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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교토에서 가장 인기있는 명승지 기요미즈데라(清水寺)와 조선인의 원혼이 깃든 미미즈카(耳塚)
기요미즈데라(清水寺)
기요미즈데라(清水寺)는 교토 부 교토 시 히가시야마 구에 있는 사원이다. 더 완전한 이름으로 오토와산기요미즈데라(音羽山清水寺)로도 불린다. 사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도 교토의 문화재의 일부이다.
기요미즈데라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설립되었다. 절의 역사는 7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현재의 건물은 1633년에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명령으로 재건된 것이다. 절 전체에 걸쳐서 못이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다. 절의 이름은 주변의 언덕에서 단지 내로 흐르는 폭포에서 유래되었다. 기요미즈(清水)는 "맑은 물"을 의미한다.
절은 원래 나라(奈良)시대 때부터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법상종에 속했지만 1965년에 독립해 현재는 "북법상종"의 일원이자 대본산임을 자칭한다.
현재 본당에는 큰 무대가 있고 산허리에 놓여있는 긴 기둥에 의해 지지되며 도시의 인상적인 경치를 관람할 수 있다. 큰 무대와 본당은 에도 시대에 많은 참배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다.
과감히 사물을 결단하는 것을 "기요미즈의 무대로부터 뛰어 내릴 생각으로"라고 하지만 기요미즈데라의 고문서 조사에 의하면 실제로 뛰어 내린 사람이 1694년부터 1864년까지 234건이었고 생존률은 85.4%였다. 1872년에 정부가 뛰어내리는 것을 금지하면서 목책을 치는 등 대책을 세우면서 잦아들었다.
본당의 밑에는 오토와 폭포가 있고 세 개의 물줄기가 연못으로 떨어진다. 방문객들은 이 물을 마실 수 있고 치료의 힘이 있다고 여겨진다. 세 개의 물줄기는 각각 지혜, 건강, 장수를 상징한다. 그러나 몇몇 일본인들은 오직 두 가지만을 선택해야하며 만약에 욕심 때문에 세 개를 모두 마시면 불운이 따른다고 믿는다.
사원 단지 내부에는 지슈 신사(地主神社)를 포함한 몇몇 신사들이 있다. 또한 다양한 부적과 향, 오미쿠지(御神籤, 행운의 종이)를 볼 수 있다. 이곳이 세워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엄청난 사람들이 모이는 나름 명소로 발전했다. 그 이유는 독특한 기원을 내걸었기 때문인데 인연을 이어주는 곳이라는 엔무스비노 가미(えんむすびの神, 연분을 맺어 주는 신)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戀占いの石이라는 점보는 돌을 양쪽에 10m간격으로 세워놓고 한쪽 바위에서 눈을 감고 걸어서 다른 쪽 바위를 만나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속설로 많은 젊은이들이 그곳에서 사랑을 점치고 있었다. 매월 첫째주 일요일마다 축제가 있다고 하는데 이때는 전통 축제 음식과 기념품들을 판매하는 특별 상점들로 채워진다.
2007년에 기요미즈데라(清水寺)는 新 세계7대 불가사의의 21개 후보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인 7개 명단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홍윤기 선생의 글을 보면 이곳 청수사도 백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의 글을 보자.
일본 교토시 동쪽 산 언덕에 기요미즈데라(淸水寺)가 우뚝 서 있다. 이곳은 고대 일본 정복왕인 백제인 오진왕(應神, 4∼5세기 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8세기 말 세워진 것으로 “교토를 관광하는 일본 사람치고 기요미즈데라를 찾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유명한 절이다. 798년 이 사찰을 창건한 이는 백제인 가문의 무장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758∼811)다. 다무라마로의 조상은 오진왕 때 백제에서 건너간 백제 왕족 아치노오미(阿知使主)였다(‘續群書類從’ 1822).
다무라마로는 백제계 간무왕(桓武 770∼806 재위)의 총애를 받던 왕실 최고 무장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었다. 그는 793년 왕도를 위협하며 일본 동북 지방으로 밀고 내려오는 홋카이도 큰 섬 아이누족 집단인 에조(蝦夷·에미시, 에비스)의 무력세력을 정벌하는 큰 무공을 세워 간무왕의 신임을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간무왕은 당시 아이누족 에조 무력집단의 큰 위협을 받고 있었고, 무장 다무라마로에 의해 아이누족은 계속해 격퇴, 섬멸됐다. 이러한 무공으로 다무라마로는 796년 동북지방의 태수로 임명됐고, 797년에는 왕실 최고 무장인 정이대장군이 된 것이다.
그는 801년 10월에도 침공하는 에조를 크게 섬멸하고 개선하여 간무왕의 더 큰 신임을 받게 되었다.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다무라마로는 귀화계 씨족이며 뒷날 대납언 겸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將)이 되고 사후에는 종2위(從二位)로 추서될 정도였다. 그의 딸은 간무천황의 비가 되어 후지이친왕(葛井親王)을 낳았다”(‘歸化人’ 1965)고 지적했다. 교토산대 고대사 담당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도 사카노우에노하루코(坂上春子) 등을 상세하게 거명하며 “간무왕의 후비(后妃) 중 6명이 도래계 씨족”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다무라마로의 성명 위에 붙은 것은 ‘사카노우에’(坂上) 즉 ‘언덕 위’라는 ‘판상’ 두 글자이다. 그것은 다무라마로가 일본 동북지방으로 쳐내려온 아이누족들을 정벌하며 무공을 거듭 세우고 나서 왕도 헤이안경(平安京·지금의 교토시) “동쪽 언덕 위에다 기요미즈데라를 세운 뒤부터의 일”(‘국보·중요문화재안내’ 1963)이라고 도쿄대학 건축사학 담당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가 지적했다.
헤이안경 동쪽 산 언덕 바윗골 험준한 단애 위에다 대형 기둥들을 나란히 세워 건축한 기요미즈데라의 웅장한 본전 건물은 일본 국보 중에서도 손꼽히는 문화재이다. 본전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로 덮었다. 오타 교수는 이 본전 건물이 “처음 창건할 때, 교토 지방의 왕도였던 나가오카경(長岡京)의 왕궁 본전(시신덴·紫宸殿) 건물을 간무천황이 하사하여 그것을 옮겨다 세우게 되었다고 전한다”고 했다.
다무라마로는 비록 이전 왕도의 왕궁 본전 건물이었지만 국왕으로부터 직접 그것을 물려받을 만큼이나 간무왕의 은총을 입었다. 현재 일본 불교 기타홋소슈(北法相宗) 총본산이 된 이 가람의 단애 위에 웅장하게 서 있는 본전 건물을 두고 예로부터 비유해오는 명언이 있다. “기요미즈의 무대로부터 뛰어내린다”는 것인데, 그 풀이는 “결연하게 단행한다”이다. 이는 바로 무장 다무라마로의 에조 침략 퇴치의 무용 등 그의 늠름하고 결연한 전공의 발자취에서 생겨난 찬사다.
백제인 후손인 다무라마로가 헤이안경 동쪽 산 언덕에 세운 오진왕의 기요미즈데라는 창건 후 여러 번 화재로 소실됐다 재건되었다. 17세기 초인 1633년에는 에도바쿠후 제3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1604∼1651)가 앞장서서 오진왕의 기요미즈데라를 재건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장군은 백제인 간무왕의 후손이며, 교토 남부 야와타(八幡)시의 오진왕 큰사당인 이와시미즈하치만궁(石淸水八幡宮)도 헤이안경의 기요미즈데라를 재건한 이듬해인 1634년에 재건한 인물이다.
정이대장군 하면 흔히 근세의 강력한 무사 정권이었던 에도바쿠후(1603∼1867) 최고 실권자였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부터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일본 왕실의 정이대장군 직제는 그보다 800여년 앞선 간무왕 시대인 794년에 시작되었다. 이 당시 간무왕 밑에 있던 백제계의 무장 오도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 731∼809, ‘신찬성씨록’ 815)가 최초의 정이대장군이 되었고, 다무라마로가 큰 무공을 세우며 뒤를 이었다.
간무왕은 생모인 친어머니가 백제왕족 야마토노니가사(和新笠 ?∼789) 대비였고(‘속일본기’ 797년 왕실 편찬), 부왕인 제49대 고닌왕(光仁 770∼781 재위)도 백제인이었다(‘대초자’ 1158). 그러기에 간무왕 당시에 “왕실 요직은 모두 백제인 출신 인물들이었다”(‘속일본기’)는 것이 왕실 역사에 장황하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헤이안경 왕족과 귀족 족보 ‘신찬성씨록’(총 30권) 편찬의 발자취다. 처음으로 왕실에서 ‘신찬성씨록’ 간행을 명령한 것은 간무왕이었다. 이 역사책 간행은 간무왕의 왕자 만다친왕(万多親王, 788∼830)이 주축이었다. 어째서 간무왕이 이와 같은 족보를 만들도록 명한 것인가. 간무왕은 왕실 율령(律令) 체제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한 계책으로 편찬시켰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일본 동북지방의 선주민들이 아이누족과 결탁하여 백제계 간무왕의 정권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에 헤이안경의 왕족과 귀족의 신분을 확실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에 다무라마로와 같은 충신의 아이누족 정벌로 정국 안정을 꾀한 뒤 ‘신찬성씨록’ 간행을 왕자에게 직접 지시한 것이다.
간무왕이 부왕 고닌왕에 이어 781년 왕위를 계승한 지역은 헤이안경이 아니고, 오늘의 교토 동남 지방인 나라(奈良) 땅, 그 당시의 헤이제이경(平城京·현재의 나라시)이다. 간무왕은 이 지역 백제인들의 세력권에서 등극했으나 선주민들의 적지 않은 벡제 배척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등극한 지 불과 3년 만인 784년 천도를 시작했다. 헤이제이경에서 저멀리 서북쪽인 지금의 교토 지방 남쪽의 나가오카경(長岡京)으로 왕도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간무왕이 총애하던 백제계 중신인 중납원(中納言) 벼슬의 후지와라노 다네쓰구(藤原種繼 737∼785, ‘신찬성씨록’)가 천도를 반대하던 반목자들의 쿠데타로 785년 10월 암살당했다. 후지와라노 다네쓰구는 왕명으로 새 왕도 건설 책임자(造京使)로 일하던 중에 피습당했다. 간무왕은 몹시 애석해하며 그에게 좌대신직을 추서했다. 이와 같은 정변뿐 아니고 정정이 불안한 가운데 간무왕은 왕도 나가오카경으로부터 다시 헤이안경으로 재차 천도한 것이 794년이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간무왕이 처음 헤이제이경에서 즉위한 초기 칙명으로 지시한 중대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일 동족(韓日同族) 관계 모든 서적의 분서 사건(焚書事件)’이었다(‘弘仁私記’ 9세기). 즉 백제 왕족을 부모로 태어난 간무왕이 그의 집권 초기에 이르러 일본 관가에 전해지던 한일 동족관계의 모든 역사책들을 수집하여 불태우도록 명령한 것이다. 이 분서사건에 대해 14세기 일본의 거물 정치가였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帛親房 1293∼1354)도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마한·진한·변한)과 동종(同種)이었느니라고 하는 책이 있어서, 그 책을 간무와 어대(御代)에 불태워버렸도다”(신황정통기 14세기)라고 썼다.
이런 내용으로 추찰할 때 등극 초기의 간무왕은 백제인이라는 출신 때문에 호시탐탐 동북지방 침략을 꾀하던 아이누족과 선주민 세력으로부터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다무라마로와 같은 유능하고 용맹한 무장을 둔 까닭에 그는 차츰 정권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더구나 794년 세 번째 왕도인 헤이안경에 천도한 뒤부터 간무왕은 백제인 신하들을 거느리고 확고부동한 왕실 정치의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무장 다무라마로를 총애하며 역대 어느 백제계 왕보다 모국 백제 의식이 투철한 군왕으로 권세를 펼쳐 나갔다. 그것은 ‘신찬성씨록’ 편찬뿐만이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794년 헤이안경 천도와 동시에 왕궁 안 남북에다 백제신 두 분과 신라신을 위한 사당 두 곳을 건립한 것이다. 그 상세한 경위는 일본 왕실 법도인 ‘엔기시키’(延喜式·총 50권·왕실에서 서기 927년 완성)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일본 왕이 직접 궁 안에서 제사 모시는 신은 한신(韓神) 두 분과 원신( 園神)으로 규정되어 있다. 역대 일본 왕들이 무엇 때문에 백제신과 신라신에게 몸소 제사지내는 것일까. 이 제사는 해마다 11월23일 전야에 거행하는 ‘니나메노마쓰리(新嘗祭)’이다. 이때 일왕은 햇곡식으로 빚은 제주(祭酒)와 떡, 온갖 제수를 진설하고 첫닭이 울기 전에 제사를 마친다. 이와 같은 왜 왕실의 한국신 제사에 관한 고대 문헌에는 “한신과 원신은 간무왕에 의하여 헤이안경으로 천도가 정해지기 이전부터 본래 궁중에서 제사를 모셨다. 천도 당시에 조궁사(造宮司)가 다른 곳으로 신주를 옮기려고 했을 당시, 간무천황의 꿈에 현신하기를 지금까지처럼 ‘제왕(帝王)을 지켜줄 것이로다’는 탁선(託宣)이 있어 새로 천도한 궁 안에도 전처럼 다시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江家次第’)고 기록돼 있다.
간무왕은 또한 헤이안경 천도와 동시에 백제 제26대 성왕(523∼554 백제 재위)의 왕실 관장 사당을 왕명으로 헤이안경 북쪽에 세웠다. 지금의 히라노신사(平野神社·연재 36회 참조)가 그 사당이다. 간무왕은 본래 헤이제이경에 모시고 있던 백제 성왕의 사당도 새로 천도한 그의 왕도 헤이안경으로 모셔왔다. 이 무렵 가장 두드러진 충신은 다무라마로 장군이었다. 그러기에 다무라마로 장군의 장례식은 왕에 버금가는 장중한 것이었다. 장례 행렬은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조정 고관들과 고승들의 독경 속에 갑옷과 검과 활통 등 무구를 함께 매장했다(‘대일본사’ 1906).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그의 전기가 실릴 정도로 이름난 무장 다무라마로의 묘지는 현재 교토시의 야마시나구(山科區)에 있는 ‘다무라마로공원’ 부지 안에 있다.
미미쯔카(귀무덤)
임진왜란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병사들의 목을 베어오라는 것이 시초가 되었고 나중에는 코를 베어오라고 했다.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은 사람의 “귀”를 묻은 무덤을 뜻하나, 그곳에 묻힌 것은 대부분 사람의 “코”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무덤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무장들이 부피가 큰 목 대신 가져갔던 것으로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이름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으로 바뀌었다.
당시 왜군의 전리품으로 희생된 조선 군민의 수는 12만6000여명에 달한다. 무덤 위에는 오륜석탑(五輪石塔)이 세워져 있는데, 희생된 조선인의 원혼을 누르기 위하여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한 한반도 침략의 역사의 증거를 현재에 남긴 미미즈카(耳塚, 쿄토시 히가시야마구 챠야쵸=京都市 東山區 茶屋町)를 방문하면 무덤을 덮은 풀이 제거되어 주위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무덤 바로 동쪽에 사는 시미즈(淸水四郞·92)씨가 평소 남모르게 환경보전에 힘써온 결과물이다. 선의의 봉사활동은 부친에 이어 2대째 이어지고 있다.
시미즈씨는 부친이 묵묵히 미미즈카의 풀을 베고 주위를 청소하는 것을 어릴 적부터 보면서 자랐다. 일본 패전 후, 외지에서 복원하자 시미즈씨도 자연스레 그런 부친을 돕게 됐다. 부친이 죽고 나서도 이 습관은 변함없이 계속됐다.
풀베기 작업은 2, 3일 걸리는 힘든 작업이었다. 시미즈씨가 작업을 시작하자 보다 못해 마을내 주민 20명 정도가 응원차 도와주었다고 한다.
주민이 함께한 풀베기 작업은 시에서 파견된 직원이 담당하게 된 10여년 전까지 계속됐다.
1980년에 들어서 한국의 학자에 의해 미미즈카의 존재가 한국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어 인권학습 및 평화학습을 겸해 많은 견학자가 미미즈카를 찾게 됐다. 이제는 수학여행으로 쿄토를 찾는 학생들의 견학코스로서 정착됐다.
그러자 시미즈씨는 시 직원을 대신하여 주위를 둘러싼 돌담 열쇠를 맡아 미미즈카의 출입 관리까지 맡게 됐다.
한국에서 온 견학자 중에는 잊지 못할 사람도 있다고 한다. 김영삼 전대통령도 그 한사람이다. "대통령은 우리 집에도 들러 주었다. 양손으로 감싸듯 나와 악수해 준 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일본이 한반도에 한 일을 생각하면 나는 그저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것 뿐인데..."라며 지금도 황송해 한다.
시미즈씨는 방문자들을 위한 방명록을 준비했다. 어느새 70권 정도가 됐다. 이 중에 30여권은 시미즈씨가 지금도 소중히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풍국신사 옆에는 이제는 절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작은 암자 하나. 그리고 커다란 종 하나만이 남아있는 방광사가 있다.
풍신수길이 천하통일 후 어머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이 그 후 화재로 불타 버리고 후에 풍신수길의 아들 히데요리가 방광사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함에 넘어가 가문이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던 유명한 절이다.
"칼로 정복한 자는 반드시 칼로 망 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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