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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문이던 특유의 예절과 예법이 있듯시 우리 가문에도 재미있는 길,흉사 때의 잊혀진 행사가 있었기에 다같이 웃으면서 슬퍼하면서 정 들었던 고향의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吉事(길사)
길사에는 잔치,회갑(진갑),화전 놀이,돌잔치,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잔치 야야기를 하기로 한다.당시의 결혼(결혼)은 지금과 달라 자연스런 만남이나 소개팅으로 연애는 있을 수 가 없었고 당사자의 부모님이나 특히 가까운 친척들의 적극적인 관여로 어루어 진다.부모님들은 젊잔은 자리에서 자연스러운 약조로 이루어진다.또한 친척 중에는 고모, 출가한 언니,아니면 집안에서 말 잘 하는 딸래들이 중신애비로 등장한다. 중신애비라는 것은 통상 남자를 말 하지만 대부분 여자들의 몫이다.말을 유창하게 여자들이 말을 잘 하기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중신애비는 말도 잘 해야 하지만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 혼사가 이루어 진다.신랑 집에는 논이 세마지이고 큰 황소 한 마리,양반이고,인물 좋다는 등 신부집 혼주들에 자랑을 늘어 놓는후 권유와 닥달로 반 강제성을 띄면서 밀어 붙힌다.그러나 중신애비는초초하게기다리면서 눈치를 살피지만 초조하게 기다린다.양가로 부터 승락이되면 신랑 집으로 부터 사성(생년월일,본관과 이름을 한지에 붓글씨로 쓴 문서를 홍청 보자기에 싸서 손위 형제가 전달)이 전해지는데 문서상으로 혼사가 이루어 지는 최초의 문서가 된다.신부집에서는 신부의 건강 상태와 생리주간을 고려하여 용하다는 철학자(?)에게 혼사 날자를 받아서 신랑집으로 통보 한다.중신애비로 부터 전달된 물목(신랑측 부모,형제 등 친척에게 전달되는 정성)을 챙기느라 신부집에서는 바쁘기 시작한다. 딸 많은 집에서는 문 열러 놓고 잠을 잔다는 이야기가 당시의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대단한 지출이다. 통상적으로 중신애비는 잘 하면 술이 석잔이고 못하면 뺨이 석대라는 것이다.그러나 잔칫날 중신애비에 특별한 음식으로 만족한 대접을 으로 만족하게 된다.요즘의 마담뚜 비하면 대단한 바겐세일이다.정성을 분수에 맞게 한다지만 시집갈 딸에게 시집가서 기 죽지 않고 살라는 어머니의 마지막 배려로 물목이 추가되기도 한다. 요즘에도 정성 때문에 파혼에 이르는 경우가 비일비제하다니 비극이다.요즘의 결혼 날짜는 하객들이 많이 올 수 있는 날과 결혼식장등을 고려해서 예비 신랑 신부가 결정함이 대부분이다.신부집에서는 결혼 준비에 바쁘지만 신랑집에서는 마을 청년들은 예비 신랑에게 댕기풀이로 축하 파티가 이루어 지는데 대부분 신랑집에서 또래의 마을 청년들을 초대하지만 친구들이 별도로 댕기풀이를 강요하기도 한다.신랑은 들뜬 기분으로 장가 갈 날짜만 기다린다.신부집에서는 음식 만들기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유과 엿 소 한마리 혹은 돼지 한마리을 잡아서 막걸리 국수등의 푸짐한 공반상이 되어야 잔치 잘 한다는 덕담을 받게 된다.추한 방을 새로 꾸며야하고 신부는 무명실로 얼굴의 잔털을 뽑으면서 신부화장에 대비한다.평상시에 피부 관리을 해야지만 농촌의 상황이 허용되지가 않은다. 어머니는 바느질 잘 하는 동서들을 집합시켜 최고의 솜씨을 발휘하여 사돈댁의 아낙네들을 감짝 놀라게 하려고 혼신을 기우린다. 어머니의 한땀한땀 엮어가면서 딸의 인생 항로을 순탄하기를 기원 한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날씨가 좋아지기를 천지신명에 기도하면서 잔치를 맞는다.
오늘은 잔칫날.
골목 골목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그렇게 먹지 못해 배 곱파했지만 숨겨 놓은 곡식으로 막걸리,감주(식혜),국수,떡,엿,등의 부조가 줄을 이으면 신부집 어머니는 이제는 되었다는듯 안도의 한숨을 쉰다.체면상 부조의 정도를 파악하지 않았기에 솔직한 표현이다.신나락은 .굶어 주어도 먹지 않고 씨는 배개에 넣어 배고 잔다는 숭고한 일면을 볼 수 있다.마당 한쪽 구석에 말둑 몇개 밖고는 멍석으로 손님 맞을 연회장을 만든다.손님이 삼삼오오 짝지어 축하 인사와 공반상(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상)을 들면서 잔치 분위기는 한층 고조된다. 신랑이 드디어 가마를 타고 마당으로 진입한다.아이들은 왁자지껄 가마 뒤를 따르고 가마를 맨 일꾼은 짚단에 불을 놓은 것을 거침없이 밟고 진입한다. 신랑과 상객(보통 상객으로 신부 혹은 신랑의 아버지가 행차하지만 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할아버지 몱)의 영접은 엄숙하고 무게가 실린다. 큰상에 차린 진수성찬으로 최고의 대접을 받지만 상객보다 더 큰 어른이 계신다면 차려진 음식중 일부를 한지에 산 봉성을 가마를 메고온 일꾼 인편으로 신부 혹은신랑집으로 전달 된다..신랑은 대반(신랑을 보살피면서 분위기를 조정하는 사람)으로 부터 혼례식을 무사히 마칠 때 까지 보살핌을 받는다.마당에서는 다리가 긴 큰상위에 생화(적당히 동네 언덕에서 배어온 야생화)와 쌀 한 사발,양쪽 촛불,닭 한쌍 올려져 있고 큰상 양쪽에는 술과잔,세수물등이 놓여지면 혼례식 준비끝.혼례식 진행자가 교배례 순서에 따라 신부는 호화 찬란한 한복을 입고 신부 오라버님의 어께에 짊어지켜 식장에 얼굴을 희고 긴 수건을 가린체 식장 서쪽에 사뿐히 내려 놓인다.신랑 신부가 생에 처음으로 마주 대하지만 신랑은 고개숙이고 신부는 얼굴 가리고 있기 때문에 상면이 아니고 그저 나무같이 서 있을 뿐이다.혼례식이 끝나고 신부가 퇴장한 뒤 신랑은 장인 장모와 가까운 친척들에게 첫 인사를 하지만 숙덕숙덕 말이 많아 진다.일차적으로 신랑의 인물 평가부터 시작되지만 결론적으로 부자라는 추측으로 모든것이 긍정적이되고 만다.하객들은 무한한 가능성과 시련를 뛰어넘는 의지를 담고 한발씩 전진하는 신랑 신부에게 축하를 보낸다.첫날 밤은 정말 요지경이다.신랑이 사모관대의 복장으로 신방에 들어서면 신부가 혼례식 때 입었던 차림으로 얼굴을 노출시키고 신방의 한 구석을 향해 사쁜이 자리한다.야반상(밤에 신랑 신부가 처음 같이 먹는 차례상)이 놓여지면 창호지로 바른 문은 뭇 사람의 깧만 눈동자들이 촛불에 어른거리는 신랑 신부를 지켜본다. 문 밖에서는 또래의 청년들이 야반상을 강제로 탈취하느라 신랑과 시비가가 벌어진다.야반상을 탈취 당한후 새로운 야반상이 들어 오면 신부 언니는 신부에게 신랑과 마주 보라고 충고한다.순간 서로간 배필임을 확인하고 얼굴을 훔친다.술잔이 오고 가고 촛불이 꺼지고 신랑은 사관대와 도포을 벗어 적당히 밀고는 신부의 쪽도리를 벗기다 실수하면 쪽도리가 턱밑으로 떨어져 문밖에서는 웃음 소리가 신랑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또한 신랑이 신부 옷을 무리하게 볏기다가 신부의 저고리까지 벗겨 숨겨둔 앞 가슴의 뽀오얀 살결의 신비을 노출시켜 훔처보는 사람들로 부터 킥킥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생전 처음 덮어 보는 비단요와 이불 두통배개로 자리에 눕는다.신부가 신랑에게 첫 말을 해야 잘 산다는 전통 때문에 신부의 입이 열린다.호칭도 없이 경상도 특유의 퉁명스럽고 멋적은 말투의 한마디 "집에 논은 몇 마지기....소는 몇 마리"하면서 얼버무린다. 지나친 예의도 꼴 불견이려니와 애교없는 말 솜씨도 천하 일색(?)치고는 허허 너무했다.그러나 서로간 믿은과 신뢰로 미운정 고운정 들어 아들 딸 잘 놓고 살고 있으니 배필이 따로 있나 정들면 배필이 되는것을 ....
잔칫날 밤에는 사각지대에 놓인 연령층의 청년(타성은 거의 없고 잔치집의 가까운 친척이나 일가(가문)의 청년)들이 어슬픈 정보(가까운 친척인 또래가 제공해 준 정보)로 하루 종일 여러가지 행사로 피곤에 지처 곤히 잠든 시간에 당가집(잔칫집)으로 진입하여 먹을것 있는데로 챙겨서 아지트로 돌아 온다.오래만에 색다른 음식을 배불리 먹고 술 한잔 걸치면 세상이 모두 내것이 된다.그러나 잔칫집 맞 며느리는 잔치가 끝날 때 까지 긴장하여 이것 저것 살피다가 손님 대접 할 음식이 없음을 확인하고 용케도 아지트로 들이닥처 내일 손님 대접 할 음식 다 없어졌다 면서 야단 법석을 떤다.조카 사촌 시동생은 내 죽었다 도망가고 리더격인 청년이 고개를 떨구지만 되돌릴 수가 없으니 .....
이튼날 (새 신랑 죽이는 날)
오후가 닦아와 또래의 청년들이 하나 둘 모이면 본격적으로 신랑 죽기기 공작이 이루어 진다.수사 반장과 보조형사가 등장하는데 신랑이 똑똑하여 수사 진행이 어러울 때를 대비해서다.기동대는 수사 반장의 명령에 복종하여 효과를 극대 시킨다.신랑은 긴장된 모습으로 대반으로 부터 분위기 지도를 받으며 알았다는 듯 태연하다.수사반장이 방안 분위기를 잡으면서 어제 이집에서 음식을 잃어 버렸다는 민원이 있어 접수되어 출동했다며 이사람 저사람 찍접데며 거동을 살핀 후 새신랑을 지목하고 본격적으로 신문에 들어 간다.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하다가 슬슬 훔처(?)간 각종 음식명을 외우면서 실토하지만 민원에 신고한 물량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다리를 묶은체 꺼꾸로 들고는 심한 고문(?)을 하기 시작하면 처형, 처제,처남댁은 대충 대충 음식명을 알려 주면서 신랑의 입장을 거들어 준다.신랑이 도망간다고 다리는 묶은체 노애 끌드시 이고석 저구석 뒤적이며 남은 음식을 찾아 낸다.텅 빈술단지며 밥풀데기만 붙은 감주 단지,육회 다 처서 먹고 앙상하게 남은 소 앞뒤 다리등 여러가지로 한방이다.실은 먹을 것이란 별 것도 없으면서 잔치 잘 했다고 극히 찬양한다.수사 반장이 또 다른 중요한 민원이 있다며 최대의 수사 의욕을 보인다.밤중에 이집 규수가 없어 졌다는 것이다.납치되 없어 젔다는 것이다.또 새신랑을 지목하고 2 차 신문이 시작 된다.규수를 본적이 있느냐 어제 밤에 이 방에서 규수와 함께 밤참을 먹고는 한 이불속에서 자는 것을 보았다는 증인이 많은데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체포한다.신랑은 숨겨 놓은 규수를 대리고 오겠다며 자백하기에 이른다.안 방에서 긴장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한 신부가 나를 대리고 가라는 듯 꿈틀 거린다.신랑은 맞는것 같다고 하지만 성 희롱이 자자한 현실이라 확인 하라는 수사반장의 지시에 살며시 신부의 얼굴을 들어다 본다.본인임을 확인하고 억지로 신랑이 신부를 업고 수사관 실로 대리고 들어 온다.야유와 웃음이 뒤셖인 혼란속에서도 신부는 신랑의 등을 살며시 감사면서 사랑의 진실을 알린다.이제 부터는 현장 검증이 시작 된다.함께 자는 모습에서 부터 무슨 일을 저절었는지가 최대의 하이라이트다.어제 밤의 행동을 똑바로 재현하지 않으면 발 바닥에 몽둥이 세례가 여지없이 가해져 신랑은 최대의 고비에 봉착한다.신부의 식구 다수가 고비를 이상없이 넘기도록 협조를 하지만 수사반장의 의지대로 현장검증이 완료된다.성격이 순능적이지 못한 신랑은 수치스러움에 저항도 하지만 유대를 갖자는 장난인데 마지막에 가서는 유화적이다.유종의 美(미)로 한 장르의 막이 내리면 노래와 유흥으로 분위기가 한층 고조된다.신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곡 부르면 신부가 화답한다.신부가 노래를 할 때는 선곡을 옳바르게 해야 한다.잘 못 노래하다 가는 평생 비운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이별이다,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련다,외로워서 못 살겠다.등의 노래를 불렸다가는 이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니 역사의 흐름임을 이야기를 머리에 담아 두기를 바란다.
보통 신랑은 결혼한 달에 본가로 돌아 달을 넘기지않고 재형을 오지만 달을 넘기는 경우가 생기면 처삼촌 집이나 처남집에서 하루 묵고 재형을 오게 된다.친척 아낙네들과 한판 물 장난이 끝나면 새옷을 갈아입고 젖은 바지 저고리는 빨고 풀칠하여 완성까지는 3 일정도 걸리는데 이것은 신랑을 붙잡아 놓기 위한 한 방법으로 신부와 오래토록 사랑을 하라는 아낙네들의 배려이니 얼마나 숭고한가. 2 박 3일간의 하니문 기간이 끝나면 신랑은 본가로 돌아 간다.하루 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영원한 배필이된 한 신혼 부부는 그리움과 아쉬움을 남기고 동구밖에서 이별을 한다.새 신랑은 발 걸음이 무거워지고 연거퍼 뒤만 살핀다.신부도 얼굴을 붉히면서 애절한 이별의 순간를 맞는다.마지막 산 모퉁이를 지날 때면 약속도 않았는데 서로간 두 얼굴을 스친다."사랑합니다.우린 머리가 파뿌리 돌때 까지 행복하게 살자고.빨리 오세요"마음의 울부짐이 메아리가 되어 가슴속까지 돌아 온다.요즘의 결혼과는 너무나 비교가 된다.화려하고 웅장함은 따르지 못하지만 순수하고 소박함은 비교가 될 수 있겠는가.조상들이 남긴 풍속이 이젠 역사로 문화제가 되었음을 후세들은 자랑스럽고 숭고하게 보존 유지 했으면 한다.지금도 옛것을 찾는 문화 행사로 구경꺼리가 되었지만 조상님의 얼을 볼수 있어 다행이다.어떤 제도나 관습에는 장단점이 필히 수반되기 때문에 어느 때 가서는 부작용이 생겨 개선점을 찾기도 하지만 문화는 빠르게 개선 되지 않은 것이 문화고유의 특성이다.요즘의 결혼 문화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신부는 3 개월이나 일년후에는 가마타고 시집을 가면 고달프고 서러운 시집살이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들 딸 잘 놓고 산다. 이 이야기는 대부분 70세 이상의 노인(?)들의 몫이다.
兇事(흉사) 이야기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감이 자연순환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므로 거부할 수가 없다.세상을 이상적으로 살아온 위대한 성인(예수.석가모니. 공자등),사상가.위정자들도 한 때를 장식했지만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지 않았는가.병원에 한번 가 보지도 못한체 할아버지께서 운명에 이르게 된다.시집간 딸들은 한번 병문하고는 소식이 없다.장날 인편으로 병세를 대충들었지만 여의치 못하여 자주 방문하지를 못한다.요즘은 80세 90세 까지 건강한 몸으로 살수있지만 의료시설이 빈약한 1970년대 이전까지는 대부분 사람들은 무슨병으로 죽었는지도 모른다.아무 근거도 없는 병명이지만 천식,속병(각종 암)등이 아닌가 생각한다.할아버지는 가슴을 벌덕이며 숨결이 바빠진다.가까운 친척들은 마지막 순간을 지켜 보면서 할어버자를 저세상으로 편안히 가시기를 바라면서 이별을 고한다.지켜 보고있는 자식들과 친척들은 소리없이 흐느끼기만 한다.저 세상가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고인의 동생이나 친척중 한사람이 고인이 입었든 윗저고리를 들고 북쪽 하늘을 바라 보면서 "대한민국 경주시 손곡동 박누구 복복복"큰 소리를 지르면서 고인의 옷을 집붕위에 던져 버린다. 福(복)을 남기고 가라는 뜻이 아니고 復(복)의 의미는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감을 천지신명에 알리는 의식이다.큰 방으로 큰 상주가 운명 직전에 업어서 옮기고 운명을 맞고 시체가 굳기전에 새 옷으로 개복(?)을 한다.최 우선으로 시집간 딸들에게 인편으로 운명을 알린다.비보를 받은 딸은 긴 머리풀고 통곡한다.상주들은 곡을 하고 친척들 몇몇은 장례 날짜와 초상칠 만반의 준비에 착수한다.밤중 세벽에 반 실신 상태로 딸들이 들어 닦치면 초상집의 슬픔은 최고조에 달한다.악귀가 침범옷하도록 팥죽으로 방 마루 벽등에 팥죽을 뿌린다.귀신은 팥죽을 무척 싫어한다는 전설의 고향이다.보통 장례는 3일,5일,7일,9일장으로 치루는데 경제 형편에 따른다.큰 소나무를 배어 마당에서 관을 짜기 위해 도목수가 등장하고 묘터를 잡는다.글쓴이는 구체적인 장례행사 순서를 숙지하지 못했기에 장례의 분위기만으로 가름한다.
장레식은 엄숙하게 집행된다.마지막으로 조상대대로 물려온 정든 집과 애지 중지 아끼던 보물(?)들을 뒤로 한체 떠나는 할아버지의 흔적을 기억하면서 대성 통곡 울음 바다다.마을 공터에는 행려가 호화 찬란하게 꾸며져 가는이의 마지막 위용를 장식한다.당당하고 꺼리낌없이 미련 없이 내 갈길로 찾아 간다고....아들 딸들아,친척 동네사람 여러분 가문 이상없이 이어가고 행복하게 잘 살아요의 강한 메시지를 남긴다.동네 사람들은 언덕혹은 담너머에서 가는이의 마지막을 지켜 보면서 눈물울 훔친다.마지막을 알리는 상두꾼들의 구슬픈 행여 소리가 슬픔을 고조시킨다. 저승으로 인도하는 지휘자는 딸랑종 울리면서 "살아 생전 옷 없어 떨고있는 행인(?)에게 옷 한벌주었는냐,배고픈 행인(이웃)에게 밥 한끼 배부르게 주
었는냐,길 가는 과객을 따뜻한 방에 편히 주무시게한 적이 있느냐"의 주문을 하면서 갈 곳으로 인도 한다. 대충 살았지만 긍정적으로 주문에 답하면서 행여를 지도한다.살아 가면서 이웃을 도우면서 배푸라는 고전의 교훈이며 현대의 강한 메시지다.초상집 사위들과 고인의 가까운 친척들은 금일봉 봉투를 준비해야 한다.특히 사위들은 상두꾼들로 부터 망신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지금 사회 분위기는 4.0의 자본주의가 요구되고 있지 않은가.죽어 입고 갈 수의에는 재물을 넣어 갈 호주머니가 없지 않은가.당시의 장레는 지금과 같이 포크레인등의 장비가 없어서 일꾼들의 힘으로만 했기 때문에 상두꾼들 정말 고생이 많았다.저녁 늦게 까지 깨끗이 유택을 마련한 상두꾼에게 푸짐한 대접을 한다.
당시에는 일년의 간격으로 대상 소상으로 삼년 탈상(상주가 상복을 벗는 의식)을 했는데 일년 만에 탈상한 경우가 생기고 심지여는 한달 혹은 삼오 때 탈상하는 경우까지 왔으니 시대의 흐름은 거역할 수가 없나보다.시묘 살이(3년간 자식이 묘옆에 움막을 처 놓고 3년간 부모님과 같이 생활하는 의식)하는 것은 본적은 없지만 지금의 공동묘지 근방에서 시묘살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글쓴이도 어머니 돌아 가신후 세벽에 묘에 가서 아침 문안 일주일 한 적은 있다.가물 거리는 촛불을 뒤로한 체 형님과 나는 발길을 돌리곤 했다.
상두꾼,동민,찾아주신 방문객 여러분 물심 양면으로 도와 주셔 감사합니다.부모님을 잃어버린 죄인으로 마지막 인사 드립니다.
부모님의 빈 자리가 너무나 큼니다.
추신:지금의 결혼,장례에 대해 현대적 감각에서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개선의 의지을 갖고
실질적으로 집행할 수 있도록 토론이 이루어 지기를 바람니다.
첫댓글 재행이라는 숨은 뜻이 그렇군요. 신랑을 다루는 각본이 재미있습니다. 어릴 때 그걸 구경해보면 성질급한 신랑은 막 화도 내더구라구요. 참 재미있었던 풍속이었습니다.
요즘은 볼래야 볼 수 없는 전설이 되고 말았지만요.
장례문제는 이제 생장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시대적인 추세에 따라 화장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풍수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러차례 주장했습니다. 아직 손곡은 화장을 안하는 추세인데 화장이 불효라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죽으면 육은 지수화풍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윤회하니까요 살아생전에는 불효자식이다가 죽은 부모 명당에 모시려는 사고는 지양해야겠고요.
단지 부모를 추념할 공간은 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장한 후 시설이 잘된 납골당에 모시고 성묘할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