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고백과 불운한 최후
이광수는 1944년부터 경기도 양주군 사릉에 농가를 짓고 칩거하던 중에 해방의 소식을 듣는다.
해방 후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친일파에 대한 단죄의 움직임이 일자 허영숙은 1946년 5월 이광수와 이혼을 결행한다.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는 해방 후에도 2년 이상 사릉에서 두문불출하다가
1948년 《나의 고백》을 내놓는다. 변명으로 보이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결국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한 변명을 쓴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해방 이후까지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전 형식의 긴 글이다.
이광수는 《나의 고백》의 뒷부분에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과거 칠팔 년 걸어온 내 길이, 그 동기는 어찌 갔든지 민족정기로 보아서 나는 정경대도를 걸은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조선 신궁에 가서 절을 하고, 가야마미츠오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내 선일체를 부르짖은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 禍端)을 조금이라도 돌리자 한 것이지마는,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마는 이제 민족이 일본의 기반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또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에 내가 죽어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해방 후 만 이 개년 가만히 있었다. 내가 사릉 집도 버리고 양주 봉선사로 간 것은 아주 산중에 숨어버리자는 결심에서였다. 그러나 나의 건강과 가정의 사정이 그것을 허하지 아니하여서, 산에서 나와 다시 소설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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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친구들은 벌써부터 나더러 참회록을 쓰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권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은 내가 나를 변명하는 것이 사내답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음이다.
(······)
그런데, 반민법도 이미 실시되었으니 내가 언제 심판을 받을는지도 모르고, 심판을 받으면 어떠한 법의 처분을 받을는지 모르니 아직 글을 쓸 수 있는 동안에 민족운동과 나와의 대략을 적어서 평소에 나를 사랑하고 염려하여 주던, 또는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던 이들에게 내 심경을 알리고자 하여 이 글을 쓴 것이다. 나는 동포에 대하여 아무러한 장래의 약속도 할 처지에 있지 아니하다. 대개 나는 국법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명이 남아 있는 동안 내게는 무슨 사명도 남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사명을 따라서 여생을 바칠 것이다.
이광수는 1949년 1월 친일행위와 관련해 반민특위의 재반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2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사릉 농민 300여 명이 이광수의 석방을 위해 탄원서를 제출했고, 당시 중앙중학 6학년이던 아들 영근이 ‘병중에 잡혀간 아비 대신 갇히게 해 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써 반민특위에 내기도 했다.
이광수는 출감 후 《사랑의 동명왕》을 집필하는 등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해 9월 반민특위의 불기소로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그는 이해 12월 《사랑의 동명왕》을 탈고했다. 모처럼 편안한 시기를 맞았으나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고혈압과 폐렴으로 효자동 집에 누워 있을 때 6·25가 터졌다. 병중에 그는 피난도 갈 수 없었다. 7월 5일 효자동 집은 인민군에 의해 차압되었고, 그는 12월 북으로 끌려갔다.
6·25때 납북되었다 탈출한 전 국회의원 계광순의 증언에 의하면, 7월 18일 평양감옥에서 이광수를 봤는데,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해 독방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평양감옥에서 수갑을 찬 채 갈갈이 찢어진 셔츠를 입고 있던 이광수를 본 사람도 있었다. 이광수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사경을 헤매다 후에 북한의 부수상까지 오른 옛 친구 홍명희의 도움으로 만포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이해 10월 25일 숨을 거뒀다. 현재 평양시 룡성구역에 있는 ‘재북인사의 묘’에는 이광수의 묘비가 위당 정인보의 묘비 등과 함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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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는 중일전쟁 이전, 즉 1937년 전까지는 친일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출처] 이정식, 「시베리아 문학기행」중에서
♣ 다음에는 ‘허영숙에게 눌려 지낸 이광수’ 편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