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시의 본질 ‘산문시散文詩’라 함은 운문韻文이 아닌 산문散文으로 된 시詩를 말함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문장은 산문이지만 그 안에 시적 요소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산문으로 썼다고 해서 모두가 다 산문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운문과 산문은 어떻게 다르며, 산문에서 시적 요소란 무엇을 두고 말함인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예문을 들어서 설명해 보겠다. ① 우주는 무수한 은하와 별들을 담을 정도로 크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150억 광년이다. 그러나 우주의 대부분은 암흑물질로 되어 있는 텅 빈 공간이다. -이정후?김성식?박찬 공저 『우주의 신비』32P 일부 ② 올망졸망, 높고 낮은 파도 밀려와 내 발부리 앞으로 어둠 부려 놓고 간다. 그 살가운 어둠 쌓이고 쌓일수록 가녀린 초승달 더욱 가까워지고 나를 꼬옥 뒤에서 껴안던 소나무 숲, 어느새 잠들어 사나운 꿈을 꾸는지 진저릴 친다. -이시환의 시「몽산포 밤바다」전문 ③ 사는 동안 까마득히 잊어 버렸거나 부인해 온 나의 꾀 벗은 모습. 원시림 속의 내가 모니터 화면에 잡혀 암실暗室로부터 끌려나오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미 검은 것은 희뿌옇게, 뿌연 것은 온통 검게 변해있다. 솟은 곳은 들어앉아 있고 패인 곳마다 솟아있는 뜻밖의 나는, 웃음 하나를 앞니 사이로 물고 서 있었지만 긍정肯定이냐 부정否定이냐, 좌左냐 우右냐, 안이냐 밖이냐를 강요받고 있었다. 그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나의 편견과 독선이 더욱 오만해 지고 있을 무렵. -이시환의 시「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전문 위 예문들에서 ①과 ③은 산문이고, ②는 운문이다. 그런데 운문인 ②는 당연히 시라 하지만 산문인 ③도 시詩라 한다. 그렇지만 산문 ①을 두고 시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운문과 산문을 분별하는 핵심적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의 제일 요소는 역시 ‘운韻’이다. 운의 유무(有無:있고 없음)에 의해서 운문이냐 산문이냐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운이 일정한 규칙 안에서 존재하면 운문이고 풀어 헤쳐져 흩어져 있거나 없으면[散: 흩다, 흩뜨리다, 한가롭다, 볼일이 없다, 흩어지다, 헤어지다, 내치다, 풀어 놓다] 산문이 된다. 그렇다면, 운이란 무엇인가? 소리 내기의 완급緩急?장단長短?고저高低?광협廣狹?청탁淸濁?반복反復 등의 요소들이 어우러져 내는 음악성(音樂性:음악과 같은 성질)이다. 시에서는 행行과 연聯 구분을 통해서 ‘일정한 시간 내’에 소리 내기의 완급과 장단을 조절하고, 같거나 유사한 소리 내기의 반복으로써 그 음악성이 구축構築된다. (여기서 일정한 시간이란 한 행 또는 한 연을 다 읽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으로, 이것이 몇 분 몇 초라고 떡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에서의 ‘마디’나 ‘절’과 같은 구실을 한다.) 뿐만 아니라, 적절한 시어詩語 선택으로 소리내기의 고저?광협?청탁에까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시 문장에서의 운이란 행과 연 구분에 의한 소리내기의 완급?장단이며, 동음同音?동일구조 문장 반복에서 느끼는 일정한 규칙성이다. 물론, 그 규칙성에서 우리는 익숙해짐으로부터 오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동시에 그 문장의 의미가 쉽게 인지認知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위 예문들에서 ①과 ③은 공히 산문인데 ①은 시가 아니라 하고 ③은 시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운을 느끼게 하고, 실질적으로 그 운을 부여하는 도구이자 장치이기도 한 행과 연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 같은 산문이라 하는데 무엇이 이들을 시詩와 비시非詩로 갈라놓았을까? 그것은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사실을 단순 기술해 놓는 문장이냐 아니면, 주관적인 느낌이나 생각, 바꿔 말하면 감정이나 사상 등을 정서적 반응으로써 표현해 내는 문장이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기술記述’이냐 ‘표현表現’이냐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시를 시답게 하는 요소 곧,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기분을 포함한 감정과, 생각이나 의식을 포함한 사상을 드러내는 정서적인 문장이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문이든 산문이든 시에서는 ‘정서적인 문장으로서의 표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인 느낌?기분?감정?생각?의식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되 수사적修辭的 기교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산문으로 된 시일지라도 운문으로 된 시에서 느끼게 되는 음악성音樂性 곧 리듬감과, 수사修辭로써 빚어지는 내용의 정서성情緖性과 함축성含蓄性 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것들을 담아내는 방식이 운문과 다른데, 운문이 가지는 음악성을 행과 연 구분 대신에 문장이나 문단에서 느끼게 되고, 다시 말하면, 얘기 전개 과정에서 느껴져야 한다. 그리고 단순 기술이 아닌 수사적 표현기교에서 주관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개별적인 문장들이 담아내거나 겉으로 드러내는 의미들보다 문장들이 얽어내는[구축해 내는] 전체적인 얘기가 환기시키거나 숨겨 놓는 의미가 이미 존재하거나 존재할 법한 세계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얘기의 핵심을 드러내 놓고 있는 단면처럼 함축성을 지녀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한 편의 산문시는, 얼핏 보면 시시콜콜하게 풀어쓴 어떤 구체적인 얘기 같지만 그 얘기가 더 큰 의미를 환기시키는 암시기능과 내장하고 있는 대표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산문시 쓰기가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위 예문들을 가지고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 보자. ①은 산문임에 틀림없다. 이 산문을 가지고 아래와 같이 운문처럼 행과 연 구분을 임의로 했다 하자. ④ ←① 우주는 무수한 은하와 별들을 담을 정도로 크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150억 광년이다. 그러나 우주의 대부분은 암흑물질로 되어 있는 텅 빈 공간이다. 얼핏 보면, 이것도 시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용은 다르지만 이런 유형의 시들이 사실상 많이 발표되고 있는 현실을 전제하면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시로서는 결격사유가 많은, 시가 될 수 없는 문장이다. 화자(話者=표현자)의 인식과 판단은 들어있지만 개인의 정서적인 반응으로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운문시 ②에서 행과 연 구분을 배제시켜 보자. ⑤ ←② 올망졸망, 높고 낮은 파도 밀려와 내 발부리 앞으로 어둠 부려 놓고 간다. 그 살가운 어둠 쌓이고 쌓일수록 가녀린 초승달 더욱 가까워지고 나를 꼬옥 뒤에서 껴안던 소나무 숲, 어느새 잠들어 사나운 꿈을 꾸는지 진저릴 친다. 행과 연 구분 없이 바꾸어 읽어도 본래의 ②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①과는 분명히 다르다. 화자의 인식과 판단이 기술되어 있다는 점은 ①과 ⑤가 같은데 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것은 인식과 판단에 대한 단순기술이냐 정서적 반응으로서의 표현이냐의 차이로 설명된다. 곧, 위 ⑤에서 화자의 중요한 인식이자 판단은, ‘파도가 밀려와 내 발부리 앞으로 어둠을 부려 놓고 간다’는 것과, ‘어둠이 쌓일수록 초승달이 더욱 가까워진다’는 것과, ‘소나무 숲이 잠들어 사나운 꿈을 꾸는지 진저릴 친다’ 등 크게 보면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판단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화자의 기분이나 상태나 감정 등이 투사된 개인의 정서적 반응으로서 인식된 세계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화자의 기분?감정이나 인식?판단 등이 엮어내는 주관적인 의미망[意味體系]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현실의 세계가 자극刺戟으로 접수되었을 때에 화자가 그것을 해석하고 반응해 보이는 과정에서 구축되는 주관적인 가상의 세계일 뿐이다.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바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로서 현실 세계를 그대로 전달 받거나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의식 등이 투사되어 나타나는 표현으로 구축되는 주관적인 진실로서의 가상세계를 읽는 것이다. 그래서 ①은 시가 되지 못하지만 ②와 ⑤는 공히 시가 되는 것이다. 이제, 산문시라 한 ③을 가지고 아래와 같이 행과 연 구분을 지어서 읽어 보자. ⑥ ←③ 사는 동안 까마득히 잊어 버렸거나 부인해 온 나의 꾀 벗은 모습. 원시림 속의 내가 모니터 화면에 잡혀 암실暗室로부터 끌려나오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미 검은 것은 희뿌옇게, 뿌연 것은 온통 검게 변해있다. 솟은 곳은 들어앉아 있고 패인 곳마다 솟아있는 뜻밖의 나는, 웃음 하나를 앞니 사이로 물고 서 있었지만 긍정肯定이냐 부정否定이냐, 좌左냐 우右냐, 안이냐 밖이냐를 강요받고 있었다. 그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나의 편견과 독선이 더욱 오만해 지고 있을 무렵. 원래 산문이었던 문장 ③을 가지고 이렇게 임의로 행과 연 구분을 해 놓으면 어떻게 읽히는가? 원래의 문장인 ③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③보다는 더 천천히 읽히게 된다. 그래서 그만큼 생각을 더하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가 얹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 의미가 달라지거나 깊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별 의미가 있지는 않다. 오히려 천천히 읽는 운문보다 빨리 읽히는 산문 쪽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⑥보다는 본래의 ③이 낫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천천히 읽으며 생각하게 하는 쪽보다 빨리 읽는 쪽이 더 긴장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은 행과 연 구분을 하는 쪽이 좋고, 또 어떤 것은 그 구분 없이 산문으로 쓰는 쪽이 좋은가? 다시 말해, 어떤 것은 천천히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낫고, 또 어떤 것은 빨리 읽어내어 지각하는 시원함을 느끼는 것이 나은가? 그것은 오로지 개인적 판단에 맡겨질 일이지만 기본 원칙은 있을 수 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같은 산문시 ③과 ⑤의 차이로써 설명된다고 본다. 위 ③과 ⑤를 동일선상에 놓고 읽었을 때에 우리들은 어떤 차이를 느낄 수 있는가? 알다시피, ③은 이시환의 산문시「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며」의 전문이고, ⑤는 이시환의 4연 10행의 운문시「몽산포 밤바다」를 산문시로 바꾸어 쓴 것이다. ③은 네거티브 필름에 박힌 사람의 모습을 실물과 비교해 가며 들여다보고 있는데, 명암이 뒤바뀐 그 이미지를 통해서 이분법적인 논리로 재단하려는 경향이 짙은 정치 사상적 현실세계를 암시하고 있는 무겁고도 어두운 시이다. 반면, ⑤는 ‘몽산포’라고 하는 특정 지역의 밤바다 풍경을 파도?어둠?초승달?소나무 숲?바람 등의 객관적 요소들을 가지고 재구성해 놓고 있다. 그 재구성된 세계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닌 사유세계로서 구축된 주관적인 진실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는 ③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③은 주관적 진실로서 인식된 판단에 대해 단순히 기술記述하는 측면이 크고, ⑤는 문장으로써 그려내는 그림에 가깝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나가며 생각을 함으로써 그 이미지를 떠올려야 하는 차이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③은 산문이 어울리지만 ⑤는 행과 연 구분을 통해서 읽어나가는 속도를 통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⑤보다는 ②가 낫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산문시가 가지는 진정한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 매력을 느끼려면 제대로 된 산문시를 많이 읽어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로서 ‘일방적으로 꿈꾸는’ 산문시의 매력은 이러하다. 곧, 빠르고 쉽게 읽혀져야 하고, 그런 데에서 오는 쾌감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 쾌감이란 ‘알았다’ 혹은 ’나도 그렇게 느끼고 생각했다’는 지각知覺의 즐거움이자 ‘시원스러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오래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오래오래 깊이 생각한 결과를 펼쳐 놓아야 하며, 그 내용은 마치 무의 가운데 토막처럼 핵심적인 부분으로써 전체를 환기시키거나 암시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이왕이면 그 무가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드러내 놓는 눈[眼]이었으면 한다. -2013. 03. 20. *시詩에서의 행과 연 구분이 가지는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이시환의 저서 『신시학파선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출처: 동방시 원문보기 글쓴이: 이시환
첫댓글 역시~~ 이프로님의 시가 일취월장 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네요...
노력하시는 모습 좋아요...
좋은 내용 잘 보았어요... 감사^^
산문과 운문의 구분을 명쾌하게 알려주는 좋은 글 감사...모두 글 공부하게 계속 올려주시길.
아~~ 공부 할께요...
이프로님 역시 프로다운 명해설과 더불어 좋은 내용 잘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