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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 김종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
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 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
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
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덛욱 여린 날, 사랑
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
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아철을 타고 당산에게고 갑니
다.
* 노래
-이시영
사랑하다는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 전해 드리기 위해
이 강에 섰건만
바람 이리 불고 강물 저리 붉어
못 건너가겠네 못 건너 가겠네
잊어버리라 잊어버리라던 그 말 한마디 돌려드리기
위해
이 산마루에 섰건만
천둥 이리 우짓고 비바람 속 낭 저리 깊어
못 다가가겠네 못 가겠네
낭이라면 아득한 낭에 핀 한 떨기 꽃처럼,
강이라면 숨막히는 바위 속,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은빛 찰라의 물고기처럼
*꽃 지는 저녁
-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여름가고 가을 오듯
-박재삼
여름 가고
가을 오듯
해가 지고
달이 솟더니,
땀을 뿌리고
오곡을 거두듯이
햇볕 시달림을 당하고
별빛 보석을 줍더니,
아, 사랑이여
귀중한 울움을 바치고
이제는 바꿀 수 없는 노래를 찾는가.
* 간 봄
-천상병
한때는 우주 끝까지 갔단다.
사랑했던 여인
한봄의 산 나무 뿌리에서
뜻 아니한 십 센티쯤의 뱀 새끼같이
사랑했던 여인.
그러나 이젠
나는 좀 잠자야겠다.
*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들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추억
조병화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밍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보고 싶은 마음
고두현
휴대폰 없이 산에서 지내는 동안
하늘색 공중전화가 있는
절 마당까지 뛰어갔다가 동전을 못 바꾸고
길만 바꿔 돌아올 때
보고 싶은 마음 꾸욱 눌러
돌무지에 탑 하나 올린다.
*꽃가루 속에
-이용악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
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것은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
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 놓은 꽃가루 속에
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지 때문에
*꽃싸움
-한용운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서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이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서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媛氏에게
-오장환
창앞에서 기다립니다.
발자최 소리마다 귀를 기울입니다.
기다리는 것만이
사랑에서 오는 기쁨이라면
삼백예순날 이냥 안타까운 속에서라도 기다리겠습니다
사랑이여!
당신에게 괴이한 제물은
내 보람의 샘이 막힐 때까지
아 내 노래는 당신의 것입니다.
*사랑
-김광섭
이리로 오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아
저 달이 유난히 빛나면서
고인 듯이 흐르는 푸른 강 위에
자욱한 빛이 꿈처럼 풀려 오른다
물 속에 고기와 산 속에 새와 언덕조차
취한 밤이니 너와 나를 새겨 놓고
말없이 저 달을 보낸 뒤에
문을 열고 너는 내 가슴에 불을 켜라
이제로부터 너는 나를 붙잡고 가리니
자연에 遍滿한 사랑과 함께
너와 나 사이에 다시 뜨는 달을 보며
우리는 이루어 새것을 열리라
어 드디어 돌아갈 날 함께 누우려나
* 사랑
-이성선(1941~2001)
더러운 내 발을 당신은
꽃잎 받듯 받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흙자국을 남기지만
당신 가슴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당신을 눈물과 번뇌로 지나가고
당신은 나를 사랑으로 건넙니다
당신을 만난 후 나는 어려지는데
나를 만난 당신은 자꾸 늙어만 갑니다
*수양버들 공원에 내려가
예이츠, 정현종 역
수양버들 공원에 내려가 내 사랑과 나는 만났습니다.
그녀는 눈처럼 흰 귀여운 발로 버들 공원을 지났습니다.
나뭇잎 자라듯 쉽게 사랑하라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어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들녘 강가에서 내 사랑 나는 서 있었고
내 기운 어깨 위에 그녀는 눈처럼 흰 손을 얹었습니다.
둑 위에 풀 자라듯 쉽게 살라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었던 탓에 지금은 눈물이 넘칩니다.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개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안 번도 부치지 않는다
*해바라기 연가
이해인
내 생애가 한 번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여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습니다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 실로
당신의 비단옷을 짜겠습니다
빛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가 될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여
드릴 것은 상처뿐이어도
어둠에 숨지지 않고
섬겨 살기 원이옵니다
*부끄러움
주요한
뒷동산에 꽃 캐러
언니 까라 갔더니
솔가지에 걸리어
다홍치마 찢었습네
누가 행여 볼까 하여
지름길로 왔더니
오늘따라 새 베는 님이
지름길에 나와습네
뽕밭 옆에 김 안 매고
새 베러 나왔습네.
*사모
유치환
깊은 깊은 회한이 아니언만
내 오오랜 슬픔을 성스러이 지녔노니
이는 나의 생애의 것이로다.
오늘에 이르러 다시금 생각노니
그때 지은 哀別은
진실로 옳았노라 옳았노라.
뉘는 사랑을 위하여 나라도 버린다더니
나는 한 개 세상살이의 분별을 찾아
슬픔을 얻었으되 회한은 사지 않았노라.
어느 하늘 아래 다시 한 번
그대 안고 목놓아 鳴泣하료마는
그러므로 오오 나의 마음의 보배여 하늘이여
저 임종의 날에도 고이 간직하고 가리니
나의 생애는 그대의 애달픈 사모이었음을.
* 내 마을을 아실 이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잣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맘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잣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잣마음은
*작은 짐승
-신석정
란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란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어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어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란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란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란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서 말없이 앉어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웃은 죄
-김동환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선천성 그리움
-함민복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 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찬비 내리고
- 나희덕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 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
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
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
저리도 눈부신가요
몹시 앓는 듯한 이 예감은
시들기 직전의 꽃들이 내지르는
향기 같은 것인가요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 봐
저는 마음껏 향기로울 수도 없습니다
* 그리운 시냇가
장석남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깊고 아득한 골짜기로 올라가리라
아무도 그곳까지 이르진 못하리라
가끔 시냇물에 붉은 꽃이 섞여 내려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
사람들, 한잠도 자지 못하리리
*폐병쟁이 내 사내
허수경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
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잡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
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
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더욱더 조그만 사랑 노래
황동규
연못 한 모퉁이
나무에서 막 벗어난 꽃잎 하나
얼마나 빨리 달려가는지
달려가다 달려가다 금시 떨어지는지
꽃잎을 물 위에 놓아주는
이 손
* 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섰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 맘 켱기는 날
김소월
오실 날
아니 오시는 사람
오시는 것 같게도
맘 켱기는 날!
어느덧 해도 지고 날이 저무네!
* 호수 1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밖에
* 소년
윤동주
여기저기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고=ㅓ리마다 봄을 말련해 놓고 나뭇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
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씃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
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
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ㅡ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어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
굴ㅡ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咏懷
오장환
후면에 누워 조용히 눈물지우라.
다만 옛을 그리어
궂은 비 오는 밤이나 왜가새 나는 밤이나
조그만 돌다리에 서성거리며
오늘 밤도 멀리 그대와 함께 우는 사람이 있다
卿이여!
어찌 추억 우에 고은 탑을 쌓었는가
애수가 분수같이 허트러진다.
동구 밖에는 晴冷한 달빛에
허물어진 향교 기왓장이 빛나고
대돌 밑 귀뚜리 운다.
다만 울라
그대로 따라 울으라
위태로운 행복은 아름다웠고
이 밤 咏懷의 情은 심히 애절타
모름지기 멸하여 가는 것에 눈물을 기울임은
분명, 멸하여 가는 나를 위로함이라. 분명 나 자신을
위로함이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悲歌
조지훈
미워하지 말아라 미움은 괴로운 것
사랑하지 말아라 사랑은 더 괴로운 것
그 집착의 동굴 안에 너의가 찾을 것은 마침내 이별
의 슬픈 水脈 ! 아
그 하늘 아래 그 물을 마시고 살아야 하는 태초 이래
의 悲戀의 계시 속에 너는 있어라 검은 머리 파뿌리 되기에도
세월은 이다지 지루하고나
* 교실에서
진은영
우리는 책을 덮고 창가로 가서 밖을 바라본다
백주대낮에는
하느님이 전하신 일만 일어나므로
사제에게 쫓겨난 사람들이
길 위를 메우고
앰블런스와 소방차로 거리는 활기차다
열차는 수백 명을 태운 채
강물로 뚸어들 뻔했다
물고기들이
노란 사이렌을 울리고
놀라서 고개 돌리면
저녁은 이미 교실 안으로 와 있다
칠판에는 백묵으로 무언가 적혀 있고
어둠 속에서 글자들은
너무 멀리 있어 이름을 알 수 없는 별처럼
희미하게 빛난다
하루 종일 침묵한 입을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강철로 된 드롭프스를 넣어준다
* 그날
진은영
처음으로 시의 입술에 닿았던 날
내가 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환하고도 어두운 빛 속으로 걸어간 날
도마뱀을 처음 보던 날
나는 푸른 꼬리를 잡으려고 아장아장 걸었다
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날
따스한 모래 회오리 속에서
두 팔 벌리고 빙빙 돌았던 날
차도로 뛰어들던 날
수백 장의 종이를 하늘 높이 뿌리던 날
너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커튼의 파란 줄무늬
그 뒤에 숨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양손에 푸른 꼬리만 남기고 네가 사라져버린 날
누가 여름 마당 빈 양철통을 두드리는가
누가 짧은 소매 아래로 뻗어나온 눈부시게 하얀 팔꿈치를 가졌는가
누가 저 두꺼운 벽 뒤에서 나야, 나야 소리 질렀나
네가 가버린 날
나는 다 흘러내린 모래 시계를 뒤집어놓았다
* 울기만 했어요
-조 운
바람 쳐불고 비 오는 간밤에
나는 혼자서 울기만 했어요
창에 젖는 빗방울 방울마다
님이 그리워서
나는 혼자서 울기만 했어요
바람소리 빗소리 물소리 속에
밤은 속절없이 깊어 가는데
나는 혼자서 울기만 했어요.
* 강이 풀리면
- 김동환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 님도 탔겠지
님은 안타고 편지야 탔겠지
동지 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멋에 녹는데 왜 아니 풀릴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愛戀頌
-이 찬
愛戀이란 으스름 봄밤 소리도 없는 가랑비가
오란 배 없음이었지만 실실이 내려
내리는 줄도 모르는 새 흠뿍이 젖는
으스름 봄밤 소리도 없는 가랑비가
하마 愛戀이란 한여름 행길섶 무르녹는 녹음인가
먼 여로 살포시 기약 없는 午睡에 안겨
밀치면도 한 손으론 더 껴안고 싶게 살틀한
한여름 행길섶 무르녹는 녹음인가
때로 愛戀이란 낙엽 지는 늦가을 황혼 비낀 뜨을인가
우수 부질없이 잎잎을 우러
울고 나도 또 울고퍼 핑계를 찾는
낙엽 지는 늦가을 황혼 비낀 뜨을인가
아하 愛戀이란 한겨울 골방 속 무료히 씹는 추잉검인가
씹고 씹어 단물 마튼 배앝을 무렵
뱉으려다 또다시 씹어 뱉기 어려운
한겨울 골방 속 무료히 씹는 추잉검인가
* 흐르는 강물처럼
-유하
그대와 나 오랫동안 늦은 밤의 목소리로
혼자 있음에 대해 이야기해왔네
홀로 걸어가는 길의 쓸쓸한 행복과
충분히 깊어지는 나무 그늘의 향기,
그대가 바라보던 저녁 강물처럼
추억과 사색이 한몸을 이루며 흘러가는 풍경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곤 했었네
그러나 이제 그만 그 이야기들은 기억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
어느날인가 그대가 한 사람과의 만남을
비로소 둘이 걷는 길의 잔잔한 떨림을
그 처음을 내게 말해주었을 때 나는 다른 기쁨을 가졌지
혼자서 흐르던 그대 마음의 강물이
또 다른 한줄기의 강물을 만나
더욱 깊은 심연을 이루리라 생각했기에,
지금 그대 곁에 선 한 사람이 봄날처럼 아름다운 건
그대가 혼자 서 있는 나무의 깊이를 알기 때문이라네
그래, 나무는 나무를 바라보는 힘만으로
생명의 산소를 만들고 서로의 잎새를 키운다네
친구여, 그대가 혼자 걸었던 날의 흐르는 강물을
부디 잊지 말길 바라네
서로를 주장하지도 다투지도 않으면서, 마침내
수많은 낯선 만남들이 한몸으로 녹아드는 강물처럼
그대도 그대와 그대가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스며드는 곳에서 삶의 심연을 얻을 거라 믿고 있네
그렇게 한 인생의 바다에 당도하리라
나는 믿고 있네
* 첫사랑
이윤학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연하 카드
황인숙
알지 못할 내가
내 마음이 아니라 행동거지를
수전증 환자처럼 제어할 수 없이
그대 앞에서 구겨뜨리네
그것은, 나의 한 시절이 커튼을 내린 증표
시절은 한꺼번에 가버리지 않네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물. 한 사물
어떤 부분은 조금 일찍
어떤 부분은 조금 늦게
우리 삶의 수많은 커튼
사람들마다의 커튼
내 얼굴의 커튼들
오, 언제고 만나지는 사물과 사람과
오, 언제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
나는 중얼거리네 나 자신에게
그리고 신부님이나 택시 운전수에게 하듯
그대에게
축,1월!
* 연락선
안도현
네가 떠난 뒤에 바다는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해변의 나리꽃도 덩달아 눈자위가 붉어졌다
너를 잊느려고 나는 너의 사진을 자꾸 들여다보았다