ‘가난한 무기’다. 문학의 경우는 그래도 고리키의 『어머니』가 러시아혁명을 낳고, 스토우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 노예해방 전쟁을 일으켰다는 그 ‘믿거나 말거나’ 하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문학에 비해 영화의 역사가 일천해서 아직 신화가 없을 뿐, 앞으로 그런 신화를 기대해도 괜찮은지? (…)
김기덕 : 영화가 사회를 바꾸거나 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한 시대의 각도를 바꾼다는 환상과, 스스로 그러한 역량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영화는 소박하게 사람들의 의식을 재정립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살아온, 또는 살아갈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준다고 기대하지는 않고 있다. (……)3)
이런 입장은 그 나름대로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에 대한 여러 입장 중 하나로서 말입니다. 문제는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그가 왜 갑자기 논픽션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는지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역시 신화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더구나 엄밀히 말해 논픽션 쪽은 ‘문학에 존재하는 신화’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장정일은 이와 관련해서 어떤 해명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문학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제대로 된 교양인이 되려면 논픽션도 읽어야 한다는 당위만을 내세우고 있지요. 우리는 이런 모순된 태도에서 ‘변화’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것은 문학사나 사상사에서 보통 ‘전향’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사실 장정일이 보여준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은 그가 한국문단에 등장하여 주목을 받은 시기(이를테면 그의 문학적 전성기)를 고려하면, 그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정일이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1980년대 후반은 주지하다시피 민중민족문학(사회참여문학)이 문학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던 시기로, 당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즉 엘리트라기보다는 민중에 가까운), 그러나 책에 파묻혀 지내온 순수문학청년 장정일의 등장은 사회참여문학이라는 시대적 대세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순문학가 내지 모더니스트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시 문학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소위 창비계열과 문지계열은 흥미롭게도 그런 대립을 공식적으로 표출하여 문제화하기보다는 ‘지혜롭게’ 독자를 나눠가짐으로써 사실상 적대적 공존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이는 혼란을 싫어하는 엘리트들(이는 창비든 문지는 마찬가지입니다)의 노련함(생존감각)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로지 책으로만 단련된(생활과 사실상 격리되어 있던),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순수모더니스트일 수밖에 없었던 장정일은 당시 대세였던 민중문학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이것은 노련함의 부족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모종의 합의를 깰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이데올로기 이전에 존재하는 생리적 거부감과 관련이 있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회참여문학의 모토란 이를테면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글을 쓰라”이 될 텐데, 서생으로 자라난 그는 책을 버리고 바깥으로 나가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당대의 문학적 흐름에 노골적으로 저항하는데, 이는 점잖은 모더니스트들4)의 적잖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가 대신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갑자기 논픽션의 사회적 영향력에 주목하게 된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민중민족문학(사회참여문학)의 영향력 감소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사실상 사회참여문학에 대한 명확한 안티라는 이유로 과대평가된 면이 없지 않았던 장정일의 문학은 안티대상이 시대적 변화에 의해 사라지게 되자, 그 자신도 설 땅을 잃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길 안에서의 택시잡기』(1988)와 소설집 『아담이 눈뜰 때』(1990)로 큰 주목을 받은 그는 1992년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끝으로 사실상 자신의 문학적 에너지를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참고로 1992년은 민중문학(참여문학)의 에필로그라 할 수 있는 후일담문학이 대세였던 시기입니다).
이후 그가 1994년에 발표한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4)는 이전의 문학적 성취에 한참 미치지 못한 졸작이었고, 1996년에 발표된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외설논란과 영화화로 큰 화제를 불러왔지만 역시나 이전의 포스를 느끼게 할 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발표한 『보트하우스』(1999)는 뭐랄까 이제 그가 확실히 노쇠했음을 알려주는 작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요. 사실상 장정일의 문학적 수명은 끝난 셈이었죠.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장정일에게는 문학가의 얼굴 외에 다른 얼굴이 존재합니다. 즉 왕성한 독서가이자 서평가라는 얼굴이지요.
16년에 걸쳐 총10권이 나온 『장정일의 독서일기』(서평집에 가까운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시리즈와 『공부』 포함)는 그 자체로 장관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첫 권이 나온 것이 1994년, 다시 말해 그가 문학적 참신함을 잃고 범작 내지 졸작을 내기 시작하던 시기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독서가 내지 서평가로서의 장정일은 민중문학의 종말과 더불어 의미를 잃은 장정일 문학 이후에 탄생한 것이다. 앞서 저는 ‘전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경우만큼 그 단어가 어울리는 예도 찾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정말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1994년 이후, 문학적 실패가 계속 될수록, 그가 문학과 거리를 유지해갔다는 점입니다. 이는 일련의 그의 독서일기 내지 서평을 죽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초기에는 문학서(주로 소설)가 주된 서평대상이었다면, 뒤로 갈수록 그 대상은 소위 (교양)인문서로 바뀝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이전과 같은 문학적 열정이 사라졌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독자나 비평가들도 문학가로서의 그의 모습을 조금씩 잊어 갔습니다. 둘째는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단, 소위 인문서만을 서평대상을 삼은 『장정일의 공부』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입니다.
아마 그는 『장정일의 공부』를 통해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감을 잡았을지 모릅니다. 실제 그는 이즈음부터 서평의 형식을 빌려 사회적 발언을 하면서 ‘지식인 장정일’의 이미지를 착실히 구축해갑니다. 오늘날 장정일 하면 시인, 소설가라는 이미지보다는 교양전도사 내지 서평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것은 그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변신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논픽션에 대한 새삼스러운 강조는 바로 이런 ‘전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다음과 같은 막연한 주장은 이것을 놓치고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문학이 세상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영화는 그런 신화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논픽션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한마디로 그의 논픽션에 대한 강조는 전향의 합리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비판받거나 비판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정도의 변신이라면, 문학인이 흔히들 하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우리는 그의 논픽션에 대한 강조가 일종의 픽션이라는 사실만 확인하면 될 것입니다.
2. 왜 한국에서는 논픽션이 발달하지 못한 것일까?
그건 그렇고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애당초 이 글의 목적이 장정일 비판에 있지는 않으니까요. 이미 확인한 것처럼 장정일은 한국에서 논픽션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로 문학중심주의를 듭니다.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단 논픽션이라는 장르가 한국에서 발전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옳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문학중심주의이라는 주장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를 과장함으로써 생겨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예컨대 문학은 리얼리즘이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소위 논픽션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장정일이 싫어했던) 아이러니컬하게도 사회참여문학(리얼리즘문학)이 그 역할을 대신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적어도 90년대 초반까지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92년을 전후로 후일담문학이 등장함으로써 리얼리즘문학은 문학적 헤게모니를 상실합니다. 즉 이제 현장(예를 들어, 공장이나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소설을 쓰는 일이 시대에 뒤떨어진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껏 조용히 지내던 소위 순문학자(모더니스트)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죠.
하지만 그것은 문학적 헤게모니가 그들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문지적 문학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창비적 문학이 건재했을 때 의미가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문학계는 제3의 세력이 등장함으로써 재편되게 됩니다. 1994년 창간된 《문학동네》가 그 핵심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후 《문학동네》가 한국문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실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학에 대한 순수한 애정밖에 없는 텅 빈 그릇이어서 이원체제가 붕괴되어 흩어진 문학세력을 그냥 주워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럼 1990년대 초반을 전후로 논픽션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전까지 사회참여문학이 해왔던 역할을 이후 순문학이 그것을 떠맡았던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TV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즉 일부 선진국과 비교해 논픽션이 발달하지 않는 것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역으로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발달한 TV시사고발 프로그램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우리나라에서 흔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도 흔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대표적인 시사고발프로인 <PD수첩>과 <그것이 알고 싶다>는 각각 1990년과 1992년에 방송을 시작하여 여러 가지 논란 속에서 무려 20여 년간 장수해온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들이 한국 사회에 끼친 역할에 대해서는 따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사실 중 하나는 문학이 나서서 딱히 사회의 거울 역할을 할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발프로그램들은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될 만한(바꿔 말해 논픽션의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을 ‘매주’ 다루고 있었는데, 그 방영빈도 때문인지 도리어 새로운 소재를 찾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방영한 것을 종종 리바이벌하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그것이 알고 싶다>의 경우 1995년 9월부터 1996년 10월까지 잠시 방송을 중단했는데, 그 이유는 소재고갈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떤 작가가 논픽션을 쓴다고 했을 때, 그 소재란 대부분 이미 TV로 방영된 것 가운데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사실 공지영의 『도가니』부터가 그렇습니다. 그녀가 소설을 쓸 때, 2005년에 방영된 <PD수첩>은 주요 참고자료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도가니』는 <PD수첩>에서 확인한 내용 이상의 특별한 사실을 담고 있지 않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보죠.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논픽션이 아닌 시사고발프로그램이 발달한 것일까요? 여기에서 문학중심주의 같은 것을 찾는 것은 골계입니다. 그보다는 현실적인 한계들에서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TV 시사프로그램의 경우, 일련의 전문가들이 팀워크를 이루어 사실을 확인하고 정리, 편집한 후 방영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논픽션의 경우 사실상 홀로 자료수집과 인터뷰와 같은 일련의 준비과정을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는데, 현실적으로 매우 힘든 작업이라는 상상이 가능하실 것입니다. 즉 그들은 보도전문 방송국 PD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이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한국의 경우 아직까지 한 개인이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의 범위가 매우 제한적입니다. 해당 사건이 현재진행형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바꿔 말해, 쓸 만한 자료에 접근을 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힘이 일정 정도 필요합니다. 또 많은 경우 확정적이지 않은 사실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표현에 있어 신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명예훼손 등으로 소송에 휘말릴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란 사회적 영향력의 유무라기보다는 ‘개인 중심이냐 팀워크 중심’이냐 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문학(픽션)의 경우는 출판계의 지원이 원칙적으로 필요 없는 글쓰기인 데 반해, 논픽션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데, 아쉽게도 한국의 출판계는 한 작가를 서포트해 줄 소위 ‘전담편집자’ 같은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단은 규모의 문제이지만, 다르게 보면 논픽션이 출판사의 입장에서 그다지 매력적인 장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논픽션이 사회적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많이 팔리는 장르라면, 굳이 장정일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할 것이기 때문에, 새삼 픽션을 비판하고 논픽션을 치켜세울 필요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돈이 된다면, 유언 따위는 무시하고 죽은 사람도 팔아먹는 게 출판계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릅니다. 책이란 기본적으로 ‘지나간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법정스님의 예를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사실상 유언을 배반한 채로 이루어진 도서판매는 베스트셀러 1위부터 6위까지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는데(세계출판사상 유례가 없는 기록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스님의 정신을 희구하는 중생들의 열심으로 보였겠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절판’ 때문에 생기게 될 희소성을 둘러싼 광풍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법정스님의 신작을 출간하여 대박을 터뜨린 한 출판사의 대표는 유언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평소 책을 소중하게 여기시던 스님의 태도를 생각했을 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스님이 다음 책들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을 듭니다. 일단 저는 이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유언을 배반할 만한 이유는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유언은 저로 하여금 카프카의 유언(자신의 작품을 불태우라)을 떠올리게 만드는데(밀란 쿤데라는 두 번째 에세이집에서 카프카의 유언에 대한 명료한 해석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미 엄청나게 팔린 책을 모두 수거하여 폐기처분할 수 없는 이상, 실천적인 면에서 위 유언은 적극적인 해석이 요청된다 하겠습니다. 유언에서 이와 관련된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말빚을 청산하고 싶다.
어떻게?
(2) 내가 출판한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않음으로써.
여기서 우리가 현실적으로(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2)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실수한 것은 그것을 “절판하라!”은 뜻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절판을 시킨 지금의 상황을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가능합니다. 이미 충분히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스님의 책은 중고시장에서 비정상적으로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확신하건대 이는 결코 스님의 원했던 결과가 아닐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청산하고자 한 말빚은 남은 이들에게 소유욕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니까요. 그래서 어떤 이는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출판을 통해 정상적으로 유통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합니다. 살아있는 자들의 특권 중의 하나가 유언을 배반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유언은 어디까지나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 문장은 참으로 어색한 문장입니다. 매우 짧은 한 문장에 비슷한 표현이 무려 세 번이나 등장하여(‘출판한’, ‘출판물’, ‘출간’) 다소 너저분한 인상을 줍니다. 확실히 수십 권의 책을 펴낸 문장가가 썼다고는 믿겨지지 않은 문장입니다. 그냥 “내 책을 절판시키시오” 또는 “내 책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마시오”라고 하면 되었을 텐데,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이런 어색함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이것을 소유의 대상인 ‘출판물의 형태’으 남는 것에 대한 거부로 해석합니다. 즉 스님은 자신의 이름이 달린 책이 소유의 대상(즉 출판물)이 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나름 설득력이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절판행위란 어떤 의미에서 저자가 휘두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행동으로서 물구나무를 선 출판욕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소유를 설파해온 스님이 그런 꼼수를 부려 자신의 이름을 날렸을 리 만무합니다. 따라서 저는 스님(저작권자)과 스님의 책(저작물)을 분리하는 것이 유언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스님의 책이 더 이상 누군가의 소유대상이나 비즈니스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그것을 웹 등에 완전히 공개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저작권이 없는 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출판업자의 입장에서 이것만큼 당황스러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판이란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그것을 소유대상으로 만든 것이니 때문입니다. 우리가 출간이냐 절판이냐는 출판업자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출판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회적 화제(이슈)를 책 판매와 연결시킬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화제가 많을수록 좋지요. 예컨대 그들은 사회적 갈등이든 정치적 이슈든 또는 누군가의 비극이나 죽음도 모두 책 판매량으로 환원시켜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구조 속에서 소위 교양인이란 그런 문화적 재생산에 복무하는 고용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회를 정상적으로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출판산업을 정상적으로 만드는 사람이죠.
작가도 실은 마찬가지입니다. 논픽션이 많이 팔린다면, 그들은 지금 당장이라고 소설을 때려치우고 논픽션에 매달릴 것입니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약삭빠른 작가들은 다른 쪽(아동문학이나 청소년문학으로)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장정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논픽션을 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에 서평가로서 인문교양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거나 『구월의 이틀』과 같은 졸작을 쓰거나 『삼국지』 다시쓰기를 하는 데에 10년이 넘는 시간을 소비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국의 문학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논픽션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공염불로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3. ‘도가니 열풍’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제 가장 중요한 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도가니 열풍’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도록 만듭니다. 일단 왜 그것이 ‘2011년 지금’ 문제가 됐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은 소설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2005년부터 많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PD수첩>으로 방영되어 전 국민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이미’ 많은 국민들이 그 사건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과 같은 공분을 일으키지 못했는지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방영된 <PD수첩>을 다시 보면 답이 나옵니다. 시사고발프로는 어디까지나 확인된 사실에 근거하여 꾸려지는, 어떻게 보면 매우 조심스러운 프로그램인데, 바로 그 때문에 그런 non-fiction은 한편으로는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청자들에게 제한적으로만 영향을 끼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그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호기심을 갖지만, 그것을 어디까지나 자신과 먼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시사프로그램의 경우, 사실 확인과정이 주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추리소설’적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고요?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추리소설은 기본적으로 범죄를 다루는 서사물입니다. 하지만 독자가 그것을 통해서 얻는 쾌감은 살해당한 자(희생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데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런 범죄가 행해지는 과정이나 숨겨진 범죄가 사실적으로 밝혀지는 과정에서 얻습니다. 즉 논리적 쾌감은 사실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데, 사실이 사실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선 희생자에 대한 ‘괄호 넣기’이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공지영의 픽션(『도가니』)은 그와 달랐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도가니』에 새롭게 추가된 사실은 없습니다. 장정일은 그런 것을 바랐을지 모르지만, 그러합니다. 하지만 역으로 보면 바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것은 사회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다른 글5)에서 말한 것처럼 『도가니』는 문학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독자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여기서 저는 문학적 가치와 사회적 영향력은 별개라는 것을 지적해 두고 싶습니다).
공지영의 픽션이 <PD수첩>의 논픽션과 다른 점은 한마디로 ‘사실의 단순화’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픽션의 정의를 새삼 돌이켜보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논픽션이라는 말 자체만 놓고 보면, 그것이 마치 픽션의 부정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후자가 나중에 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즉 픽션(또는 문학)이란 한마디로 사실의 복잡함을 거세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라면, 멜로드라마(통속소설)는 그것을 극단적으로 이원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즉 모 아니면 도, 또는 선 아니면 악인 셈이지요.
물론 공지영의 경우, 그것이 가진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진기행」의 차용하여 중간자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학적 장치가 『도가니』의 판매를 저조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도가니>는 바로 그런 문학적 거품을 깔끔히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도리어 가장 ‘공지영적인’ 『도가니』로 탈바꿈시켰고, 바로 그것이 ‘뒤늦은’ 도가니 붐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외일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객관적인 사실로는 감동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런 사실을 훼손시킴으로써(허구화함으로써) 만들어진 이야기에 의해 울고 웃고 분노하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의 감정이란 동물의 생리적 반응만큼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기계적인 것’에 가깝습니다. 이를 종교가들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는데, 예컨대 주일설교와 부흥회설교는 다릅니다. 부흥회에서 신도들이 울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이미 경험한 ‘부흥회용 매뉴얼’대로 설교가 이루어질 때입니다. 우리가 감정이입에 실패하는 것은 대부분 낯선 것이 등장할 때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뻔한 것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몰입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이 시종 ‘움직일 수 없는 사실’으 둘러싸인 개개인의 감정을 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순함에서만 평안함(쉼)을 얻습니다. 울고 웃고 분노함으로써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닐지 모릅니다(그것은 언제든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해 촉발되는 감정의 순화가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일전에 이런 문학을 대중문학과 구별하여 키치문학이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6), 그때 강조했던 것 중의 하나는 키치문학의 대립개념이 순문학(본격문학)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키치문학은 바로 순문학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키치문학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오락(쿤데라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사소한 예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토마스 만이 「영화」라는 에세이에서 영화는 결단코 예술이 아니라고 단언하면서 영화는 감정에 호소하지만 예술은 냉정함을 고수한다고 한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공지영(또는 신경숙)류의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하겠습니다. 즉 이런 키치문학은 단순히 본격문학에 비해 예술성의 정도가 약간 낮은 문학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몰沒문학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명칭을 부여해야한다면, ‘픽션’이나 ‘통속소설’ 정도가 적당할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한 형태로지만, 그런 의미에서 어쨌든 『도가니』는 문학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영화화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보다 잘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이 그 증거입니다.
혹자는 『도가니』의 사회적 영향을 예로 들어 문학은 앞으로 이전과 같은 사회적 위신을 회복할 것이라고 섣부르게 판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지영 역시 『도가니』의 성공이 젊은 작가들이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소설을 쓰는 데에 있어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어린, 그리고 장애가 있는 여자아이에 대한 성폭행만큼 사회적 분노를 일으킬 만한 키치적 대상을 찾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도가니』는 이중삼중의 극단적 키치를 우리에게 제시함으로써 성공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수백, 수천 명에 달하는 어른들의 죽음은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지만, 대여섯 명의 어린이에 대한 성폭행은 차마 바라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모순은 일찍이 세계문학사상 가장 키치적 인물인 이반 카라마조프에 의해 강조된 바 있습니다. 이반은 <대심문관 전설>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아무런 죄도 없이 학대받는 어린아이들의 고통’이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물론 기독교적 논리로 그것은 간단히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사후에 그에 합당한 영생을 보장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반은 그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며, 흥미롭게도 아이들이 그런 ‘이해된(유클리드적인)’ 영생보다는 더 가치가 있는 ‘사실’임을 강조합니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아. 난 사실에 머물고 싶어. 이미 오래 전부터 이해하지 않기로 결심했거든. 만일 내가 무언가 이해하고 싶어 한다면 당장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될 거야. 그래서 사실에 머물기로 결심한 거지. (…)
만일 어린애들의 고통으로 진리를 구입하는데 그는 꼭 필요한 고통의 총액을 보충해야 한다면, 나는 미리 단언해 두는 바이지만, 진리 전체도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거야. (…) 나는 조화를 원치 않아,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원치 않는단 말이야. 난 차라리 보상받지 못한 고통과 함께 남고 싶어.7)
하지만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이반의 ‘사실에 대한 강조’이 실은 지독한 픽션임을 비판합니다. 쿤데라는 적어도 이점에서만큼은 그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와 공명합니다. 사실상 ‘키치론’이라고 할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그 대표적인 예로 제시되는 것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행복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비나(그는 미국에서 화가로 성공합니다)의 친구인 한 상원의원은 네 명의 아이들이 잔디밭을 내달리는 모습을 보고 저런 것이야말로 행복이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순간 프라하 광장의 연단에 서있는 상원의원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즉 높은 연단에서 발 아래로 행진하며 미소를 짓는 시민들에게 보내는 것과 똑같은 미소를 짓는 그를 말입니다. 여기서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어떻게 이 상원의원은 어린아이들이 행복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그는 그들의 영혼을 읽었을까? 만약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들 중 세 명이 네 번째 아이에게 달려들어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면?
상원의원이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논거는 하나밖에 없다. 그의 감수성. 가슴이 말할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이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것이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물론 키치에 의해 유발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감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키치는 과감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키치는 인간의 기억력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적 이미지에 호소한다.8)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핵심적 이미지, 그것의 소위 할리우드식 서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아이는 주인공(아빠든 아저씨든)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원동력(약물)이자 정의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자 평화로운 마지막을 상징하는 에필로그적 존재로 등장합니다. 어린아이의 고통이 서사의 추동시키는 지렛대라면, 그들의 미소는 서사의 최종종착지인 셈이지요. 즉 우리는 때 묻지 않은 절대순수 앞에서 비로소 단순해질 수 있으며, 현실의 복잡함에서 벗어나 마음껏 울고 웃고 분노할 수 있는 것이지요. 쿤데라식으로 말하면, ‘가슴의 독재’이 가능하지요.
왜냐하면 그 순수를 파괴하는 인물은 일말의 동정도 필요 없는 절대악으로 치부할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어떤 분은 『도가니』의 사회적 순기능을 생각했을 때, 너무 가혹한 평가가 아니냐고 묻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복이 되겠지만 사회적 영향력과 문학적 평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많은 경우 그것이 보여준 영향력은 작품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 바깥에 있기에 그러합니다.
영화화되지 않았다면(저는 영화도 낮게 평가합니다), 『도가니』는 공지영의 작품 중 상대적으로 덜 팔린 작품 정도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대중들이 분노할 대상을 찾는 사회적 분위기가 없었다면, 소설이든 영화든 그렇게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련의 도가니 사태는 문학의 새로운 국면도 보여주는 것도, 영화의 영향력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사건도 아니며, 그저 몇 가지 우연이 만난서 이루어진 감정적 해프닝에 가깝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어떤 것이 지나치게 두드러진다는 것은 역으로 다른 무언가가 시야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며, 감정이란 무한대로 소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친 감정분출은 한동안 다른 것에 대한 무심함을 촉발시킬 뿐입니다. <작가선언>을 한 젊은 문학가들이 용산을 ‘선택 집중’하고 같은 시기 또 다른 지옥이었던 쌍용자동차를 사실상 외면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4. 기술은 우리를 구원할까? : SNS과 문학
최근 한국사회에서 감정의 도가니를 잘 보여주고 있는 SNS의 경우(『도가니』의 성공이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직접적인 표현과 빠른 전파력 때문에 오늘날 여론을 움직이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정치적 승패가 갈리기도 하는데, 일차적으로 그것은 대중동원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SNS의 대중동원력이란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매우 제한된 사용자를 가지고 있지요. 다만 언론(포탈 포함)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자꾸 공개함으로써 전반적인 사회적 흐름인양 착각하게 만드는데, 이때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트위터에 글을 올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쪽이지요.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SNS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실적 인간관계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 성격과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사회경제적 조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그들은 현실적 관계를 회피하기 위해 SNS에 집착한다기보다는 전자의 관계가 잘 꾸려지지 않는 환경에 놓여있기에 어떻게든 그 결핍을 전자망의 관계로 메우려고 합니다. 짐작컨대 학생, 주부, 실업자나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이나 전문직보다 SNS 활용도가 매우 높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론이 가능할 것입니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인사들도 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고 있지 않는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SNS 활용은 사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업무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SNS를 활용하는 유명인사들은 대부분 어느 쪽으로든 대중을 움직임으로써 이득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인이든, 작가든, 연예인이든, 교수든, 판사든. 그렇다면 그들은 왜 최근 이쪽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요? 그것은 앞서 말한 대중동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SNS를 잘 사용하지 않는 정규직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은 사회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어떤 조치 없이는 사실상 움직이기가 불가능한 데에 반해, SNS 사용자들은 ‘희망적인 말’, ‘성적으로 올바른 말’,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 ‘개념 있는 말’만으로도 손쉽게 동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SNS이 만드는 가치란 민주적 토론 등을 통해 생산된 가치와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중요한 것은 정보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많은 경우 정보의 빠른 파급력(즉 가속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지상명령’(이것은 주로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지지하거나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9) SNS 사용자들은 정보의 진위를 분별하는 과정을 생략하고(제한된 글자 수 등의 시스템적 한계가 형식으로 그것을 못하게 막고 있기도 한데, 그것은 속도를 저하시키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전달하는 매개자를 자처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발생할 ‘현실에의 영향력’에서 나름 일조했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정보가 전달되는 통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성(사실의 확인)이라는 관管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사실의 주관화)이라는 관입니다. 당연히 SNS는 후자에 최적화된 커뮤니케이션이라 하겠습니다. 감정의 전염력은 군중(또는 대중)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하겠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미디어학의 주제라기보다는 정치학의 주제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무기(도구)를 준 것일까? 아니, 권력에 저항하는 기술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지금까지는 이 물음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빠른 정보전달과 그것이 만들어낸 ‘지상명령’은 권력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기에 충분하니까요. 소위 자스민혁명이 그 예지요. 하지만 정보 전달에 소요되는 시간의 최소화(단축화)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SNS는, 바로 그로 인해 ‘역으로’ 통제 내지 조작이 비교적 쉬운 매체라는 점 또한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통제자는 리비도의 통로만 적절히 바꾸어 군중을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빅브러더가 존재한다면, 그는 감시카메라나 인공위성보다는 정보의 통로를 장악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정보의 불균형과 관련이 있습니다. SNS는 정보전달의 속도를 무기로 삼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렇게 유통되는 정보의 양(또는 내용)을 조절할 수 있다면, 통제 또한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SNS에서의 판단은 그것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정보량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때의 판단이란 정보량의 변동에 따라 언제든지 뒤집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는 혁명이 반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 사고하기를 거부할 때에만 소위 SNS의 위력이라는 것이 성립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사회적·경제적 한계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관념적으로는 ‘실존적 결단’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비록 자신의 주위는 바꾸지 못하지만(즉 무력하지만)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대문자 사회는 바꿀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자기중독적 희망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의 역할이란 현실을 견디도록 한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회변혁에 있어 ‘최소한의’ 공헌을 음미하기보다는 왜 그때 사회가 움직였는지를 따지는 게 아닐까 합니다. 사실 확인을 넘어서려는 이런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기술과 진보’라는 틀 안에서 ‘지독하게도 느리고 냉정한’ 문학의 역할 내지 예술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한국문학과 그 적들] [세계문학의 구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