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실록에 나온 위의 기사는 강화에 있던 팔만대장경이
당시 서울로 옮겨진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서울에서 다시 해인사로 옮긴 과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왕조실록』 정조 원년 정월조의
기사에는
“경상감사에게 명해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쇄하는
승려들에게 공양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이 서울에 도착한지 9개월 뒤의 기록이므로
대장경은 그 사이에 해인사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반 과정에도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육로 이동설이다. 해인사 대적광전에는 대장경판을 운반하는 장면을 그린 벽화가 있다.
운반 행렬의 맨 앞에는 동자가 향로를 들고 길을 내고,
그 뒤를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행렬을 인도한다.
스님의 뒤로는 소중하게 포장한 경판을 소달구지에도
싣고 지게에도 졌는가 하면 머리에 이기도 한 채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강화도를 떠나 한강에 다다른
배는 다시 남한강을 거쳐 충주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는 해인사의 벽화에서처럼 많은 인력을 동원
하여 육지로 운반한다. 행렬이 낙동강변에 이르면 대장경을 다시 배에 옮겨 싣고 고령까지 이동하여 육로로 해인사에
들어간다는 추정이다
둘째는 해로 이동설이다.
실록의 태조 7년 5월 12일 기사에는 “임금이 서강에 행차해 전라 조운선을 시찰했다.”고 되어있다.
이는 대장경판이 서울에 도착한지 이틀 뒤의 기록이다. 조운선이란 조세로 거둔 쌀을 운반하던 선박으로서 깊이가
얕은 강을 따라 내륙으로 이동하기 쉬우며, 해변을 항해하기에 유리한 구조였다.
1척 당 경판 5천 장을 실을 수 있어, 총 20척 정도면 팔만대장경을 운반하는데 충분하였다.
따라서 기록 속의 조운선은 이틀전 서울에 도착한 팔만대장경의 운송수단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앞의 낙동강변의 나루가 개경포(開經浦)이다.
조선 초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고려대장경'을 개경포를 통해 해인사로 이운했다.
그후 대장경을 옮긴 나루라는 뜻의 '개경포'란 이름을 얻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 지리지나 읍지
고지도 등에는 개경포를 '개산강(開山江)' 또는 '개산포(開山浦)'로 기록돼 있다.
이곳에는 강창(江倉)이 있어서 인근 지역에서 생산된 각종 물품을 모아 낙동강을 통해 한양으로 옮겼다.
선사시대부터 낙동강을 이용해 외부지역과 교통하는 가장 중요한 물길로 대가야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주요 나루터로 이용됐다. 고려대장경이 고령의 개경포를 통해 해인사로 옮겨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개경포에서 해인사까지의 이동 경로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첫번째는 "개경포에서 서쪽으로 열뫼재라는 고개를 넘어 회천을 따라 신안리~ 반운리~양전리~회천교~고령읍으로
들어왔다. 고령읍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중화리~저전리~신리를 거쳐 미숭산의 나상재 고개를 넘은 후 합천군 야로면의 나대리에서 월광리로 내려와 해인사로 진입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경로는 고령읍으로 진입하기 전 고아리에서 안림천을 따라 쌍림면을 거쳐 합천군 야로면으로 난
26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이다. 쌍림면의 신촌리를 거쳐 야로면 덕암리를 거쳐 해인사로 진입할 수 있다.
나상재를 넘는 길은 고개가 가파르고 안림천을 따라가는 길은 거리가 멀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 두 가지 중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선뜻 판단하기 어렵다고 한다.
한강에서 서해 바닷길로 나온 다음 남해를 돌아 낙동강 줄기인 고령에 이르러 배를 대고,
이곳에서 해인사까지는 육로로 운반하였을 것이다. 방대한 양의 팔만대장경을 운송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여 10리, 5리씩 릴레이 하듯 머리에 이고 지고 대장경을 현재의 장소로 운반하였다.
첫댓글 너무 좋은 자료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