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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옛 남영동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을 기억하다!
보통사람들의 일상이 담겨 있는 남영역과 그 건너편
1호선 전철이 어김없이 머무는 곳 남영역. 일상에 바쁜 많은 시민들은 무심코 이곳을 지나치지만, 전철이 남영역에 멈출 때 잠시 주의를 기울인다면 동쪽에 있는 7층짜리 검은색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70~80년대 대표적인 고문기관으로 악명을 떨쳤던 ‘남영동대공분실’ 이 있던 건물이다. 옛 남영동대공분실은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박종철(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년)군이 파쇼경찰의 물고문에 맞서다 스러져간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대공분실 기능을 홍제동으로 이전한 가운데 ‘경찰청인권센터’가 들어서 있는데, 박종철 열사가 숨진 509호실을 비롯한 5층 조사실은 2006년 홍제동으로 이전할 당시의 모습으로 보전된 채 4층에 설치된 박종철기념관과 함께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개기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사 직전에 놓여 있던 민주주의를 되살리고자 일어난 전국적인 ‘촛불혁명’이 여전히 진행 중인 시점에서 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한 박종철 열사의 정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신의)이 서려있는 옛 남영동대공분실 탐방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박종철 하면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말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이 말은 박종철 군의 사인을 쇼크사로 조작하여 당시 경찰총수인 치안본부장(강민창)이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할 때 사용한 말인데, 초등학생도 믿지 않을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려다 국민의 분노만 더 크게 만든 말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알려진 1987년 1월 14일의 이 사건은 당시 민주화추진위원회(약칭, 민추위)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한 선배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이 박종철 군을 불법연행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종철 군은 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 전두환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위기에 처한 조직의 재건을 추진 중이던 선배에게 몇몇 인물과의 연락업무를 부탁받은 상황이었다. 그는 ‘약속’과 ‘신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약속’은 단순히 한 선배와의 사적인 약속이 아니었으며,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대의를 지켜내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래서 박종철 군은 경찰의 물고문을 비롯한 모진 고문에도 선배의 소재를 밝히기를 거부했으며, 자신의 목숨을 ‘민주의 제단’에 바치는 일까지 감내했던 것이다.
이런 박종철 군의 의로운 죽음은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고, 군사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민중들의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민주주의를 반드시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열망과 의지’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군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의 진상에 대한 폭로는 급속도로 타 들어가는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6월 민주항쟁으로 폭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떨던 전두환 군사정권은 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노태우를 통해 발표한다. 그런데 이는 국민의 저항에 대한 항복의 의미를 갖는 동시에 위기를 회피해나가고자 하는 기만책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시도는 민주세력의 분열과 맞물리면서 일단 성공하여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전두환의 동료였던 노태우의 당선으로 귀결되고 만다. 지난 30년간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도,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촛불혁명’의 거대한 물결이 휩쓸고 있는 것도 모두 30년 전 6월 민주항쟁의 타협적 귀결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 군사정권을 즉시 몰아내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결정적 승리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더 이상 폭압적인 군사정권이 지속될 수 없도록 하는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 역시 끝내 6월 민주항쟁으로 활화산같이 폭발하여 우리 사회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누른 탄압의 상징, 옛 남영동대공분실
1) 건물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1976년에 준공된 옛 남영동대공분실은 원래 5층 건물이었는데, 1983년 2개 층이 증축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7층 건물이 된다. 유신의 한 복판이었던 1976년에 건물이 만들어졌다는 점, 전두환군사독재정권의 폭압이 한창이던 1983년에 증축되었다는 점은 독재권력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인 국민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국민에 대한 감시와 통제에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짐작케 해준다. 이것만이 아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벌어진 1987년 당시에는 건물 맞은편 테니스장 뒤편에 2층짜리 가건물을 지어 대공수사2단을 추가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박종철군고문치사사건을 일으킨 곳도 바로 그 대공수사2단이었다.
이 건물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 중 하나로 알려진 김수근의 작품이다. 김수근은 5·16쿠데타의 핵심이었던 김종필과 친분을 쌓으면서 박정희 군사정권과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많은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한 건축가이다. 워커힐(1961), 자유센터와 타워호텔(1963), 세운상가(1966), 여의도종합개발 계획(1967), 올림픽주경기장(1976), 올림픽 체조, 사이클, 수영경기장(1984), 서울지방법원 청사(1984)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김수근은 자신이 사용했던 ‘공간’ 사옥과 같이 검은색 벽돌을 활용하여 이 남영동대공분실을 지었다. 지금도 김수근의 제자들은 옛 남영동대공분실에 대해 “건물을 운영한 사람이 잘못이지 건물을 지은 사람이 무슨 죄냐”고 항변한다지만, 이 건물을 직접 본 사람이면 누구나 스승에 대한 맹목적 감싸기에 불과하다는 걸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옛 남영동대공분실은 처음부터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민주인사나 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걸 알고, 오히려 그에 충실하게 설계된 건물이다. 우선 입구에 들어설 때 탱크 소리를 내면서 열리는 육중한 문만 봐도 연행되어 온 민주인사나 학생들의 공포감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당으로 들어와 건물을 올려다보면 당시 조사실(고문실)이 있던 5층의 창문 구조가 다른 층의 창문과 확연히 다르다는 걸 쉽게 발견하게 된다. 고문을 받다 고통에 못 이겨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역할과 더불어 밖을 손쉽게 내다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도록 한 그 치밀함에 보는 이들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2) 건물은 고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남영동대공분실은 다른 수사기관과 달리 조사실을 지하에 두지 않고 꼭대기 층인 5층에 두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5층은 15개의 조사실 중 2개를 제외하고는 똑같은 구조의 '조사실'로 들어차 있는데 각 방은 4.09평 공간에 책상과 의자, 침대, 욕조, 변기가 설치되어 있다. 설치된 가구들은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 고정되어 있다. 각 방에 있는 창문은 폭이 좁고 위아래로 긴 2개의 창문만이 이중창으로 나 있어 밖을 내다보기도, 비명소리가 새어나오기도 어렵게 장치되어 있다. 당시 전철을 타고 지나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시민들은 남영역 바로 옆 건물 안에서 얼마나 ‘비 일상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행된 민주인사나 학생들이 5층 조사실로 이동하는 코스는 대공분실 직원들이 다니는 정문이 아닌 은밀한 뒷문으로 이어진다. 밖에서는 문조차 있는 지 가늠할 수 없는 그 뒷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조사실이 있는 5층에만 서는 엘리베이터나 5층으로만 통하는 나선형 계단을 통해 조사실로 올라가게 된다. 특히 고개를 숙인 채 쇠로 만들어진 나선형 계단을 오르게 되면 방향감각조차 상실하게 되고, 쿵쿵 울리며 들리는 쇠계단 소리는 두려움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15개의 조사실이 서로 대각선으로 마주보게 설계되어 있는 5층은 여러 명이 함께 잡혀온 경우에도 일절 서로 소통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곳에 일단 잡혀오면 나갈 때까지 각각의 좁은 조사실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 곳에서 식사도 하고, 잠도 자고 대소변도 보면서 물고문, 전기고문을 비롯한 온갖 고문을 감내해야 한다. 1963년 개정헌법부터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로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고문 받지 않을 권리’는 이곳에서는 그 효력을 상실한다. 고문장면을 비롯한 조사실의 일상은 CCTV를 통해 감시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본관 3층에서 모든 방을 지켜볼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509호실 욕조에 설치된 수도꼭지를 틀 때 나는 물소리는 그 소리만으로도 당시의 물고문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은 박종철 열사가 스러져 간 509호실만이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갖춘 8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이 전기고문까지 당한 515호실을 비롯한 나머지 조사실은 몇 차례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이제는 애석하게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3) 아무리 뛰어난 재주나 전문성을 가지고 있어도
독재자의 편에 서서 자신의 뛰어난 재주를 펼치면서 출세한 건축가 김수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또 다른 건축가 한 사람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그는 1971년 서울시의 도시계획과 건축정책 등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가 박정희 정권과 서울시에 밉보여 프랑스로 사실상 강제출국을 당한 후 1979년 박정희가 몰락한 이후에야 한국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건축가 김중업이다. 김중업은 우리가 잘 아는 삼일빌딩이나 주한프랑스대사관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인데, 박정희 정권 덕분에 프랑스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을 받기도 하고 미국에서도 더 큰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2014년에는 그런 김중업의 업적을 기려 안양에 김중업박물관이 개관되었는데, 김중업은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했을만큼 동시대를 함께 산 건축가임에도 김수근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지금 건축가 김수근은 미래를 설계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그 뛰어난 재주나 전문성조차 한낱 독재권력을 옹호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4) 친일과 독재는 어떻게 이어져왔는가
옛 남영동대공분실에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 또 있다. 5층 조사실과 4층 기념관을 관람한 이후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통해 정문으로 내려오면 건물입구 벽 아래 부분에 동판으로 새겨진 ‘定礎’ 표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동판은 1976년 당시 이 건물을 지은 책임자가 ‘내무부장관 김치열’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김치열은 일제 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검사를 지낸 친일파였지만, 해방 이후 처벌되기는커녕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승승장구하여 서울지검장(1958)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1960년 4․19혁명 직후 3․15부정선거를 ‘가담 내지 방조․묵인’했다는 이유로 해임되면서 한 때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이후 박정희의 5·16쿠데타를 지지하면서 재기한 후 1970년에는 중앙정보부차장에 임명되며 승승장구한다. 김치열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있던 1973년에는 남산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 숨진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를 간첩으로 몰아 “간첩 사실을 자백한 후 죄책감에 자살한 것”이라고 거짓 발표한 당사자였으며, 검찰총장 시절에는 박정희 유신독재의 대표적인 인권유린과 조작사건의 하나인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연행된 8명이 ‘사법살인’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사건 수사와 재판을 총괄하는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출세한 김치열은 내무부장관이 되어 대표적인 고문기관, 용공조작기관인 남영동대공분실을 짓는 책임자 역할까지 맡았던 것이다. 김치열은 옛 남영동대공분실에서 자신의 굴곡된 삶의 궤적을 통해 우리에게 친일청산을 제때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는지, 또 친일과 독재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옛 남영동대공분실에서 친일과 독재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것이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는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고문의 역사를 통해서이다. 우리는 남영동대공분실에서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한 대표적인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이근안이 사용한 물고문과 전기고문은 그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당시 대표적인 고문기술자로 불리던 노덕술의 고문기술이 박처원(박종철군고문치사사건 당시 대공담당 치안감)을 통해 계승․발전된 결과물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던 그 고문기술이 해방과 함께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진화를 거듭하면서 박정희유신독재와 전두환군사정권으로 이어져 독재권력을 비호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5) 박종철기념관에서 박종철을 기억하다!
옛 남영동대공분실 4층에는 박종철 군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박종철기념관’이 2008년부터 들어서 있다. 기념관에는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80년대의 시대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사진이나 신문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박종철 군이 감옥에 있을 때 부모님이나 누나, 그리고 친구들에게 쓴 편지는 물론 안경과 기타를 비롯하여 박종철 열사가 사용했던 여러 유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방문자들이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며 특히 주목하는 것 중에 1981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롯데그룹이 신문에 낸 축하광고가 있다. 이 광고는 재벌조차 독재권력에 얼마나 노골적으로 아부하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고 드러내고 있어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군에 강제징집 당하여 전두환군사정권의 ‘녹화사업’에 희생된 대학생 6명의 위령제 장면은 박종철군의 죽음이 결코 우발적이거나 우연한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박종철군고문치사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쪽지에 적어 교도관을 통해 외부로 날린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의 ‘비둘기’도 이색적인 전시물로 관심을 끈다. 다만 당시 온 국민을 분노에 떨게 했던 박종철군고문치사축소은폐조작사건의 경과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공간이 배치되지 못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는 이후 리모델링 과정에서 충분히 반영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종철기념관에는 87년 당시 박종철 열사의 서울대 언어학과 동료들이 집단창작한 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가 전시되어 있어 당시 박종철 군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인간, 자유, 해방’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오늘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솟아오르는 분노의 주먹을 쥔다
차가운 날
한 뼘의 무덤조차 없이
언 강 눈바람 속으로 날려진
너의 죽음을 마주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곁에 맴돌
빼앗긴 형제의 넋을 앞에 하고
우리는 입술을 깨문다
누가 너를 앗아 갔는가
감히 누가 너를 죽였는가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우리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너는 밟힌 자가 될 수 없음을
끝까지 살아남아 목청 터지도록 해방을 외칠
그리하여 이 땅의 사슬을 끊고 앞서 나아갈 너는
결코 묶인 몸이 될 수 없음을
너를 삼킨 자들이
아직도 그 구역질나는 삶을 영위해가고 있는
이 땅 이 반도에
지금도 생생하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너
철아
살아서 보지 못한 것 살아서 얻지 못한 것
인간, 자유, 해방
죽어서 꿈꾸어 기다릴 너를 생각하며
찢어진 가슴으로 네게 약속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너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말하리라
빼앗긴 너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일어서서 말하리라
오늘의 분노 오늘의 증오를 모아
이 땅의 착취
끝날 줄 모르는 억압
숨 쉬는 것조차 틀어막는 모순덩어리들
그 모든 찌꺼기들을
이제는 끝내주리라
이제는 끝장내리라
철아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동지여
마침내 그날
우리 모두가 해방 춤을 추게 될 그날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어라
그리하여 무진벌에서 북만주에서 그리고 무등에서 배어난
너의 목소리를 듣는 우리는
그날
비로소 그 날에야
뜨거운 눈물을 네게 보내 주리라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생생히 배우는 학습장, 남영동대공분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옛 남영동대공분실만큼 생생한 곳은 아마도 대한민국에 없을 것이다. 옛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가 있던 남산 기슭의 건물에는 이미 그런 고문의 현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빙고호텔’로 불리던 서빙고동 보안사대공분실은 그 기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된 것과 달리 옛 남영동대공분실은 그나마 잘 보존된 채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비록 주말개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어려움이 있지만, 이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청소년을 비롯한 보다 많은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이곳 옛 남영동대공분실을 찾아 친일과 독재로 이어져 온 우리의 ‘아픈 현대사’와 이를 극복해낸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동시에 기억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역시 박종철을 기억하는 이 시대 모든 이들의 숙제일 것이다.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는
역사현장탐방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현장탐방 - 옛남영동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을 기억하다!"를 운영합니다.
"현장탐장 - 옛남영동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을 기억하다!"는
우리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역사탐방 프로그램이 되고자 합니다.
옛남영동대공분실과 박종철열사가 스러져간 509호실 현장,
그리고 4층에 있는 박종철기념관 등을 둘러보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역사탐방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신 청 : 전화 - 010-4529-9401(김학규 사무국장)
탐방 가능시간
평일 : 오전 9시 ~ 오후 6시
휴일 : 오전 9시 ~ 오후 6시(사전신청 필수 - 공간관리자인 현 경찰청인권센터는 경찰기관으로 휴일에 문을 열지 않습니다)
* 신청하신 분들에게는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 친절한 안내를 해드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