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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찬성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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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알고싶은 정보 자료 ? 스크랩 함안군 연고적 사회관계의 기반
정의사도(안정의) 추천 0 조회 190 09.02.11 14: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8. 11. 3(월)

 

오늘 강의는 함안군을 사례로 들어 연고적 사회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알아본다.  연고적 사회관계를 성씨, 학연, 지연의 세가지 형태로 구분하고, 문헌자료를 활용하여 정리하였다.

 

1.  성씨의 분포

성씨자료는 2000년 센서스 자료에 나와 있으나 인터넷상으로는 광역까지만 나와서 경남도의 성씨분포를 정리하면 도 전체 인구 297만여명 가운데, 10만명 이상의 성씨는 강 11만여명, 김 64만여명, 박 27만여명, 이 41만여명, 정 17만여명, 최 12만여명으로 나타났다.

대개 함안의 큰 성씨 3개를 조리안으로 꼽는데, 함안 조씨와 순흥안씨는 이의가 없는데, 이씨는 혹자는 인천이씨로, 혹자는 재령이씨를 지칭하고 있어 혼란이 있다.  그런데 2000년센서스에 보니 경남도의 경우에는 함안 조씨가 5만 1천여염, 순흥안씨가 29천여명, 재령 이씨가 15천여명, 인천 이씨가 1만여명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재령이씨 일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확인해 보아야 할 사항이다.

함안 이씨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趙旅 선생을 유명한 이로 꼽고 조려 선생이 함안으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입향조로 표현하지 않아서, 더 이전에 입향한 이가 있는기 확인을 요한다.  만일 조려선생을 입향조로 여긴다면, 아마도 1400년대 중후반으로 추론할 수 있다.  현재 조려선생은 군북면 원북에 있는 서산서원에서 배향받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함안 조씨의 염수재가 있다고 하니 아마도 다른 곳에 또 중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령이씨는 1400년경에 고려조의 충절을 지키고 이성계정권에 반대하여 낙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1400년경제 입향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산인면 모곡리 고려동에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천이씨는 기록에서 李啓耘선생을 입향조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1400년대 중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최초 거주지는 군북면 평광리라 되어 있고, 이후 큰 아들은 평광에 계속거주하고, 차남은 현재의 함안면 대산리 금천마을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평광리에 도천제라는 제실이있고, 문중의 현인을 모신 사당으로 평광리에 도천사가 있다.  함안 향교의 전교가 이씨인 것으로 보아 함안면에서 유학의 전통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대산리의 설화에는 인천이씨와 함안 조씨와의 사이에 일어난 갈등이 전해져 내려 온다고 하니, 양대 성씨 간의 세력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순흥안씨는 을묘사화시(1519년) 춘천에서 安昌恭, 安昌廉 두 형제가 입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거한 장소는 인의면 모곡리 마을이다.  가야읍 도음마을에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고 인터넷 자료에 나와 있다.  칠원향교의 전교가 안씨이므로, 순흥안씨도 유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2.  학연은 크게 고등학교의 학연과 대학교 동창들의 학연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아마도 함안군 내에는 대학이 없으므로 인근 진주의 경상대학교와 마산의 경남대학교에 많이 진학하여 이들이 다시 함안에 들어와서 큰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상대 동창회는 가야읍내에 사무실을 갖고 있어 상대적으로 활발하다는 점을 알 수있다.

고등학교는 모두 5개가 있는 하나는 1937년에 세운 함안 고등학교이며, 아마도 가장 오래된 학교이고, 공립이라고 가장 많은 졸업생이 배출되었을 것이며,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있다.  사립고등학교 4개는  윤효량이 세운 것으로 추정키로는 1951년에 대산고등학교, 칠성교등학교(찰원종합고등학교), 1966년에 명덕고등학교(구 함안여고, 이후에 함안 여상... 이 부분은 확인 요, 2000년부터는 남녀 공학이다), 군북고등학교를 세웠다.  면단위로 고등학교가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군이 여러개의 세력권으로 나뉘어 있거나, 아니면 교육활동이 활발한 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함안 군 전체의 인구이동은 2006년 주민등록 통계에 따르면, 전입률 21.2%, 전출률 17.7%를 기록하고 있다.  철서면은 전출과 전입이 모두 20%이상에 달한다.  아마도 107만평에 달하는 칠서지방공업단지가 활발하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곳은 상대적으로 토착세력이 약하여 동이장도 젊은 사람들이 많다.

칠원면은 전입율은 30%이상이나, 전출은 10%대로서 상대적으로 전입이 많은 곳이다.  창원과 마산의 공업의 배후도시겸, 관련 중소기업이 많이 입주한 곳이다. 5-10명규모의 중소기업 300여개가 입주하여 현재 25백여명을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삼칠 지역의 하나인 칠북면은 상대적으로 다른 두면에 비해 이동이 적고, 주로 과수재배지역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 기미년 3월 9일 경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을 했다고 하니 시장이 흥하고, 교육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수 있다.

상대적으로 군북면과 대산면은 이동이 적은 편이다.  이 두곳은 시설작물을 재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군북은 칠북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을 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현재도 5일장이 설 정도로 시장과 농사가 흥한 지역이다.

산인면과 여항면도 상대적으로 인구이동이 많은 편이다.  아마도 농공단지도 있고, 최근에는 여항에는 인근 도시에서 교외 거주를 구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런것으로 추정된다.

농촌지역도 인구이동이 심해지면서, 전통적인 여론형성 장이 마을 원로 그룹에서 젊은 그룹, 또는 행정쪽으로 많이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 권력의 3대 축인 이장, 새마을 지도자, 마을 개발위원장의 공식적 직위가 강해지고 있는 점이 눈에 띤다.

 

다음 주부터는 지구적 수준에서 시민사회, 한국 국가의 수준, 그리고 함안군을 중심으로 한 지방 수준의 시민사회의 현황을 강의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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