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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2.7]
동학소설
제13화 호중동학군이 일어났다
작가 이상면, 전 서울대 교수
해월 최시형이 갑오(1894)년 9월 16일 저녁
보은 장내리 대도소에서 척왜항전을 결심하자,
이종만은 밖으로 나와 삼례에서 온
오지영(吳知泳)에게 달려가 기쁜 소식을 전했다.
“됐어. 모레 18일 (양력 10월 16일)
오후 4(申)시경 총동원령을 내리기로 했어.”
“잘 됐네. 우리가 남북접 연합을 이루어 내다니---.
전봉준 대장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우리 경호대는 그날 정오
금강과 한양길 율봉도(栗峰道)가 교차하는
지명장(芝茗場)에 모여서
‘호중의군 대도소’ 위치를 정하고,
보은 장내리로 이동해 총기포 치성식에 참가할 걸세.”
오지영은 전봉준 대장께 보고하겠다며
어스름 달빛에 서둘러 삼례로 말을 몰았다.
이종만은 손천민과 함께
각 포접과 군현 각처 경호대원에 보내는
소집 통문을 작성하여 파발로 띄우고 나서,
청주로 말을 달려 서장옥을 만나러 갔다.
“전라도에 정신없이 오가다 보니,
일해(一海) 스님을 뵌 지가 근 한 달이나 되네요.”
“나도 얼마 전에 한번 만났는데,
운현궁 측에서 보낸 밀사가 와서 거병을 독려했다며,
한강 중상류로 포접을 순방하러 가겠다고 말합디다.”
“거병은 동학군 전체의 작전계획에 따라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학교단에서 전봉준의 거병에
동참하기로 하였으니, 그에 따라 하면 되겠지요.”
“운현궁 의사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밀사가 당장 내려와야 할 텐데---.”
“일본군은 전신(電信)으로 통하고 있는데,
우리는 밀사를 마냥 기다려야 하니 답답하네요.”
중천에 뜬 만월이 기울 무렵,
이종만과 손천민은 청주 서장옥 본가에 도착했다.
“삼경(三更)이 지났는데 아직도 주무시지 않고---.”
“나라의 명운이 경각에 걸렸는데,
어이 잠이 오겠소---.”
“동학교단에서 내일 18일 오후 4(申)시경
총동원령을 내린답니다.”
“좀 늦었지만, 다행입니다.”
“전봉준은 삼례에서 출정 준비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종만 장군 휘하에 가용 병력이
4천여 명이나 있다면서요?
나도 최근에 남한강 중상류의 각 포접을 돌며
기포를 독려하고 왔습니다.”
“거병을 언제 하면 좋겠습니까?”
“속히 해야 합니다. 지금 일본군이
운현궁을 압박하고 있어요.”
“호남 동학군과 함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봉준이 미적거리는 통에 일이 어렵게 되었어요.
김개남조차 미동이니 큰 탈입니다.”
“손병희마저 뒤늦게 남한강 중상류에 가서
호북 동학군을 모병하겠다고 저러니---.”
“내가 지금껏 허문숙(許文淑)과
남한강 중상류를 누비며 동학군을 모집해왔는데,
같은 곳에 또 들어가서 어느 세월에
새로 2천여 명을 모은다는 거요?”
“혼선이 생길 우려가 있겠습니다.”
“손병희의 때늦은 행보가 만사를 그르칠 우려가 있소.”
“그러면 호중에서 먼저 거병하는 게 좋을까요?
아직 준비가 부족한데---.”
“총동원령이 내리게 되었으니,
우선 군현 별로 기포하여
관아를 털어 구식 무기라도 획득해 놓고,
그것으로 청주 진남영을 공격해서
신무기를 확보하도록 합시다.
잘하면 우리가 전봉준보다 먼저
공주성을 차지할 수도 있을 거요.”
“원시적인 무기를 들고 최신 무기를 갖춘
진남영(鎭南營)을 공격하는 건 무리입니다.”
“일본군이 경군을 이끌고 쳐내려올 텐데,
무리 여부를 따질 겨를이 있겠습니까?
운현궁 밀사 박동진, 박세강, 서병학이
최근에 다 잡혀갔어요.
일본 공사가 그들로부터 획득한 밀서를
대원군한테 들이대고 추궁했답니다.
운현궁 측에서 화를 입으면,
우리도 온전치 못할 겁니다.”
*
9월 18일 오전 이종만은
경호대를 소집해 놓은 지명(芝茗)으로 말을 몰았다.
금강이 지명산과 이웃 남산을 멀리 우회하며
그 사이에 만들어낸 백만여 평의 백사장에는
남에서 북으로 뻗어나간 낮은 암반 위로
한양길 율봉도(栗峯道)가 나루로 연결되어
그 일대에 장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정오가 되자 경호대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원 여러분,
오늘 오후 우리는 보은 장내리로 이동하여,
4(申)시경 총동원령을 내리는
치성식에 참가할 것이오. 대일항전에 나서게 되면,
우리는 이곳 지명(芝茗)에 ‘호중의군 대도소’를 차리고
구국운동에 나설 참이오.”
지난 봄 전주성을 떠날 적에
우리가 쓰던 화승총을 반납했는데,
얼마 전에 도로 찾아왔어요.
오늘 오후 총동원령이 내리게 되었으니,
모두 돌려드리겠소.”
대원들은
화승총과 탄약을 받고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때 남쪽에서 누가 말을 몰고 달려왔다.
큰 고리짝 두 개를 내려놓으며,
“전봉준 대장께서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
고리짝을 열고 화선지를 걷어내자,
대추와 검은 콩이 박힌 백설기가 가득했다.
대원들이 백설기를 한 뭉치씩 받아서
허기를 달래는 동안, 이종만은 걷어낸 화선지를 들고
으슥한 데로 가서,
담뱃대에 불을 붙여 열을 가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붉은 글씨가 서서히 나타났다.
“공양미 3백 석과 왕죽(王竹) 3천 주를
22일 12(午)시경 받으시도록 배편에 보내려 하오.”
‘필시 그 속에 화승총과 탄약이 들어 있을 게다.’
이종만이 다시 대원들 앞으로 와서,
“대원 여러분, 22일 지명 장날 11(午)시에
분대장 4명을 조교로 삼아 이곳에 데리고 오시면,
그들에게 화승총과 탄약 및 왕죽(王竹)을 배부하겠소.
그때까지 각 소대원에게 화승총 사격 연습을 시키시고,
화승총에 꽂을 총검을 4개 이상 만들어 오시오.
우리는 곧 항전태세에 돌입하게 될 거요.”
*
9월 18일 오후 해가 기울자,
두령들이 보은 장내리 대도소에 속속 몰려들었다.
경호대원 80명이
총검을 번쩍이며 적토마를 타고 당도하자,
다들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굉장한데---.”
“전봉준한테 가서
봄내 싸워주고 새경으로 받아온 거라누만---.”
대도소 대청에 차린 청수단 아래,
교주 해월 최시형 이하 두령들이 늘어섰다.
참가자가 워낙 많아 대청 밖에 서 있기도 했다.
경호대원 80명이 총검을 들고 광장에 도열했다.
타종에 이어 김연국이 치성식을 선언하자,
최시형이 천고(天告)를 올리고 나서,
“팔로(八路)에 동학도(東學徒)가
천도(天道)를 받들매, 무슨 죄과(罪過)가 있기에
하루를 살기가 이리 어렵나뇨.
작금 왜적이 침노하여 팔도(八道)를 유린하고
임금을 욕보이며 오도(吾道)의 싹을 자르려 하나니,
온 도인은 분연히 일어나 마땅히 싸워야 할지라.
도인은 도인끼리 성과 힘을 모아 속속 기포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오도(吾道)를 보전할지라.”
이어서 손병희가 나서서,
“왜적이 침노하여 나라가 위태하매,
오등(五等)이 기포하는 것은
난(亂)을 작(作)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고자 의(義)를 거(擧)함이니,
주인(敎主) 선생님의 교시에 따라
전봉준 대장의 거의에 동참합시다.
관병이 우리와 합쳐 왜적과 싸워야 할진대,
만약에 그들이 도리어
왜적의 괴뢰가 되기를 자처할 시는, 당연히
그들의 무기를 빼앗아 왜병과 싸워야 할 것이오.”
“우리는 왜적과 싸움에 경험이 일천한 즉,
이종만 장군께서 경호대를 이끌고
전라도에 가서 전봉준 대장을 도와
많은 공을 세우고 오셨으니,
훈병과 전투 준비에 관해
한 말씀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두령들의 박수 속에, 이종만이 앞으로 나가서,
“경호대는 지난 여름 귀환하여,
각기 40-50명 정도로 소대를 구성하여
나름대로 훈련을 해왔습니다. 무장이 허술해서,
구할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군현이나 접별로 여러 소대가 있어 중대가 형성되면,
공병조 치차조(輜車組) 취타조 취사조 간병조를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소대에는 식별을 위해
한 자 정도의 소대기가 있어야 하겠고,
중대에는 두 자 정도의 중대기가 필요하겠습니다.
깃발은 먼 데서 잘 보이게
색깔과 문양을 넣어 제작해도 좋겠습니다.”
“동학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궁을기(弓乙旗)를 등에 붙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난에 대비하여, 소형 배낭에
광목 보료 외피와 비상식량 등 개인 용품을 넣어
허리에 차도록 합시다.“
*
회식 후 두령들이 돌아가자,
교단 지도부가 해월 선생을 모시고 둘러앉았다.
당장 내일부터 각 포접에서
무기 확보 투쟁에 나설 텐데,
걱정이 태산 같다. 손병희가 나서서,
“각 포접에서 무기가 웬만큼 확보되면,
이곳에 집결해서 대오를 짓고 있다가
전봉준 군아 북상할 때 합류하도록 합시다.”
“그러려면 시일이 걸릴 텐데,
거병 준비가 다 된 전봉준더러
마냥 기다리라고 할 참이오?”
“관군 일본군이 공격해 올 텐데,
시일을 그리 끌면 되겠소?”
“이종만 장군, 휘하에
호중 동학군이 4천여 명이나 있으니,
여차하면 나설 수 있지 않겠소?”
“무장이 저조하지만, 전봉준 대장께서
원조를 해주시어 좀 나아지고 있으니,
방어에 나설 수 있겠습니다.”
“청주 남면과 북면에서 청의포와 송산포를 이끄시는
손천민 대접주께서도
고견을 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도 무장이 부실해서 걱정이지만,
경호대의 협조를 받아 청주성을 치려고 합니다.”
“청주성에서 신무기를 탈취하게 된다면,
공주성도 공격할 수 있을 거요.”
“구식 무기를 들고
막강한 진남영을 제대로 공격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청주성을 쳐서 신무기 탈취에 성공하면
공주성을 공격하기로 하고, 잘 안되면
호남 호북 동학군이 공주성을 함께 칠 적에
합세하면 되겠습니다.”
“서장옥을 따르는 남한강 유역과
남금강 일대의 여러 포접에서도 호응이 클 것입니다.”
“청주성을 먼저 치는 게 좋겠소.
손천민 대접주와 이종만 장군이 적시에 수행하시오.”
손천민과 이종만이 밖으로 나와 달빛을 받고 서서,
“총기포 선언으로 조정에서 진남영을 강화할 테니,
그 전에 청주성을 공격하기로 합시다.”
“전봉준 대장께서 원조하는 무기가
22일 지명에 도착하니,
서두르면 24일에는 가능하겠습니다.”
“청주 읍성도 상당산성도 매우 높고 견고한데,
어떻게 해야 차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상당산성은 높고 험난하니
저희 경호대가 맡기로 하고,
청주읍성은
남북으로 길고 남문과 북문 밖에 광장이 있으니,
남면 송산포와 북면 청의포가
협공하기에 좋을 것 같습니다.”
*
9월 22일 지명 장날, 11(午)시가 다가오자
경호대원들이 분대장급 조교를 4명씩 대동하고
속속 지명장에 나타났다.
얼추 다 모이자, 이종만이
“왕죽과 공양미를 실은 평저선(平底船)이 올 텐데,
화승총과 탄약도 들어있을 듯하오.”
정오가 되자, 공양미 3백 석과
왕죽(王竹) 3천 주를 실은
평저선(平底船) 6척이 나타났다.
장날 인파가 많아,
한적한 남산 부두로 이동해 정박케 했다.
뱃사공들이 큰 고리짝을 하나씩 들고 내렸다.
그 속에는 전처럼 백설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경호대원과 조교들이 백설기 뭉치를 하나씩 들어
허기를 달랜 후, 하역을 개시했다.
왕죽 10개를 묶은 다발 속에
화승총이 1정씩 들어있었다.
먹칠과 회칠을 한 쌀가마 속에는
쌀 대신 탄환과 화약이 담긴 자루가 들어 있었다.
왕죽이 3천 주인 줄 알았으나,
우사(優賜) 3백 주가 더 들어있었다.
화승총도 3십 정이 더 들어있었고,
탄환과 화약도 1할이 더 들어있었다.
이종만은 하역과 배분이 끝난 후,
경호대원과 조교들을 집합시켰다.
“조교 여러분께
화승총 1정씩과 탄약 2근씩을 나눠드리겠소.
동학교단을 방위해야 하니,
보은현과 청산현에서 온 조교 절반은
각기 현지로 이동하시오.
지명과 그 이웃 주안 문의남면 회인남면 조교 절반도,
지명에 남아 물자를 지키고,
‘의군 대도소’를 설치할 준비를 하시오.”
“우리는 내일 율봉도를 통해
청주 쌍수역으로 이동해 작전 준비에 들어갈 것이오.
무기가 부족한 탓에 당분간 경호대 중심으로
조교의 보조를 받아 작전을 해야 할 것 같소.
면리에 남아있는 소대원들은 무기가 획득되는 대로
집결지로 오게 하면 되겠습니다.”
“경호대원들은 조교들이 광목 보료 외피를
배낭에 넣어 허리에 두르고 왔는지 확인하시오.
평소에 깔고 덮기도 하고,
왕죽을 넣어 들것으로 사용할 수도 있소.”
“경호 기마대도 이제 큰 부대가 되었으니
공병조 치차조 취타조 치사조
간병조를 두는 것이 좋겠소.
필요한 물품은 지명장에서 구득하시오.”
*
9월 23일 아침,
경호 기마대가 말을 타고 청주로 향했다.
무기와 탄약을 숨긴 채,
깃발을 들거나 대오를 짓지 않고,
율봉도를 따라 북상을 개시했다.
치차조가 군수품을
쌍두마차 여러 대에 나누어 싣고 그 뒤를 따랐다.
청주 남면 쌍수역 인근 관터(館基里)는
경주이씨 집성촌. 문중에서는
이종만이 기마부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박수로 호응했다.
이종만은 부친과 상의하여 20년 전
보은에서 동학을 하다가 객사한
조부의 묘를 이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당시에 객지에서 급서하여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했으니,
이장이라도 성대하게 해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종만 본가와 이웃 일가 집에서
차일을 치고 멍석을 펴고
대규모 손님 맞이에 들어갔다.
소와 돼지와 닭을 잡아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인근 술도가에서 막걸리를 보내왔다.
식사 후 상여를 빌려다가
요령잡이를 태우고 댓들이를 했다.
“어허- 어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북망산천 찾아갈 제, 어허- 어하-”
상복도 여럿 마련했고
건(巾)과 행전(行纏)도 많이 준비했다.
*
9월 24일 아침
이종만이 경호대원과 조교들을 집합시키고,
“청주에는 무심천변에 읍성이 있고,
상당산에 산성이 있소.
오늘 각처 포접 동학군이 청주 읍성을 공격한다고 하오.
우리는 청주 동쪽 상당산성으로 진입하여
무기고를 털려고 하오.”
“상당산성은 한강 수계와 금강 수계를 가르는
분수령에 있는 남향 분지요.
그 안에 동네가 있고 농토가 있어, 여느 농촌과 같소.
산성에는 남문(公南門), 동문(鎭東門),
서문(美湖門)이 누각을 이고 있고,
동북쪽 성벽에 동암문(東暗門)과
서남쪽 성벽에 남암문(南暗門)이 나 있소.”
“동네 사람들이
방죽 아래 수구문(水口門)으로 출입하는데,
우리도 그 길로 진입할 작정이오.
상여를 앞세우고 동네 뒷산에 올라가
장례를 모시면서 기회를 보려 하오.
성내 고지에 무기고와 화약고가 있고,
남단 호숫가 병영에
관군 240명이 3교대로 지킨다고 하오.”
“하관 절차 진행 중, 무기고를 점령할 것이오.
무기를 왕죽 들것에 싣고 동암문(東暗門)으로 빼내
북면 쌍교(雙橋,細橋)로 이송하려고 하오.
조교 갑반은 청주 북쪽 율봉역을 거쳐
인근 쌍교로 이동해서,
상당산 북쪽으로 산성에 접근하시오.
동암문 부근에서 왕죽을 들고 서성이다가,
성내 상황을 보아 작전에 합류하시오.
조교 을반 경호대가 무기고를 점령하고
동암문을 열거든,
무기를 들것에 실어내서 갑반 조교들과 함께
북면 쌍교 청의포로 이송하시오.”
이윽고, 장례 행렬이 상당산성으로 향했다.
상여 속에는
화승총과 장창과 장검이 잔뜩 들어있었다.
장례 용품을 실은 들것 밑에도 무기가 숨겨 있었다.
이종만은 상복 속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대원들이 죽창 끝에 만장을 달아 높이 들고 가자,
아낙네도 곡을 하며 뒤를 따랐다.
장례 행렬이 수구문으로 들어서자, 병졸이 나와서
“어느 집 장사이기에 행렬이 이리 기시오?”
“관터 이 진사 댁 장사요.”
장례 행렬은 산성에 들어서 동네 뒤로 이동했다.
무기고가 가까운 뒷산에 상여를 내렸다.
땅을 파고 하관할 자리를 만드는 동안,
아낙네가 음식이 든 광주리를 이고
무기고를 지키는 관병 2명에게 접근했다.
어여쁜 아가씨가 술병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여인네가 술과 음식을 권하자 싱글벙글했다.
동북쪽 동암문을 지키는 관병 2명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관병들이 술에 거나하게 취하자,
대원들이 덮쳐 재갈을 물리고 기둥에 묶어두었다.
경호대가 무기고를 열자, 성내 조교대가 와서
무기를 들것에 담아 동암문으로 빼냈다.
밖에서 대기하던 조교들도 들어와서,
수많은 무기와 화약을 들것으로 실어내,
북면 쌍교로 향했다.
무기가 거의 다 반출된 다음, 경호대는
헛묘를 대충 마무리 짓고, 상여를 메고
수구문 밖으로 철수했다.
치차조는 쌍두마차 여러 대를 끌고
율봉로를 통해 쌍교로 이동했다.
쌍교 청의포에는 경호대와 조교들이 가져온 화승총이
8백여 정이나 되었고,
각종 활과 장창도 무수히 쌓여있었다.
탄약 궤짝도 여러 개가 있었다.
이종만은
획득한 무기를 많이 싣고 청주성 북문 밖으로 갔다.
마침 동학군을 지휘하고 있던 손천민을 만났다.
“장군, 어떻게 북쪽에서 오시오?”
“상당산성에서 무기를 반출해서 싣고 오는 길입니다.
쌍교에도 좀 두고 왔어요.
필요한 무기를 말씀하시면, 지금 드리겠습니다.”
“장군, 고맙소. 그렇지 않아도
허문숙 군보다 무장이 열세라서 민망했는데,
무기를 이렇게 많이 구해다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종만은 다른 포접에서 온 동학군에게도
필요한 만큼 무기를 지급했다.
이종만은 북문에서 무기를 배부한 후,
쌍교로 돌아와서 나머지 무기를 싣고 남문으로 갔다.
남문 밖에는 회덕 접주 강건회 군이
옥천 접주 박석규 군과 함께
성내 관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곳 동학군도 무장이 허술했다.
필요한 만큼 무기와 탄약을 지급했다.
이종만은 동문 앞 보은 접주 권병덕 등에게도,
서문 앞 문의 접주 오일상 등에게도
무기를 필요한 만큼 다 지급한 다음,
평소에 종종 지도하던
관터 옆 송산포에 가서도 무기를 많이 내려놓았다.
산성에서 탈취한 무기를 다 공급했어도,
청주읍성 진입 작전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기를 들고 서 있어도 사용할 기회조차 없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척양척왜’와 ‘관민상화’와 같은 깃발을 높이 들고
구호를 외쳐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
사흘째가 돼도 읍성 진입 작전에 진척이 없었다.
저녁에 서장옥과 손천민이 이종만을 찾아왔다.
“어렵게 무기를 획득해 주셨는데도
도저희성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요---.”
“결사대가 왕죽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넘어 들어가서
싸우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성벽을 넘는 순간 도륙을 당할 텐데,
누가 감히 자원을 하겠습니까?”
“철환을 박은 대형 공이를 우마차에다 싣고 가서,
성문에 충격을 가해 파괴하면 어떨까요?”
“탁견입니다. 동서남북 4개 대문에서 동시에
그런 시도를 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성문이 열린다고 이기는 보장이 없습니다.
도리어 역습을 당하면 큰 탈입니다.”
동학군은 28일 오전
우마차 4대에 철환을 박은 대형 공이를 싣고
4대문 앞으로 가서, 성문에 충격을 가했다.
‘쿵-, 쿵-’하는 소리가 동서남북 성문에서 들려오자,
병마사 이장회가 기겁을 했다.
남문을 열고 나와, 양총을 멘 병졸들을 앞세우고
마구 사격을 해댔다.
동학군은 우르르 도망을 갔다.
관군은 미처 달아나지 못한
동학군 두령 이종묵(李鍾默)과 병사들을 잡아다가
남문 밖에서 효수했다.
관군은 또 북문을 열고 나가 동학군을 패퇴시켰다.
*
10월 1일 수많은 동학군이 무심천변에 나타나
다시 진입작전을 벌일 준비를 하자,
진남영 군이 다시 성문을 열고 나와 공격을 해댔다.
관군이 쏘는 양총 앞에 화승총을 든 동학군은
도저히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관군은 남면 솔뫼(松山里)로 달려가서
송산포 동학군 거점을 초토화 했다.
강건회 군은 금강 건너 회덕으로 돌아갔고,
오일상 군도 미호천 건너 병마산성으로 물러났다.
진남영 군은 북면 쌍교에 가서도
청의포 동학군 진지를 파괴하고,
수일 전에 상당산성에서 탈취당한 무기를
일부 회수해 갔다.
손천민 군은 증평 쪽으로 물러났고,
서장옥 군 일부는 그들이 왔던 충주 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상당수는
서장옥의 편지를 들고 이종만에게 찾아왔다.
‘장군, 나는 서울에 가서 상황을 좀 알아보려 하오.
휘하 병사들을 지도해시주기 바랍니다.’
“좋소. 먼 데서 오셨으니,
원남(遠南) 원북(遠北)의 독립 중대로
우리와 함께 활동하시지요.”
기타 포접에서 온 동학군들도
이종만에게 찾아와 이끌어 주기를 간청했다.
그렇게 모인 동학군이 2천여 명---.
다들 무기를 든 어엿한 동학군이었다.
이종만은 예하 동학군을 이끌고 지명으로 돌아가
‘호중 의군 대도소’를 건설하고,
소대를 점검해 연대를 편성하기로 했다.
*
10월 3일 천 명이나 되는 동학군이
회덕을 떠나 유성 파군리로 이동하다가,
연산과 진잠을 거쳐 공주로 귀환하는
진남병 80명과 한밭(大田坪)에서 조우했다.
영관 염도희(廉道希)가
국왕의 윤음(綸音)을 보여준다며
동학군에게 접근했다.
동학군도 윤음이라는 말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염도희가 윤음을 꺼내서 읽으려 하자, 동학군 하나가
“우리 두령과 동지들이 진남병한테 효수당했어.
배신자 임기준이 느그네 상관이냐?”
“윤음에 감동해 동학을 접고 중군(中軍)이 되신 분이오.
여러분도 뉘우치기만 하면---.”
“뭐? 뉘우치라고? 임금님이 포로로 잡혀있고,
경군 관군이 다 괴뢰군이 돼버렸는데---.”
“뭐, 괴뢰군이라고?”
“암먼, 무기를 들고 일본군 편에 서서
나라를 없애는데 가담하면, 괴뢰군이지---.”
진남병이 항변하자, 동학군이 삥 둘러 에워싸
완력으로 제압해 들어갔다.
“아니, 이놈들이---.”
“무기를 놓고 항복하면 살려주마.
괴뢰군으로는 못 돌아간다.”
영관 염도희가 ‘국왕전하 천세’를 세 번 외치더니,
칼을 빼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
선혈이 낭자하는 가운데,
그가 피를 토하고 무언가 중얼 거리며 쓰러지자, 진남병들이 통곡하며 ‘저희도 뒤를 따르겠다’고 외쳤다.
대관이 이어서 ‘국왕전하 천세’를 외치고
자결하려고 들자, 동학군이 제지시키고,
“재고할 시간을 주마.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
물침표(勿侵表)를 주어 돌아가게 하겠다.”
얼마 후 80명 중 7명이 항복을 했다.
나머지는 대관의 구령으로 다 함께
“국왕전하 천세”를 세 번씩 외치고, 죽기를 자원했다.
동학군은 설득이 안 되자,
그들을 완력으로 자진케 했다.
비록 무지의 소치였지만, ‘국왕전하 천세’를 외치고
별 저항 없이 죽은 진남병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닌가---.
일단 경호대에 보고하기로 했다.
동학군 하나가 지명으로 말을 달려
‘의군 대도소’에 들어서며,
“급보요-, 방금 한밭에서
진남병 73명이 살해되었소---.”
“갑자기 전투가 벌어진 거요?”
이종만은 몇 마디 보고를 받고
경호 기마대 전원을 집합시켰다.
“한밭에서 동학군이 진남병 73명을 에워싸
완력으로 죽였다니, 다 함께 조사하러 갑시다.”
이종만 대장과 예하 3백여 경호 기마대가
총검을 번쩍이며 살해 현장에 당도했다.
관군 시체가 술에 취해 자는 듯 널려있었다.
이종만은 자초지정을 듣고 나서,
“전투 중도 아니었는데, 관군을 감금해 놓고서
포로대우도 하지 않고 상부에 보고도 없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소?
일단 무기와 탄약 및 군복을 노획해서
상부에 보고하겠소.
가담한 자의 소속과 성명을 명시해 경위서를 작성해서
‘의군 대도소’로 가져오시오.”
지명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호대 핵심 참모가
“상당산성에서 노획한 여러 궤짝에
양총 탄환이 가득히 들어있는 걸 보았습니다.”
“양총 80정을 구했으니, 경호대 80명이 비로소
관군 일본군과 싸울 수 있게 되었소.”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