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전(苟全)선생 강원(講院)일록(日錄)
1615(을묘:광해군 7)년 (선생 50세)
일록(日錄)
【 3 월 】
〖10일 병진〗
10일 정사(政事)에서 나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정5품직)으로 임명한다는 교지(敎旨)를 공손히 받았다.
〖13일 기미〗
서리(書吏) 박충립(朴忠立)이 소명(召命: 신하를 부르는 왕명)을 받들어 왔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3月6日 壬子
이정원(李挺元)을 사간으로,유숙(柳潚)을 부제학으로,유인길(柳寅吉)을 대사간으로,
박홍도(朴弘道)를 부교리로,임성지(任性之)를 수찬으로,남이준(南以俊)를 보덕으로,이경심(李慶深)을 황해병사로 삼았다.
光海君 7年 3月10日 丙辰
以奇允獻爲掌令, 金中淸爲文學。(기윤헌을 장령으로, 김중청을 문학으로 삼다.)
光海君 7年 3月14日 庚申
합사하여 이원익의 귀양, 남이공의 위리 안치를 청하나 남이공의 체직·추문 처치케하다
사헌부가 형장을 남발하여 임명을 해친 일로 박안례의 파직을 청하니 추고하라 명하다 합계하여 5적의 일을 아뢰나
번거롭게 하지 말 것을 답하다
光海君 7年 3月15日 辛酉 합사하여 이원익·남이공의 일을 아뢰나 따르지 않다 합사하여 재차 이원익·남이공의 일을
아뢰나 따르지 않다
이후 재차 아뢰고 옥당이 하루 걸러 차자를 올리나 따르지 않다
사헌부가 백성에게 징수한 미포로 사복을 채운 강익문의 국문을 청하니 따르다
光海君7년 3月19日 乙丑
합사에【이원익 등의 일이다. 】 답하였다.
“이원익은 대신의 신분으로 감히 흉측한 차자를 올렸으니, 정상을 추구하여 죄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 거기에 해당되는
율이 있다.
어찌 멀리 귀양 보낼 뿐이겠는가. 그러나 이는 훈척 대신으로 여느 벼슬아치와는 같지 않다.
어찌 율문대로 적용해야만 하겠는가. 그대로 버려두는 것이 좋겠다.
남이공은 분명치 않은 일로 죄안을 만들 수 없으니 다시 자세히 살펴 논죄하라.”
光海君 7年 3月21日 丁卯
합사하여 재차 이원익·남이공의 일을 아뢰니 이원익의 관작 삭탈·성밖 출송을 명하다 합사하여 재차 이원익과 남이공의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이원익은 관작을 삭탈하여 성문 밖으로 출송하고 남이공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쟁집하지 말라.”하였다.
光海君 7年 3月22日 戊辰
“주청사(奏請使) 박홍구(朴弘耉)는 외거 노비 5명과 전지 30결을 주고 부경자제(赴京子弟)에게 6품직을 제수하고,
부사(副使) 이지완(李志完)은 자급을 뛰어 올림과 동시 외거 노비 3명에 전지 20결을 주고,
서장관(書狀官) 오익(吳翊)은 가자와 함께 전지 10결에 외거 노비 2명을 주고, 당상 역관(堂上譯官) 박인상(朴仁祥)과
상통사(上通事) 장세굉(張世宏)은 가자와 함께 실직을 제수하고,
세 차례를 계속 중국에 다녀온 역관 정언방(鄭彦邦)은 가자하고,
이문 학관(吏文學官)이장배(李長培)는 동반(東班)6품직을 제수하되 만약 이미 이 직을 거쳤으면
동반직으로 승진 서용하고, 역관(譯官) 황효성(黃孝誠) 등은 본 아문의 정직을 제수하고,
사자관(寫字官) 이정상(李廷祥)은 동반 6품직을 제수하고,
사헌부 서리 이경무(李景茂)는 서제대간(書題待干)을 제수하고,
군관(軍官) 김정간(金廷幹)·이상규(李尙規)는 실직을 제수하되 만약 이미 실직을 거쳤으면
이에 상당하는 수령과 변장을 제수하고, 기타 나머지는 모두 무신년 진주사 군관의 상격례에 의하여 살펴 시행하라.”
고 전교하였다.
--------------------------------------------------------------------------
〖23일 기사〗
경상감사[方伯:관찰사]로부터 마문(馬文)이 왔다.
〖25일 신미〗
오천(梧川)을 출발해서 온계(溫溪: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자고
〖26일 임신〗
다음날 저녁에 봉화(奉化)친가[親庭]로 향했다.
〖27일 계유〗
낮에 집을 떠나서 영천(榮川=영주의 옛 지명)에서 잤다.수령이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28일 갑신〗
아침에 (관아로)들어가서 수령을 만나보았다. 이어서 고을과 집안의 어른 분[鄕丈門老]들과 친구들을 만나 보았다.
〖29일 을유〗
새벽에 구야(龜爺)를 찾아뵙고,아침을 먹고,구미촌(龜尾村)을 들러 박숙전(朴叔淟)씨를 찾아뵙고,풍기(豊基)에서 잤다.
〖30일 병신〗
신 새벽에 차운로(車雲輅)라는 관장(主倅)이 나와서 맞이한다.
그 행동거지[擧措]가 조찬한(趙纘韓)영주 원(倅)과는 사뭇 다르게 한결같다.
단양(丹陽) 봉서정(鳳棲亭)에서 잤다. 정회원(鄭恢遠)이란 원(倅)이 나와서 맞이했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3月26日 壬申
다음달 1일부터 3일까지 창덕궁·창경궁·동궁에 방포(放砲)할 일을 군기시에 말하도록 전교하다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한 달 간 흥해(興海)로의 병가(病暇)를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이익(李瀷)을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로, 한명욱(韓明勖)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光海君 7年 4月2日
임금께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다 양사(兩司:사간원,사헌부)가 합계(合啓)하여 경연(經筵)을 열어 치도(治道)를
묻도록 청하니 조리 후 행할 것으로 답하다
光海君 7年 4月4日
대사간 유인길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로 사직을 청하나 따르지 않다
계속되는 흉소(凶疏)를 막지 못한 죄로 이정원·최응허가 파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光海君 7年 4月5日
합사하여 아뢴 일에 대해 이원익(李元翼)의 중도부처(中途付處)와 남이공(南以恭)의 삭탈관직을 명하다
서경덕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하원량 등의 상소에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답하다
光海君 7年 4月7日
송순이 근래의 사의에 피혐하지 못한 죄를 들어 파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光海君 7年 4月8日
병조의 당상, 판서 이하가 경운궁에 가서 감찰할 것을 전교하다
光海君 7年 4月9日
정언 이짐이 김효성 등의 상소 내용을 보고 파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송순·유인길 등이 김효성 등의 상소 내용을 보고 파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박자흥(朴自興)을 사인으로,금개(琴愷:자 彦康)를 장령으로,이안눌(李安訥)을 동부승지로,권태일(權泰一:자 守之)을
호조 참의로,한찬남(韓纘男)을 응교로,유여항(柳汝恒)을 겸설서로,김경서(金景瑞)를 북병사로 삼았다.
--------------------------------------------------------------------------
【 4 월 】
〖1일 정축〗
비를 무릅쓰고 길을 재촉한다.
수산(水山)에서 쉬고, 저녁에 충원(忠原)에 투숙했다. 별감(別監) 박대익(朴大益)이 채찍을 들고 맞이한다.
〖2일 무인〗
용안(勇安)에서 쉬고, 죽주(竹州)에 투숙했다.
윤경(尹絅)이란 부사(府伯)는 서울에 가서 나오지 않았다.
〖3일 기묘〗
양지(陽智)에서 쉬고, 또 용인(龍仁)에서 말을 먹이고 저녁에 판교(板橋)에서 투숙했다.
양지(陽智)의 원(倅)인 남진(南鎭)을 잠깐 보고, 용인(龍仁)의 원(倅) 한양(韓瀁)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러 나갔기에
보지 못하고 왔다.
〖4일 경진〗
낮에 도성(都城)에 들어왔다.
〖5일 신사〗
저녁 무렵에 사은(謝恩)했다.
〖6일 임오〗
집에 있었다.
〖7일 계미〗맑음.
밥을 먹은 다음 입직(入直)했다. 동료인 겸 문학(兼 文學: 정5품직)인 손척(孫倜1)을 만났다.
그는 당시에 이조 정랑(正郞)을 겸하고 있었다. 하번(下番)은 사서(司書: 정6품직) 이익(李瀷2)이다.
책상 위에는 서전(書傳) 제5권과 대학연의(大學衍義) 제1권이 놓여있었다.
들으니 세자(世子) 저하께서 이제 막 이 두 책으로 강(講)을 하려 했는데
요즘은 임질(淋疾:임균으로 일어나는 요도점막의 염증인 성병)로 인해서 경연(經筵)을 중단한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8일 갑신〗맑음.
이(李)사서(司書)는 실록청(實錄廳)에서 나와 갔고, 설서(說書:정7품직)남성신(南省身3)이 교체되어 왔다.
저녁에 동궁[春宮]전에서 퇴선(退膳: 임금의 밥상에서 물려낸 음식)이 와서 한 잔씩 하고 막 끝내려는데
교리(校理:홍문관의 정5품직)박정길(朴鼎吉4)이 와서 더불어 술잔을 주고 받고 하다가 인정(人定:밤8시)이 지나서
마쳤다. 박 교리와 함께 밝은 달빛을 밟으며 귀가했다.
〖9일 을유〗맑음.
내가 실록청(實錄廳)으로 가서 2판(板:4페이지)을 베껴 썼다.
실록청 총재관(總裁官)인 영의정 기자헌(奇自獻5)영사(領事)와 도청(都廳)인 의정부 우참찬(右參贊=四宰)
박건(朴楗6)동지사(同知事)께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10일 병술〗맑음.
유여항(柳汝恒13)이 어제 실시한 인사발령[政事]에서 설서(說書: 시강원 정7품직)에 임명되어
오늘 아침에 사은(謝恩)하고 이어서 당직[直所] 서는 데를 물어서 시키게 한다.
저녁에 오융보(吳隆甫=吳汝穩61) 수찬(修撰: 홍문관 정6품직)이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에 수직(守直)을 서면서
“약간의 술 단지를 얻었으니 모두들 따라주기 바랍니다.”라고 써서 부르기에 나와 이(李瀷2)사서(司書)가 같이 갔다.
종묘서(宗廟署)의 봉사(奉事: 종8품직)인 김대진(金大進)이 제사지내고 남은 술을 갖고 와서 잔을 올린다.
몇 순배 후 교리(校理: 홍문관 정5품직) 박홍도(朴弘道14)가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들 간다.
김 봉사(奉事)가 앞서 나가고 우리들은 그 다음에 돌아왔다.
〖11일 정해〗맑음.
이익(李瀷2)사서(司書)는 실록청에서 와서 그 형을 만나러 잠깐 나가고 나 혼자 있다.
정언(正言: 사간원 정6품직) 이잠(李埁15)이 사간원에서 방문하러 왔고,
박사(博士: 성균관 정7품직) 박수서(朴守緖16)가 그의 집에서 또 왔다.
이(李埁15)정언(正言)이 돌아가고,박(朴守緖)박사는 저녁에 돌아갔다.이(李瀷)사서(司書)가 집에서 다시 돌아왔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7년 4월10일 丙戌
영의정 기자헌(寄自獻),우의정 정창연(鄭昌衍)을 선수청 도제조로 삼고,
유근(柳根)이준(李準)박승종(朴承宗)은 호.공·병 삼조의 판서로서 예겸제조로 삼았다.
--------------------------------------------------------------------------
〖12일 무자〗맑음.
아침에 천문훈도(天文訓導)인 윤시(尹時)의 단자를 보니 ‘
지난 밤 5경(更:새벽4시경)에 유성(流星)이 위성(危星:28宿중 危宿에 있는 별)에서 나타나 동쪽 하늘로 떨어졌다.
그 모양은 주먹만하고 꼬리는 3~4자나 되며 붉은 색이었다.’
이 당시 합사(合司:사헌부와 사간원이 같이)하여 이원익(李元翼17)을 멀리 귀양 보내고 남이공(南以恭18)을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라고 계청(啓請)한지 여러 달이 되었다.
이(李元翼)정승을 부처(中途付處:軟禁)시키고, 남이공을 삭탈관직(削奪官職)시켰지만 계청(啓請)이 그치질 않았다.
송순(宋諄19)이 대사헌,박재(朴榟)가 집의(執義:사헌부의 종2품직),최응허(崔應虛)가 장령(掌令:사헌부의 정4품직),
기윤헌(奇允獻20)은 새로 들어오고, 양시진(楊時晋21)과 신광업(辛光業22)이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직)이다.
대사간(大司諫)은 유인길(柳寅吉23),사간(司諫:사간원의 종3품직)은 이정원(李挺元24),헌납(獻納:사간원의 정5품직)은
조정립(曹挺立25),정언(正言)은 이잠(李埁15)과 한명욱(韓明勗26)이다. 금개(琴愷12)는 병가(病暇)중이다.
들으니까 이정원(李挺元)이하의 사간원의 관원들이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정승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올린
유생(儒生)인 홍무적(洪茂績27)등에게 죄(罪)주려 한다고 한다.
대사헌 송순(宋諄19)은 “유생들은 벌할 수 없다.
사간(司諫)들이 유생 시절에 일찍이 상소를 올렸지만 그 당시에 죄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하자
사간원 정언인 이잠(李埁15)이 말하길 “비록 유생의 이름은 한 명이지만 이 상소인즉
한 갈래[一揆: 같은 경우나 경로]로 볼 수 없습니다.”
송순(宋議竟)이 가면서 말하길 “어제 경연에서 사헌부의 계청(啓請:임금에게 아뢰어 청함)으로 입격(入格)자(洪生員)를
따르는 여러 명이 (줄 갔다)관직을 잃을 것이다.[畫數除職]”라 했다고 한다.
임금께서 대신과 논의하면서 실록청(實錄廳)에 가서 3판(板)을 베껴 오라고 명(命)해서 사과(司果:5衛의 정6품軍職)
이경여(李敬輿28)가 역시 두 번째 방(二房:)낭청에서 와서 일을 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한옥(韓玉7)과 김경직(金敬直29)도 둘러보고 갔는데, 김경직은 가주서(假注書:승정원의 정7품직)가 되었다.
〖13일 기축〗흐리고 갠 후 낮에 비 옴.
포도대장 이일(李一)이 왔다 갔는데, 그는 이 사서(司書=李瀷2)의 숙부이다.
감찰(監察:사헌부의 정6품직) 최공망(崔公望20)이 상소를 올려 김효성(金孝誠31),정택뢰(鄭澤雷),홍무적(洪茂績27)등을
벌주고, 법을 밝혀 각처의 말을 참고 안하면서 조작하는 대사간 한옥(韓玉7)을 파직시켜 내치라고 했다.
유여항(柳汝恒13)이 당번을 갈아 들어오고, 권성오(權省吾32)가 부망(副望)으로 가주서(假注書)에 기용되었다.
(셋째 아들인) 주우(金柱宇33)가 와서 잤다.
〖14일 경인〗비온 뒤 낮에 갬.
권성오(權省吾32)가 가주서(假注書)로 나아가지 못하고 밀려나고 새로 남명우(南溟羽34)로 바뀌어서 들어갔다.
주우(柱宇)가 돌아가고, 이(李瀷2)사서(司書)는 실록청에 갔다.
남병사(南兵使)와 북병사(北兵使)가 일시에 북쪽 오랑캐(㺚虜)의 정세에 대해 치계(馳啓:급하게 임금에게 아룀)하고
이어서 조산(造山)경흥(慶興)가을파지(葛坡:茄乙坡知의 縮音인 듯 함)등지에서도 오랑캐 고을대(古乙大)등에 대해서
고(告)한다.
선수제조(繕修提調:당시 궁궐 수리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선수도감의 총괄자 즉 이이첨,이성,권반)가 들어가서
아뢰기를 “미포(米布)를 백성들에게 메겨서 거둬들인 다음에 공사를 시작해야만 하는데 금년은 큰 흉년이 들어서
기근이 심해 백성들을 구제해야하는데 어쩌면 좋습니까?”하자 답하길 “
유사시에 쓸 미포는 병조(兵曹)의 미포[군수물자]를 보충해서 쓰고 민간에게는 거두지 말라.”고 하였다.
예안현(禮安縣) 사람인 천수(千守)에게 고향 편지[鄕書]를 부쳤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4月14日
이충을 선수 도감 부제조로 임명하도록 전교하다 또 이이첨(李爾瞻)이성(李惺)이병(李覮)권반(權盼)을 제조로 삼았다.
--------------------------------------------------------------------------
〖15일 신묘〗맑음.
이익(李瀷2)사서(司書)가 죽은 부인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당번을 바꿔 달라고 해서 개인적으로 잠시 나갔으므로 부득이
내가 대신 근무한다. 집의(執義:사헌부의 종3품직)박재(朴梓)와 장령(掌令:사헌부의 정4품직) 최응허(崔應虛35)가
서로 다투어 다시 물러나게 이른다. 시직(侍直)하는 박(朴)이 와서 보았다.
바로 아침에 필선(弼善:시강원 정4품직) 배대유(裵大維36)가 바꿔 들어가기로 쪽지로 청해서 내가 승낙했기에
저녁 쪽으로 바꾸어 나갔다.
사은사(謝恩使)윤방(尹昉37)이 옥새를 찍은 고명(誥命)을 먼저 보냈다고 치계(馳啓)했다.
밤에 이형원(李馨遠55) 3형제와 홍성해(洪成海)가 내방(來訪)했다.
꿈에 어버이가 계신 방에 절을 하는데 흡사 조문객들이 집에 가득한 듯하고,
그리고 부친의 상기(喪期)를 마치는 날이 라는 말을 하는 등 뒤숭숭한 꿈이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16일 임진〗흐리고 개었다가 잠깐 비가 옴.
금(琴愷12) 장령(掌令)의 초청을 받아 가서 마시고 저녁에 돌아왔다.
임금의 비망기(備忘記: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기록)에 이르기를
‘(이번 급제자)정석준(鄭碩儁38)은 태경(泰慶=晉陵君39)의 처남으로 과거에 급제했는데,
정적(鄭賊:鄭汝立)및 다른 역적의 친척들도 또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자가 있는가? 일이 매우 놀랍도다.
해조(該曹:해당 관청의 부서)로 하여금 살펴 아뢰게 하라.’고 했다.
시골서 부친 편지를 보니 정극렴(鄭克廉)씨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봉화(奉化)경주인(京主人242:서울에 머무르면서 지방 관청의 사무를 대행해 주는 사람)의 노비가 편지를 가지고 왔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4月16日
예조에서 역적의 지친이면서도 정거를 당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아뢰다
傳曰:“鄭碩儁以泰慶【晋陵君也】妻娚, 至於登科。 鄭賊【汝立】及他逆賊妻娚, 亦有通科擧仕路者乎? 逆賊至親,
전왈:“정석준이태경【진릉군야】처남, 지어등과。 정적【여립】급타역적처남, 역유통과거사로자호? 역적지친,
不爲停擧, 有同平人, 事甚可駭。 令該曹察啓。”
부위정거, 유동평인, 사심가해。 령해조찰계。”
(전교하기를, “정석준(鄭碩儁)은 태경(泰慶)의【진릉군(晉陵君)이다.】 처남으로 과거에 급제했는데,
정적(鄭賊)과【정여립(鄭汝立)이다.】 다른 역적의 처남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자가 있는가?
역적의 지친을 정거(停擧)하지 않고 평인(平人)과 동등하게 대우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해조로 하여금 살펴 아뢰게 하라.)
--------------------------------------------------------------------------
〖17일 계사〗맑음.
내가 원종(原從) 2등 공신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당하관의 품계)에 가자(加資)되어서
한산군(漢山君)조진(趙振40)의 집에 인사하러 갔다.
그의 4촌인 조식(趙拭) 및 한산군의 사위인 정인(鄭演)이라는 사람과 그의 아들인 양윤(鄭良胤41)이 같이 있었다.
또 이대엽(李大燁42)을 보았다. 교리(校理) 유활(柳活43)도 역시 왔다. 나는 먼저 나왔다.
예안현의 향리(鄕吏)가 왔기에 시골집에 편지를 전했다. 저녁에 입직(入直:관청에 들어가 숙직함)하러 들어가자
배대유(裵大維36)는 교대하여 나갔다.
이날 표리(表裏)를 간품(看品:품질의 어떠함을 살핌)하러 지평(持平)신광업(辛光業22)과 설서(說書) 남성신(南省身3)이
와서 참여했다.
수사(水賜:세숫물을 드리는 궁궐 나인) 별감(別監:액정서(掖庭署)의 예속(隸屬)인)인 김덕남(金德男)이 양치질하는
봉이지(封裏紙)를 지난 초하룻날 풍저창(豊儲倉:우창(右倉)과 장흥고(長興庫)를 합친 곡식 창고)에서 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령을 하지 않고 문서를 조작하여 거짓으로 내관(內官:궁중의 여관)의 서명을 받아 개인적으로
형조(刑曹)로 보내 놓고는 돈으로 속죄(收贖)하기를 독촉해서 받아내니 그 간사하고 참람함이 막심하다.
그래서 임금께 주문(奏文)을 올려 바로잡기를 청한다고 한다.
들으니 형부승지 한찬남(韓纘男44)의 집 대문에 익명(匿名)의 시(詩) 2수(首)가 붙었는데,
딴 곳에도 역시 같은 것이 붙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明經賢士盛於斯 二百年來始見之 七大文通從自願 字標相應鬼神知
‘명경현사성어사 이백년래시견지 칠대문통종자원 자표상응귀신지
(경서에 밝은 인재 이때에 융성하였으니 2백년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로다.
일곱 살에 문리에 통달함은 자원자를 따랐기기 때문이오, 문자와 표시가 상응한 것은 귀신만 알고 있다네..
-글을 잘 모르는 한찬남의 아들 한급이 식년 전시에서 시관(試官)들과 미리 짜고 4서3경중 한 대목만을 골라
외우게 해서 급제한 것을 비꼰 시-任叔英의 作이라 함 )
〖18일 갑오〗맑음.
내가 가자(加資)된 것에 사은(謝恩)했다.
단지 이조참판 이성(李惺45)과 동지사(同知事) 이충(李沖46)이 장막을 사이에 두고 차례로 맞아 본다.
나도 차례대로 나란히 나아갔다. 그리고 실록청에 가서 7판(板)을 베낀다.
저녁에 흠경각(欽敬閣:물시계와 각종 천문관측기구가 있는 천문각)에 가서 천문을 관측해 보았다.
낭청(郎廳)윤민일(尹民逸47)과 한 감역(監役)이 그곳에 있었다.
이날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에서부터 신시(申時:오후 3시~5시)까지 햇무리가 생겼으며,
밤 일경(一更:오후 7시~9시)에 손방(巽方:동남방)에 화광(火光)같은 기운이 보였고 아울러 유성(流星)이
자미원(紫薇垣:북극성)에서 출발하여 직녀성(織女星)으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만 하고 꼬리는 4~5자(尺)정도라고
봉사(奉事)홍경직(洪敬直)의 보고서[單字]에 기록되어 있었다.
성균관 유생[泮儒]홍경정(洪景艇)등이 상소하여 ‘김효성(金孝誠31)의 불신(不臣: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음)의 죄를
극한 형률(極律)을 적용하고 또 홍무적,정택뢰,남이공(南以恭18)등이 임금을 흐리게 하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물어
귀양 보내라.’고 청하자 답하길 “조정에서 응당 참작하여 처리할 것이니 물러가서 책이나 읽으라.”고 했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4月18日
김효성의 극률 적용과 홍무적·정택뢰·남이공 등의 귀양을 청하는 홍경정의 상소문
--------------------------------------------------------------------------
〖19일 을미〗맑음.
문과(文科)식년시(式年試:子午卯酉년에 보는 과거)를 보는 날이다.
전시(殿試:임금이 참석하여 보이던 과거)의 독권관(讀卷官)은 기자헌(奇自獻5),유근(柳根48),이이첨(李爾瞻49),
대독관(對讀官)은 윤길(尹길),이정복(李廷馥),오익(吳翊50)이고 승지 이춘원(李春苑)이 점수를 집계했다.
북병사가 오랑캐가 문서를 보내 왔다고 치계(馳啓)했다. 사시(巳時)에 비가 내렸다.
군신(君臣)이 서로 만나 문제의 대책을 논의하면서 합사(合司)로 올린데 대해 답하기를
“ 이원익(李元翼)은 훈척(勳戚:나라에 공훈이 있는 친척)대신으로 이미 흉차(兇箚:흉한 차자)를 올렸으니 오늘날의
언관(言官)은 불가불 논해야 하겠지만 당초에는 삭출(削黜:영지를 깎고 관위를 떨어뜨림)하라고만 청(請)하다가
부처(付處: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게 하는 벌)하는 데 까지 이르렀으니 이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이다.
하필 신광업(辛光業22)의 피혐(避嫌)하는 계사로 인하여 멀리 귀양 보내기를 극력 청하는가!
삼사(三司:홍문관,사간원,사헌부)의 일을 논하는 체모(體貌)가 과연 이 같은 것인가?
남이공(南以恭18)은 이미 시골로 내쳤으니 위리(圍籬) 안치하는 것은 지나치다. 굳게 고집하지 말라.” 하였다.
(궁궐을 수리하라는 명을 거두어 달라는) 합계(合啓)에 대해 대답하기를,
“양궁(兩宮)을 수리하는 일은 애초부터 대단한 일이 아니었는데 합계(合啓)하기까지 하다니,
누가 사론(邪論)을 주장하여 임금의 손발을 묶고자 하는가? 극히 놀랍다.
마땅히 엄중히 추궁해야 하겠으나 지금 잠시 불문에 붙일 것이니 속히 중지하고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사간(司諫) 이정원(李挺元24), 지평(持平) 양시진(楊時晋21)ㆍ신광업(辛光業22), 정언(正言) 이잠(李埁15), 헌납(獻納)
조정립(曹挺立25)등이 모두 파직시켜 내치라고 청한데 대해 답하길 준엄한 전교를 내렸다.
오늘 저녁에 가는 비가 흩날리다 그쳤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4月19日
황경중(黃敬中)을 공홍 감사로,윤효전(尹孝全)을 대원군(帶原君)으로 삼았다.
식년 전시에서 이상빈 등 32명을 뽑다.
式年殿試,取李尙馪等三十二人。【所取者,皆兇黨之子弟及附託時論者也,以公道得參者,僅數人。 蓋設場之前,
식년전시,취리상빈등삼십이인。【소취자,개흉당지자제급부탁시론자야,이공도득참자,근수인。 개설장지전,
預定試官擬望之人,使與擧子相約,三經、四書中,各出一大文,使誦習之,故應講之際,無不純通。 韓纘男之子昅,
예정시관의망지인,사여거자상약,삼경、사서중,각출일대문,사송습지,고응강지제,무부순통。 한찬남지자겁,
年甚少而不讀書,亦登高第,有人夜書其門曰:
년심소이부독서,역등고제,유인야서기문왈:
“明經多士盛於斯,二百年來始見之。 七大文通從自願,字標相應鬼神知。】
“명경다사성어사, 이백년래시견지。 칠대문통종자원, 자표상응귀신지。】
【〈정석준(鄭碩儁)은 여기에 들지 않았다.〉 뽑은 사람은 대부분 흉당(凶黨:대북당)의 자제와 시론(時論)을
좇은 자들로 공정하게 급제한 사람은 겨우 몇 명이었다.
대개 과거를 시행하기 전에 시관(試官)으로 의망(擬望)될 사람을 미리 정하여,
응시자들과 서로 짜고 삼경(三經)과 사서(四書) 중에서 각기 한 대문(大文)을 골라 외우게 하였기 때문에
강경(講經)할 때에 모두 순(純)과 통(通)이었다.
한찬남(韓纘男)의 아들 한급(韓昅)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책을 읽지 못했는데도 좋은 성적으로 급제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밤에 그의 집 대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경에 밝은 인재 이때에 융성하였으니 이백년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로다.
칠서 대문을 통한 것은 자원을 따라주었기 때문이니 상통한 정상을 귀신은 알고 있다네.
--나중에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 작품이라고 하는 설이 있었다.(편집자 주)】
양사가 합계하여 양궁을 수리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答曰:“兩宮繕修之役,初非大段,而至於合啓 何人主張邪論,縶君上之手足乎? 極爲可駭。
답왈:“양궁선수지역,초비대단,이지어합계,하인주장사론,집군상지수족호? 극위가해。
所當重究,今姑不問,亟停勿擾。”
소당중구,금고부문,극정물요。”
( 대답하기를, “양궁을 수리하는 일은 애초부터 대단한 일이 아니었는데 합계하기까지 하다니,
누가 사론(邪論)을 주장하여 임금의 손발을 묶고자 하는가. 극히 놀랍다.
마땅히 엄중히 추궁해야 하겠으나 지금 잠시 불문에 붙이니 속히 중지하고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정원·양시진 등이 합계한 일을 꾸짖는 전지를 받고 사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司諫李挺元,持平楊時晋,辛光業、獻納曺挺立、正言李埁啓曰:“近年以來,水旱連歲,民生困悴,而繕修兩宮之命,
사간이정원,지평양시진,신광업、헌납조정립、정언이잠계왈:“근년이래,수한련세,민생곤췌,이선수양궁지명,
又下於此時,臣等不勝憂悶,冀解倒懸之苦。 至於合啓者,所以重其事也。 非徒不見嘉納,反下嚴譴,目爲邪論,
우하어차시,신등부승우민,기해도현지고。 지어합계자,소이중기사야。 비도부견가납,반하엄견,목위사론,
至以縶手足當重究爲敎,不料聖明之世,反有此未安之敎也。 臣等雖極愚妄,所願者忠,而旣被前古所未有之峻旨,
지이집수족당중구위교,부료성명지세,반유차미안지교야。 신등수극우망,소원자충,이기피전고소미유지준지,
擧何顔面,更辱名器乎? 請罷臣等之職。”
거하안면,경욕명기호? 청파신등지직。”
答曰:“勿辭。” 退待。 掌令琴愷,大司憲宋諄,大司諫柳寅吉,皆以此引避, 退待。
답왈:“물사。” 퇴대。 장령금개,대사헌송순,대사간류인길,개이차인피, 퇴대。
(사간 이정원, 지평 양시진·신광업, 헌납 조정립, 정언 이잠이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수해와 한재가 해마다 연이어
백성들이 수척해 있는데, 양궁을 수리하라는 명이 또 이때에 내렸으므로,
신들은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을 풀어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에 합계하기까지 했던 것은 그 일을 중하게 여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납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엄한 꾸지람을 내려 사론(邪論)이라고 지목하시고,
손발을 묶는 것이라느니 엄중히 추궁해야겠다느니 하고 전교하기까지 하셨는데,
성명의 시대에 도리어 이같이 온당치 않은 전교가 있을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비록 극히 어리석고 망령되나 원하는 바는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전에 없던 준엄한 전지를 받았으니 무슨 낯으로 다시 명기(名器)를 더럽히겠습니까. 신들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금개, 대사헌 송순, 대사간 유인길이 다 이를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 홍문관이 모두 출사하도록 명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삼사가 이원익 등의 일을 논한데에 다시 논하지 말라고 답하다,
答三司論李元翼等事曰:“元翼以勳戚大臣,旣上兇箚,則爲今日言官者,雖不可不論, 而當初只請削黜,
답삼사론이원익등사왈:“원익이훈척대신,기상흉차,칙위금일언관자,수부가부론, 이당초지청삭출,
至於付處,則如斯而止可矣。 何必因辛光業之避啓,力爭遠竄? 三司論事之體,果如此乎? 南以恭已爲放歸,
지어부처,칙여사이지가의。 하필인신광업지피계,력쟁원찬? 삼사론사지체,과여차호? 남이공이위방귀,
圍籬安置過矣。 毋庸堅執。”
위리안치과의。 무용견집。”
(삼사가 이원익 등의 일을 논한 데에 답하기를,
“원익이 훈척 대신으로 이미 흉차를 올렸으니 금일의 언관이 불가불 논해야 하겠지만 당초에는 삭출하라고만
청하다가 부처(付處)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보면 이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이다.
하필 신광업(辛光業)의 피혐하는 계사로 인하여 멀리 귀양보내기를 극력 청하는가.
삼사의 일을 논하는 체모가 과연 이같은 것인가.
남이공(南以恭)은 이미 시골로 내쳤으니 위리 안치하는 것은 지나치다. 굳게 고집하지 말라.” 하였다.
-------------------------------------------------------------------------
〖20일 병신〗맑음.
사헌부 장령(掌令) 금개(琴愷12)가 피혐(避嫌)하면서 아뢰길
“(궁궐)선수(繕修=수선)의 중지를 청하는 것은 실로 간절한 우국(憂國)의 충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엄한 꾸지람을 내려 사론(邪論)이라고 지목하시고, 사자(邪字)의 한 글자로 손발을 묶은 즉 어찌 감히
일각이라도 여기에 덧붙여 말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했다.
오늘 아침에 오전, 오후 당번(上下番) 모두가 동궁(東宮)저하께 문안드렸더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진시(辰時:오전7~9시)쯤 비가 뿌리더니 햇빛이 오히려 빛난다.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의 장관들이 피혐(避嫌)하면서 아뢰자 임금이 답하길 “신진(新進) 소년배들이 어찌 국가
사정을 알겠는가? 경(卿)들은 이를 참작하여 논의(論議)를 닫고 진정하라.”고 했다.
저녁에 홍문관 교리(校理)박홍도(朴弘道14)가 입직(入直)하고 있는 데를 둘러보았더니 홍문관[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사간원 정언(正言) 한명욱(韓明勗26)을 바꾸라 했단다.
전날 한옥(韓玉7)을 추고(推考)했을 때 바로 파직 시키지 않고 지금 바꾸게 된 것이다.
〖21일 정유〗맑음.
어제 전시(殿試)에서 이상빈(李尙馪)이 장원,이강(李茳53)이 2등,조석붕(趙錫朋60)이 3등을 했단다.
이익(李瀷2)이 개인 용무로 나가고, 나는 실록청에 가서 7판(板)을 베꼈다. 주우(柱宇)가 들어왔다.
흠경각(欽敬閣)에 가 보고, (의심을 받은) 양사(兩司)에서는 다시 피혐(避嫌)하는 소(疏)를 올렸다.
임금으로부터 공성왕후(恭聖王后:공빈 김씨로 광해군에 의해 왕후에 추증되었으나 폐위 후 삭탈)의 휘호를 올리는
일을 국(局)을 만들어서 실시하라는 명(命)이 있었다.
이(李瀷2) 사서(司書)가 개인 용무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4月20日
정창연이 첫 번째 정사를 올리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 창경궁의 각 아문의 건립을 금년 내로 끝낼 것을
전교 박승종이 정사한 것으로 인하여 사직하지 말 것을 전교
光海君 7年 4月 21日
공성 왕후의 휘호를 올리는 일을 국을 설치하여 거행하도록 전교하다.
인정전의 노끈으로 짠 그물이 낡았으니 철망을 만들어 치도록 전교하다.
송순·유인길 등이 사론으로 지목받은 일로 사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존숭 도감(尊崇都監)을 설치하고,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을 도제조로,유근(柳根)이상의(李尙毅)이이첨(李爾瞻)
박건(朴楗)을 제조로,박자흥(朴自興)유희발(柳希發)박노(朴노)조존도(趙存道)정준(鄭遵)유여각(柳汝恪)황중윤(黃中允)
권척(權倜)을 낭청으로 삼았다. 영의정 기자헌이 이명증으로 체차를 청하다
--------------------------------------------------------------------------
〖22일 무술〗맑음.
사복시(司僕寺:궁중의 말 관리 관청)첨정(僉正:종4품직)김(金夢虎51)공이 당번을 바꾸어 달라고 청해서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다.
김사겸(金士謙=金廷益93)과 여러 이(李)씨들(李茳,李苙,李慕,李蒧등)을 차례로 만나보고, 종일 집에서 누워 지냈다.
양사(兩司)가 네 명을 파직시키라 청한다.
배척당하는 옥당(홍문관)이 (양사의 관원들이)나오기를 청하면서 하는 말이 간만(簡慢:소홀히 하고 업신여김,
즉 대접이 소홀했다는 겸양사)구차(苟且:몹시 가난하고 군색하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일시적으로 미봉한다는 의미)
하다고 했다.
꿈에 도롱이를 입은 권낙이(權樂而=權來52)와 이형보(李馨甫=李茳53)도 함께 보이니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잡몽(雜夢)은 믿을 것이 못되는가 보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4月22日
송순 이하가 ‘사’를 범한 것으로 파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大司憲宋諄以下啓曰:“邪之一字,凡官猶不自安,而臺諫負此名,重究之罪,他人尙難容貸,而臺諫先自犯,
대사헌송순이하계왈:“사지일자,범관유부자안,이대간부차명,중구지죄,타인상난용대,이대간선자범,
何敢强冒言地,抗論時政得失乎? 玉堂乃一體之地,而勉出至此,竊未曉其意也。 請亟命罷斥臣等之職。”
하감강모언지,항론시정득실호? 옥당내일체지지,이면출지차,절미효기의야。 청극명파척신등지직。”
答曰:“勿辭。” 退待。
답왈:“물사。” 퇴대。
(대사헌 송순(宋諄) 이하가 아뢰기를,
“‘사(邪)’라는 한 글자에 대해서는 일반 관원도 오히려 불안하게 여기는데 대간이 이 이름을 받았으며,
엄중히 추궁해야 할 죄는 일반 사람도 오히려 용서받기 어려운데 대간이 먼저 범하였으니,
어찌 감히 뻔뻔스레 언관의 지위에 그대로 있으면서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옥당도 같은 기관인데 이렇게까지 억지로 출사시키니,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속히 신들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원이 이치에 맞지 않는 상소를 올린 감사를 추고할 것을 아뢰나 허락하지 않다,
송순 이하가 ‘사’를 범한 것으로 파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
〖23일 기해〗맑음.
한안국(韓安國54),안전수(安佺隨),이형원(李馨遠55),사성(師聖=李蒧56:선생의 문인(門人))이 왔다. 인사발령이 있었다.
유여각(柳汝恪57)을 정언으로, 김 사복정(=김몽호(金夢虎51부친의 휘와 같아서 이름을 안 씀)을 장령으로,
김구정(金九鼎58)을 종묘령(宗廟令)으로, 한극겸(韓克謙59),한창락(韓昌樂),이숙형(李叔亨),안기(安奇),
이강(李茳53)을 한성부 참군(參軍:정7품직)에 제수했으며,조석붕(趙錫朋60)을 사도시(司導寺:궁중의 쌀,간장,된장을
관리하는 부서)직장(直長:종7품직)으로 삼았다.
양사(兩司)에서는 넷을 파직시키고 옥당(홍문관)에서는 나오길 청하자,승정원이 아뢰길 “지엄하신 분부를 내리시니
양사(兩司)가 임금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하니까 답(答)하기를
지금 수리하는 일은 과연 그와 같다. 법궁(法宮)을 세우는 공역(工役)은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위(내가)에서
사리를 모르지 않는데(菽麥不辨) 하필 이때에 억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겠는가?
임금이 거처하는 곳은 오로지 한 곳에만 한정할 수 없으니 만약에 절박하게 이어(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김)해야 할
일이생기면 여염집에 거처할 것인가?
창경궁(昌慶宮)의 외전(外殿) 몇 군데와 각 아문(衙門)을 조성하는 일은 실로 크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는 부득이한데서 나온 것이다. 경운궁(慶運宮)은 사태를 보아가면서 조용히 요리할 작정으로, 금년에 같이
공역(工役)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외부 사람은 알지도 못하면서 두 궁궐의 수리를 한다고 혼칭(混稱)하여 논의를
확대시켜 합계(合啓)하기까지 하니 어찌 괴이하지 않은가?!
대개 우리나라는 인심이 부박(浮薄:천박하고 경솔하여 마음이 변하기 쉬움)하여 일의 체모(體貌)를 잘 헤아리지 못하고
조정(朝廷)의 움직임 하나하나[一擧措一擧動]에 대해 반드시 과격한 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설(說)을
부추기고 공갈하면 양사(兩司)는 으레 좇아서 가세(加勢)한다.
이러한 폐습이 이미 고질(痼疾)이 되었는데, 이는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전부터 이와 같았는데,
이게 어찌 유독 양사(兩司)의 논의만 그렇겠는가? 내가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평소에 심병(心病=心恙)을 앓았는데 병이 심해져서 지난 겨울 부터는 평안한 날이 거의 없다.
그래서 발언을 하면 도리에 어긋나고 망령되며 전도(顚倒)되니, 나 또한 답답하다. 바라건대 승정원(政院)에서는
가련하게 여겨 허물하지 말라.”고 했으며,
(말을 삼가 하라는)홍문관의 계사에는“계사(啓辭)의 뜻을 유념하겠노라.”고 했다.
저녁으로 바꾸어 입직(入直)했다. 일관(日官)의 보고에 의하면 진시(辰時:오전9시~11시)에 좌측 햇무리가,
미시(未時:오후1시~3시), 신시(申時:오후 3시~5시)에도 햇무리가 생겼었다고 한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4月23日
이경함(李慶涵)을 부총관으로,김몽호(金夢虎)를 장령으로,유여각(柳汝恪)을 정언으로,장자호(張自好)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정원이 양궁을 수리하는 일에 대한 엄한 전교가 온당치 못함을 아뢰다.
政院啓曰:“兩宮繕修之命,出於民窮財竭之日,臺諫所論,實是公共。 聖上非但不卽嘉納,反下無前之敎,不勝未安。
정원계왈:“양궁선수지명,출어민궁재갈지일,대간소론,실시공공。 성상비단부즉가납,반하무전지교,부승미안。
惶恐敢啓。”答曰:“今繕修之事果如是。建法宮之役,則人雖不言,自上亦不至於不辨菽麥,何必此時,强作不當爲之役乎?
황공감계。”답왈:“금선수지사과여시。건법궁지역,칙인수부언,자상역부지어부변숙맥,하필차시,강작부당위지역호?
人君所居,不可專委一處,脫有切迫可移之事,其將寄寓於閭閻家乎? 外人不知熾張,其議至於合啓,豈不怪哉?
인군소거,부가전위일처,탈유절박가이지사,기장기우어려염가호? 외인부지치장,기의지어합계,기부괴재?
大槪我國人心浮薄,不諒事體,凡朝家一擧措一擧動,必有主張過激之論者,鼓其說而恐動之,兩司例從而加之。
대개아국인심부박,부량사체,범조가일거조일거동,필유주장과격지론자,고기설이공동지,양사례종이가지。
弊習已痼,非今斯今,自前如此,是豈獨兩司之論乎? 予不得無言。 予素患心恙,因病轉劇,自去冬殆無寧日。
폐습이고,비금사금,자전여차,시기독량사지론호? 여부득무언。 여소환심양,인병전극,자거동태무녕일。
發言悖謬,昏妄顚倒,予亦爲悶,政院憐而勿咎。”
발언패류,혼망전도,여역위민,정원련이물구。”
(정원이 아뢰기를, “양궁을 수리하라는 명이 백성들이 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때에 내렸으니,
대간이 논한 것은 참으로 여러 사람의 공론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즉시 가납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전에 없던 전교를 내리시니,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황공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수리하는 일은 과연 그와 같다.
법궁을 세우는 일은 사람들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위에서 사리를 모르지 않는데 하필 이때에 억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겠는가. 임금이 거처하는 곳은 오로지 한 곳에만 한정할 수 없으니 만약에 절박하게 이어해야 할 일이 생기면
여염집에 거처할 것인가. 외부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데 논의를 확대시켜 합계하기까지 하니 어찌 괴이하지 않은가.
대개 우리나라는 인심이 부박하여 일의 체모를 잘 알지 못하고 조정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대해 반드시 과격한 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부추기고 공갈하면 양사는 으레 좇아서 가세한다.
이러한 폐습이 이미 고질이 되었는데, 어제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고 전부터 이와 같았으니,
어찌 양사의 논의만 그렇겠는가. 나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평소에 심병(心病)을 앓았는데 병이 심해져서 지난 겨울부터 평안한 날이 거의 없다.
그래서 발언하면 도리에 어긋나고 망령되며 전도되니,나 또한 답답하다.정원은 가련하게 여겨 허물하지 말라.”하였다)
대간이 논집하고 있더라도 창경궁으로 이어하고자 하니 처리하여 아뢰도록 전교하다
홍문관이 상차하여 말하는 것을 삼가해야 함을 아뢰니 유념하겠다고 답하다.
弘文館上箚曰<중략> 答曰:“予意已諭于政院。 箚辭當留念焉。”
홍문관상차왈<중략> 답왈:“여의이유우정원。 차사당류념언。”
(홍문관이 상차하기를, “말 한마디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있고 말 한마디로 나라를 잃을 수도 있으니,
왕은 말하는 것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간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여 할말을 다하고 꺼리지 않는 것이 어찌 사론(邪論)을 주장하여 군상의 수족을
묶고자 하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은 진실로 전하의 준엄한 전교가 한때의 우연에서 나온 것을 압니다만,신들도 삼사의 하나이므로 삼가 성상의
전교를 보고 감히 묵묵히 있을 수 없습니다.
임금으로 하여금 대간을 대우하는 체면을 잃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며 감히 비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정원에 유시하였다.
차자의 말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맹인·무당으로 하여 비를 비는 일을 거행하도록 전교하다.
--------------------------------------------------------------------------
〖24일 경자〗비.
옥당(홍문관)의 자문(咨文)에 답하기를 “내 뜻을 이미 승정원에 유시(諭示)했다.
이원익(李元翼17)의 일도 이미 유시했는데 하필 억지로 간(諫)하느냐?”했다.
실록청(實錄廳)에 가서 7판(板)을 등사(謄寫)했다.
교리(校理) 박정길(朴鼎吉4)이 방 안으로 들어와서 만나 보았고,
선수도감(繕修都監)제조(提調)인 이충(李沖61)이 또 왔다.
이날은 총재관인 기자헌(奇自獻5)과 대제학 이이첨(李爾瞻49)이 펴놓고 앉아있다.
양사(兩司)에서는 5번째 파직을 청하고,
수찬(修撰) 정조(鄭造62)가 세 번 째 체차(遞差:벼슬아치를 바꿈)사장(辭狀)을 올렸다.
이(李瀷2)사서(司書)도 역시 실록청으로 와서 일하므로 나는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들으니 판서(判書) 조정(趙挺63)이 상중(喪中)에 있다고 한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4月24日
이정원이 수리의 중지를 청하는 뜻을 발론한 것으로 사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송순 등이 이정원이 인피한 것으로 사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홍문관이 상차하여 대사헌·대사간 이하의 출사를 청하니 따르다.
영의정 기자헌이 귓병으로 훈련 도감 도제조 직의 체차를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
〖25일 신축〗비.
옥당(홍문관)에 내린 비답(批答)에 “이미 참작하여 정죄(定罪)한 것이니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고 했다.
박재(朴梓120)가 두 번째 사직소를 냈다.
액정서(掖庭署)사약(司鑰)이 뵙기를 청하면서 시문(詩文)을 지어달라며 두 폭을 갖고 와 보이는데,
표문(表文)두개에 시(詩) 한 수이다. 내관(內官:내시)이 지은 것이라 했다.
이(李瀷)사서(司書)와 같이 고평(考評)해 보니
표문의 하나는 중지하(中之下)이고 또 하나는 하지중(下之中)이고,시(詩)는 상지하(上之下)이다.
그래서 완물상지(玩物喪志: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데 마음이 팔리면 본심을 잃는다.)라고 부제(賦題)를
그 종이 끝에 써서 보냈다.
그 지은 바를 보니 비록 문사(文詞)를 잃었으나
그 집안의 생김생김이 또한 비 인간적 수단이라 네 글자로 제(題)를 했다.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에 개였다. 옥당(홍문관)이 처리하기를 이정원(李挺元24)을 체직(遞職)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내 쫒으란다. 박재(朴梓)가 세 번째 체차(遞差) 상소를 했고, 정언(正言) 유여각(柳汝恪57)과
보덕(輔德)남이준(南以俊64)이 또한 칭병으로 사직소를 올렸다.
정사(政事: 인사발령)가 있었다.
이조판서 물망에 박홍구(朴弘耈65),박승종(朴承宗66),유희분(柳希奮67),한효순(韓孝純68),이이첨(李爾瞻49),
오억령(吳億齡69),박건(朴楗70) 7명을 의망(擬望)으로 넣었다.
이날 내일 아침 임금[大殿] 탄신(誕辰) 진하(進賀)에 쓸 동궁(東宮)께서
올릴 전문(箋文: 길흉사에 임금께 올리는 4.6체의 글)을 유희발(柳希發71)이 짓고,
승문원(承文院)에서 정서(正書)를 해 와서 정자(正字:승문원의 정9품직) 이배원(李培元)이 와서 대조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고, 세자익위사(翊衛司)의 이사수(李士脩)가 옥새를 찍은 뒤 봉서에 봉인하고 수결(手決)을 내가 했다.
주우(柱宇33)가 와서 보고 갔다. 일관(日官)의 보고를 보니 미시(未時:오후 1시~3시)에 해무리가 지고,
신시(申時:오후 3시~5시)에 해 위에 속은 붉고 겉은 푸른 관(冠)모양이 떠 있었다.
유활(柳活43)이 다녀갔고, 인사이동에서 배대유(裵大維36)를 보덕(輔德: 시강원의 종3품직)으로, 김질간(金質幹72)을 집의(執義: 사헌부 종3품직)로, 남이준(南以俊64)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光海君 7年 4月 25日
김질간(金質幹)을 집의로,남이준(南以俊)을 사간으로,배대유(裵大維)를 보덕으로,안홍량(安弘量)을 겸설서로 삼았다.
강원 감사가 제방을 쌓은 것과 관개한 것을 계문하니 김존경·강담에게 가자하다.
정원이 근래 작상(爵賞)이 지나치게 베풀어지고 있음을 아뢰다.
우의정 정창연이 두 번째 정사하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다.
양사가 합의하여 수리하는 일을 중지하도록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
〖26일 임인〗맑음.
유희량(柳希亮73)유효립(柳孝立74),손척(孫倜1),박자흥(朴自興75),배대유(裵大維36),신광업(辛光業22),박자응(朴自凝76)
이익(李瀷2) 및 나, 아홉 사람이 배종(陪從:세자를 수행하여 시종함)한다.
전문(箋文)은 손척(孫倜1)과 이익(李瀷2)이 받들어 가고,
예물(禮物)은 유효립(柳孝立74)과 신광업(辛光業22)이 받들어 가고,
가마에 오르고 내릴 때 인도하고 도와주며 호갈(呼喝)을 하는 것은 필선(弼善)이 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지금은
필선이 없으므로 내가 대신했다.
또한 전(箋)문을 받들어 나아가는 임무를 맡기로 한 사람은 원래 박자응(朴自凝76)이었지만 그는 발을 다쳤다고 하여
손(孫倜1)정랑(正郞)에게 대신 맡겼다.
그 말투가 참으로 보잘 것 없었다.
(행사를 마치고)세자가 환궁(還宮)하여(세자시강원과 세자궁의)소속 관료들의 문안을 받았다.
이때 서연(書筵)을 오랫동안 닫아서 미안하다는 뜻을 전달했다.
대전(大殿)과 세자궁에서 술과 음식을 하사했다. 박수서(朴守緖16)를 만나 이모(李慕10)와 함께 끝냈다.
저녁에 (액정서의) 사약(司鑰)이 와서 말하길 “임금께서 소변이 심히 잦아 경연(經筵)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아직 강(講)을 열지 못한다.”고 했다. 이날 오시(午時)와 미시(未時)에 해무리가 끼었는데,
미시(未時)의 해무리 위에 속은 붉고 겉은 푸른 관(冠)처럼 생긴 것이 있었다.
양사(兩司)에서는 또 파직을 청하고,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길
“하늘의 변화에 응답하는 데는 마땅히 진실로써 해야 한다.
원옥(冤獄)의 심리를 속히 밟아 해결하라.”고 했다. 양사(兩司) 모두 옥당(홍문관)이 조치한데로 하라고 했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4月26日 명천현에 눈이 내리다.
대전의 탄신일이므로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하다.
以大殿誕日, 王世子率百官陳賀。(이대전탄일, 왕세자솔백관진하。)
원옥을 심리할 일로 계하한 것을 의계하지 않음을 정원에 전교하다.
傳曰:“應天當以實,審理冤獄事,啓下已久,何至今不爲議啓乎?”
전왈:“응천당이실,심리원옥사,계하이구,하지금부위의계호?”
(전교하기를, “하늘에 응답하는 데는 마땅히 진실로써 해야 한다.
원옥(冤獄)을 심리할 일로 계하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찌 지금까지 의계하지 않는가?”)
헌납 조정립(曺挺立)이 이정원(李挺元)의 체직을 들어 파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유인길·금개 등이 이정원의 체직을 들어 파직을 청하나 허락하지 않다.
大司諫柳寅吉,掌令琴愷、持平楊時晋,辛光業、正言李埁,大司憲宋諄耳遞李挺元,相繼來避,答曰:“勿辭。”退待。
대사간류인길,장령금개、지평양시진,신광업、정언리잠,대사헌송순이독체리정원,상계래피,답왈:“물사。”퇴대。
홍문관이 상차하여 대사헌 이하의 체차를 청하니 따르다.
弘文館上箚曰: 當今之民力竭矣,決非興作之時,則臺諫之欲停繕修者,職所當然矣。 但聖旨丁寧,引咎至此,而兩司之避,
홍문관상차왈: 당금지민력갈의,결비흥작지시,칙대간지욕정선수자,직소당연의。 단성지정녕,인구지차,이양사지피,
强聒不回, 五避六避而不知止焉, 則俱未免騷擾之失。 請大司憲以下, 竝命遞差。答曰: “依啓。”
강괄부회, 오피륙피이부지지언, 칙구미면소요지실。 청대사헌이하, 병명체차。답왈: “의계。”
(홍문관이 상차하기를, “지금 민력이 고갈되어 결코 공사를 일으킬 시기가 아니니,
대간이 수리하는 일을 중지하기를 청한 것은 직책상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성상께서 정녕하게 인책한 뜻이 이와 같은데 양사가 피혐을 굳이 하고 돌이키지 않은 채 다섯 차례 여섯 차례를
거듭하면서 그칠 줄 모르니, 다 소란을 피우는 잘못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대사헌 이하를 모두 체차하라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27일 계묘〗아침에 비 오다가 저녁에 갬.
실록청에 가서 4판(板)을 등사(謄寫)했다.
배(裵大維36)보덕(輔德:세자시강원의 종3품직)의 요청으로 입직(入直)했다가 황익중(黃益中77)좌랑(佐郞)의 말을 빌려
타고 나왔다.
이날 아침에 도총부(都摠府)로 가서 김상용(金尙容78)지사(知事)를 만나 이두(李杜:이태백과 두보)의 5언(五言)
당시(唐詩)의 제목을 써 달라고 청했다.
그 곳에 여우길(呂祐吉79)도 있어서 그의 방으로 따라가서 만났다.
〖28일 갑진〗맑음.
인사이동이 있었다.
유간(柳澗80)을 대사간(大司諫)으로,이영(李覮81)을 대사헌(大司憲)으로,유활(柳活43)과
박홍도(朴弘道14)를 지평(持平)으로, 조존도(趙存道82)를 헌납(獻納)으로,
나와 이익(李瀷2)을 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직)으로, 홍방(洪霶83)을 장령(掌令)으로,
양시진(楊時晉21)을 문학(文學)으로, 황중윤(黃中允84)을 사서(司書)로, 유여각(柳汝恪57)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박수서(朴守緖16)와 유여항(柳汝恒13)을 전적(典籍)으로 삼았다. 들으니 대사간(柳澗)은 사직소(辭職疏)를 내 놓았고,
사간(司諫)인 남이준(南以俊64)도 역시 이미 사직소를 올렸다고 한다. 황(黃中允84)공은 영남에서 바로 올라 왔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4月28日
이영(李覮)을 대사헌으로,유간(柳澗)을 대사간으로,홍방(洪霶)을 장령으로,박홍도(朴弘道)를 지평으로,
조존도(趙存道)를 헌납으로,이익(李瀷)을 정언으로,유희량(柳希亮)을 전한으로,유활(柳活)을 지평으로,
이충(李沖)을 병조 참판으로,황중윤(黃中允)을 사서로,유여각(柳汝恪)을 부수찬으로, 정광경(鄭廣敬)을 부교리로,
유인길(柳寅吉)을 대사성으로,김중청(金中淸)을 정언으로,임석령(任碩齡)을 필선으로,양시진(楊時晉)을 문학에 삼았다.
--------------------------------------------------------------------------
〖29일 을사〗아침에 비가 뿌리다가 갬.
나도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다.
사간원 한 군데만 올려서는 안 되므로 두 군데를 올렸는데, 되돌려 내어준다.
배자장(裵子張=裵大維36),이여첨(李汝瞻=李埁15),황공직(黃公直85),이사성(李師聖=李蒧56)등이 나를 보러 왔다.
내가 빨리 그만두도록 오융보(吳隆甫=吳汝穩61)에게 억지로 (사직소를)쓰게 했다.
창락(昌樂)사람에게서 둘째아들 주국(柱國)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정언(正言)이익(李瀷2)도 와서 만나 보았다.
저물녘에 오융보(吳隆甫=吳汝穩61)와 세 이씨(李茳,李慕,李蒧)들이 찾아와서 보고는 빨리 나오기를 다그친다.
--------------------------------------------------------------------------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7年 4月29日
병조가
성진에 진을 설치하는 일을 대신에게 의논한 내용을 아뢰다.
.
《구전공13세손 김 태동 옮겨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