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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이란 조선 중기 사회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들이었습니다.
조광조가 사림의 거두인 셈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훈구세력에 의해 사림들은 4번의 사화속에서 많은 이가 죽고 시련을 맞지만 결국 조선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우선 가장 먼저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격돌하게 되면서
심의겸의 집이 대궐을 기준으로 서쪽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다 하여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을 서인과 동인이라 칭한데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조정랑이 무엇이길래 이런 분열이 일어났을까요???
이조정랑이 바로 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직급에 비해 상당한 권력을 지니고 있어 일종의 하급관리 인사권자로서의 그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이 중 서인은 이이(이율곡), 성혼이 그 중심이었으며, 동인은 이황, 조식, 서경덕의 제자로 구성되었습니다. 동,서인으로 나뉘어진 붕당은 동인이 먼저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집니다.
그 이유는 정철에 대한 처벌에 관한 건에서 강한 처벌을 원하는 북인과 그렇지 않은 남인으로그 세력이 나뉘어 지게 된 것이죠.북인은 다시 소북과 대북으로 나뉘어 지는데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바로 대북이고 영창대군 지지세력은 바로 소북입니다.
그러나 결국 광해군이 즉위하고 소북은 몰락, 대북이 그 세력을 쥐게 됩니다.
인조반정이 실시되고 광해군이 폐위되고 서인이 옹립한 인조가 등극하면서 대북마저도 몰락하여 실질적으로는 서인과 남인의 대결구도로 압축됩니다.
이 후 서인은 숙종에 이르기 까지 송시열을 거두로 하여 서인의 지배체제를 확고히 구축합니다.
그러나 장희빈을 주축으로한 남인세력은 세자옹립과 더불어 기사환국을 이루어 내며 다음 보위와 정권을 동시에 차지하는 큰 기회를 이룹니다.
6년 후 남인은 숙종의 폐비 민씨를 다기 인현왕후에 옹립시키며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하여 남인 역시 이 때 몰락 당하게 됩니다.
다시 서인의 세상이 온 것이지요.
물론 이전에 서인은 노론과 소론의 분열이 있었다고 하지만 남인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서로의 힘을 모았기 때문에 갑술환국 이후 송시열의 제자들과 문파로 구성된 노론과 남구만을 중심으로 한소론으로 나뉘어 다시 격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들이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장희빈에서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와 지금 최숙의의 소생인 연잉군의 보위를 놓고 다툼이 벌어집니다.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가 숙종 이후 조선의 20대 임금인 경종에 오르자 경종을 추대했던 소론들의 세상이 오게 됩니다.하지만 경종은 소생이 없고 건강이 좋지 못하여, 동생인 연잉군에게 보위를 물려주니 이 임금이 21대 영조임금입니다. 그 후 노론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그러나 이 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또다른 비극적인 사건을 잉태하게 됩니다.영조는 잘 아시다시피 탕평책을 실시하여 죽어가던
남인과 소론에게도 어느 정도의 기회를 부여했습니다만 실질적인 권력은 노론에게 있었습니다. 왕권 견제책으로 심어놓은 것 뿐이죠. 이 후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죽음(뒤주에 갇혀 죽음)과 관계해 시파와 벽파로 노론은 다시 분열하게 됩니다.조선의 당파(붕당)은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으며, 이 이후에는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시작됩니다.그 유명한 안동 김씨, 풍양 조씨등의 세도 정치 이후 바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로 이어져 조선의 500년 역사는 마감을 하게 됩니다.
남인
서인과 대립하던 동인은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서인과의 대결에서 상대적으로 온건론을 내세운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1591년(선조 24년) 서인 정철이 건저의 사건으로 파직되자 서인 배척에 온건했던 동인 중의 일파이다. 남인은 초기에는 우성전(禹性傳),이덕형, 유성룡, 김성일, 후기에는 윤휴, 허목(許穆)·허적(許積) 등이 영도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조식을 따르는 선비들은 북인을, 이황의 학파는 남인을 구성했다.북인은 선조의 사망과 광해군의 등극으로 집권당이 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여 소수파가 되었고,이후동인의 전통은 인조 반정 때 서인을 지지하여 살아남은 남인이 대부분 잇게 되었다.그러나 효종, 현종 연간에 율곡과 우계의 문묘종사 논쟁과 예송 논쟁 과정에서 남인 강경파인 허목, 윤선도, 윤휴 등은 송시열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갈등을 증폭시켰다.
남인은 조선 숙종시대에 예송에 참여하여 서인을 실각시켰으나 서인 배척 문제로 청남 탁남으로 분열되었다
그 뒤 인현왕후 폐위, 장희빈 중전 옹립, 인현왕후 복위 등으로 서인과 남인 간 대결이 주를 이루는 정국을 주도한 바 있고, 영조와 정조대에는 이들의 탕평책에 따라 등용되었다. 이때 남인의 영수는 채제공이었다.
그러나 1800년 6월 정조 사망 이후 세도 정치 아래서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으며,재야에 머물면서 17세기 이후 실학파 형성과 천주교 도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승훈, 안정복, 정약용, 권철신, 이가환 등이 있다.사상과 강령남인의 정치 이념과 강령은 기본적으로 유교,성리학이었다. 그러나 허목등은 도교와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있었고, 유형원, 이익 등은 청나라의 고증학과 실리 사상을 추구하여 실학사상을 잉태하기도 했다. 이는 성리학과는 정면 배치되는 사상이라 남인 당내에서도 이론의 여지가 있었다.
18세기에 오면 이승훈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래 권철신, 이가환이 천주교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천주교 사상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세력이 등장하였으며 이를 천주교를 받아들인 신서파와 구별하여 공서파라 부른다.윤지충, 권상연 등의 위패 소각 사건을 계기로 공서파가 두드러졌다.
인조 반정 이후에도 남인은 거의 오랜 기간 야당화를 겪었으므로 남인은 성리학을 당의 주요 강령으로 삼았으나 남인내 일부는 실학과 천주교 등 다른 사상에서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청남
1659년 효종이 사망한 후 자의대비(인조의 계비) 상복을 어떤 복제를 하느냐를 두고 남인과 서인이 논쟁을 벌였고 이 논쟁에서 남인이 패배하여 실각하였는데 13년 후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또다시 자의대비가 며느리 상에 어떤 복제를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남인과 서인 간에 치열한 정치투쟁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갑인예송이라고 하는데 이 정치투쟁에서 현종은 서인을 실각시키고 남인을 등용하게 되었다. 현종이 급서하고 숙종이 등극하여 복제를 잘못 처리한 서인의 처벌하게 되었는데 이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간에 의견이 대립되었다. 서인의 영수이자 남인의 최대 정적이었던 송시열의 처벌을 두고 강경파인 청남과 온건파인 탁남으로 나뉘게 되었다. 송시열에 대한 극형을 주장했던 일파를 청남, 이에 반대했던 일파를 탁남이라고 한다. 청남의 대표적 인물로는 윤휴 허목 홍우원이 있으며 탁남의 중심인물은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민희(閔熙)·오시복(吳始復)유명천(柳命天) 등이었다.
그러나 남인은 서인의 공격을 받고 역모죄로 몰려 대부분의 실각(경신환국)하고 말았다.
탁남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아버지 인종의 계비였던 자의대비가 며느리 상에 어떤 복제를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남인과 서인 간에 치열한 정치투쟁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갑인예송이라고 하며, 이 정치투쟁에서 서인을 실각시키고 남인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각한 서인의 처벌을 둘러싸고 남인간에 의견이 대립되었는데 특히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의 처벌을 두고 강경파인 청남과 온건파인 탁남으로 나뉘게 되었다. 청남의 대표적 인물로는 허목(許穆)·윤휴(尹?)·홍우원(洪宇遠) 등이 있으며 탁남의 중심인물은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남인은 숙종이 등극한 후 서인들의 모함을 받아 역모를 꾀한 죄로 몰렸으며 남인의 영수인 허적과 윤휴가 숙청을 당하고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실각했다.
북인
구성붕당 정치 초기부터 서인과 대립하던 동인은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되었다. 서인 정철의 건저의 사건을 전후하여 정여립의 사형을 주장한 서인과의 대결에서 남인은 상대적으로 온건론을 내세웠고, 강경파는 북인을 형성했다. 중심 인물은 정인홍,정여립,이발,이산해이다. 이들은 유성룡이 이끄는 남인과 대립하였으며, 학문적으로는 조식을 따르는 선비들이었다. 반면 남인에는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는 유학자들이 참가했다.1602년에 임진왜란 때의 타협적 정책을 빌미로 정인홍의 탄핵을 받은 유성룡이 밀려나면서 북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북인은 고위 관료 중심의 대북과 신진 세력인 소북의 두 개 정파로 구성되었으며, 선조 말기에는 소북이, 광해군 대에는 대북이 집권했으며, 소북은 영창대군을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하였다.1606년에는 인목대비가 선조가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출산하여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이 치열해졌다. 선조가 1608년에 세자 문제를 결정 짓지 못하고 사망하여 광해군이 등극하면서 광해군을 적극 지지한 대북이 집권당으로 부상했다. 이이첨과 허균, 홍여순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대북은 다시 육북(肉北)·골북(骨北)·중북(中北)으로 나뉘며, 소북은 청소북(淸小北)·탁소북(濁小北)으로 분열한다.1623년에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북인은 몰락하였고, 특히 광해군 재위 당시 집권당이었던 대북은 거의 전멸하였다. 이후 동인의 전통은 서인의 보복을 피하여 살아남은 남인과 일부 소북이 잇게 되었다
노론
노론(老論)은 조선 붕당정치의 한 당파이며, 숙종 이후 조선의 주요 집권 세력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인에서 분파하여 소론과는 대립하는 파벌이었다. 서인의 일파인 소론과 노론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당파를 이루었다.
1694년 남인을 제거하고, 1728년 소론을 제거후, 김조순, 조만영 일가의 세도정치가 등장할 때까지 72년간 독재정권을 형성하였다.
노론의 초대 영수 송시열서인의 분파는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놓고 명분론과 현실론이 대립하면서 싹텄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1680년(숙종 6년)의 경신환국 때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도 적소(謫所)에서 돌아와, 영중추부사로 입조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인 중 소장 측에서는 송시열의 논의에 불만을 품는 자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1682년(숙종 8년) 남인 제거를 꾀한 김익훈(金益勳)을 놓고 소장파가 그의 엄중 처벌을 주장한 데 대해 송시열 등은 그를 신구(伸救)하려 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송시열이 효종의 묘(廟)를 세실(世室)로 하고 태조에게 시호를 추상(追上)하자는 제의를 하자 그의 문인 윤증(尹拯)과의 불화까지 겹쳐 소장파는 소론을, 또한 노장파는 노론을 형성하였다.
숙종 대에는 본래 서인과 남인이 정쟁의 양대 축이었으나, 장희빈의 몰락을 계기로 남인은 몰락했다. 이후 정국은 서인 내부에서의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면서 이같은 대립이 격화되었다.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여 노론 4대신이 처형되었으나,경종이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면서 이번에는 소론 4대신이 제거되었다.
이에 소론은 남인과 손을 잡고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도리어 밀려나게 되었다.
김조순(노론이었으나 시파였다.)노론의 우위 속에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소론 일부도 등용했고, 전통적인 대립 구도가 완화되면서 노론의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차차 퇴색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을 하고,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로 다시 갈라지게 된다.그러나 이이, 김장생, 송시열로 이어지는 노론의 사상과 이념은 19세기 이후까지 계속 계승되어 북학파 등을 낳았다.
혹자는 노론 벽파가 이후 개화파를 형성하고, 남인, 노론 시파 등은 위정 척사파를 형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사상적 기반,유교와 특히 성리학적 대의사상을 당의 강령으로 삼았다. 이는 송시열, 김창집, 김종수 등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노론 내 벽파와 시파에게도 공통적으로 전하는 전승이었다.
시파 -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
벽파 - 사도세자의 죽음을 옹호
노론의 4대신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기타1930년대 까지만 해도 노론계 인사들의 후손들은 남인에 속하는 정약용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한국에 서점의 개념이 도입된 1890년대 이후, 자유롭게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었음에도 그의 저술들을 외면하였고, 윤치호는 노론계 인사들은 정약용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이다.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상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사지도 않는다.
윤치호일기
노론은 정약용이 죽은지 130년이 지난 뒤인 1930년대 까지도 정약용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하였으며,
이는 1945년 8월 광복과 동시에 아있던 노론들이 해체될때까지 그 적개심은 계속되었다.
소론
조선 중기 이후 서인에서 분파했으며, 노론과는 대립하는 파벌로서 윤증(尹拯)을 옳게 여기는 파벌이었다.
서인의 일파인 소론과 노론,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과 북인이 사색당파를 이루었다. 소론에는 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박태보·남구만·박세채 등 대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소장이 많다.
개설서인의 분파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미 단초를 보였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상대적 보수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송시열을 비판하는 소론으로 분파가 일어났다.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으로 불화를 일으킨 윤증을 비롯하여, 남구만, 박세채가 소론의 중심이었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잡은 서인들은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노론과, 타협적 온건론을 주장한 소론으로 갈라졌다.
송시열과 윤증의 감정적 다툼은 1669년 윤선거의 죽음에서 비롯된다.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윤선거의 병자호란 당시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선명성을 문제 삼았다.
송시열의 교조적인 태도에 대하여 윤선거는 생전에 《기유의서》를 남겨 비판한 적이 있어,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이 사후 윤증을 통해 다시 촉발된 것이었다. 윤증이 소론에 속하면서 양 파벌의 분화는 촉진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이르러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여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극에 달했다.경종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소론이 득세했으나,후사가 없어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으면서 대리청정 논쟁,목호룡의 역모 사건 등으로 정국은 복잡해졌다.결국 경종은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여 이번에는 노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영조 즉위 초에 소론의 핵심은 제거되었고 일부는 남인과 연합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척결되었다.
이후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을 통해 집권당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소론의 학문적 전통은 정제두,이광사를 통해 이어져 강화학파를 형성했고,이종휘와 이건창을 거쳐 정인보에까지 승계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시파
시파(時派)는 조선 정조 시기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세력이다.
사도세자로 널리 알려진 장헌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효장세자가 사망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대리청정을 맡길 정도로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노론을 지지하는 영조와의 갈등으로 폐위 된 뒤 뒤주에 갇혀 사망한다. 후 조선의 조정은 장헌세자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입장과 자업자득이라는 입장으로 나뉜다.
시파는 장헌세자의 죽음이 안타까운 죽음이라 여겼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벽파라 한다.
역사시파에는 남인과 소론, 그리고 노론의 일부가 가담하였다. 시파와 벽파의 입장차는 장헌세자의 죽음으로 생겨난 것이나, 정조가 즉위한 뒤 숙위소가 설치되고 홍국영이 숙위대장으로 세도정치를 편 1778년 이후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정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지지한 시파를 중용,개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정조 시기 중용되었던 시파는 정조 사후 순조가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벽파를 중용하자 몰락하였다.한편,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하게 되자 순조의 외척이었던 김조순을 심으로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벽파 역시 붕괴되고 만다. 김조순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시파를 다시 중용하였다.
주요 인물다음은 시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정조 시기 - 홍국영, 홍봉한, 채제공, 윤행임, 김노경, 서유방
순조 시기 - 김조순, 서유린, 김이교, 윤행임, 정민시, 홍낙임, 박제가, 이서구
벽파
벽파(僻派)는 조선 정조 시기 정조의 탕평책을 반대한 세력이다.
사도세자로 널리 알려진 장헌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효장세자가 사망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대리청정을 맡길 정도로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노론을 지지하는 영조와의 갈등으로 폐위된 뒤 뒤주에 갇혀 사망한다 후 조선의 조정은 장헌세자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입장과 당연한 죽음이라는 입장으로 나뉜다.파는 장헌세자의 죽음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시파라 한다.
역사벽파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처가인 외척을 중심으로한 노론의 일부 세력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시파와 벽파의 입장차는 장헌세자의 죽음으로 생겨난 것이나, 정조가 즉위한 뒤 숙위소가 설치되고 홍국영이 숙위대장으로 세도정치를 편 1778년 이후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2] 정조 즉위 당시 벽파는 권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정조는 재위 기간 동안 개혁을 통해 벽파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정조시기 권력에서 멀어졌던 벽파는 정조 사후 순조가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다시 력을 장악했다.권력을 장악한 벽파는 장헌세자의 추승을 건의했다는 구실로 시파를 탄압하여 조정에서 몰아냈다.한편,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하자 순조의 외척이었던 김조순를 중심으로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벽파 역시 붕괴되고 만다.김조순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시파를 다시 중용하였다.
정조 시기 - 김상로, 김귀주, 김종수, 심환지, 홍상범, 홍계능
순조 시기 - 서용보, 서능보, 심환지, 김관주, 김달순, 이만수, 서영수, 이안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