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6]
역사 현장답사
영해 형제봉과 병풍바위를 다녀오다
편집실
지난 5월28~29일,
경북 영덕군 영해읍성과 형제봉 일대를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 회원,
동학학회 성주현 교수 등과 함께 답사하였다.
영해지역은
150년 전 3월10일(양력으로는 4월29일),
소위 이필제의 난으로 불리는 변란
즉 영해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다.
영해지역의 형제봉과 병풍바위,
박사헌의 집터 등을 답사하니
하나의 의문이 풀리는 듯 했고,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포덕12년(1871) 신미년 영해 지역에서
동학도는 음력 3월10일(양4.29)
대신사 순도일을 맞아,
형제봉 병풍바위에서 천제를 지내고
한달음에 달려가 영해읍성을 점령했다.
관아의 재물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었다.
이튿날인 3월 11일 철수하여
다시 영양 일월산 해월신사의 근거지로 숨어들었다가,
추격하는 관군을 피해 충청도로 강원도로 도망쳤다.
이 거사는 이필제의 난, 영해동학혁명,
영해동학시민혁명, 영해교조신원운동 등으로 불린다.
왜 동학군은
영해읍성을 점령하고 부사 이정의 목을 쳤을까?
당시 민란이 빈번했지만
고을의 우두머리인
부사의 목을 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영해부사의 목을 친 것은
고난을 자처한 것으로, 이런 사태를
우리는 지금으로도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이후 영해 사변으로
효수, 물고 등으로 죽은 이가 90명이 넘었고,
해월신사를 비롯한 동학지도부는
강원도로 피신하여 고난의 시절을 보내야 했다.
우선, 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희생된
김귀철의 진술 기록을 보았다.
신미(1871)년 3월 24일,
울진 덕순리 거주, 김귀철(金貴哲). 물고됨
나는 금년 2월25일 쯤에
처남 전인철의 집에 가니 나에게 말하기를
“이미 들은 바가 있겠지만 영해 병풍바위에 거주하는
박사언(朴士彦 = 朴士憲)의 말에 의하면,
진인이 있는데 작년 7월부터 우리 집에 유숙해 왔다.
우리들은 무극대도의
후천개벽 오만 년의 횃불을 밝혀
혁명을 이루고자 한다.
이미 서양에서는
임금을 4년마다 백성들이 뽑아내고
임금을 처형한 나라도 있다고 하는데
병인양요에서 그 나라들은 배를 타고
수만리 우리나라 연안까지 드나들면서
좋은 무기와 큰 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모든 백성들이 존귀한 후천개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영해부를 벌하여
임금의 뜻이 어떤지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기현 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장이
몇 해 전 『동학학보』에 기고한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정리하며, 그랬을 수도 있었겠구나! 했다.
박사헌(사언)은 박영관이라고 한다.
박사헌은 체포되어
첫 심문에서 물고 즉 고문으로 죽었다.
그 동생 박영수도 죽었다.
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박씨 집안이 절단났다.
그 아버지는 박하선, 최초의 영해 접주다.
도올 김용옥의 『동경대전1권』의 주인공이다.
『대선생주문집』을 작성한 영해 '신향'의 핵심이었다.
영해거사 전 1869년 돌아가셨다.
영해지역 구향·신향 다툼의 결과,
박하선은
관에 잡혔다가 풀려났으나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시름시름 앓다가 환원하였다.
영해거사 당시 아들 박사헌은 상복차림이었다.
박사헌 등이 영해거사의 주역이었다.
물고 즉 고문으로 희생된 김귀철이
잡혀서 발설한 위의 말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4년마다 선출하는 임금!
임금을 처형하는 나라!
김기현회장의 번역이 의역일 수는 있겠으나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박사헌이 했다는 이 발언, 그런 생각은 왜 나왔을까?
김귀철에게만 전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을 꿰뚫은 그 발언은
영해지역에서만 통용된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1866년 병인양요로
프랑스 군대가 조선을 침략한 사실까지
영해의 동학하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와 협력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했지만,
선교사들이 이에 협조하지 않았고,
대원군은 서학(천주교)을 탄압하여
선교사 9인을 포함해 8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조선에 책임을 묻는다며 강화도를 침략하였고,
1개월 동안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조선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한성근이 문수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했지만, 강화성이 점령되고
외규장각의 많은 도서들을 약탈당하는 등
피해도 막심했다.
좋은 무기와 큰 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모든 백성들이 존귀한 후천개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귀철의 발설에서는
영해교조신원운동이 발생하기 5년 전인 1866년,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 군대에 대한
민족적 적대감을 찾기 어렵다.
이런 정황만으로도 1871년 3월10일의
영해교조신원운동을 ‘혁명’이라 해도 될 것이다.
1871년 봄, 프랑스에서는
파리꼼뮨이라는 사변이 발생했다.
영해동학 ‘혁명’과 정확히 같은 시기다.
파리꼼뮨은 2달 넘게 지속되었고
희생자만 3만 명이 넘었다.
1871년의 영해는
1박2일의 야유회처럼 짧았을 뿐이다.
물론 파리꼼뮨이 났다는 사실을
당시 영해사람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 기운은 다 통하는 법이다.
영해부사 목을 친 의문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물론 거사를 이끈 무리 중 과격파의 소행이었다.
이필제의 측근
김낙균이 칼을 들어 부사 이정을 목을 쳤다.
김귀철이 죽기 전 남긴 진술은 많은 여운을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하필 영해에서 거사가 일어났을까? 하는 것에는
여전히 의문이다.
소위 문장군이라는 이필제의 선동 때문이었을까?
해월신사의 협력 때문이었을까?
비교적 우세했던 영해지역의 동학 조직 때문이었을까?
하나하나가 원인이며 이유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871년 무렵,
신·구향의 대립 등 영해지역의 특수성에 대해
우리는 더 알아야 한다.
이런 의문해소를 위해 학술대회든 도올 김용옥이든
누구에게나 도움을 청하고 답을 구하고,
영해가 동학혁명, 시민혁명, 민주혁명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답사 첫날은 교조신원운동의 장소인
영해읍성 즉 영해면 사무소 일대를 둘러보았다.
비가 내린 탓에 멀리는 가지 못하고
읍내를 둘러보니 매우 넓은 동네였다.
3.1만세시위도 대규모로 일어났다고 한다.
답사 둘째 날 아침 이른 시간인 오전 9시 조금 넘어
영덕군 직천을 먼저 들렀다.
차도주 강수
(?~1894: 강시원, 강사언)의 고향 동네였다.
이곳은 지금의 영덕군 강구면 상직리
(노인정: 강구면 직천3길 5)로, 김씨 동네였다.
93세 노인분의 안내로 강씨 묘를 들러보았다.
묘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강수 집도 물론 찾을 수 없다.
동네의 작은 하천이 매우 곧았다.
그래서 곧은 내, 직천(直川)이라 했을까.
괴시마을을 들렀다.
괴시(槐市), 회화나무가 많았던
또 많은 동네라는 말이다.
한옥이 즐비하여 여기저기 구경할 데가 많았다.
민박하는 데를 만들어 관광객을 끌면 좋을 듯 했다.
영해교조신원운동의 유생 측 기록인
'신미아변시일기'를 적은
남유진도 이 동네 출신이겠고,
동학도를 모으는 이른바 '소모문'을 지었다는
울진사람 남두병도 같은 영양남씨였을 것이다.
남두병은 두 번의 고문 끝에
1871년 4월30일경 옥사했다.
영해읍성을 빠져나와
해월신사가 계시던 영양 일월산으로 가는 길
즉 동학군의 퇴각로를 먼저 들렀다.
영해읍성~창수면~인천리~ 영양일월산
윗대치가 퇴각로였다.
이 지역은 함양박씨들이 많아
후퇴하는 동학군이 편하게 동네를 빠져나갔을 것이다.
영해거사의 주역인
박사헌 (영관) 등이 모두 함양박씨였다.
구불구불한 임도를 트럭을 타고
형제봉 아래까지 올랐다.
정상 아래에 내려 조금 걸어 오르니 정상에 도착했다.
동해가 훤하게 눈에 들었다.
정상의 산불 초소 뒤에 있는 병풍바위를 둘러보았다.
형제봉 정상에서 등산로를 따라 하산하였다.
이 하산로가 1871년 동학군들이
영해로 쳐들어간 진격로였을 것이다.
조금 내려오며 박사헌(영관) 집터를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해월신사를 비롯한
이필제 등이 거사를 논했을 것이다.
영덕군에서 앞으로 이곳을 복원할 것이라고 한다.
깊은 산 속이지만
집터 주변은 비교적 넓고 물도 흐르고 있다.
옛적에는 집도 몇 채 있어보였다.
박사헌 집터 아래·위에도
병풍바위라 할 수 있는 곳도 있다.
병풍바위 정확한 위치에는
형제봉 바로 아래인지, 박사헌 집터 아래·위인지는
논란이 있다.
하산하며 탐방로 공사를 맡으신 분을 만났다.
엽전이며 기와조각 등을 모아 놓으셨다.
영덕군은 이곳에 동학탐방로를
1억원의 주민참여예산으로 조성하고 있다.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신청한 사업이었다.
이러한 탐방로가 개설하면 더 많은 분들이
이 길을 쉽게 다닐 수 있을 것이다. (탁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