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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잃어버린 한국상고사 원문보기 글쓴이: 민족긍지
5. 구태백제(仇台百濟:일명 南夫餘 또는 伊國)
[광개토왕비문에는 "伊殘" 또는 "倭"로 적혀 있다.]
[구태백제는 언제 건국되었고, 부여 무리가이 한반도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우도록 공손씨가 도운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구태백제가 동이의 강국이 된 배경은 무엇인가?]
1). 개설
구태백제(仇台百濟)는 부여왕 위구태가 부여 무리를 거느리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구태(仇台)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百濟)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이 대방고지는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A.D 204년경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이다.
일부 사학자는 이 대방고지를 계(薊) 동쪽 방면 또는 남만주 금주(錦州) 방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구태백제(仇台百濟)가 세워진 대방고지(帶方故地)는 후한(後漢)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한 지금의 황해도 지방이지 계(薊) 동쪽 방면이나 금주 방면이 아니다.
위구태가 세운 구태백제는 후에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 중국의 정사(正史)에 요서지방(遼西地方)과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에 군(郡)을 두었다고 적혀 있는 백제는 구태백제이다.
일부 사학자는 비류백제와 구태백제를 혼동하여 요서지방(遼西地方)과 중국동해안지방(中國東海岸地方)으로 진출한 백제를 비류백제(沸流伯帝)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정사인 북사(北史)나 한국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적혀 있는 백제는 비류백제나 온조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다.
2). 건국경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 있는 구태백제에 관한 문구를 살펴본다.
「북사 및 당서에도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仇台)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漢)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위 문구에 의하면 구태백제를 건국한 위구태는 요동태수 공손탁의 사위였다.
그렇다면 위구태는 어떤 인물인가?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위구태는 부여왕이었다.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내속하였다. 후한 말에 현도태수 공손탁이 해동(요동) 땅을 넓히니 바깥의 오랑캐들이 무서워하며 복속하였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내속하였다. 때에 고구려와 선비가 강하였는데, 공손탁은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있는 부여에 종녀를 (위구태의) 처로 주었다.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 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 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三國志 魏志 東夷傳 卷30 夫餘
공손탁은 왜 종녀를 위구태의 처로 주었을까?
이는 후한이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한.부여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한은 A.D 48년에 장춘 방면의 부여와 교류하여 당시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어 있던 부여를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시키고 후한과 부여가 고구려를 포위하였다. 그 뒤 A.D 120년에는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후한에 보내어 한.부여 동맹이 결성되었는데, 부여는 이 동맹에 따라 다음해 고구려가 한군현을 공격하였을 때 왕자 위구태와 군사 2만 명을 보내어 한(漢)나라를 도왔다.
「태조대왕(太祖大王) 69년(A.D 121년) 12월 왕이 마한(馬韓), 예맥(濊貊)의 1만여 기병과 같이 현도성(玄菟城)을 포위하니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 한병(漢兵)과 합력하여 막아 싸워 왕군(王軍)이 대패하였다. 十二月 王率馬韓.濊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그 뒤 A.D 136년에 부여왕이 후한을 방문하여 동맹관계를 강화하였고, A.D 190년경에 공손탁이 요동을 장악하였을 때 위구태는 요동군에 내속하였다. 후한은 한.부여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이 무렵 공손탁의 종녀를 위구태의 처로 주었다.
부여왕 위구태가 구태백제를 세웠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문구는 사실일까?
중국의 정사(正史)인 위서(魏書) 백제국전(百濟國傳)에는 백제국은 부여로부터 나왔다고 적혀 있고,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구태가 처음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시작하였다고 적혀 있어 부여왕 위구태가 대방고지에서 백제를 세웠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구는 사실로 보인다.
「백제국은 부여로부터 나왔다. 百濟國 其先出自夫餘」魏書 百濟國傳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었는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처음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세웠다. 百濟者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 有仇台者 始國於帶方故地」周書 百濟傳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처음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 東明之後 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于帶方故地」隋書 百濟傳
위구태가 부여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로 와서 구태백제를 건국한 시기와 장소를 살펴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위구태는 대방고지(帶方故地)에 구태백제를 건국하였다. 이 대방고지는 후한 공손강이 A.D 204년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부여왕 위구태가 마한과 온조백제를 정복한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초고왕(肖古王) 39년(A.D 204년) 겨울 10월 혜성이 동쪽 우물에 나타났다. 冬 十月 星孛于東井」
「초고왕(肖古王) 40년(A.D 205년) 가을 7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秋 七月 太白犯月」
온조백제 항에서 설명한 것처럼 초고왕기(肖古王紀) 39년 10월조 문구는 장춘(長春) 방면의 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대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동남쪽 방면 즉 공손강(公孫康)이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으로 왔다는 뜻이고, 초고왕기(肖古王紀) 40년 7월조 문구는 위구태(尉仇台)가 전에 홍성 금마 마한(馬韓) 지역인 온조백제(溫祚百濟)와 익산 금마 마한(馬韓)을 정복하였다는 뜻이다.
구태백제의 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구태(仇台)가 처음 대방고지(帶方故地)에 백제를 세웠다고 적혀 있으나, 구태백제의 수도는 대방군에 있지 않았다. 중국의 정사인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의 시조(始祖)가 구태(仇台)라고 적혀 있고,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는 고마성(固麻城:웅진, 지금의 공주)에서 다스렸다고 적혀 있으며(治固麻城),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치성(治城:왕성)을 고마성(固麻城:웅진)이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號所治所曰固麻). 이를 보면 구태백제의 수도는 웅진에 있었다. [註 한원(翰苑) 所引 괄지지(括地志)에 "國東北六十里 有熊津城 一名 固麻城"이라 적혀 있다. 즉 고마성을 일명 웅진성이라 불렀다.]
3) 구태백제 건국의 시대적 배경
위구태(尉仇台)는 장춘 방면의 부여 무리를 거느리고 후한의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웠는데, 공손씨가 위구태를 지원한 것은 단지 위구태가 공손탁(公孫度)의 사위라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후한 말인 A.D 204년에 공손씨가 장춘 방면의 부여 무리를 대방군으로 대량 이동시켜 구태백제 건국을 지원한 시대적 배경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후한 광무제 때 청천강 이남 지방에 설치되었던 한군현의 변천과정과 부여, 후한, 고구려간의 역학관계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한군현 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후한은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하기 위하여 A.D 44년에 청천강 이남 지방을 점령하여 한군현을 설치하였다.
「대무신왕(大武神王) 27년(A.D 44년) 가을 9월 후한(後漢)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나라(樂浪)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秋 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取 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건무 20년 한 염사인 소마시 등이 나라군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한 염사읍군에 봉하고 나라군에 속하게 하니 사시절 조공하였다.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貢」後漢書 韓傳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포위한 후한은 A.D 48년에 부여와 통교하여 고구려를 북쪽 방면에서도 포위하였다. 이에 반발한 고구려는 A.D 49년에 선비와 같이 후한의 우북평(서진 때 북평으로 개칭. 북경 동쪽 방면), 어양(북경 동북 방면), 상곡(북경 서북 방면), 태원(산서성) 등지를 점령하였다.
「모본왕(慕本王) 2년(A.D 49년) 봄 장수를 시켜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요동태수(遼東太守) 채동(蔡)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和親)하였다.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고구려의 대공세 후 한반도와 요동에 있던 한군현은 모두 소멸되었다.
그후 후한은 고구려와 선비 사이를 이간시키고, 고구려의 동맹세력인 오환을 약화시켜 고구려를 고립시킨 후 A.D 105년에 동으로 단단대령까지 점령하여 한군현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아직 한반도 방면에는 한군현을 재건하지 못하였다.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傳)에 의하면 환령지말(후한의 환제<146-167>와 영제<168-189> 재위 때)에 한(韓:백제), 예(濊:고구려)가 강성해져 한군현이 이를 제압할 수 없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가 강성해져서 후한 광무제 때 청천강 이남 지방에 설치되었던 한군현이 환령지말에는 이미 소멸되고 없었다는 뜻이다.
「환령지말에 한과 예가 강성해져서 군현이 통제를 못하게 되자 백성들이 한국으로 많이 흘러 들어갔다. 桓靈之末 韓濊强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후한은 강성해진 고구려를 남쪽 방면에서 다시 포위하고 또 역시 강성해진 온조백제를 통제하기 위하여 A.D 204년에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지(荒地)를 점령하여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고, 후한의 동맹세력인 장춘 방면의 부여 무리를 대량으로 대방군으로 이동시켜 온조백제와 마한연맹을 정복하고 왜.한 관련 업무를 대방군이 관장하게 하였다.
「건안중에 공손강은 둔유현 이남 황지에 대방군을 두고 공손모와 장폐 등을 보내어 유민들을 수집하고, 군사를 일으켜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후 왜와 한 (관련 업무는) 대방군에 속하였다.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 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 倭韓遂屬帶方」三國志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구태백제의 건국은 고구려 포위 및 후한의 왜.한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4). 구태백제 역사
가. 대방고지로 이동하여 온조백제와 마한연맹 정복
위구태는 A.D 204년 10월에 공손강이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세운 후 다음해 7월에 온조백제(溫祚百帝)와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정복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를 보면 온조백제는 초고왕(肖古王) 이전에는 왕 명칭이 "0婁王"이다가 초고왕 때부터 갑자기 고(高)자나 구(仇)자가 들어가는 왕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는 초고왕 때부터 온조백제의 왕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비문 영락(永樂) 6년조에는 왜(倭:구태백제가 서.남해, 대마도, 일본열도 방면의 倭를 군사로 사용하였다고 하여 비문에는 구태백제가 "伊殘" 또는 "倭"로 비하되어 적혀 있다)가 백잔(百殘:온조백제)을 속국(屬國)으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부여 무리의 대방 이동
나. 야마대연맹 복속시킴
익산 금마 마한과 온조백제를 정복한 구태백제는 온조백제 초고왕(肖古王) 재위시기에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A.D 97-103년경에 일본열도에 세워진 소국연맹)을 복속시켰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 2년조에는 임나(任那:대마도)의 왜(倭)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고 적혀 있고,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에는 왜왕(倭王)이 백제의 후왕(侯王)으로 적혀 있으며,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는 "왜(倭)는 백제의 보좌였다"고 적혀 있고,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 46년조에는 백제(百濟)와 왜(倭)가 초고왕 때부터 교류하였다고 적혀 있으며, 동 49년조에는 일본열도왜와 백제 군사가 가야지역에서 같이 군사활동을 벌여 점령한 점령지를 백제에 주었다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에는 백제와 일본열도왜가 교류를 시작한 해가 신공황후 46년(A.D 246년)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초고왕 재위시기는 A.D 166년부터 214년까지이고, 구태백제가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한 해는 A.D 205년 7월이며,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백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한 해는 A.D 208년경(내해이사금 13년)이므로, 야마대연맹이 백제와 교류하고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 즉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기기 시작한 때는 A.D 205년 7월에서 208년 사이 어느 해이다. [註 A.D 205년 7월-208년경은 야마대연맹의 신공황후 재위 때이다, 신공황후가 백제와 교류하고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긴 것은 신라에 대한 적개심 때문으로 보인다.]
야마대연맹 복속시킴
다. 7개 가야국을 평정하고 4읍을 항복 받음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에는 49년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기(奈解尼師今紀) 13년조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야마대연맹과 온조백제 군사를 동원하여 7개 가야국을 평정하고 4읍을 항복받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 49년은 A.D 249년이 되나, 실제로는 A.D 208년경이다.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 황전별(荒田別) 록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久氐)들과 같이 군사를 정돈하여 탁순국(卓淳國)에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때에 어떤 사람이 "군사가 적으면 신라를 깨칠 수 없다. 다시 사백(沙白)과 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증가할 것을 청하여라"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原註 이 두 사람은 성을 알수 없는 사람이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沙白)과 개로(蓋盧)와 함께 가게 하였다. 모두 탁순(卓淳)에 모여 신라를 쳐서 파하고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록국(喙國), 아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가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때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사를 끌고 와 모였다.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4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四九年 春 三月 以荒田別.鹿我別爲將軍 則與久氐等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奉上沙白.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沙沙奴跪[是二人不知其姓人也但木羅斤資者百濟將也] 領精兵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火本.南加羅.喙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古奚津 屠南蠻 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 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 自然降服」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13년(A.D 208년) 봄 2월 서방의 군.읍을 순시하고 열흘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여름 4월 왜인(註 구태백제와 야마대연맹 군사 지칭)이 국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았다. 十三年 春二月 西巡郡邑 浹旬而返 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飡利音 將兵拒之」
「내해이사금 14년(A.D 209년) 가을 7월 포상8국(浦上八國:註 삼국사기 열전 勿稽子傳에는 骨浦<마산>, 柒浦<칠원>, 古史浦<고성?> 등으로 적혀 있고, 삼국유사 勿稽子條에는 保羅國, 古自國<고성>, 史勿國<사천> 등으로 적혀 있다)이 공모하여 가라국(註 아라가야)을 침범하니 가라국의 왕자가 와 구원을 요청하므로 왕은 태자 우노(于老)와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을 시켜 육부(六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쳐죽이고 포로 되었던 6천 명을 탈환하였다.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註 포상8국(浦上八國)은 삼국사기 열전 勿稽子傳(물계자전)에는 骨浦(골포:마산), 柒浦(칠포:칠원), 古史浦(고사포:고성?) 등으로 적혀 있고, 삼국유사 勿稽子條(물계자조)에는 保羅國(보라국), 古自國(고자국:고성), 史勿國(사물국:사천) 등으로 적혀 있다.]
A.D 208년경에 일어난 사실이 신공황후기 49년(A.D
249년)조에 적혀 있는 것은, 일본서기 저자가 왜(倭)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의 나라로 섬겼다는 것을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의
백제관련 기사를 연도 순서대로 적지 않고 모두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에 늦추어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 초고왕과 구수왕은 온조백제(溫祚百濟)
지역을 다스린 구태백제(仇台百濟)의 후왕(侯王)이다.
위 신공황후기에는 백제.야마대연맹 연합군이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록국(國), 아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고 4개읍을 항복받았다고 적혀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4년조에는 신라가 가라국(아라가야 지칭)를 구원하였다고 적혀 있다. 같은 사실이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과 삼국유사 물계자편에도 적혀 있다. 일본서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내용을 종합하면, 백제.야마대연맹 연합군은 7국을 평정하였다가 신라군의 개입으로 아라가야를 도로 빼앗겼다. 이때 신라가 아라가야를 구원한 것은 아라가야가 A.D 201년에 신라와 강화한 후 그때부터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7개 가야국 복속시킴
라. 장춘 방면의 부여를 백제분국으로 만듬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고이왕기(古爾王紀) 5년조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A.D 238년에 장춘 방면의 부여를 분국(分國)으로 만들었다.
「고이왕(古爾王) 5년(A.D 238년) 봄 2월 부산(釜山:註 부여)으로 사냥 가서 50일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대궐 문기둥에 낙뢰가 있었다.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 나왔다. 五年 春 二月 田於釜山 五旬乃返 夏 四月 震王宮門柱 黃龍自其門飛出.」
위 부산(釜山)의 부(釜)는 부여를 뜻하는 고대말 불달(해님<천제>의 아들이 사는 땅)을 한자로 적으면서 해님을 뜻하는 불(不)을 부(不)로 읽고 뒤에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산(山)은 들을 뜻하는 고대말 "달"을 뒤에 한자로 적으면서 "達" 또는 "山"으로 적었는데, 이 경우는 산(山)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사냥은 동족을 평정할 때 자주 사용된 말이고, 낙뢰(震)는 임금을 뜻하는 진(辰)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며, 황(黃)은 역(易)에서 중앙 또는 수도를 뜻하고, 용(龍)은 임금을 뜻한다. 위 문구의 의미는 백제왕이 2월에 부여로 출병하여 50일만에 돌아왔고, 4월에 부여를 다스릴 분국왕(分國王)을 임명하였다는 뜻이다.
A.D 238년에 위구태가 부여로 출병한 것은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사마중달)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위구태의 인척 되는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衍)을 토벌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위구태는 장춘 방면의 부여로 출병하여 부여를 지킨 후 부여를 떼어 내어 구태백제의 분국(分國)으로 만들고 분국왕으로 간위거(簡位居)를 즉위시켰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위구태가 죽은 후 간위거가 즉위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尉仇台死,簡位居立),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은유법으로 적혀 있는 문구에 의하면 간위거는 이때 즉위하였다.
구태백제가 장춘 방면의 부여를 분국으로 만든 것은 그때까지 요동의 공손씨와 구태백제(장춘 방면의 부여 포함)가 동맹세력이었는데, 요동의 공손씨가 위나라에 토벌됨으로써 장춘 방면의 부여가 고립되자 고구려와 위나라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부여를 구태백제왕이 직접 관장하지 않고 분국왕을 두어 관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A.D 246년에 부여의 간위거왕은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A.D 238년부터 구태백제와 위나라는 적대국이 되었는데, 간위거왕이 구태백제의 적대국인 위나라에 군량미를 공급한 것으로 보아 장춘 방면의 부여는 위나라의 이간전술(離間戰術)에 넘어가 A.D 246년경부터 구태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장춘 방면의 부여를 분국으로 만듬
마. 요서지방 진출
A.D 313 - 314년경에 구태백제는 모용씨(慕容氏)와 동맹을 맺고 요서에 진출하였고, 그뒤 서진(西晋)이 망하는 A.D 316년에는 (당나라 때의) 유성군(柳城郡:조양 방면)과 북평군(北平郡:난하 서쪽 방면) 사이에 있던 (당나라 때의) 요서군 지역에 백제군을 두었다.[註 백제의 요서진출은 모용씨의 고구려 포위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서 '한군현' 장의 '樂浪郡과 帶方郡의 慕容氏 영역으로 이동'편 참조]
「진나라 때 고구려는 (晋時 전에)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晋時에) 요서, 진평 2곳을 차지하여 군을 두었다. (요서에 있는 군은) 지금(당나라 때)의 유성군과 북평군 사이에 있었다. 晋時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 今柳城北平之間」通典 百濟傳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晋世 전에)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晋世에) 요서, 진평 2곳의 땅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麗在遼東之東千餘里 晋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南史 百濟傳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는 (晋世 전에) 이미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었고, 백제 역시 (晋世에) 요서, 진평 2곳의 땅을 차지하여 이때부터 백제군을 두었다.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之地矣 自置百濟郡」梁書 百濟傳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여 다스렸다. (중국동해안 방면의) 백제의 치소는 (송나라의) 진평군 진평현이 있던 곳이라 한다.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宋書 百濟傳 [註 진평군 진평현은 백제의 군현 이름이 아니고 송나라가 A.D 468년에 복건성 복주 방면에 설치하였다가 A.D 471년에 폐지한 군현의 이름이다.]
요서지방에 진출(A.D 313~314년)
바.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
A.D 316년에 구태백제는 양자강하류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비류왕기(比流王紀) 13년조에는 그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비류왕(比流王) 13년(A.D 316년) 봄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 왕도의 우물이 넘치고 검은 용이 우물 가운데서 나타났다. 十三年 春 早 大星西流 夏 四月 王都井水溢 黑龍見其中」
위 문구 중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는 것은 요서의 백제 대장군이 서쪽으로 진출했다는 뜻이고, 왕도의 우물(井)이 넘쳤다는 것은 백제가 강성해졌다는 뜻이며, 검은(북쪽 지칭) 용(龍:후왕 지칭)이 왕도의 우물(井) 가운데서 나타났다는 것은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의 백제 대장군이 바다를 통하여 왕도로 와서 후왕으로 임명되었다는 뜻이다.
북사(北史)나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 등에는 백제가 晋.宋.濟.梁 나라 때 양자강 좌.우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송, 남제, 양나라 때까지 양자강 좌우에 자리잡고 있었다. 自晋宋濟梁據江佐右」北史 百濟傳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송, 남제, 양나라 때까지 양자강 좌에 자리잡고 있었다. 自晋宋齊梁據江左」周書 百濟傳
중국동해안지방에 진출(A.D 316년)
사. 중원(中原)에 진출하고 중국동해안지방의 백제영역 확장
구태백제(仇台百濟)는 후위(後魏:A.D 386~) 때 중원(中原)에 진출하였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송, 남제, 양나라 때까지 강좌에 자리잡고 있었다. 후위(북위) 때 중원에 자리잡았다. 自晋宋齊梁據江左 後魏宅中原」周書 百濟傳 [註 중원은 하남성(河南省)을 중심으로 산둥성(山東省) 서부, 산서성(山西省) 동부에 걸친 황하(黃河) 중.하류 지역을 가리킨다.]
그 무렵 구태백제는 중국동해안 전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는 백제가 제(齊), 노(魯), 오(吳), 월(越) 등지를 평정하여 관서를 두었다고 적혀 있고,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전에는 백제가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는 북위 때 중원뿐만 아니라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광서자치구 방면 중국동해안 전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였다.
「전략. 앞서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齊), 노(魯), 오(吳), 월(越)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官署)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王爵)을 분봉(分封)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정벌(征伐)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년간(明治年間)에 백제의 군정(軍政)이 쇠퇴하고 부진(不振)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聖朝)로 돌아왔다. 先是 百濟以兵 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 屯戌險塞 軍征賦調 悉準內地 明治年間 百濟軍政衰頹不振 權益執行 盡歸聖朝」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전략. 백제가 영유하는 강남(江南:註 양자강 남쪽 중국동해안 지방)을 진평(晋平)이라 했다. 그 곳에는 월주(越州)가 있었는데, 그 속현(屬縣)으로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이 있었다. 문자제(文咨帝) 명치(明治) 11년(A.D 502년) 11월에 월주(越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署), 군현(郡縣)을 고쳐 송강(松江:註 상해 서남), 회계(會稽:註 강소성 소주), 오월(吳越), 좌월(左越), 산월(山越), 천주(泉州:註 복건성)라 했다. 12년(A.D 503년)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朝貢)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遼西)와 진평(晋平) 등의 군(郡)을 취하고 백제의 군(郡)을 폐했다. 濟所領曰 遼西晋平 江南有越州 其屬縣 一曰山陰 二曰山越 三曰左越 四曰左越 至文咨明治十一年十一月 攻取越州 改暑郡縣 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 十二年 以新羅民於泉州 以實之 是歲 以百濟不貢 遣兵攻取 遼西晋平等郡 百濟郡廢」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고구려,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
연.제.노.오.월의 위치
출처. 동양문화사 상권(을유문화사 70쪽)
A.D 386년경 백제 영역
아.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구태백제가 궤멸되어 구태백제 지배층이 일본열도로 피신함
백제는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피하였으나 구태백제(仇台百濟)가 A.D 313-314년에 고구려의 적국인 모용씨(慕容氏)와 동맹을 맺은 후부터 백제와 고구려는 적대관계로 변하였다.
A.D 369년에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보기병(步騎兵)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주둔하여 온조백제(溫祚百濟)의 민가를 약탈함으로써 백제와 고구려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일어난 전쟁은 A.D 371년에 구태백제(仇台百濟)를 등에 업은 온조백제가 평양을 점령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킴으로써 이 전쟁은 백제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후 A.D 392년 7월에 광개토대왕은 온조백제를 공격하여 같은 해 10월에 온조백제를 항복받았다.
「진사왕 8년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三國史記 百濟本紀
「고구려왕 담덕은 재위 초년 10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수십성을 빼앗고, 담덕과 연나라는 백제의 태자와 왕친자 1인을 인질로 받았다. 麗王談德在位初年 冬十月 南伐濟數十城之入 德燕取人質濟太子外王親子一人」燕書
그러나 같은해 11월에 구태백제가 기각숙니 장군 등을 온조백제로 보내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세우므로써 온조백제는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응신천황 3년(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무례(無禮)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도숙니를 보내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註 온조백제)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도숙니 등은 아화(阿花:註 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三年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禰 羽田矢代宿禰 石川宿禰 木菟宿禰 嘖讓其无禮狀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禰等便立阿花爲王而歸.」日本書紀 [註 일본서기(日本書紀)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3년조에는 구태백제왕과 온조백제 진사왕과의 관계가 응신천황과 진사왕과의 관계로 적혀 있다. 즉 응신천황과 구태백제왕이 동일한 인물로 적혀 있다. 이는 일본서기를 만들 때 멸망한 구태백제 존재를 말살하고, 구태백제왕이 한 일을 마치 대화왜 천황이 한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진사왕 8년 겨울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行宮)에서 돌아갔다. 冬十一月 薨於狗原行宮」 三國史記 百濟本紀
온조백제가 다시 구태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자 광개토대왕은 구태백제를 궤멸시켜야 온조백제를 계속 복속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그때부터 4년간 전쟁준비를 한 후 A.D 396년에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금강하류에 상륙하여 구태백제를 궤멸시킨 후 이어서 보기병으로 아리수(한강)를 건너 온조백제를 다시 항복 받았다. 이때 궤멸된 구태백제의 지배층은 일본열도로 피신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과 환단고기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잔(百殘:註 온조백제)과 신라(新羅)는 예로부터 우리의 속국(屬國)이어서 조공(朝貢)을 바쳐 왔는데 왜(倭:註 응신조왜)가 신묘년(A.D 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00.신라를 깨뜨리고 그들을 (구태백제의) 신민(臣民)으로 만들었으므로, 영락 6년에 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이잔국(伊殘國:註 구태백제<伊國>)을 토벌한 후 대군을 남진시켜..중략..왕은 발연히 대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선봉부대를 보내어 그 도성을 핍박하니 백잔왕(百殘王:註 온조백제 진사왕)이 곤핍하여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치고 귀복하였다. 백잔왕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백잔왕이 처음에 깨닫지 못한 허물을 용서하고 뒷날 정성스레 순종할 것을 다짐받았다. 이 싸움에서 백잔국의 58성 700촌을 얻고 백잔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군사를 되돌려 도성으로 돌아왔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0 以辛卯年倭來渡 破百殘00新羅 以爲臣民以 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伊殘國 軍南進..中略..其國城0不0義敢出00 王威赫怒渡阿利水 遣刺迫城00000便國城 百殘王困逼 獻0男女生九一千人細布千匹 殘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錄 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村七百 將殘王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廣開土王碑文 永樂六年條 [註 구태백제를 비하하여 이잔(伊殘)으로 적혀 있고, 온조백제를 비하하여 백잔(百殘)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응신조(應神朝) 왜(倭)는 왜(倭)로 적혀 있으며, 구태백제도 응신조 왜(倭)와 동일세력이라고 비하하여 왜(倭)로 적혀 있다.]
「제(帝)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왔다. 帝躬率水軍 攻取熊津.林川.蛙山.槐口.伏斯買.雨述山.進乙禮.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期早朝祭天 以環」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일본서기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8년조에도 그 사실이 적혀 있다.
「응신천황(應神天皇) 8년(A.D 397년) 봄 3월 백제인이 내조(來朝)하였다[백제기(百濟記)에 말하였다. 아화(阿花:아신왕)가 왕이 되어 귀국(貴國)에 무례하였다. 때문에 우리의 침미다례(枕彌多禮:제주도?), 현남(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 동한(東韓:가야 지역)의 땅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왕자 직지(直支:전지)를 천조(天朝)에 보내어 선왕(先王)의 수호를 다시 하였다.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 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 支侵 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日本書紀 [註 이때 광개토대왕이 가야 지방과 제주도 등지를 빼앗았던 것은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해상통로(海上通路) 차단과 남해(南海)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온조백제는 A.D 396년에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으나, 다음해 A.D 397년에 아신왕이 아들 전지(支)를 왜왕(구태백제왕 지칭)에게 인질로 보내고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
자. 구태백제의 반격과 광개토왕의 재반격
영락(永樂) 9년(A.D 399년)에 응신조(應神朝) 왜(倭) 군사가 신라, 가야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와 응신조 왜는 A.D 396년에 고구려에 빼앗긴 남해의 제해권을 A.D 399년 이전에 도로 회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태백제와 응신조 왜 군사가 신라, 가야 지방을 공격하자 광개토왕은 영락 10년(A.D 400년)에 보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 가야 지방을 점령한 왜(倭)를 물리치고 계속 추격하여 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왜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영락(永樂) 9년(A.D 399년) 기해년에 백잔(百殘:註 온조백제)은 맹세를 어기고 왜인(倭人:註 구태백제와 응신조 왜 지칭)과 더불어 화통(和通)하였다. 대왕이 남쪽으로 평양에 내려가 순시하는데, 마침 신라(新羅)가 사신을 보내어 대왕께 고하되 왜인(倭人:註 응신조 왜 군사)들이 그 국경에 가득하고 성지(城池)를 파괴하니 노객(奴客)은 백성을 위하여 왕을 찾아 뵙고 명(命)을 청한다고 하였다. 九年 己亥 百殘違誓與倭密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0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000其忠00遣使環告以00」廣開土王碑文
「十年 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0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제2면9행) 官兵跡 而越來攻來背急追至任那加羅 從拔城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0城倭滿 倭潰城六 (제2면10행) 被我攻滅無遺 倭遂擧國降 死者十之八九 盡臣率來 安羅人戌兵滿假00 倭欲敢戰與己呑卓淳 (제3면1행) 諸賊謀00 官兵制先 直取卓淳 而佐軍由淡路島到但馬 右軍經難波至武藏 王直到竺斯 諸賊悉自潰 (제3면2행) 遂分爲郡 安羅人戌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000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00 新羅寐錦00僕勾 (제3면3행) 0000朝貢 관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차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00에 가득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이어 좌군은 담로도(註 瀨戶內海 동부에 있는 섬, 兵庫縣에 속함)를 경유하여 단마(註 兵庫縣의 북부)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註 大阪)를 경유하여 무장(註 那良의 春日野)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註 北九州)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주몽)고구려에 복속하였다.」 廣開土王碑文 [註 파란색 글자는 계연수님이 지은 碑文徵實로 결락자를 일부 보충한 것임. 그리고 위에 나오는 己呑은 일본서기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 2년조에는己呑으로 적혀 있다.]
「한번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倭)를 격파하였다(註 영락 10년 사실). 왜인(註 응신조 왜 지칭)은 백제(註 구태백제 지칭)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密通)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註 영락 9년 사실). 제는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오다(註 영락 6년 사실). 때(註 영락 10년)에 백제(百濟), 신라, 가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契丹), 평양(平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任那)와 이(伊), 왜(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一自渡海 所至擊破倭人 倭人百濟之介也 百濟先與倭密通 使之聯侵新羅之境 帝躬率水軍 攻取熊津 林川 蛙山 槐口 伏斯買 雨述山 進乙禮 奴斯只等城 路次俗離山 期早朝祭天 以環 時則 百濟新羅駕洛諸國 皆入貢不絶 契丹平凉皆平服 任那伊倭之屬 莫不稱臣」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註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영락 (永樂) 6년조, 9년조, 10년조 사실이 함께 뒤섞여 적혀 있다. 광개토왕비문에는 구태백제가 이잔(伊殘) 또는 왜(倭)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구태백제가 이(伊) 또는 왜(倭)로 적혀 있다. 이 이(伊)는 부여 무리라는 뜻으로 부여 무리가 이주하여 세운 구태백제 또는 구태백제계 무리가 이세(伊勢), 대화(大和) 등지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고 근국(根國)인 구태백제(일명 南夫餘.伊國) 명칭을 사용한 무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왜(倭)는 서.남해(西.南海), 대마도(對馬島), 일본열도(日本列島) 등지에 거주한 왜(倭) 무리 또는 이들과 같은 세력인 마한(馬韓)이나 구태백제(仇台百濟)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삼국사기 열전(列傳) 최치원전(崔致遠傳)에는 고구려,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 연, 제, 노를 흔들었다고 적혀 있다. 같은 지역을 고구려, 백제가 침범하고 흔들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백제로부터 요서지방과 중국동해안지방을 모두 빼앗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주몽)고구려, 백제(百濟)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
그후 영락 14년(A.D 404년)에 구태백제와 응신조(應神朝) 왜(倭)는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영락 14년(A.D 404년) 갑진년 왜(倭:註 구태백제와 응신조왜 군사 지칭)가.. 대방(帶方)의 경내로 침입하여...석성(石城)..왜적의 배들이 줄을 이었다..인솔하여..평양..(왜적의) 선봉과 서로 만났다..태왕이 군사들에게 왜적의 길을 막고 시살토록 하니 왜구는 궤패(潰敗)되었고 무수한 왜적을 베어 죽였다. 永樂 十四年 甲辰 以倭00 侵入帶方界 0000石城0聯船 000率000平壤000鋒相遇 王幢要截刺 倭寇潰敗斬殺無數」[註 위에 나오는 대방과 석성의 위치는 어디인지 불명이다. 한국의 사학자들은 대체로 황해도나 경기북부지방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 재위시 존속한 북위(北魏)의 역사를 적은 위서(魏書)애는 대방과 석성이 모두 대릉하 방면에 있고, 대방은 樂浪郡에, 석성은 建德郡에 각 속해 있다. 이곳은 광개토왕에게 배앗긴 백제의 요서분국이 있던 곳이다.]
일본열도 방면의 왜(倭)는 영락(永樂) 10년(A.D 400년)부터 임나연정(任那聯政)의 통제를 받고 있었는데, A.D 404년에 왜(倭:구태백제와 응신조 왜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임나연정(任那聯政)의 일본열도 왜(倭) 통제가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전쟁에서도 왜(倭:구태백제와 응신조 왜 군사)가 패배함으로써 구태백제와 광개토왕간의 10여 년간에 걸친 지루한 전쟁은 광개토왕의 승리로 끝이 났다.
[참고:광개토왕 즉위 후 구태백제가 고구려에 일방적으로 패배한 원인]
A.D 392년 이전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점령하거나 국경 부근에서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다가 광개토왕이 즉위한 A.D 392년부터 A.D 404년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였다. 이는 광개토왕의 탁월한 외교술과 전략.전술 때문이다.
광개토왕 재위 시 구태백제의 전략.전술과 고구려의 전략.전술을 비교해 보면, 구태백제는 보병전술과 기마전술을 주 전술로 사용하였고 상륙전술은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보조하는 전술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륙전술에 동원된 배는 왜(倭)가 사용하는 소정(小艇)이었고, 이 소정에는 대략 20-3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륙전술에 동원된 왜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하였다. 반면에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까지는 주로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사용하다가 광개토왕 때부터 해상전과 상륙전에 대비하여 대규모 병력이 승선할 수 있는 대함과 수군을 대량으로 보유하였다. 그 결과 광개토왕 때부터 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해졌다.
A.D 392년에 고구려 수군이 한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한강 이북에 있는 10여성을 빼앗고 관미성으로 통하는 양도(糧道)를 끊어 관미성을 고립시킨 것, A.D 396년에 고구려 수군이 금강하류 방면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본거지인 웅진 등지를 궤멸시킨 것, A.D 400년에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대마도(임나가라)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왜를 복속시킨 것, A.D 404년에 대방계로 침입한 왜를 물리친 것 등은 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차. 구태백제왕이 한반도 백제 지역 통치
A.D 405년 3월에 온조백제 아신왕이 암살당한 후 왜왕(구태백제왕 지칭)은 인질로 와 있던 아신왕의 태자 전지(支)를 온조백제로 보내어 온조백제왕으로 즉위시켰다.
A.D 407년에 전지왕(支王)의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내신좌평에, 해수(解須)를 내법좌평에, 해구(解丘)를 병관좌평에 각 임명하였다.
A.D 408년에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만들어 여신(餘信)을 상좌평에 앉히고 여신(餘信)에게 백제의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모두 맡겼다.
A.D 416년경에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이 전에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의 장군으로 있다가 A.D 400년에 광개토왕에게 복속한 백제장군들을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시기고 중국동해안지방을 수복하였다.
진서(晋書)나 송서(宋書)에는 이 무렵 백제왕의 이름이 여영(餘映)으로 적혀 있다. 양서(梁書)에는 여영(餘映)이 온조백제 전지왕(支王)이라고 적혀 있으나, 여영(餘映)은 진서(晋書)에는 A.D 416년에, 송서(宋書)에는 A.D 420년과 424년에 각 백제왕으로 나오는데, 전지왕(支王)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A.D 420년에, 일본서기에 의하면 A.D 414년에 죽었으므로 여영은 전지왕(支王)이 아니다.
A.D 420년에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은 전지왕(支王)과 구이신왕(久辛王)을 각 제거하여 온조백제의 대(代)를 끊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이신왕이 A.D 427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구이신왕기(久辛王紀)에 구이신왕의 즉위와 사망사실만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구이신왕은 A.D 420년에 즉위하여 곧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기(毘有王紀) 29년조에 의하면 A.D 455년에 백제에 내란이 일어나 비유왕이 죽었다.
「비유왕(毘有王) 29년 봄 3월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흑룡(黑龍)이 한강에 나타났다. 잠간동안 구름과 안개가 끼어 캄캄하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돌아갔다. 二十九年春三月 王獵於漢山 秋九月 黑龍見漢江 須臾雲霧晦冥飛去 王薨.」 [註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유왕(毘有王)이 구이신왕(久辛王)의 아들로 적혀 있으나 진서(晋書), 송서(宋書), 남사(南史) 등에는 여영(餘映) 다음 (구태)백제왕이 여비(餘毗:비유왕)로 적혀 있으므로, 비유왕은 구이신왕(久辛王)의 아들이 아니다.]
위 문구는 그때까지 제거되지 않은 온조백제계 장군들이 그 해 3월에 수도 한산(漢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의 규모가 매우 커서 비유왕(毘有王)이 진압하지 못하자 그해 9월에 흑룡(黑龍:중국동해안분국 군사 지칭)이 출동하여 한강을 통하여 수도로 와서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이때 비유왕(毘有王)이 반란군의 손에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때 반란을 일으킨 온조백제계 장군들은 개로왕기(蓋鹵王紀) 21년조에 나오는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萬年) 등으로 보이며, 이들은 비유왕(毘有王)을 죽이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A.D 475년에 고구려 군사를 끌어들여 개로왕(蓋鹵王)을 죽였다.
A.D 458년에 개로왕(蓋鹵王)은 백제본국의 군사를 중국동해안분국으로 보내었다. 이때부터 A.D 463년 사이에 백제는 북평(北平:북경 동쪽 방면)에서 난하 사이 요서지방(遼西地方)을 다시 수복한 후 A.D 465년에 그곳에 조선태수(朝鮮太守:난하서쪽 방면), 광양태수(廣陽太守:북경 동쪽 계 방면) 등을 두고 양무(楊茂)를 조선태수에, 고달(高達)을 광양태수에 각 임명하였다.
A.D 471년에 백제는 중국동해안분국을 다시 고구려에 빼앗겼다.
카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김
A.D 475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이 점령되고 개로왕(蓋鹵王)이 피살당하자 문주왕(文周王)은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A.D 479년에 동성왕(東城王)이 즉위한 후 백제의 국력이 다시 강화되었다.
동성왕(東城王)은 A.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천황(仁賢天皇)을 세운 후 백제본국(百濟本國) 군사와 후국(侯國)인 일본열도왜 군사를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으로 보내어 북위(北魏)와 고구려를 패배시키고 요서분국(遼西分國)을 확장하고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을 다시 수복하였다.
A.D 501년에 반란이 일어나 대화왜(大和倭)가 지원한 무령왕(武寧王)이 정변에서 승리하여 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이 정변으로 동성왕(東城王)이 죽고, 동성왕계(東城王系)인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 출신 고위관리들은 모두 몰락하였다. 이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장군들이 백제본국에서 이탈하여 고구려에 복속함으로써 백제는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을 상실하였다. [註 대화왜(大和倭)가 지원한 무령왕(武寧王)이 이 정변에서 승리하므로써, 백제는 종전까지 대화왜(大和倭)의 종주국에서 대화왜의 지원을 받는 나라로 위상이 역전되었다.]
타. 수도를 사비(泗:부여)로 옮김
성왕(聖王) 16년(538년)에 수도를 사자(泗)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그 뒤 무왕 때 백제는 일시적으로 익산을 임시수도 또는 별궁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註 익산에 "왕궁지(王宮址)" "왕성지(王城址)" "왕릉(王陵)" 등의 유적이 있고, 왕궁평에서 백제 5부 중 중부를 상징하는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일본의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백제무광왕천도지모밀지신영정사(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新營精舍)"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지모밀지(枳慕密地)"는 익산으로 추정된다.]
의자왕 20년(A.D 660년)에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