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과 불심을 일깨운 스승의 법문
-설악무산스님과의 만남
최동호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을 실감하게 된 것은 나이가 들어서이다. 앞뒤 분간을 못하고 살던 시절에 이 말은 그저 인연을 소중히 하라는 강조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구초심이 되어 자신의 생을 돌이켜 보는 시기에 들어서면 무언가 알 수 없는 인연의 나선형 그물에 의해 자신의 생이 전개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춘기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할 수 있으나 시심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한 불심의 원천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많은 책을 읽고 대학에서 스승을 만나고 선후배들을 만났으나 나에게 시나 인생의 근원에 대한 것을 직접 명쾌하게 가르쳐 주신 분은 없었다. 이 인연은 어느 날 우연히 찾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년이 넘은 이 인연은 소소한 것은 제하더라도 다음 세 가지 법문을 계기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첫 번째 법문은 이성선 시인의 권유로 낙산사 무산 노장스님을 처음 뵙기 위해 찾아간 1992년 가을에 있었다. 설악산 시인 이성선 선배가 자신만만하게 앞장을 섰으나 노장스님은 지금 절에 계시지 않는다는 전갈을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스님의 방문 옆에는 깨끗한 고무신이 한 켤레 놓여 있었다. 고무신은 있는데 스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그 이유를 당시는 알 수 없었으나 후일 노장스님을 가깝게 모시기 되어 의문을 풀게 되었다. 잡지 편집자를 비롯한 귀찮은 사람(당시 필자는 현대문학 주간이었다)은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 스님의 원칙이었다는 것이다. 졸지에 만날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 크게 당황했으나 오랜 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나에게 주신 최초의 법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부재로 실재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고지식한 책상물림의 단순한 생각을 깨트리게 만들어 주신 것이다. 밝은 햇살이 소복하게 담긴 하얀 고무신은 지금도 가끔 기억 속에서 떠오른다.
두 번째 법문은 2000년 초겨울에 있었다. 1999년 가을 UCLA 대학으로 공부하러 떠나기 전에 조금은 무례하게 노장스님께 당호를 부탁드리고 연말에 노장스님을 찾아뵌 것은 백담사 선방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노장스님을 알현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인데 어렵게 선방 문을 열고 들어간 필자에게 노장스님은 매우 특별한 당호를 지었다고 미소를 지었다. 그 당호가 ‘치인痴人’이라는 것이었다. 백담사 아랫마을에서 미리 마신 곡차기가 확 가시는 듯한 충격이 스쳐갔다. 내심 멋진 당호를 기대하고 있던 필자로서는 ‘바보’가 된다는 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마음을 간파하신 노장스님은 『벽암록』의 전거를 인용하시면서 이 당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최 선생에게 가장 절실한 당호라는 것이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잠시 선방을 나와 백담사 계곡을 휩쓰는 물소리를 한참 듣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노장스님께 큰 절을 올렸다. 이 때 당부하신 말씀은 평론에 힘을 기울이는 것도 좋지만 원래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시심을 일깨워 앞으로 창작에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범종소리처럼 은은하고 긴 울림을 전해 주었다. 이 순간이 바로 비평에서 시로 전환하는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다. 비평에서 시로 전환시킨 이 말씀은 노장 스님이 필자를 꿰뚫어보고 계셨다는 뜻도 될 것이다. 시작 메모지를 다시 가다듬어 좀 더 적극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시인 최동호는 이 가르침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장스님의 세 번째 법문은 지난 2013년 8월 필자의 정년 문집에 들어 있었다. 여러 번 사양하시는 것을 결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려 어렵게 문집의 서문을 받게 되었다. 병고로 머리가 맑지 못해 글을 쓰지 못하신다고 하셔서 그리 큰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원고가 마감되고 인쇄가 돌아가려고 하는 마지막 시점까지 기다렸으나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역시 무리가 아닌가 노심초사 중에 원고를 쓰셨다는 전갈이 왔다. 직접 찾아뵈려했지만 올 것 없다고 하시고 메일로 보내주셨는데 원고를 읽는 순간 강한 전류가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나친 과찬의 글로 필자를 압도하신 것은 물론 그 구성과 문체에 있어서 단연 근래에 보기 드문 명문장이었다. 마치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 같았다. 막상 문집 증정식 당일에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그 침묵은 이미 글로 다 말했으니 번다한 말이 더 필요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특히 노장 스님의 글에서 탁하고 가슴을 친 것은 ‘파수상고산把手上高山’이라는 구절이었다. ‘두 손을 맞잡고 높은 산에 함께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은 필자에 대한 노장스님의 절대적인 신뢰감의 표명이기도 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 어느 쪽도 다 감당할 수 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말에 담긴 노장 스님의 가르침은 평생의 큰 교훈이다.
어느 지면에서 필자는 시심은 불심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은 대체 불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부처의 마음은 염화미소라고 한다. 그 얄궂은 미소의 뜻을 제대로 안다면 세상만사를 이해하고 시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 갈수록 시도 그렇지만 세상만사도 자꾸만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인연의 실마리를 하나 붙잡고 이를 잘 풀어나가 그 근원을 찾는다면 무언가 제대로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설악무산 노장스님은 승속을 넘어서는 인연을 세 번의 법문으로 전하셨다. 그것은 스쳐 지나갈 범상한 인연은 아니다. 아마 전생에 세속의 인연을 넘어서는 불가의 인연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평생 시를 쓴다고 했지만 그 실마리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던 용기 없는 속인에게 ‘너는 바보다’라는 명제로 설하신 것이다. 바보가 된다면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노장스님의 평소 말씀을 근거로 이미 「명검」을 비롯한 몇 편의 졸작을 발표한 바 있지만 최근 읽은 노장스님의 시 「아득한 성자」는 남다른 감명을 주었다. 이를 흉내 내어 다음 시를 써 보았다.
매미들 돌부처에 소신공양
바친 저물녘
비에 젖은 파초가 부처
옷자락 벗는다
산들바람 앙금처럼 내려앉은
대청마루
하루살이 알이 스는 노스님 등에
노을이 따습다
―「대청마루 독경」
큰 눈으로 보면 하루를 사는 것이나 천년을 사는 것이나 다 같이 한 순간인데 무어 다를 것이 있겠는가. 차라리 하루살이가 성자다. 오도의 송이라고 할 수 있는 시 「아득한 성자」를 읽고 있으면 산들바람 이는 대청마루의 독경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생사를 뛰어넘는 가르침을 전하는 노장스님의 등에 저녁노을이 후광처럼 실리고 그 등에는 하루살이 알이 슬어 새 생명이 탄생한다. 거기에는 중생을 어여삐 여기는 노장스님의 따뜻한 자비지심이 담겨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니 노장스님이 보여준 최초의 법문은 하얀 고무신이었다. 마치 부처가 열반 후 늦게 달려온 마하가섭에게 두 발을 내보여 자신의 가르침을 전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당호를 주시던 날 노장스님과의 미소도 의미심장하다. 인연은 인연을 만들고 다시 인연을 만들어 돌부처의 귀도 뚫어 본래 마음이 열리고 하루살이가 천년을 사는 법을 깨닫는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최동호/ 1979년 〈중앙일보〉 평론 당선. 시집 『황사바람』 『아침 책상』 『공놀이하는 달마』 『불꽃 비단벌레』외, 시론집 『현대시의정신사』 『삼의 깊이와 시적 상상』 외 다수. 대한민국문학상 평론상 소천비평문학상 시와시학상 평론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고려대 명예교수.
첫댓글 하얀 고무신! 원래 있던 마음을 깨우쳐 창작에 전념하라! 저도 법문 받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채 선후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