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졸업앨범
초등학교 졸업앨범이 며칠사이 내 따뜻한 손길에 행복해 하고 있다.
그동안 천덕꾸러기처럼 책장 한구석에 처박혀 주인의 손을 한 번도 탄 적이 없었던 학창시절의 졸업앨범- 큰 물난리가 났던 어느 여름날에도, 여러 번의 이사에도 용케 살아남아서 내게 또 다른 기쁨을 주고 있다. 요즘 들어서 내가 졸업앨범을 자주 뒤적거리게 된 사연은 ‘밴드(BAND)’라는 스마트폰 운영프로그램 때문이다.
지난 해 여름부터 밴드앱이 추억을 모티브로한 동창 찾기 기능이 추가되면서 국민 SNS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때, 내게도 초대 문자가 날아왔다. 궁금한 마음에 앱을 다운받아 들어갔더니 고등학교 동창 몇 명이 반갑다는 인사말과 함께 꽃다발 세례로 환영해주었다. 비록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이모티콘의 꽃다발이었지만 오랜만에 받아본 꽃이기에 상기된 마음으로 초대해준 친구와 인사를 나누면서 그렇게 나의 밴드 모임은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새로 들어오는 친구에겐 ‘웰컴’ 이라는 현수막까지 앞세우며 기쁘게 맞아 주었고, 프로필사진이 생소한 친구는 졸업앨범을 뒤적거려가며 옛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하였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 친구들과의 대화는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저녁시간이 되어 밥 짓기도 잊은 채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희미한 기억들을 그들이 토해놓는 지난 이야기와 맞춰가면서, 조각나서 달아나버렸던 장면은 또렷이 완성되어졌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맞아~ 그랬었지!!”를 연발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워 나갔다.
동창들과의 밴드만남이 시작되면서 어느새 내 일상생활의 대부분이 여기에 몰입되었다. 이쯤 되면 중독된 게 아닐까… 염려스런 마음이 들면서 밴드에 빠져 들었던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밴드를 향한 나의 마음이 조금씩 잦아들 무렵 카카오 톡으로 “나, 은희야! 기억하겠어?”라는 문자가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짧은 답문자로는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우리가 헤어진 중학교 2학년 때 그대로였다. 은희는 밴드에서 친구들의 프로필을 확인하다가 내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오기에 바로 연락을 했다고 한다.
사실 이십 년 전쯤 어렵사리 번호를 알아내어 통화를 한 적은 있었다. 그때 친구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음을 전해왔다. 학교일과 가정일 을 병행하는 게 힘들 것 이라는 나의 지레짐작으로 만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많은 세월이 흘렀다. 우린 한 시간 가량을 통화하면서 이제 연락이 닿았으니 자주 통화도 하고 빠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약속 하였다.
은희는 초등학교 4,5,6학년 내내 같은 반 단짝친구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반은 달랐지만 방과 후엔 무슨 일이든 늘 함께 했었다. 그런 은희가 중2 때 대전으로 전학 가던 날, 나는 친구에게 기차 안에서 챙겨 먹으라며 과자 몇 봉지와 못난이삼형제 인형을 건네주고는 몇 날 며칠을 우울해 하며 지냈다. 얼마 전 종영된 아침드라마 ‘은희’를 보면서 눈이 크고 예뻤던 그 친구를 기억해 낸 적도 있었다.
이렇듯 은희를 내 기억 속에서 지워내지 못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5학년 때 은희는 반장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학교 환경미화로 바쁜 탓에 우리들의 학습지도를 회장과 반장에게 맡겨두곤 하였다. 어느 날 우리가 떠들었는지 아니면 어떤 잘못된 일을 저질렀는지 기억에 없지만, 선생님은 반장인 은희에게 마포자루를 쥐어주면서 단체 벌로 손바닥을 두 대씩 때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때 차마 우리를 때리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던 은희의 손바닥을 세차게 내리 치면서 네가 맞은 만큼 때리라고 윽박질렀다.
그 고사리 같은 손에 쥐어진 큰 몽둥이로 우리를 때려야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친구의 아팠을 마음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사흘 뒤 을지로에서 밴드친구 몇몇이 모여 식사를 하기로 했다. 거기에 은희도 참석한다. 삼십년을 넘게 만나지 않고 지내왔건만, 이제 연락이 닿으니 기다리는 하루하루의 시간들이 몹시 지루하게 느껴진다.
야속하게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꿋꿋이 잘 살아온 친구들을 보며 우린 흐뭇해 할 것이다. 예전 모습 그대로다~라는 예쁜 거짓말을 서로 주고받으며, 어린 시절 학교 담장을 넘어 성당 벚나무에 열린 버찌를 따먹다가 들켜 혼쭐났던 이야기이며, 예방주사를 맞는 게 겁나 눈물바람으로 교문 밖까지 도망쳤던 일, 또 어느 무덥던 여름날 애국조회를 길게 하시는 덩치 큰 교장 선생님 때문에 운동장에 하나 둘 쓰러졌던 친구들의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겠지. 한편 이런저런 사연으로 이미 우리 곁을 떠나간 친구의 안타까운 소식에 탄식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만남에는 35년을 넘게 잘 견뎌온 빛바랜 졸업앨범도 함께 할 것이다.
요즈음 나의 오전 일과는 졸업앨범을 꺼내드는 일로 시작된다. 오늘도 어김없이 겉표지가 푸른색인 앨범을 펼쳐들었다. 한 장 한 장 앨범을 넘길 때마다 거기 퇴색해 버린 흑백사진 속에서 한없이 촌스럽기 만한 아이들의 순수했던 모습들이 오늘따라 마냥 그리워진다.
첫댓글 쑥스럽지만 올렸습니다.
좀더 부드럽게 고쳐 주시기를 부탁 드려용
전에 말씀하시던 동창분들의 이야기군요.
빛바랜 초록색 앨범의 추억이 또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순수했던, 아니 지금도 너무 순수하신 소리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역시 소리님~
네 봉님께서 쓰시고자하는 친구들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지요
어찌 제수필의 내용이 다 비슷한것 같아서 쓰면서도 고민스러웠습니다.
항상 칭찬해 주시니 힘이 납니다.. 감사 감사
학창시절 예쁜 이름 중에 유독 금희 보다는 은희 은실이 은영이...금보다 은자 돌림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예쁜 글 저도 이 글따라 추억의 시계를 차고 회상의 열차에 승객이 되어 출발합니다....얘들아 잘들있는 거니???
맞아요 오봉님 유독 은자 돌림이 많았어요..댓글중 회상의 열차에 승객이란 표현 넘 좋습니다.감사 감사
예쁜글이라 칭찬을 해주시니 쥐구멍을 뚫어서라도 숨어야 겠어요.. 오늘도 멋진 날 되세요
금자, 금숙이, 금순이(특히 굳세어라 금순아-), 금실(강금실)이... 금자도 많은 것 같아요~ ㅎㅎ
여성 특유의 섬세한 센티멘탈이 작품 곳곳에서 수채화물감처럼 묻어나는 빼어난 신작수필입니다. 참, 잘쓰셧구요, 일취월장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어여쁘십니다. 계속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수필 한편씩 늘어갈때 마다 울 회장님께 고마음을 느낍니다.그런데. 계속 정진하라시는 말씀은 거두어 주시옵소서...흑
게다가 이리도 칭찬을 해주시니 감사 감사
그동안수십편의책을낸작가선생님같습니다.새벽에일어나좋은글읽고감동먹고갑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어머니들의 현실을 느끼게 합니다.. 멋진 탄생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